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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굴 가이드
김미월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5월
평점 :
이 책이 출간된 것이 2007년 5월이니 나온지 꽤 되었는데 오랫동안 찜만 해놓고 있다가 이제서 읽게 되었다. 1977년 생, 이 책이 나올 당시 그녀는 서른을 갓 넘었을 나이인데, 더구나 이 책이 그녀의 첫 소설집이라는데, 읽어보면 훨씬 더 원숙하고 노련하달까, 그런 느낌이 든다. 어느 분이 그녀를 머리 좋은 작가라고 평해 놓은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만큼 치밀하게 꽉 짜여진 글의 구성때문일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맞물림, 그 맞물린 흔적이 전혀 어색하거나 부자연스럽지 않아서 이야기의 극적 효과를 더해주고 작가의 속내나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끝까지 들키지 않은채 독자를 끌고 가는 능력이 돋보였다. 삽입되는 과거의 단편들 각각이 현재 주인공의 어떤 행동이나 심리 상태의 해답을 던져 주는 역할을 하며, 그것을 발견하고 찾아가는 즐거움을 독자의 몫으로 안겨준다. 이렇게 이야기를 끌고 가기 위해 작가는 얼마나 머리 아프게 고민하고 고쳐 쓰는 시간이 많았을까 짐작해보기도 했다.
흔치 않은 직업과 이야기의 배경들도 색다르다. PC방에서 일하며, 엄마와 자기를 학대하다가 지금은 반신불수로 누워있는 외할머니를 둔 여자가 등장하고 ('너클'), 떠나간 남자를 잊기 위해 뉴욕으로 날아간 선배를 대신해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봉사를 잠시 맡게 된 경수의 직업은 마트에서 식료품의 유통 기한을 지우고 다시 고쳐쓰는 일. 아버지에게 배신을 당한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놀라운 재능을 보이던 소년, 그 엄마가 어느 날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자 곧바로 다른 방식의 삶을 택하게 되는 얘기가 중간중간 삽입되고, 마지막 부분에서 경수와 그 소년의 관계가 드러난다 ('유통기한'). 서울시 한복판에 만들어진 인공 동굴의 가이드 일을 하며 고시원에서 지내고 있는 여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서울 동굴 가이드' 에서는 불꺼진 신호등을 보면서 건너가야 할지 건너가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누구도 정답을 가르쳐주지 않는, 가이드 없이 헤쳐나가야 하는 젊은이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보인다. '(주)해피데이'라고 인쇄된 쇼핑백을 들고 가는 여자를 따라가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인 '(주)해피데이' 에는 제목이 상징하는 역설성도 이야기의 주제에 한 몫 하고 있고, 다음의 '수리수리 마하수리' 와 '소풍'은 이 책에서 제일 인상 깊게 읽은 단편들이다. 작은 사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수리수리 마하수리'에서 주인공 강은 사고로 죽음을 당한 친구 란에 대한 죄의식이라는 상처가 자신의 인생에 억압으로 작용하는 것을 어쩌지 못한다. 엄마의 죽음이 '소풍'으로 그려진 단편 '소풍' 에서 세살 정신 연령을 가진 다 큰 청년을 돌봐주는 일을 하는 주인공의 기억으로부터 파생되는 환상, '가을 팬터마임' 에서 아버지를 등지고 나온 여자 주인공의 상점 쇼윈도 모델이라는 이색 직업, 신문배급소 직원으로 일하는 내가 거처하는 배급소 구석의 '골방', '정원에서 길을 묻다' 의 '정원'이라는 공간은 모두 세상에 섞이지 못하고 자신을 가두어두거나 자신을 스스로 격리시키는 곳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여러 단편의 묶음집에서 어찌 보면 작가의 세계를 더 잘 알수 있기도 하다. 이 책 처럼, 실린 단편들에 다양한 배경의 다양한 주인공들을 등장함에도 거기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작가의 목소리가 일관되게 잡히는 경우라면 말이다.
책장을 열기 시작하고 마지막까지 단숨에 읽어버린 이 책이 현재까지 나온 그녀의 유일한 소설이기에 더 읽어볼 것이 없음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