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의 논문을 자기 이름으로 발표하는 것. 우리 나라에서는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시대가 많이 달라졌으니, 더 이상 '오늘'의 얘기는 아니기를, 이미 지난 '어제'의 얘기이기를 기대했으나, 아니다. 아직도 아니다.

영국에서 학위 과정중 내가 논문을 낼 때의 일이다. 영국에서는  복수 지도 교수제도를 택하고 있는 곳이 많아, 나의 지도 교수도 두 사람이 지정되었으나, 한 사람은 거의 형식상으로 이름이 올라 있을 뿐, 나의 학위 과정에는 거의 개입을 안하고 있었다. 나는 나와 지도 교수, 두 사람의 이름으로 논문을 썼는데 논문의 초고를 검토한 지도 교수가 다른 한명의 지도 교수 이름도 저자에 포함시키는 것이 어떻겠냐고 했다. 그 지도 교수는 적어도 이 논문에는 전혀 기여한 바가 없는데 라고 당시만해도 철 없는 (?) 내가 이의를 제기하자, 두말 않고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하고는 내가 초고에 쓴대로, 아무리 지도 교수라도 논문에 관여하지 않은 지도 교수 이름은 포함시키지 않고, 나와 다른 한 명의 지도 교수, 두 사람의 이름으로만 논문이 나갔다.

또 다른 논문은 첫번째 논문과는 달리 여덟명의 공저자 형태로 나갔는데, 그때 나의 일을 조금씩 도와주었던 학부생 및 다른 대학원생들의 결과가 논문에 함께 실렸기 때문이다.

미국에 있는 남편의 예전 지도 교수가, 예전에 남편이 해놓았던 일을 가지고 논문을 한편 내자고 연락이 왔다. 남편이 논문을 다시 다듬어 그 지도 교수에게 e-mai로 보내고, 다시 검토를 하고, 첨삭하고, 서로 왔다 갔다  online상으로 discussion끝에 투고를 위한 완결본을 지도 교수가 보내왔는데, 1저자(first author)와 교신 저자 (corresponding author;논문을 지도한 사람. 논문에 대해 답변의 책임을 갖고 있는 사람) 이름을 모두 남편 이름으로 해서 보내왔더란다. 자기는 이 논문에 한 일이 없다며.

몇년 전 국내 모 대학에서 투고를 위해 논문을 작성하고 있던 중, 그 논문과 아무 상관없는 교수들의 이름까지 모두 저자로 포함시키라는 '지시'를 받았다. 영문 없어 하며, 위의 영국에서의 경험담을 얘기했더니 그럴려면 영국에 가서 살라는 말을 들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이지만, 최소한 연구활동과 더불어 '교육'이라는 것이 이루어지고 있는 학교라는 사회는 그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자의 양심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내가 피땀 흘려 이룬 일을 관심있는 이들과 공유할수 있도록 발표하고,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노력과 수고로 이루어진 일에 대해서는 그 사람의 노력과 수고에 감사하고 존중할 일이다.

누군가는 말한다. 이 세상이 그렇게 일 더하기 일은 이가 되는 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직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살든, 일 더하기 일은 이 라는 진리를 지키며 사는,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 나라에 많지 않은 것이 유감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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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3 15: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하이드 2007-02-13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식'의 문제인데. 정말 '더럽고 치사하다' 라는 말이 절로 나오겠군요.
'관행'의 이름으로 대대손손 내려오는 범죄라고 생각합니다.

hnine 2007-02-13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 예, 말씀하신 그런 이유이지요. 현실이랍니다.
하이드님 '상식'이 통하는 사회에 살고 싶지요. '관행'이라는 것, 무섭더라구요.

전호인 2007-02-13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자들도 정치인들에게 많이 배우고 있는 듯하여 요즘은 씁쓸합니다. 모든 분들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냥 관행이라고 덮어두는 것이 옳지는 않다고 봅니다. 관행이라는 말이 좋게들릴 날을 기대해 봅니다. ^*^

여울 2007-02-14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상식'이 필요한 사회라는 생각보단, '상처'가 필요한 사회란 느낌이 듭니다. 아파도 아파할 줄 모르는 우리라는 생각이 들어, 곪고 터져, 이것이 상처라는 것이구나 최소한 느낄 줄 아는 사회면 좋겠습니다. '상처'임에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되는 상황들이 안타깝습니다. 님의 말씀처럼 묵묵히 지키는 사람들이 그나마 무게중심을 지키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말입니다.

씩씩하니 2007-02-14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세상에 자긴 한 일 하나도 없음서,,그런게 말이되나여?
전 대학 다닐때..저희 교수가 서지쪽 책을 번역하라구 학생들한테 조금씩 분량을 나눠준 후에 그걸 자기가 다시 보구 검토해서 번역한걸루 책 낸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 황당함이라니...
전 님의 자신감과 당당함을 사랑해요,,진짜루요,,,

hnine 2007-02-14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호인님, 그날이 너무 천천히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어요. 적어도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때에는 많이 바뀌어 있기를. 그런데 그것을 위해 저는 아무 일도 안 하고 있네요.
여울마당님, 우리 사회에서 우리가 존경해야 할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일을 이루는 사람들보다 어쩌면 이렇게 말없이 묵묵히 자기의 생각을 지켜가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씩씩하니님, 어제 남편의 지도 교수 얘기를 전화로 듣고 여러 가지 옛날 일이 생각나서 써본 것이었어요. 저 별로 자신있지도 당당하지도 않은데 어쩌지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