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루시 바턴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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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는 어린 시절. 집 대신 창고가 온가족이 머무는 집이었고 학교 아이들은 그런 루시를 손가락질했다. 부모로부터 물질적, 정신적 보살핌을 충분히 받지 못한 것이 가슴에 쌓여있는채 어른이 된 루시 바턴은 마침내 작가로서 성공, 꿈도 못 꾸던 뉴욕 생활을 하게 됨으로써 물질적 결핍은 벗어날 수 있었다 쳐도 정신적 결핍은 아마 그러질 못했었나보다. 함께 살지도 않고 아주 친한 관계도 아니었던 엄마를 작가가 이 소설 전반에 함께 등장시키며 루시와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서 엄마와 딸의 관계, 즉 애와 증의 그 묘한 관계가 이 소설의 주제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것을 주제로 삼기에는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았다. 번역자도 해설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그려낸 선들 중 그 출발점이자 가장 자세히 들춰지는관계는 엄마와 딸의 관계인 것 같다. 하지만 그야말로 출발점이지 전체는 아니다. (226)

그렇다면, 어린 시절 가난과 어려움 속에 살았지만 꿈을 접지 않고 작가로서 성공한 여성 루시 바턴이 옛날을 회상하는 이야기라고 봐야할까? 리뷰 쓰기 전에 youtube에서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인터뷰 자료를 찾아보고 뜻밖의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자기는 소설 쓸때 플롯(plot)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이미지나 장면에서 소설에 대한 아이디어를 잡아내어 구상을 시작하고 (올리브 키터리지의 경우엔 나이 들고 몸집 큰 한 여인이 집 앞에서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이 그 시작이었다고 한다.) 일단 쓰기 시작하다보면 플롯은 자체적으로 만들어져 나가는 것이라고. 이 소설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쓰기 시작할때 이 인물이 나중에 작가로 성공하는 것으로 해야겠다고 계획한 적 없다고 한다. 다만 어릴 때 너무 가난하고 부모가 생계 전선에서 바빴기 때문에 혼자 시간을 보내야했던 루시가 좋아했던 것이 책 읽기였으니 나중에 그녀의 직업으로써 작가가 되는 것으로 하면 좋겠구나 하고, 쓰면서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주제를 꼭 가난했던 여성의 '작가'로서의 성공담으로 볼 것도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주인공 루시의 직업이 작가였기에 혹시 루시가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지 궁금할 수 있겠는데 이에 대해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그렇진 않지만 최소한 자기는 소설 중의 루시가 하는 말과 행동의 의미를 다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번역자는 해설에서 루시 바턴 보다는 오히려 소설 중에 나오는 세라 페인이 아마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일거라고 한다.

어쩌면 이 소설의 주제를 한마디로 정리하려 들지 않아도 좋을지 모르겠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이제 겨우 두권 읽은 후라서 단정지을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이 두권에서 작가는 사건 중심, 서사 중심으로 소설을 쓰고자 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이런 저런 소소한 사건을 두루 보여주며 사람에 대해, 삶에 대해, 나이 들어간다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 아닐까. 삶에 대한 주제를 한가지로 정리하기 어려운 것과 같을 것이다. 그녀 소설의 주제를 한가지로 정리하기 어렵다는 것은.

 

거의 끝부분에 루시의 말을 통해 이 소설의 의도, 작가의 의도를 확실히 할 수 있게 해준다.

이건 내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이건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몰라의 이야기이자 내 대학 룸메이트의 이야기이고 어쩌면 프리티 나이슬리 걸즈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엄마, 엄마! (216쪽)

이렇게 소설에 등장한 주요 인물들을 언급한 후에 이어서 말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내 것이다. 이 이야기만큼은, 그리고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이다. (216쪽)

누가 등장하든, 누가 관계하든, 주체는 그들이 아니라 내가 되는 삶. 내 이름은 nobody 가 아니라 루시 바턴 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삶. 작가는 그것을 말하고 싶었고, 그러면서도 그런 삶이 꼭 독불장군 처럼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다른 사람과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사는 것이라는 것. 그럴 때마다 꺾이거나 꺾기보다 루시 바턴이, 작가가 택한 방법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마음이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었고, 움직였다. (211쪽)

마음을 한군데에 고정시키고 절대불변을 고수하기 보다는 양가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이 때로 우리의 삶을 불편하게 할지라도 그 댓가가 없지 않으니.

남의 마음을 움직이려고 하지 말고,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보자는 생각은, 이 소설에서 뽑아낸, 나만의 뜬금없는 힌트라고 할까.

 

모든 생은 내게 감동을 준다. (219쪽)

이 마지막 문장, 짧은 이 문장이 내게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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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6-19 0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의 마음이 아니라 먼저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맞는 것 같아요 내가 먼저 움직여지지 않는데 다른 이에게 감동을 준다는 건 또 하나의 강제이고 강요인 듯 ~굿모닝입니다!

hnine 2019-06-19 12:26   좋아요 1 | URL
주관을 가지고 사는 것도 필요하지만 요즘 같이 가치관과 해석이 다양한 시대에 부러지지 않고 살려면 (!) 제 마음을 좀 말랑말랑한 상태로 유지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아요.
모든 생은 내게 감동을 준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작가인가봐요. 물론 감동만으로 되는 건 아니지만요. ^ ^

목나무 2019-06-19 0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은미 작가가 <어제는 봄> 집필하면서 참고한 작품이래서 궁금하던 차에 에이치나인님 글보니 저도 곧 읽기 시작해야겠습니다. ^^
저도 굿모닝입니다~

hnine 2019-06-19 12:30   좋아요 1 | URL
설해목님께서 최은미 작가 만나고 오셔서 쓰신 페이퍼 물론 읽었지요. 두번 읽었어요 ^^
<어제는 봄>과 <내 이름을 루시 바턴>두 소설 모두 읽은 입장에서 말하자면, 에~~ ^^ 둘은 전혀 느낌이 다르다고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둘 다 놓치기 싫은 작품이라는 것도요. ^^

뚜유 2019-06-19 17: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최근에 읽었습니다.
리뷰를 쓰고는 싶은데 섣불리 못 쓰겠더라고요.
잘 읽고 갑니다

hnine 2019-06-19 23:07   좋아요 0 | URL
섣불리 리뷰를 못쓰셨다는 게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될 것 같아요. 저도 그랬었고요.
그래서 작가의 인터뷰 자료들을 찾아본것인데, 그렇게 작가가 작품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나니 조금 알것 같기도 하고 그랬어요. 그래도 완전히 알게 된건 아니지만요.
뚜유님의 리뷰도 기다리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