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인문학 2 - 섬뜩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언캐니의 세계 이미지 인문학 2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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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인문학2] 섬뜩한 아름다움에 몰두하는 포스트디지털리언

 

<이미지 인문학1>을 읽으며 2권이 몹시 궁금하였다. 1권의 본문을 읽고 예고된 2권의 목차를 보며 1권은 총론적 성격이 강하며 저자가 포착하는 ‘이미지 인문학’의 본질은 2권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1권을 통해 미학에 대한 기초 소양 유무와 관계없이 포스트디지털시대의 예술을 읽는 최소한의 눈과 힘을 기를 수 있다. 그를 바탕으로 도전한 2권에서 독자들은 본격적으로 현시대를 이끄는 포스트디지털 이미지와 맞닥뜨린다. ‘섬뜩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언캐니의 세계’라는 부제처럼 <이미지 인문학2>의 키워드는 ‘푼크툼’과 ‘언캐니’이다.

 

 

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함으로써 사진의 존재론에 본질적 변화가 생겼다. 그 변화는 ‘지표성의 상실’로 요약된다. 롤랑 바르트는 <밝은 방>에서 사진의 본질을 지표성에서 찾았다. 사진의 지시대상은 “대물렌즈 앞에 놓이는 필연적으로 실재적인 사물”이며, “그것이 없이는 사진도 없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 카메라는 이 사진의 존재론을 위협한다. 장 보드리야르의 말대로 “사진은 사라짐의 순간을 보존하나 합성 이미지에서 실재는 이미 사라져”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위기에 처한 것은 바르트가 사진의 본질로 제시한 ‘푼크툼’의 개념이다. <카메라 루시다>에서 바르트가 내린 푼크툼의 정의를 다시 인용해보자. “이 자국, 이 상처들은 점이다. 스투디움을 방해하러 오는 이 두 번 째 요소를 나는 푼크툼이라 부르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찌름, 작은 구멍, 작은 반점, 작은 흠, 주사위 던지기이기 때문이다. 사진의 푼크툼은 그 자체가 나를 찌르는 (또한 나를 상처 입히고 괴롭히는) 우연이다.” 푼크툼은 “절대적 특수자”. “최고의 우발성”으로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 pp.37~38

 

 

정신분석학에서 ‘언캐니’는 “그동안 억압되어왔던 것이 통합된 정체성이나 미적 규범이나 사회질서 등을 파열시키면서 회귀”하는 것을 볼 때 생기는 심리적 분위기로 정의된다. (...) ‘언캐니’는 독일어 ‘운하임리히’의 역어로, 주지하다시피 심리학자 에른스트 옌치가 도입한 개념이다. 그는 언캐니의 감정을 “살아 있는 듯한 존재가 정말로 살아 있는지, 혹은 그 반대로 생명 없는 대상이 실은 살아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운 상태”로 정의했다. 옌치와 달리 프로이트는 (...) 유아기의 거세 환상은 성장과정에서 억압되고 망각되지만, 삶에서 경험하는 여러 사건을 계기로 끝없이 되돌아온다. 번번이 되돌아오는 이 환상은 원래 낯익은 것이지만 동시에 망각된 것이기에 의식에는 낯설게 느껴진다. 바로 여기서 ‘낯익은 낯섦’이라는 언캐니의 정의가 성립하게 된다. “언캐니는 억압에 의해 낯선 것이 되어버렸으나 원래는 낯익던 현상이 되살아나는 것과 관련된다. 억압되었던 것이 되살아나면서 주체는 불안해진다. 주체가 이해하기 힘든 모호한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언캐니는 이 불안한 모호함 때문에 생기는 직접적 결과다.” - pp.140~141

 

 

진중권은 포스트디지털 시대는 기본적으로 초현실주의의 맥락에서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초현실주의를 후기 프로이트 이론 관점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요컨대 디지털 카메라로 구현된 포스트디지털 시대의 이미지들은 사진의 본질인 지표성을 상실함으로서 존재의 해방성이 증폭되고 그로 인해 모호하고 우발적이며 특수한 ‘푼크툼’의 성질을 가진다. 그래서 존재하면서 존재하는 자신을 스스로 해치며 의미든 정체성이든 확장시킨다. 이는 기존의 기술을 계승하면서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구축하면서, 낯익으면서 낯선 ‘언캐니’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들 이미지를 보는 현세대인들이 느끼는 공통적인 감정을 진중권은 ‘세계감정’이란 용어로 표현하는데, ‘푼크툼’과 ‘언캐니’의 속성 때문에 포스트디지털 이미지에 대한 일차적 ‘세계감정’은 거부감과 공포감이다. 그럼에도 이 섬뜩함에 아름다움을 찾으며 빠져드려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푼크툼’와 ‘언캐니’의 개념을 접하며 처음 떠올린 것은 연꽃사진 사건과 쿠사마 야요이였다. 전자는 우리나라에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기 시작하던 2003년, 디지털카메라 커뮤니티였던 디시인사이드에서 유행한 연밥사진 합성이었다. 쿠사마 야요이는 강박과 환영이란 주제로 망과 점에 집착한, 원으로 가득한 미술 작품만 발표하는 아티스트이다. 흔한 식물에 지나지 않은 연밥의 알알이 박혀 있는 속성이 다른 이미지와 합성되며 혐오와 희열을 불러일으키며 엽기문화를 열었다. 정신병원에 사는 천재 예술가란 별명을 가진 쿠사마 야요이는 유년시절 트라우마로 인한 지독한 강박증을 앓고 있는 작가인데 자기치유와 강박표출이 얽혀 독특한 미적 세계를 구축하였다. 전자는 해프닝으로 끝났고 후자는 예술이 되었지만 평범한 것을 낯설게 하고 혐오와 쾌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는 공통점이 있다.

 

 

과학에서는 언캐니한 감정의 원인으로 다양한 설명이 제시되었다. 인간인 줄 알았던 대상에서 기대하는 행동이 나오지 않을 경우(기대 위반), 그 대상을 생명의 범주에 집어넣을지 말지 혼란스러운 경우(정체성의 역설), 그 대상이 건강한 생체와 달리 어딘지 유전적으로 병약해 보이는 경우(진화 미학), 그 대상이 감염 위험이 있는 병약한 것으로 보일 경우(혐오 이론), 그 대상이 죽음에 대한 본능적 공포를 불러일으켜 내면의 방어기제를 작동시키는 경우(공포 관리) 등. 그런가 하면 조커의 웃는 입과 실제 표정의 괴리나 더빙된 영화의 입 모양과 음성처럼, 인간행동을 구성하는 다차원의 신호들이 미묘한 부조화를 이룰 때 언캐니 효과가 발생한다는 설명도 있다. - p.97

 

 

현대인이 점점 갈수록 무엇이든 좀 더 자극적인 것을 찾는 것도 ‘푼크툼’과 ‘언캐니’로 설명할 수 있다. 진중권이 2권에서 소개하는 ‘푼크툼’과 ‘언캐니’의 대표적인 작가들로는 강형구, 키스 코팅엄, 매튜 바니, 오론 캐츠 그룹, 패트리샤 파치니니 등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미학을 구축하기 위해 진중권이 2권에서 소개하는 작가들의 이미지는 그림을 사진으로 다시 CGI로 만들거나, 수많은 사진을 합성한 후 다시 컴퓨터그래픽화하거나, 인간과 동물의 합성을 주력으로 하거나 배양육을 미술의 영역으로 가져오는 등 다채로운 방식으로 관람자로 하여금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이 섬뜩한 충격감을 구현하기 위해 상당히 수고스러운 일이 필요함에도 마다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작업 방식 자체가 창조적 유희로서 기능한다.

