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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유감 - 현직 부장판사가 말하는 법과 사람 그리고 정의
문유석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문유석 판사의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고 바로 이어 <쾌락독서>를, 다음으로 <판사유감>까지 내리 읽었다. 아마 어느 한 책이라도 재미가 없었으면 이렇게 연달아 읽을 수 없었을 것이다. 판결문 조차 너무 어렵게 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저자인데다가 책 읽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좋고, 글 쓰는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는 편에 속한다고 하는 사람이니, 그런 사람이 쓴 글이 지루할 리가 없다. 어렵고 복잡하게 쓰는 것으로써 부족한 지식과 사고력을 보충해야할 수준은 이미 넘어 섰다. 그러니 읽는 사람으로서는 아주 경쾌하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 읽어본 문유석 판사 글의 특징이 아닌가 한다.
세권의 책이 같은 듯 하지만 조금씩 다른 색깔을 지니고 있는데, 이 책의 내용은 주로 판사로 재직하면서 겪은 에피소드를 소재로 한 것들과 하버드 로스쿨에서 1년 수학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나라 법학 교육과의 차이점에 대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직도 이런 소리를 하는 남성들이 있습니다. '여자들은 다 입으로는 싫다고 말하는 내숭덩어리니까 남자가 좀 터프하게 밀어붙일 수 밖에 없다', '남자의 성욕은 본능이니 어쩔 수 없다'.
저 역시 분명하게 말해 주고 싶습니다. 입으로 싫다고 말하면 싫은 겁니다. 인간 사회에 살고 싶으면 본능을 억제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120쪽)
이런 면에서 이번 사태에서 다른 어떠한 거대담론에도 귀를 기울이지 아니한 채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이 과학자의 할 일이라면서, 과학자체의 방법만으로 검토하고 논의했던 무명의 과학자들이야말로 우리를 질식하지 않게 해 주는 징표라고 생각합니다. (137쪽)
황우석 사태가 어떻게 세상에 밝혀지게 되었는가. 저자는 법학을 전공했지만 과학 하는 자세에 대한 본질 역시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구절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 거대담론보다, 사람들의 비난 여부보다 훨씬 우위에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기본적으로 한국의 법학 교육은 학생들의 머리 위에 거대하고 복잡한 개념의 탑을 쌓아놓고 그 완결적 구조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도록 하고는 실제 지금 이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각자 일하면서 알아서 자기 머릿속에 들어 있는 개념들에 꿰어 맞추든지 뭐 알아서 하라는 방식인 것 같습니다.
하버드 로스쿨의 법학은 그야말로 '실사구시'하는 방법입니다. (153쪽)
법학 뿐 아니라 미국 교육은 현장에서 일어나는 실례 중심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서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저자는 실사구시라는 말로 잘 요약해주기까지 했는데, 실례로 쓰이지 않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배운 것, 연구한 것을 실례로 적용시키는 것을 중시하고 가치를 둔다는 것이다.
우리 법학은 가상적인 '평균인'의 판단과 행동을 전제로 이론을 전개하는데, 여기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간의 행동을 인센티브와 레버리지로 설명하고 예측하려 합니다. (154쪽)
사람은 '논리'나 '당위'로 절대로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공감'해야 비로소 변화하지요. (206쪽)
책장이 술술 넘어가게 읽힌다. 더운 여름 날 부담없이, 하지만 읽을 만한 가치가 충분한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