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시간이 생기면 즐겨 하는 일이 누구든지 있다. 그런데 그 일이라는 것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바뀌어 가는 것 같다.

중 고교 시절엔 편지쓰는 것이 나에게  즐거움을 주는 큰 일이었다. 예전에 같은 학교 다니다가 헤어진 친구, 선생님, 심지어 매일 학교에서 보는 친구에게 까지, 맘에 드는 편지지를 고르고, 그 사람이 막상 옆에 있다면 술술 나오지 못할 말들도 편지지에 한자 한자 적어보내기를 좋아했었다. 심지어는 군인아저씨에게 위문 편지 써오라는 숙제까지도 즐거이 하곤 했으니.

대학에 들어오면서 생긴, 혼자 영화 보기와 연극 보러 다니기. 그리고 무분별 책 읽기. 이미 사람들 입소문으로 알려진 영화보다는 개봉 첫날, 첫회 상영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유별남을 보였고, 그때 모은 극장의 영화 전단지가 상당했으나 역시 여기 저기 주거지를 옮겨다니면서 행방불명 되고 말았다. 연극 보러 나설 때의 정서 모드는 영화를 보러갈 때와 같지 않다. 바로 내 눈 앞에서 혼신을 다해, 연기가 연기처럼 느껴지지 않게 열중하는 연극 배우들을 보며 채워지는 내 안의 에너지, 그리고 거기서 받는 위로에 난 참 많이 기대고 살았었다. 산울림 소극장, 서소문의 이름도 가물가물한 그 조그만 소극장, 시청 근처의 마당 세실, 대학로의 여러 소극장등을 주말, 평일 할 것 없이 돌아다니곤 했었다. 대학에 입학하여 대학 생활 자체를 즐기지 못하던 내게, 혼자 영화, 연극 보러 다니기와 더불어 이 책, 저 책 닥치는 대로 읽기는, 모르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려는 지극히 소극적인 나 다운 방법이 아니었다 싶다. 소설, 시, 그리고 다른 과의 전공 서적까지 기웃거렸으니. 수강 신청 기간에 전체 대학 종합시간표 책자를 앞에 놓고 다른 과에선 도대체 어떤 과목들을 배우나 일일이 다 들춰보기도 하고, 어떤 과목들이 타과생들에게 개방이 되어 있는지 알아보기도 했었다. 그러고보니, 논리학, 미학, 심리학, 미술사, 음악사 등 참 다양한 과목들을 수강했었다. 그 중 음악사와 미술사는 지금까지 잊을 수 없는 수업이다.

이후, 타국에서 혼자 생활하면서 친해진 그림 보기. 잠잘때는 거의 늘 미술 화집을 들고 침대속으로 들어가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는 그림보고, 해설 읽고, 또 페이지 넘겨서 그림 보고 해설 읽고...하다가 잠이 들었다. 주말엔 미술관과 박물관 가는 재미로 그 주체할 수 없는 혼자의 시간을 가까스로 채울 수 있었지. 이전까지는 미술이라면 나와 인연이 없는 다른 어떤 세계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생각의 반전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결혼하고 아이 엄마가 되면서부터는 영화도, 연극도 소원해졌다. 책도 무분별, 잡식성으로 읽기보다는 아이 키우며 나도 크는 그런 류의 책 쪽으로 방향성이 생겨났다. 사실 아이를 키우면서 나에 대해 다시 분석해보고, 개선해보고자 하는 노력을 이전의 몇 배 더 기울이게 되더라. 영화, 연극 등,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져서 보여지는 것 보다는 이제 철따라 자연을 보러 나가는 것이 시간날 때마다 내가 즐겨 하는 일이 되었다. 봄에는 벚꽃 구경 여름엔 장미, 물 놀이, 가을엔 단풍 구경, 겨울엔 눈 구경. 철 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자연을 보고 느끼는 일. 이전엔 그렇게 철마다 인파에 휩쓸리면서 '나다니는' 사람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말이다.

어떤 일이든, 나의 숨통을 열어주고, 머리 속을 꽉 채우고 있던 생각들을 잠시 접어 놓을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은 중요한 것 같다. '반전' . 모든 일에는 좋은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반전의 여지가 있는 법이므로. 좀더 눈을 크게 뜨고, 멀리, 마치 다른 일인 양 바라 볼 수 있는 시간, 그리고 마음의 여유가 꼭 필요한 법이다. 지금 내가 매달리고 있는 것들이 언젠가는 사소해질지도 모르는 일이고 지금 내가 사소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어느 날엔가 반전의 진수를 보이며 다가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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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7-05-22 0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일에는 좋은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반전의 여지가 있는 법이므로. 좀더 눈을 크게 뜨고, 멀리, 마치 다른 일인 양 바라 볼 수 있는 시간, 그리고 마음의 여유가 꼭 필요한 법이다"

 님이 품고 계신 문화자산이 부럽습니다. 그러고보면 여유에서 싹을 틔운 소중한 것들이군요. 마음에 여유 가져갑니다. '반전'을 꿈꾸며,

붓꽃맞죠... 감추어도 감출 수 없는.  반전은 그런 것인가요... ...  나만의 몸도, 우리몸도 반전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보고 즐길 수 있는

잘 느끼고 갑니다. 


비로그인 2007-05-22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뭔가에 버닝- 했다가는 급 식어버리곤 했던 기억이 많네요.
그래서 결국은 많이 아는 것 같지만 제대로 아는 것은 하나도 없는 셈;;
어떤 것도 아무것도 사소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요즘은요.
뭐든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아야겠다... 예상치 못한 반전에 당황하지 않으려면
그런 생각을 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

hnine 2007-05-22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울마당님, 지난 주말 수목원 옆 공원에서 찍은 붓꽃 사진을 컴퓨터로 옮기고 정리하다가 적어본 페이퍼랍니다. 영어에 'stay aloof'란 말이 있는데요...전 그 말도 좋아한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요.
체셔고양2님, 예...아무것도, 어느 누구도 사소하지 않지요. 그걸 염두에 늘 두고 살아야 하는데, 자주 잊어요 ^ ^

홍수맘 2007-05-22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전"
정말 어떤 일이든 어떤 시각을 가지고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져봐요. 긍정적이면서 포옹할 수 있는 시각을 가져야 할텐데 하는 바램이예요. 주제와 안 맞나?

hnine 2007-05-22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수맘님, 주제와 안 맞기는요. 바로 그 얘기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