 

 

(로봇 영역에서 논의되는) 일본과 달리 미국에서는 ‘언캐니 밸리’에 관한 논의가 주로 CGI를 둘러싸고 이루어진다. 그것은 로봇과 애니메이션에서 미국과 일본의 취향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동반자 로봇’에 집착하는 일본에서는 로봇에 되도록 인간에 가까운 외양을 부여하려 하나, ‘기능성 로봇’에 주력하는 미국의 로봇 산업은 인간과 똑같은 외관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애니메이션에서는 사정이 뒤집힌다. 일본의 ‘아니메’가 초당 7~8프레임의 움직이는 만화로 남으려 한다면, 미국의 애니메이션은 아날로그 시절부터 실사에 가까운 초당 24프레임의 사실주의를 지향해왔다. 이렇게 만화를 실사에 가깝게 만들다 보니 로봇이 아닌 CG의 영역에서 ‘언캐니 밸리’의 문제를 떠안게 되는 것이다. - p.109

 

 

일본의 로봇 공학자 모리 마사히로는 인간이 인간을 닮을수록 호감과 친밀감을 느끼지만 일정 수준 이상 닮으면 섬뜩함을 느끼며 긍정적인 감정이 급격히 떨어지는 현상을 발견하고 이를 ‘언캐니 밸리’라는 함수로 명명한다. <이미지 인문학2>의 후반부는 로봇과 CG 등 인간, 실제와 닮은 무언가들의 속성에 깃든 ‘언캐니’함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인공성과 동물성, 생명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고민으로 확장한다. <이미지 인문학2>의 초반부는 1권도 그러했듯 디지털 이미지의 본질부터 정의하기 위해 사진 미학이 리얼리즘에서 포토리얼리즘으로 다시 합성리얼리즘으로 초점이 옮겨감을 포착한다. 그리고 후반부로 자연스럽게 화제를 연결해 합성리얼리즘의 재능과 공포적 속성이 건드리는 철학과 과학을 바라본다. 

 

요컨대 진중권의 ‘이미지 인문학’은 갑자기 튀어나온 생소한 개념이라기보다, 인문학적 관점으로 예술을 분석하는 미학의 속성을 십분 발휘하여 미술을 보다 풍부하게 감상하고 최신 미술의 경향을 정의하는 한 기제라고 볼 수 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다는 창조강박,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는 시대에 합성에의 탐닉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것이 혐오·공포·위화감 등을 기저에 깐 유희라는 점에서 재미있다. 진중권의 분석에서 결국 우리의 ‘언캐니’한 감정은 존재상실의 위기의식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합성이 거듭되면 원본은 쉽게 망각된다. 혹은 그 본질을 흩트리고 해체한다. 그 대상은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어쩌면 인간이 대체될 수 있고 존재감을 상실하는 ‘사라짐’의 공포와 싸우기 위해, 그래서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이 기기묘묘한 이미지들을 모순적으로 탐닉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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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브렌다 - 본성 대 양육 논쟁의 전환점이 된 일란성쌍둥이에 관한 기록
존 콜라핀토 지음, 이은선 옮김 / 알마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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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상한 나라의 브렌다] 화끈거리는 아랫도리로 차갑게 생각한 이상한 인간

 

 

 

커크는 건강하고 명랑한 다섯 살 남자아이였다. 다만 인형을 가지고 노는 등 여성성이 강해서 부모가 걱정하였다. 한 심리학자가 아이의 사연을 듣고 추적 연구를 하고 싶어 한다. 훈련을 통해 성격을 바꿀 수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던 학자였다. 부모의 동의 후 시작된 이 장기 실험을 간단하였다. 여성적인 행동을 하거나 여자애들이 갖고 노는 장난감을 집으면 체벌이나 심리적 모욕감을 주고 남성적인 행동을 하면 상을 주기도 하면서 심혈을 다해 아이의 성향을 바꾸려 하였다. 생각보다 커크는 빨리 바뀌지 않았고, 2차 성징이 시작된 이후엔 단순히 성격만 여성적인 것이 아니라 성적으로도 남자에 끌리는 게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훈련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표면적으로 이 실험은 성공했다. 우락부락한 몸매에 수염을 기르고 직업으로 군인을 택하는 등 누가 봐도 상마초스러운 성인으로 성장한다. 부모들은 안심했지만, 측근들은 그가 대인관계에 있어 남에게 자신을 잘 열지 못하고 몇 년 동안 화장실에서 식사를 하는 등 다른 면에서 정신병적인 문제가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믿었고, 커크 본인 역시 평범한 남성으로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 실험은 38세에 커크가 자살하면서 대실패로 끝난다.

 

 

'The Sissy Boy Experiment : Therapy designed to make feminine boys more masculine'이란 이름으로 UCLA에서 1970년부터 수행했던 장기 추적 연구이다. 실험을 지휘했던 조지 앨런 리커스는 후천론의 대표적인 심리학자였고, 반동성애 운동가이자 행동 치료를 통한 동성애 극복 분야의 권위자였다. 커크 연구도 반동성애 단체의 든든한 재정적 지원 하에 이루어졌다. 윤리적으로 맹비난을 받은 커크 실험은 몇 년 후 CNN 다큐를 통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다. 그 다큐를 담당했던 유명 저널리스트 앤디슨 쿠퍼는 이후 커밍아웃한다. 2014년의 오늘도 선천론과 후천론은 팽팽하게 맞서며 결론이 나질 않고 있다. 유전적으로 타고난 기질(본성)과 후천적 자극(양육)의 효과를 모두 받아들여야 된다는 게 잠정적인 중론이다. 20세기의 후반 반백년 동안 학계와 소수자 운동 진영은 후천론이 지배하였다. 선천론이 낳은 우생학과 히틀러 철학의 망령을 지우고 싶었고, 인권 운동에 희망 기제가 필요하였다. 백인 이외 인종은 진화가 덜 된 것이고,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하고, 장애인은 서커스 전시용 인간이고, 중병환자는 사탄의 씨앗이고, 동성애자는 마녀인, 인류의 역사 깊은 오해와 차별과 싸우기 위해 믿고 싶고 믿어야 했던 기제였다.

 

 

[1955] 반음양 환자들의 총계를 놓고 보았을 때, 남성이건 여성이건 성 행태와 성 지향성을 본능적으로 타고나지는 않는다. 남성적인 면과 여성적인 면은 선천적으로 결정된다는 이론이 있지만, 반음양 환자들을 관찰한 결과 알 수 있듯이 심리학적으로 볼 때 출생 당시 중립적이었던 섹슈얼리티는 성장과정에서 겪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남성적인 쪽으로 혹은 여성적인 쪽으로 차별화되기 시작한다. - p.59

 

 

<이상한 나라의 브렌다> 사례 역시 커크 실험과 유사하다. 1967년 존스홉킨스 의과대학의 정신의학자 존 머니가 이끈 이 실험은 포경수술을 하다가 사고로 음경이 거의 타버린 남아를 여아로 성전환수술한 후 완벽한 여성으로 성장하게끔 양육하는 것이었다. 후천론이 지배하는 시대였고, 존 머니는 20세기 후반기 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성 문제 전문가였다. ‘성정체성’이란 용어를 만든 학자도 존 머니였다. 윤리적인 문제 때문에 인간을 실험하는 것은 매우 힘들다. 그래서 전쟁포로를 이용하거나 자신의 자녀로 실험하는 경우가 있었다. 문제의 아기 데이비드는 매우 매력적인 실험체였다. 왜냐하면 그는 일란성 쌍둥이였기 때문이다. 동생 브라이언을 완벽한 대조군 삼아 성장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렇게 ‘어른’의 판단으로 데이비드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성전환 수술을 받았다. 대개 남성들은 자신의 성기를 제2의 자아로 생각할 만큼 민감한 바, 성기 재건 수술을 받는다 하더라도 남성으로써 씻을 수 없는 상실감과 열등감으로 평생을 살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당시 존 머니를 대표로 하는 ‘성정체성’에 대한 다수설은 인간은 30개월 이전에 성 인지를 하지 못하며 성 심리는 중립적이고 성 정체성과 기질은 양육의 영향이 압도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2000명당 한 명꼴로 태어나는 반음양(유전적 성별은 정해져 있으나 남녀 성기 모두를 지니고 태어난 인간) 영아와 사고로 성기가 훼손된 영아들은 대부분 성전환수술을 시켰다.

