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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파라모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3
후안 룰포 지음, 정창 옮김 / 민음사 / 2003년 12월
평점 :
별로 분량이 많은 것도 아니다. 등장 인물이 복잡한 것도, 복잡한 줄거리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다 읽고서도 어떻게 정리해서 리뷰를 올려야할지 감이 오지 않는 책들이 있다. 이 소설도 바로 그런 경우였다. 후안 룰포라는 작가 이름은 낯설지 않으나 작품은 읽어본 적이 없다. 평생 두권의 책만 내었다는데, 남미 문학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그 이름이 생소하지 않을 정도로 그는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 한 축을 이루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 두권중 하나인 뻬드로 빠라모를 다 읽고났지만 그 작품에 대해 내가 정확하게 느낌을 말할 수 있기에는 다시말해 리뷰를 작성하기에 생각은 설익었을 뿐이다. 시간이 생각을 익혀주는 것은 아닐텐데도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평소 잘 안꾸는 꿈을 꾸고 일어난 날이 있었다. 왜 그런 꿈을 꾸었을까 생각하다가, 내가 아는 의식의 세계말고 나 자신도 잘 이해못하는 무의식의 세계, 잠재된채 존재하는, 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그런 세계도 있다는 것을 새삼 떠올리게 되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나는 두 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과 사물들을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77쪽)
-시간이 마치 뒷걸음치고 있는 것 같았다. (77쪽)
-무슨 일로 왔어요? 당신은 이미 죽었잖아요! (130쪽)
(이런 식의 문장이 자주 출현한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엄마는 죽으면서 아들에게 그동안 존재를 보인 적 없는 아버지가 있다는 곳을 알려주며 찾아가보라고 한다. 아들인 후안 쁘레시아도는 그렇게 아버지 뻬드로 빠라모를 찾아가는데, 정작 아버지가 있다는 곳에 도착해보니 아버지는 죽은 사람이었고, 아버지가 있다는 그곳은 망자의 세계여서,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예전에 그곳에 살다가 죽은 사람들이었다. 후안이 그것을 알아갈 무렵 독자는 알게 된다. 후안도 망자가 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무엇인가를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머리 위에서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짙은 안개 같은 것을, 나의 입을 씻어내던 거품 같은 것을, 나를 사라지게 만들었던 운무 같은 것을. 그것은 내가 마지막으로 본 어떤 것이었다.
(81쪽-후안의 죽음을 암시하는 부분)
이 책은 왜 아들이 아닌 아버지를 제목으로 하고 있을까. 책의 중간쯤 되는 부분부터 이야기가 아들에서 아버지 중심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살아서 그 지역 땅부자였던 아버지 뻬드로 빠라모는 땅이면 땅, 여자면 여자, 종이면 종, 자기가 원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 손에 넣고야 마는 욕망으로 가득찬 인물이었지만 말년에 오랫동안 연정을 품어오던 여자인 수사나의 마음만은 끝내 차지하는데 실패한다. 수사나 그녀에게는 뻬드로 빠라모가 아닌, 플로렌시오라고 하는 따로 좋아하는 남자가 있었다. 그러나 읽다보면 이 플로렌시오의 존재도 실재하는 인물인지 모호하다. 소위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하는 이런 라틴 아메리카 문학 작품의 기법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읽기에는 쉽지 않은 구조이다.
작가인 후안 룰포가 태어나 성장하던 시기는 멕시코 역사상 두번의 혁명을 거치고 불안정과 빈곤 속에 혼란한 시기였다. 작가 개인적으로는 일곱살에 아버지가 피살되어 수녀원의 고아원에 들어갔고 간신히 초등학교를 졸업은 하지만 그 해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난다. 불우하고 우울하고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그는 몇편의 단편을 쓰고 (이것은 저자의 다른 한 권 <불타는 평원>에 실려있다), 삼십대 후반에 <뻬드로 빠라모>를 발표하여 작품성, 예술성을 인정받았으나 이후로 작가는 죽을 때까지 창작과 손을 끊는다. 그렇게 이 작품 <뻬드로 빠라모>는 멕시코 문학의 레전드로 남아 지금까지 멕시코 국민문학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들인 후안의 시각으로 출발하여 기억에 없는 아버지의 삶, 아버지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들로부터 들은 말을 통해 농민과 빈곤 계층으로 제시되는 이들의 핍박과 고난, 빈곤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끌고 나갔다. 하지만 작가의 상상력은 그것이 전부가 아닌 듯. 굳이 아버지의 삶을 작품의 중심으로 끌어들인 것은, 그래서 상상력과 독특한 구조를 할 수 밖에 없도록 이 작품의 운명을 지은 것은, 아버지의 삶이 아버지 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주위에까지 어떤 식으로든 남아 아버지 당신의 삶보다 더 오래 흔적을 끌고 있으며 다른 이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서까지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물론 눈에 보이지 않고 무의식이 아니면 알아낼수도 없는 형태로.
이 작품 이후로 침묵을 지키다 세상을 떠난 작가이니 아쉽지만 그가 이전에 펴낸 단편을 묶은 책 <불타는 평원>이 마침 집에 있는 것을 보고 반갑기도 하고 안반갑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을 두고 다른 책에 손이 가지 않기에 바로 읽기로 들어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