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서는 산업체 부설 학급이 야간 과정으로 개설되어 있었다. 우리가 수업 끝나고 하교할 무렵, 우리보다 나이가 좀더 들어보이기도 하고, 더 성숙해 보이기도 한 학생들이 우리와 똑같은 교복을 입고 등교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언덕길을 거꾸로 올라오는 그들을 보며 낮에 일하고 지칠만한 시간에 다시 공부하러 학교에 오려면 힘들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들의 꿈에 대해 생각하곤 했었다.
어느 날, 결근하신 우리 국어 선생님 대신 보강 들어 오신 다른 국어 선생님께서 책읽기에 대한 말씀을 해주시던 중이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에세이, 신변잡기 같은 글을 읽지 말고 소설을 많이 읽으라고 하셨다. 그 선생님께서는 야간의 산업체 학급에서도 수업을 하시는 분이었는데, 가르치고 계신 한 학생에 대한 얘기를 해주셨다. 물론 이름은 말씀해주시지 않으셨고, 말씀해주신다 한들 그때는 들어도 몰랐을터였다.
책 읽고 글쓰는 것을 무척 좋아하고 소질이 있는 학생이 한 명 있어서 글쓰기에 대한 조언을 종종 해주시고 계신데, 산업체 학생이긴 하지만 대학에 가고 싶어하고, 장래를 위해서도 그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입시 준비를 하라고 하셨단다.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이 거의 없던 산업체 학급에서 혼자 학력고사 준비를 하기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노력파 스타일이었기에 암기 과목을 비롯한 다른 과목은 그래도 최소한 시험을 치룰 만큼의 성적은 나오는데, 수학만은 혼자서 아무리 공부를 해도 한계가 있노라고 했단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 1학년, 그 학생은 곧 졸업을 앞둔 3학년이었다. 그러니까 학력고사를 코앞에 둔 상황이었을 것이다. 선생님께서 덧붙이신 말씀을 나는 놓치지 않고 기억해두었다. 이번 학교 교지에 그 학생이 소설을 한편 냈다고.
몇 달이 지나고 학년 말이 되어 그해 교지가 나왔다. 받아든 교지에서 나는 학생 소설이 나온 페이지부터 찾기 시작했다. 그해 교지에 실린 딱 한편의 학생 소설. 지금도 기억하는 그 제목은 '질경이'였다. '아! 그 학생이 쓴 소설이구나.' 한줄 한줄 읽어보았다. 자세한 내용은 지금 기억나지 않고 아쉽게도 그 교지는 이사다니면서 행방불명이 되어 버렸으나 그 때의 느낌은 기억한다. 나이는 나보다 좀 많을지라도 같은 고등학생이면서, 고등학생 신분에 이런 정도, 분위기의 소설을 쓸수 있다는 것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고 진지하고, 정말 소설가가 쓴 소설 같았다. 학생이 쓴 것 같은 어설픔은 어디서도 느낄 수 없었다.
그녀의 이름을 다시 보았다. 그리고 기억해두었다.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가고 어느 해이던가, 그녀의 이름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이번에는 교지가 아니라 그녀의 이름으로 나온 소설 책으로.
그녀는 꿈을 이루었구나...
현재 국내 대표 여자 소설가 중 한명인 그녀. 그녀의 신간이 나올 때마다 그녀에 대해 말씀하시던 그 국어 선생님의 성함과 함께 20년도 더 지난 그때 그 국어 시간이 떠오른다. 교지를 받자 마자 그녀의 소설을 찾아 읽는 나를 보고 교지에서 이런 거 읽는 애도 있다고 별나게 보던 반 친구들도.
최근에도 그녀의 소설을 한 권 읽었다. 솔직히 그녀의 소설을 아주 쫗아하는 편은 아니라서 그 많은 작품을 다 찾아 읽은 것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어쩌다가 읽게 되었다. 그 옛날 그녀의 '질경이'를 읽었을 때나 지금이나 읽고 난 후의 나의 느낌은 별로 다르지 않은 걸 보면 그녀가 다시 한번 대단해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