 

 

 

“부모님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부모님이 내 보호자니까, 부모님이 그곳으로 데리고 갔으니까 분명히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 p.136

 

1980년에 브렌다가 데이비드로 바뀐 뒤 10년이 지났고, 시그먼드슨은 쌍둥이케이스의 실상을 학계에 보고할까 생각도 했었지만 포기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존 머니가 죽도록 무서웠거든요. 그랬다가는 제 앞날이 어찌 될지 알 수가 없었죠.” - p.255

 

 

책을 읽는 내내 사타구니 가운데 급소를 페이지 넘길 때마다 얻어맞는 듯해 움찔거렸다. 사춘기 이후로 졸업했던 ‘ㅆ’이나 ‘ㅈ’이 들어가는 욕설이 저절로 나왔다. 그렇게 화끈거리는 아랫도리와 그래서 더 냉정해진 머리로 데이비드를 ‘이상한 브렌다’로 만든 ‘이상한 사람’들을 생각하였다. 불행하게도 데이비드는 브라이언보다 훨씬 남성적 기질이 강한 아이였다. 그러나 부모는 자신들이 쌍둥이를 키우며 겪는 문제들을 세계적 권위자의 처방에 대한 강력한 믿음으로 애써 무시한다. 여자아이는 바지를 입히고 특별한 자극이 없어도 알아서 치장에 관심을 갖는 등 여성스러운 행동을 한다. 때로는 스스로도 자신의 기질과 감정을 설명하지 못하다가 성 호르몬의 영향 때문인 것을 알아차리기도 한다. 그것이 선천적 유전형질이고 본능이고 본성이다. 그러나 데이비드의 경우 효과적인 양육을 위해 그가 남자로 태어났다는 것을 단 한 번도 알려주지 않았으며 항상 치마를 입히고 머리를 기르게 하였다. 그럼에도 유치원과 학교에서 가장 선머슴 같은 여자애보다 더 악동 같이 행동하였고, 남자아이들에게도 여자아이들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따돌림을 받게 된다.

어떤 상담치료도 소용이 없었다. 데이비드는 어른들의 기대와 달리 거듭되는 상담치료에 대해 어른들이 원하는 대답을 대충 해주며 어떻게든 회피하려는 자세를 취한다. 여기서 존 머니의 엽기적인 치료 철학과 방식이 폭로되는데, 전형적인 ‘제 눈에 안경’식으로 왜곡 관찰·해석한 원주민의 생활에서 영감을 받아 아동에게 포르노 시청과 성행위 흉내 내기 놀이를 시키는 게 성 정체성 확립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굳게 믿는다. 오늘날 아동학대의 일종으로 여겨지는 변태행위이다. 존 머니는 심지어 이것을 근친관계인 브라이언과 함께 하도록 시킨다. 후에 데이비드와 브라이언이 성생활에 트라우마가 없이 정상적인 섹스를 할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고 신기할 정도이다. 데이비드가 10대에 들어서고 2차 성기성형수술과 성 호르몬 치료를 할 시기가 다가오면서 상황은 달라진다. 데이비드와 브라이언이 존 머니의 치료에 거세게 저항하기 시작했고, 존스홉킨스가 아닌 집 근처에서 여러 정신과 의사들을 거치며 치료하면서 학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존 머니의 쌍둥이 케이스가 완벽한 실패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1987] “반음양 또는 선천성 성기기형으로 태어났거나, 포경수술의 외상으로 남근이 박리돼서 남은 조직이 정상적인 배변과 성교가 가능한 남근으로 재건될 수 있을 만한 수준이 못 될 때, 성을 전환해 여성으로 길들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성인이 된 환자들을 비교한 결과, 남근이 없는 남성보다는 여성으로 사는 경우가 만족도 면에서 월등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머니의 주장은 최소한 두 가지 면에서 호기심을 자아냈다. 첫째, 머니나 존스홉킨스 측에서 여성으로 사는 경우가 만족도 면에서 월등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을 만큼 체계적인 추적 연구결과를 이전에 발표한 적이 없었고, 머니의 수상소감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둘째, 정상적으로 태어났지만 사고로 남근을 잃은 아이의 경우 의사들이 얼마든지 성전환수술을 하면 된다고 이야기했지만, 그가 유아기부터 성인기까지 추적 관찰한 실험대상자는 브렌다 라이머뿐이었다. 그리고 브렌다가 데이비드로 바뀌면서 실험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이미 7년 전이었다. - pp.261~262

 

[1994] 성 정체성과 성 지향성은 태내에서 흡수한 호르몬과 뇌, 신경계에 입력된 기타 유전정보에 의해 대부분 선천적으로 결정되며, 그렇기 때문에 성전환에는 한계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남성성과 여성성 표출에 양육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는 있지만, 남성 또는 여성, 소년 또는 소녀로서의 자아관 형성에 더욱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인자는 본성이라고 강조했다. 이 논문은 섹슈얼리티의 신경생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는 사례였다. 또한 데이비드처럼 정상적인 생식기의 신경계를 가지고 태어난 신생아뿐 아니라 그밖에 모든 신생아를 대상으로 성전환수술을 남용하는 의학계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다. - p.269

   

 

문제는 데이비드를 담당한 지역 의사들이 존 머니와 데이비드의 가족을 떼어놓는 것까진 가능했지만 존 머니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반박 논문을 내는 용기까지는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가장 최선이 북미권에 수출하지 않는 전제 하에 영국 다큐멘터리 제작에 익명으로 참여한 정도였다. 데이비드가 출생의 비밀을 알고, 무사히 브렌다에서 데이비드로 돌아오고, 두 번의 성기재건수술을 통해 고환은 제거되었지만 여성과 성생활을 할 수 있는 상태로 회복하는 등 표면적으로 데이비드의 ‘이상한 나라’ 탈출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직업, 마초적이고 단순한 남성노동자들이 득실거리는 기술직인 도축장 잡역부로 일한다. 브라이언의 소개로 아이가 셋 있는 이혼녀와 결혼하고, 그녀의 열정적인 사랑과 까르륵거리는 아이들 속에서 남편과 아빠라는 꿈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데이비드가 브렌다로 살면서 겪은 가족들의 끔찍한 기억들은 지울 수가 없었다. 데이비드의 부모는 죄책감과 스트레스로 극심한 우울증과 알코올중독에 시달렸고, 데이비드의 대응 짝으로 만만치 않게 존 머니에게 시달림을 받고 데이비드에 온 신경을 쓰는 부모 때문에 애정결핍을 느꼈던 브라이언도 자살기도에 범죄에 온갖 반항을 하다가 결국 중년에 목숨을 끊는다. 일과 아내 덕에 버텼던 데이비드 역시 그 삶에 균열이 생기자 자신을 놓는다. 대참사였다.

 

<이상한 나라의 브렌다>는 우리에게 여러 시사점을 준다. 본성 대 양육논쟁 그리고 성정체성은 아직 인류가 결론내기 힘든 복잡한 문제라는 것, 권위에 취약한 학계의 비겁함, 인간의 아집과 믿음의 끔찍함, 프레임 싸움 등이다. 서두에 언급한 커크 실험의 경우 앤더슨 쿠퍼 역시 비판을 받았다. 이성애가 상남자와 상여자, 섬세남과 왈패녀, 야수와 선머슴 등 다양한 방식으로 짝을 맺듯 게이가 모두 여성적인 성향을 가지는 것이 아닌데 자신의 커밍아웃에 유리하게 이용하느라 동성애를 너무나 단순한 프레임으로 접근하였다는 지적이었다. 책을 읽으며 소름 돋았던 대목 중 하나는 이 책을 읽고도 "본성 대 양육 논쟁은 어느 쪽이 옳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쪽에 좀 더 무게를 두느냐의 문제다. 후천적이라는 쪽에 좀 더 무게를 두는 것이 여성을 위해서는 정치적으로 훨씬 건전한 판단이다.(p.352)"라고 쓴 어느 서평이었다. 신념을 위해 사실은 기꺼이 무시할 수 있다는 태도이다. 분명 연구를 진행하며 데이비드에게서 예상외의 반응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석하고 반박 주장을 모두 무시하던 존 머니처럼 믿고 싶은 대로 고집하는 인간이 측은하다. 작가가 책 후반부 다시 시간을 거꾸로 돌아가 1951년의 한 논문을 소개하는 대목은  인간의 아집이 가진 폭력성을 더욱 증폭시켜 부각한다.

  

 

[1951] “중성이라는 모순적인 상황 때문에 대부분 정신병과 노이로제 증상을 보였다고 하더라도 모두들 당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주 극단적인 반음양의 경우에도, 그러니까 자신의 성별이 모호하다는 사실을 모를 수 없는 경우에도 소위 말하는 기능성 정신병의 발병률은 극히 낮았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심각하고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전형적인 신경성 정신병의 발병률도 현저히 낮았다.” 저자는 성별이 모호한 생식기 때문에 “우울”해하거나 “과묵한” 환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우울감이나 과묵함이 일상생활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할 만한 정신병 수준이라는 증거는 없었다”고 밝혔다. - p.299

  

가장 크게 달라져야 할 부분은 성별이 모호한 생식기와 더불어 성장하는 어린이를 바라보는 의학계의 시각 자체일지도 모른다. 머니와 존스홉킨스의 치료방식은 그런 어린이가 정신적으로, 성 심리적으로 불행하다는 믿음을 기본 전제로 깔고 있다. 이와 같은 직관적인 주장의 진위를 입증할 수 있는 연구 자료는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 pp.297~298

 

 

아이는 자기가 처음 관계 맺은 인간인 부모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다. 데이비드의 비극도 데이비드가 부모의 무지함을 의심했더라면 좀 더 빠르고 약하게 끝났을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대화는 실제 녹취 원고와 상담 기록, 인터뷰에서 따왔다. 저자 존 콜라핀토는 이를 재구성하고, 존 머니나 데이비드 부모의 성장과정도 추적하면서 인간의 판단과 철학이 어떤 배경에서 이루어지는지부터 따졌다. 최선을 다해 수집한 자료들을 엮어 한 이야기로 구성하되, 저널리스트 특유의 딱딱한 필체를 유지하였다. 오히려 ‘공상 의학 게임’, ‘소년은 울지 않는다’, ‘본성이 그를 빚은대로’ 같이 임의의 소제목을 붙이인 국내 번역본에서 원서에 없는 감정적 온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반음양 등 성기 문제자와 동성애자 등 성적 소수자는 굉장히 많다. 본문에 언급된 것처럼 그들이 불행하며 반드시 고쳐져야 한다는 생각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너무나도 융통적이며 다채로운 존재이다. 생각외의 대안으로 문제를 극복한다. 그래서 영아의 의사를 묻지 않고 미래를 정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행동이라 하겠다.

 

 

데이비드 실험과 커크 실험은 지난했던 본성 대 양육 논쟁에서 일단 어느 쪽에도 편향되지 말고 두 측면 모두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 전환점적 사건이다. 쓰는 용어의 유행만 봐도 얼마나 이 문제에 대한 연구가 빠르게 뒤집히고 수정되고 있는지 알 수 있으며,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인간실험이 함부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경종을 울린다. 대표적으로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지배적으로 사용했던 젠더란 단어의 사용이 요즘은 현저히 줄었다. 현재의 성정체성 문제는 환경문제하고도 많이 맞물려 선천론이 부각되고 있다. 본문에 실린 20세기 후반 연구결과 중 임신 중에 태아와 반대 성 호르몬의 자극을 많이 받을 경우 아이에게 반대 성의 기질이나 신체적 특성이나 성적 지향을 가져올 확률이 크다는 내용이 있는데, 환경호르몬과 비만 등으로 내분비 호르몬 교란이 빈번한 요즘 더욱 관심을 많이 받고 있다. 끝으로 자신이 알려지는 것에 용기를 내 적극적으로 대처하고자 노력했던 데이비드의 말을 인용하며 서평을 갈음하고자 한다. 이상한 브렌다를 만드는 이상한 사람들의 도발이 부디 사라지길 기원하며.

 

 

데이비드는 가능한 한 인터뷰 요청에 응하려고 한다. “계속 그 이야기를 하려니까 힘들어요.” 얼마 전에 그는 식을 줄 모르는 언론의 관심이 부담스럽다고 내게 고박한 적이 있다. “그러면 기억이 떠오르는 속도가 훨씬 빨라지거든요. 좋지도 않은 기억인데,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런 일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당연히 궁금하겠죠. 그 심정은 이해해요. 당황스러워서 그렇지. 진실을 알리려면 어쩔 수 없죠. 그게 세상을 바꾸는 유일한 방법이니까요.” - p.3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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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감옥 - 생각을 통제하는 거대한 힘
니콜라스 카 지음, 이진원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유리감옥] ‘자동화’에 눈멀어 ‘인간’을 잃다

 

 

 

‘자동화’라는 이름의 달콤함에 우리는 기꺼이 ‘유리감옥’에 수감되고자 한다

기계의 편리함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에 우리는 무엇을 잃었나

‘유리’는 깨뜨릴 수 있다. ‘유리감옥’으로부터의 탈출은 우리의 의지에 달렸다

 

 

 

“사전을 찾을 필요가 없는 쉬운 단어만 쓴다.”는 포크너의 비판에 “글의 울림과 어휘의 수준은 상관이 없고, 쉽지만 쓰고 싶은 바를 완벽하게 전달하는 어휘를 선택했다.”고 일축했던 헤밍웨이처럼 니콜라스 카의 글은 언제나 영리하고 쉽다. 그는 디지털사상가로 활동하기 전, 아이비리그에서 학석사를 마친 잘 나가는 경영 컨설턴트이자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편집장이었다. 그는 활자를 인간의 기억을 담은 지도라며 강조하지만, 디지털 시대의 대중들의 독해력과 집중력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초 단위’를 언급하며 전작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서 대중들의 실태를 분석했던 그였고, 그래서 자신의 책을 하나의 이상적인 ‘블로그 포스트’처럼 일부를 보든 전체를 보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중심 주제를 찾을 수 있도록 설계해놓았다. 누구나 문제의식을 갖고 도출할 수 있는 결론임에도 누구도 나서서 진지하고 면밀하게 분석하지 않는 소재를 다룬다는 점에서 그는 이 시대 흥미로운 저자이다.

 

 

이번 신작을 전세계 동시출간했을 만큼 현재 그의 위상과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처음 칼럼을 통해 ‘구글이 우리를 바보로 만든다’고 고발하며 본격적인 디지털사상가로 변신하였고, <빅 스위치(2007)>에선 디지털 세계의 특징을 정의하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2010)>에선 디지털 시대의 인간을 분석하였다. 이러한 흐름에서 ‘자동화’를 소재로, 컴퓨터스마트폰 등의 스크린이 인간의 생각을 통제하는 거대한 ‘유리감옥’이라고 고발한 신작 <유리감옥(2014)>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니콜라스 카’다운 선택과 도전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한용운의 시 <복종>이 떠올랐다. “남들이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중략)” ‘유리’ 화면을 보는 동안 인간은 다른 일을 하지 못한다. 시간, 관심, 사고 모두를 빼앗는 ‘감옥’에 우리는 기꺼이 수감된다. ‘자동화’라는 기계의 편리함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 때문이다.

 

 

스마트폰 사용은 기력을 빼앗기는 것과 같다. 알다시피 여러분들은 그곳에 우두커니 서 있다. 여러분들은 이런 특징 없는 유리 조각을 문지르는 것 같다. - 세르게이 브린(구글 창업자)

 

구글 창업자 세르게이 브린은 구글글래스를 내놓으며, 구글글래스가 기존의 스마트기기와 차별화된 ‘유리’라고 자랑했지만, 니콜라스 카는 이 역시 또 다른 ‘유리감옥’의 등장일 뿐이라고 분석한다. 370쪽이 넘는 <유리감옥>은 자동화, 희망 오류, 퇴화, 자동화의 역설 네 가지 핵심어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자동화’는 1946년 포드자동차가 자신들의 작업공정을 일컫는 새로운 용어로서 등장하였다. 두 번의 세계대전이 이끌어낸 급속한 과학기술의 발전이 낳은 용어로, 기존 기계화의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진보한 무언가를 의미하였다. ‘로봇’이 노예 상태를 뜻하는 체코어 로보타에서 기원했다는 것에 알 수 있듯, 기계는 인간에게 시종 인간의 행위를 대신하거나 그 행위에 있어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충직한 종으로 인식되어왔다. 문제는 기계가 할 수 있는 ‘자동화’의 영역이 많아질수록 기계에 대한 인간의 의존은 점점 높아진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가 시간을 보낼 때보다 일을 하고 있을 때 그 일로 인해 더 많은 행복가과 성취감을 느꼈다. 자유 시간에 사람들은 지루함과 불안함을 느끼는 경향을 보였다. 그렇다고 그들이 일을 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다.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욕구를 강렬하게 표현했다. 그리고 일을 하지 않을 때는 다시 일하러 가는 걸 가장 싫어했다. “우리는 사람들이 여가를 즐길 때보다 일을 할 때 더 많은 긍정적인 감정을 느끼면서도, 여가를 즐길 때가 아니라 일을 할 때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역설적인 상황을 확인했다.” 이 실험 결과는 어떤 활동이 우리를 만족시켜주고, 또 반대로 어떤 활동이 우리를 만족시켜주지 못할지를 기대하는 데 서툴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뭔가를 하고 있는 와중에 그로 인한 심리적 영향을 정확히 판단하지 못한다. - p.37  

 

저장해둔 데이터베이스에서 쉽게 정보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뇌가 기억하려는 노력을 덜 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 인터페이스가 인간의 능력을 더 많이 대체할수록 새로운 상황에 대한 사용자의 적응력은 그만큼 더 떨어지게 된다. - pp.128~130

 

 

심리학에서 좋아하지 않는 것을 바라고 바라지 않는 것을 좋아해, 일어나길 바라는 일들이 행복감을 높여주지 못하고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일들이 행복감을 높여주는 것을 ‘희망 오류’라고 정의한다. 즉 우리의 믿음과 달리, 인간은 자신의 선호와 이해를 합리적으로 판단하지 못한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자동화’가 가져오는 비극은 ‘희망 오류’와 관련 있다. 인간이 원하고 좋아해서 더 많은 기계, 더 탁월한 기계를 만들고 의존한 결과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와 행복을 빼앗아간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흔히 떠올리는 ‘자동화’의 비극은 인간의 ‘퇴화’이다. 편리함의 대가는 자율성의 상실이고, 자율성의 상실로 인한 단순화는 퇴화를 일으킨다. 내비게이션을 사용할수록 공간지각능력이 급격하게 떨어진다는 사실은 이제 비교적 널리 알려진 상식이 되었다. 손가락만큼 최고의 도구가 없다고 말했던 스티브 잡스처럼 인체만큼 가능성 넘치고 생동하는 자동체가 없는데 우리 스스로 점점 우리의 ‘자동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전문가들의 지적 재능은 자동화로부터 보호를 받지 못한다. 현재 온갖 종류의 창조적·분석적 작업이 소프트웨어에 의해 처리되고 있다. 의사, 예술가, 변호사, 음악가, 교사…컴퓨터가 이런 직업들을 100퍼센트 떠맡은 건 아니지만 많은 부분을 대신해주고 있다. 그리고 컴퓨터는 분명 일하는 방식을 바꾸고 있다. 직업만이 컴퓨터에 의해 자동화되고 있는 건 아니다. 취미도 자동화되고 있다. - p.33

 

자동화에 대한 편향은 자동화에 대한 안심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사람들은 모니터를 통해 들어오는 정보에 과도한 무게를 둘 때 이런 식의 편향에 빠진다. 정보가 틀렸거나 잘못됐더라도 무조건 믿어버리는 것이다. 소프트웨어를 맹신하다 보면 본인의 감각 등 다른 정보 출처를 무시하거나 폄하해버린다. - p.114

 

자동화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일에 대한 부담을 지우고, 여키스-돗선 곡선(자극 강도와 능력 정도가 종형을 이룬다는 곡선. 자극이 지나쳐도 무기력과 무능력에 빠진다)의 오른쪽으로 그들을 밀어 넣음으로써 사실상 사람들에게 예상치 못한 추가적 부담을 가한다. 학자들은 이를 두고 ‘자동화의 역설’이라고 말한다. 자동화된 시스템이 종종 업무 부담을 높이고, 불안한 작업 환경을 만들어낸다는 걸 보여주는 연구 결과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자동화의 아이러니다. - p.143

 

아이들이 혼자서 절대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간섭하길 좋아하는 부모님처럼 구글과 페이스북과 다른 개인용 소프트웨어 제조사들은 적어도 과거에는 온전하고 활기찬 삶에 꼭 필요하다고 여겨졌던 천재성, 호기심, 독립심, 인내, 담대함 같은 성격상 특성들을 비하하고 깎아내린다. 미래에는 그런 미덕들을 우리가 컴퓨터 스크린들을 통해 들어가는 판타지 세계에 사는 존 마스턴 같은 영웅들의 위업을 통해서 간접 경험만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 p.271

 

 

‘자동화’는 인간의 노동과 여가 모두에 변화를 가져왔다. 더 이상 TV를 바보상자라 부르지 않는다. 전통적인 수제 교구보다 시청각과 터치에 기반을 둔 스마트 교구가 수업을 지배하고, 아무 생각 없이 부모들이 아기들에게 스마트폰으로 뽀로로를 틀어주고 글씨를 쓰는 것보다 문자로 치는 것을 먼저 알게 하면서 디지털 시대에 최적화된 ‘새로운 인간’의 양산은 이미 상당히 진행되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모두 겪은 성인들은 점점 ‘더 많은’ 과거에 겪지 않았던 어려움과 과거에 필요하지 않았던 일들에 직면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과거엔 직접 쓰고 말해서 끝냈을 일이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고장 나면 손 놓고 있게 된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과거엔 직접 수동 작동하면 되던 일을 굳이 자동기능을 쓰기 위해 기계에 명령어를 입력하거나 데이터를 기록해야 한다. 요리, 운동, 쇼핑, 연애 등 생활의 사소한 부분까지 애플리케이션을 쓰고 인터넷 검색을 하며 오늘도 스마트한 하루를 보냈노라고 뿌듯해 한다. 누르고 찾는 현재보다 직접 생각하고 발품 팔던 과거가 더 시간효율적일 수 있음에도, ‘스마트’는 디지털의 전유물이어야 하니까 애써 무시하기로 한다.

 

자동화가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자동화와 자동화의 선구자인 기계화는 오랜 세기에 걸쳐서 발전해오고 있으며, 그 결과로 우리가 처한 환경은 대체로 크게 개선되었다. 현명하게 사용할 경우 자동화는 우리가 힘들고 단조로운 일에서 벗어나 보다 도전적이고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일에 매진할 수 있도록 해준다. 문제는 우리가 자동화에 대해서 합리적으로 생각하거나 자동화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아주 능숙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충분하다’ 내지는 심지어 ‘잠시만 멈춰’라고 말해야 할 시기를 모른다. 경제적, 감정적으로 자동화의 장점에만 흠뻑 빠져 있을 뿐이다. - p.42

 

우리는 여러 가지 대안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망각한다. 우리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과 자동화된 시스템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이해를 약화시키기보다 강화시키게 해주는 방식을 무시하고 있다. 인간 요인 연구원들과 자동화에 대한 다른 전문가들이 찾아냈듯이, 컴퓨터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많은 혜택들을 잃어버리지 않고 유리감옥을 깰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들은 분명 존재한다. - p.228

 

 

유리천장이든 유리감옥이든 ‘유리’의 속성은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유리감옥’은 기꺼이 수감되기를 원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원한다면 충분히 부수고 벗어날 수 있다. 인간이 ‘희망 오류’ 속성을 가진 비합리적인 존재임에도 인간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 니콜라스 카의 주장이다. 성장의 정점을 찍은 인간은 모든 면에서 늙어간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인체의 기능은 나이와 상관없이 쓰지 않거나 잘못 쓰면 망가지고, 다시 쓰고 잘 쓰면 다시 회복한다. 그게 인간의 가능성이고, 그래서 인간을 믿어야 한다. 니콜라스 카는 분명 유리감옥을 깰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한다고 말한다. 다만 그 구체적인 방법들을 별로 말하지 못하고 ‘유리감옥’의 속성과 현황을 분석하는 데 그친다는 것이 책의 한계라면 한계이다. 어쩌면 그것은 누군가 콕 짚어 명쾌하게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 사람마다 달라 각자 방법을 찾아야 하는 사안일지도 모른다. 니콜라스 카가 생각하는 한 가지 힌트는 프로스트 시 <풀베기>의 한 구절인 ‘사실은 노동이 알고 있는 제일 달콤한 꿈이다’이란 문장이다. 어떻게들 생각하시는지.

 

 

육체나 정신 중 어떤 것이건 노동은 일을 완수하는 방법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노동은 사색의 한 형식이자, 세상을 유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대면해서 바라보는 방법이다. 행동은 관점을 조정하지 않고, 우리를 사물 그 자체에 가깝게 데려다준다. 사랑이 우리를 서로 묶어주듯이 행동이 우리를 이 세상과 묶어준다는 게 프로스트의 뜻이다. 초월과 반대되는 일은 우리를 우리의 공간 속으로 집어넣는다. - pp.319~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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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10가지 - 따봉, 프란치스코!
차동엽 지음 / 위즈앤비즈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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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10가지]

교황청립 대학에서 감수하고 박사 신부가 쓴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하여’

 

 

지난 8월 18일 4박 5일 간의 바쁜 방한 일정을 마친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으로 돌아갔다. 평화방송은 당분간 천주교 신자가 소폭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젊은 시절 일본 선교에 평생을 투신하고 싶어 했던 교황의 꿈이 반백년 후 옆 나라에서 조금이나마 이루어진 셈이다. <명량>의 1500만 돌파처럼 교황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은 ‘인간적인’ ‘리더’에 대한 갈급이 어느 정도 작용했던 듯하다. 문제는 백자백답이듯 교황이 원하지 않는 반응도 적잖게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공사기업은 물론 지자체까지 교황 관련 관광 상품과 물건 기획에 열을 올리고, 어느 언론은 교황 방한이 별로 특수를 가져다주지 못해 유감이라고 한다. 교황의 행동 하나만 보고 빨갱이라 하질 않나 해방신학자라는 둥 포퓰리즘에 미쳤다는 둥 하는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한다. 저마다 보고 싶은 대로 믿고 싶은 대로 교황을 쳐다보는 것이다. 방한을 앞두고 몇 달을 주보로 강론으로 주의를 주고 심지어 교황 집전 미사 참석자를 본당별로 미리 조사해 예비소집까지 하는 초유의 단속이 있었음에도, 우상숭배도 아니고 신자씩이나 되어서는 교황을 만지기만 하면 천당 가는지 아는 무지몽매한 이도 있었던 듯싶다.

  

아무리 경박하고 무책임한 세태라지만, 적어도 어떤 이를 힐난하려거든 제발 정확한 사실에 입각해서 논리적으로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광신도처럼 묻지도 따지지 않고 좋다고 사랑한다고 외치는 것도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적어도 사회 혼란은 일으키지 않는다. 인터넷 검색 한번만 해도 잘못된 걸 알 수 있는 이야기가 SNS로 입으로 인터넷으로 삽시간에 퍼져버리고 커지는 요즘이다. 그런 와중에 이런 저런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책을 찾아보며 그의 면면을 제대로 알고자 하는 독자들이 적지 않다. 문제는 물량의 홍수인데 최근 두세 달 동안에 나온 교황의 어록이나 글을 번역한 책이나 제3자가 교황을 분석한 책들이 수십 종에 이른다. 온라인 서점과 제휴해서 무료 전자책을 대량 배포하거나 장기 광고를 걸 수 있는 출판사, 교회 내에서 대놓고 밀어주고 소비되는 가톨릭계 출판사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참으로 피 튀기는 책전쟁이 아닐 수 없다. 그 때문에 독자는 선택의 폭이 넓어 행복한 대신에 괜찮은 책을 골라내기 위해 한참을 서가 앞에서 고민해야 한다.

차동엽 신부가 쓴 <(따봉, 프란치스코!) 교황의 10가지>는 6월 말에 일찌감치 내놓은 책이다. 스타 신부임은 물론 <무지개 원리> 열풍으로 신자, 비신자 아우르는 팬층을 꽤 확보하고 있는 저자이다. 사목신학을 전공한 차동엽 신부의 장기는 어려운 얘기도 쉽게 푸는 문장력과 뛰어난 편집력인데 <교황의 10가지> 역시 그런 장기를 한껏 살린 책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삶, 말과 글을 실으며 본문의 모든 내용을 교황청립 라테란대학교의 자문을 구해 집필하였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 10가지로 정의를 내렸다. 검증받은 책, 정통 가톨릭의 입장에서 교리적 배경과 함께 프란치스코 교황을 알고픈 독자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교리 소양이 부족한 가톨릭 신자나 가톨릭의 특성을 전혀 모르는 비신자에게 유용한 책이다.

 

“가톨릭 교회는 항상 이 부분에 명확한 입장을 밝혀 왔다. 나는 교회의 사람이므로 교회와 같은 생각이다. 더 밝은 얘기를 하고 싶다.” - p.230

 

인용한 것은 낙태, 동성애 등 교회가 금기해 온 민감사안에 대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확고한 입장이다. 최초의 비유럽권 교황, 최초의 남미 교황, 최초의 개발도상국 출신 교황, 최초의 예수회 출신 교황, 최초의 프란치스코 교황…. 유난히 ‘최초’ 타이틀이 많은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싶어 한다. 하루아침에 뚝 떨어진 외계인 보듯, 기존 교회를 뒤집어엎는 매우 별난 사람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가톨릭이 내세운 ‘개혁 교황’이란 의미는 점점 대중의 염원으로 둘러싸인 신화를 뒤집어쓰고 있다. 만장일치 콘클라베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가 영속하기 위해선 보수적 기조는 필수다. 사람들은 낮은 곳에 몸소 임하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강조하고 대중 친화적이고 여러 사안에 대해 온건한 언행을 보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보며 해방신학이니, 프란치스코 정신이니, 진보 좌파니 하지만 프란치스코 교황을 읽는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단연 ‘예수회’라고 생각한다.

  

그가 가톨릭 내부의 ‘개혁’에의 갈급 때문에 선출되었고, 요한23세의 뒤를 잇는 ‘개혁’교황으로서의 의지를 보이고 있음은 분명하다. 교황 재임기간 동안 교회법이나 교리, 각종 추문과 부정 등에 대해 상당한 조치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어떤 기존의 근간을 흔드는 개혁이라기보다 가톨릭의 과오를 사과하고 자정하며 교회와 교리, 신앙을 더욱 공고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을까 싶다. 선교(복음화)도 더욱 강조될 수 있다. <교황의 10가지>에서 차동엽 신부가 분석한 교황의 10가지 특성은 다음과 같다. 사람에 대한 애착과 믿음, 사랑의 강조, 항상 웃음과 미소, 자비를 중시, 희망과 긍정주의, 예수를 닮고자 노력, 무릎 꿇고 기도함은 축복, 현장의 목자, 프란치스코의 정신으로, 마지막으로 식별로 상징되는 예수회의 교회 기여이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식별을 통해 자신의 올바른 위치를 인식하고, 자신의 ‘관점’에서 출발하여 ‘하느님의 일’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이냐시오(예수회의 설립자) 성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장소와 시간과 사람의 상황에 맞게 끊임없이 육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통솔 자세는 요한 23세 교황의 ‘모든 것을 보고, 많은 것을 식별하고, 작은 것을 시정하라’라는 문구에서 다시금 드러납니다.” - p.222

"유토피아적인 모든 투사(미래를 향한)나 재건(과거를 향한)은 좋은 정신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실재하시고 ‘오늘’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과거를 향한 그분의 현존은 당신 백성에게나 우리 각자에게나 구원의 위대한 업적에 대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미래를 향해서는 ‘약속’과 희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과거에 하느님은 현존하셨고, 당신의 자취를 남기셨습니다. 기억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만나도록 도와줍니다. 미래는 오로지 약속입니다. 천년도 아니고 막연한 미래도 아닙니다. ‘오늘’은 영원과 가장 닮았습니다. ‘오늘’은 영원의 불꽃입니다. ‘오늘’, 영원한 생명에 투신해야 합니다." - p.238

  

<교황의 10가지>를 읽으며 가장 큰 소득은 몇 안 되지만 중요한 가톨릭의 기조들을 저자의 명쾌한 설명으로 알았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가난한 자와 함께하고’ ‘가난한 교회’를 갈망하는 것에 대한 프란치스코 정신과 교황의 신념은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 함의를 알기 위해선 가톨릭의 두 비전인 ‘제도’ 교회와 ‘성령’ 교회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제도 교회는 말 그대로 교회의 구조와 재산, 규정과 통치 등을 다룬 계보와 조직화의 교회를 의미하고 성령 교회는 약자를 사랑하는 사명을 같고 겸손하고 단출한 평등 공동체를 지향하고 영성을 강조하는 교회를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둘은 비교적 서로 떨어져 서로의 빈틈을 메우거나 견제하며 발전해왔다. 나름의 신념을 갖고 영성 교회의 역할을 해온 대표적인 수도회 프란치스코회와 예수회의 정신을 제도 교회의 끝판왕인 교황청으로 끌어들인 것은 큰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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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광기 - 왜 예루살렘이 문제인가?
제임스 캐럴 지음, 박경선 옮김 / 동녘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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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광기]

예루살렘, 오오 이토록 성스러운 '유토피아'여

  

이스라엘 사람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코너에 몰려 있는 상태다. 하지만 그 코너는 그들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다. 그 코너의 한쪽 벽은 서구 문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반유대주의의 오랜 역사다. 기독교 신학은 (...) 유대인들은 유대 본토로부터 추방당하게 되어 있음(예루살렘으로부터의 유대인 배제)을 전제로 삼는다. (...) 1948년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귀한에 관한 양가서은 이 같은 맥락에서 상당 부분 설명이 가능하다(가령 바티칸은 1994년까지 이 국가를 인정하지 않았다). (...)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해 취해 온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 반유대주의는 아니지만, 이스라엘이 늘 비난의 대상이 되는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 열쇠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 대해 다수가 느끼는 본능적인 불편함에 있다. 나머지 한쪽 벽은 식민 정책이다. 유대인들이 여전히 오랜 과거의 역사에 휘둘리고 있듯, 아랍인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역사는 곧 인종차별의 역사다. 식민지의 민족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경멸 말이다. (...) 식민지 개척 세력이 예루살렘에 뿌려 놓은 유대-아랍 분쟁의 씨앗이 단단히 뿌리를 내려 버린 셈이다. (...) 그러나 그 제3자의 존재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인식도, 인정도 하지 않는다. (...) 나는 바로 그 제3자를 지목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3자를 밝혀낸 뒤에야 비로소 그 힘의 작용을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 저자 인터뷰

  

이 책의 저자 제임스 캐럴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예수회 계열 대학에 진학했고 아예 신학교로 옮겨 석사학위를 받는 것으로 모자라 사제가 된다. 신앙인으로서 정점을 찍었다 생각한 순간 열의가 사라지고 혼란에 휩싸였다. 마음을 잡고 영적 성숙을 위해 떠난 예루살렘 성지순례는 그에게 엄청난 확신을 심어주었고, 이 경험으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사제직을 그만 뒀지만 신앙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리고 전업 작가가 된다. 그가 몰두하고, 그를 관통하는 두 가지 주제가 있다. 하나는 <아메리칸 레퀴엠><전쟁의 집>으로 대표되는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고, 다른 하나는 <콘티탄티누스의 칼><예루살렘 광기>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다. <예루살렘 광기>는 그렇게 작가 자신의 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한 책이다. 사사로운 동기였지만 그 완성품은 창대한 역작이다.

덤비는 책을 만날 때가 있다. 대개 읽는 이의 수준보다 높은 어려운(데다 두껍기까지 하면 더욱)’ 책들이 그렇다. 반가워하며 주먹 불끈 쥐고 전투 독서하며 책과 승패를 겨룬다. 이런 책 중 뭔지 모를 짜릿함에 휩싸여 읽는 내내 신나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 올해는 <예루살렘 광기>가 처음 만난 그런 책이었다. 역사, 종교, 사회학, 문화인류학 등 배경지식이 얼마나 있어야 이 책을 완전히 읽을 수 있을까 가늠이 되지 않을 만큼 저자의 서술은 종횡무진 한. 서로 중첩되어 이어진 10개의 장은 다시 한 가지 담론을 그린다. 본문 간의 중첩이 저자가 독자를 위해 마련한 유일한 배려이다. 흔히 대중교양서가 가진 친절함(차근차근 설명하며 떠먹여주는)<예루살렘 광기>엔 없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세 종교의 중요 성지인 예루살렘, 그를 둘러싼 인간의 탐욕과 분쟁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 되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가톨릭은 끊임없이 십자군 전쟁에 대해 속죄했지만 20년 전까지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았고, 부시는 그 불편한 단어인 십자군을 다시 입에 올리며 이스라엘과 미국의 긴밀한 유대와 미국의 중동 개입을 대놓고 표를 내기 시작하였다. 빈 라덴 사후 이슬람근본주의 테러리스트들은 예루살렘으로 집결한다. 미국의 출연으로 이 미친 성전의 판은 오히려 더 커졌다. 저자는 예루살렘이 서구 역사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라 표현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둘러싼 광기의 기원을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 제임스 캐럴은 예루살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과 종교의 본질을 논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p.11) 이 책은 예루살렘이라는 실제 도시와 그 도시가 던져 주는 묵시종말론적 환상 간의 치명적 순환 고리에 관한 책이다. 다시 말해, 두 예루살렘에 관한 책이다. 땅의 예루살렘과 상상 속 예루살렘, 그러한 이중성은 기독교의 예루살렘과 유대교의 예루살렘, 유럽의 예루살렘과 이슬람의 예루살렘, 이스라엘의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언덕 위 도시라는 실제 지리상의 예루살렘과 메시아 국가라는 이상으로서의 예루살렘 간 긴장을 통해 한층 두드러진다. (p.13) 수 세기에 걸쳐 환상 속의 그 도시가 현실 속 도시를 만들어 내고, 그 현실 속 도시는 다시 환상 속 도시를 만들어 왔다. 결론은 전쟁이다. 지난 2000년간, 예루살렘의 지배 세력은 열한 차례나 거듭 전복됐고, 거의 모든 경우 극단적 폭력을 수반했으며 그 전면에는 늘 종교가 있었다. 이 책은 그러한 전쟁 이야기, 즉 신성한 땅이 전쟁터가 되는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토마스 무어가 주창한 유토피아는 모든 인류가 꿈꾸는 이상향이지만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모순의 공간이다. 이러한 유토피아의 속성과 가장 가까운 곳이 예루살렘이 아닐까 싶다. 예루살렘은 4대 문명 중 둘이 속한 비옥한 초승달 지역안에 있는 도시다. 유일신이 말한 약속의 땅이었고, 예수의 주 활동지였으며, 가장 오래된 이슬람사원이 있는 탐나고 탐나는 곳이다. 제임스 캐럴은 종교의 본질을 폭력과 모순으로 규정한다. 신석기혁명으로 인류는 수렵채집 생활을 멈춘다. 그러나 그때 맛본, 살육의 집단흥분이 DNA에 각인되었다. 인류는 이를 종교의식을 치를 때 희생물을 요구하는 희생제의라는 방법으로 타협점을 찾는다. 문제는 이 희생제의를 통해 폭력을 거부하는 종교의 중심에 폭력이 있는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바탕부터 모순이니 교리와 신앙이 비이성적인 것은 당연하다.

   

(pp.268~269) 하느님은 막강한 통치자에서 친구로 진화했다. 한 종족에게만 충실한 하느님이 아니라, 도처의 모든 인간에게 충실한 친구인 단일한 하느님이 된 것이다. 따라서 성서는 상대적 약자의 관점에서 풀어낸 사회적 서사로, 스스로 한 민족을 창조해내고 그 민족에게 자기비판의 원칙 즉 예언을 주었다. 성서는 희생자가 된 민족 스스로도 타인을 희생양 삼으려는 충동을 지니고 있음을 경고했다. 폭력의 충동을 느꼈던 성서 속 하느님이 폭력을 거부했다. 이 하느님은 홍수로 지구를 한차례 멸망시킨 뒤 이렇게 맹세했다. “다시는 아니하리라.” 당시 유럽인들은 중세시대 이래 문화적, 경제적, 종교적 대변혁을 또 한 차례 겪었으나, 이는 다시는 아니하리라라는 서사의 번복이었다. 우리는 기독교가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규정해 유대교의 부정적 이미지에 대비시키고, 유럽 대륙이 외부의 적인 이슬람교에 맞서 단일화된 문화로 결집했음을 지켜보았다. 인간 본성이 무엇이든, “네 적을 사랑하라라는 평화운동에서 출발한 종교가 또다시 전쟁의 후원자가 되었다. 천년왕국을 향한 열병에서 수많은 운동이 생겨났고, 그중 십자군운동과 그 정신이 가장 결정적이었다. 라틴인과 잔틴인 사이뿐 아니라 라틴인과 아랍인 간의 수많은 무력 충돌로 대대적인 변화가 촉발되었다.

  

그래서 팽팽하게 대립하는 각 종교간 이해관계에서 어느 누구도 승자도 선도 있을 수 없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은 이스라엘을 두고 서로 주인임을 자처하는 동시에 자신의 피해를 부각하지만 세 종교 모두 역사적으로 과오가 있다. <예루살렘 광기>는 각 시대별로, 종교별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과 그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나열하고 분석한다. 이 책의 가장 큰 성과는 현재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 대한 지배적 관점이 얼마나 기독교 편향적인지 밝힘으로서 독자들이 다시 생각하도록 돕는 것이다.

 

<예루살렘 광기>를 관통하는 흥미로운 개념은 성서 <요한묵시록(요한계시록)>에 입각한 묵시종말론적 사고. <요한묵시록>은 신구약을 통틀어 가장 논란이 되는 성서이다. 인류의 종말과 구원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석을 놓고 수많은 교파가 갈려 이단전쟁을 낳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학자나 성직자가 조심스럽고 보수적으로 다룬다. 그러면서 신자들을 단속하는 각인기제로 강력하고 요긴하게 사용해왔다. 반유대주의의 기저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을 둘러싼 세 종교의 전쟁의 표현만 다를 뿐, 결국 묵시종말론적 사고에 입각한 성전이다. 누가 극단적 공포를 견디고 유일신의 선택을 받는지, 신의 도시의 주인인지를 놓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세계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다. 이 세 종교를 통해 인간의 본성과 종교의 본질을 규정한다는 것은 심한 비약의 위험한 시도일 수 있다. 그러나 네 대륙(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아메리카)의 이해관계가 얽힌 유일 무일한 갈등이고, 제법 설득력 있는 분석이다. 결론부에서 저자는 좋은 종교에 대해 고민한다. 그의 평생을 지배하는 질문이기도 하지만 종교가 있는 이라면 누구나 생각하게 되는 문제이다. 저자의 명민한 통찰력을 통해 다각적으로 예루살렘의 특수성을 배울 수 있었고, 세계를 보는 눈을 좀 더 키울 수 있었다. 색인과 주석 등까지 포함해서 66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고 꽤 어려운 편인데도 피곤하지 않고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오타도 없고 바르게 용어 표현한 바른 역자와 편집자의 꼼꼼한 작업 덕인 것 같다. 빨간 표지처럼, 한여름 더위가 싹 가실만큼 빠져들었던 강렬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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