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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탄생 - 사라진 암호에서 21세기의 도형문까지 처음 만나는 문자 이야기
탕누어 지음, 김태성 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평점 :
* 원제: 文字的故事(문자적 고사;2001;대만)
한자를 노닐다
구체적인 사물을 모양을 본떠서 만든 글자 상형자, 추상적인 생각이나 뜻을 점이나 선으로 나타낸 글자 지사자, 한자와 한자를 합쳐 새로운 뜻을 나타내는 글자 회의자, 뜻을 나타내는 한자와 음을 나타내는 한자를 합쳐서 일부는 뜻을 일부는 음을 나타내는 글자 형성자. 한자나 한문을 배울 때 한자의 짜임을 배운다. 한자문화권 국가인 우리나라는 점점 한자어의 비중이 줄어들어간다고는 하지만 전체 국어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점점 한자교육이 줄어든다고는 하지만 한자 자격증 응시자도 꾸준하고, 어릴 적부터 한자 교육을 접할 기회가 많다.
문자가 생겨남으로써 인류의 사유와 표현은 시간의 독재에서 벗어나 순간적으로 공기 속으로 흩어지지 않으면서 축적되기 시작하고, 점차 두께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문자는 공간적 거리와 시간적 거리를 포함하는 언어 연계의 확장력을 크게 증가시켰고, 인간의 영감, 발견과 발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인간의 사유를 지속시켜주는 중요한 근원으로서의) 곤혹감을 더 이상 고독하지 않고 안정적이며 지속적이고 면밀한 상태로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다. - p.21
공동의 기억이 크고 두터워질수록 문자가 부담해야 하는 정보의 양은 상대적으로 감소하고 문자를 더 경제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 p.79
오래된 문자들 위에 남아 있는 모든 못자국과 홈, 호도 등은 이 문자들의 유구한 역사와 사라지지 않는 경력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 p.123
책 제목과 출판사 홍보 글을 봤을 때는 갑골문자에서 현재 한자에 이르는 한자의 탄생과 역사를 논하는 책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그런 내용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상한 모양새와 전혀 다른 책이었다. 어떻게 보면 한자를 소재로 저자의 인문학적 내공을 여실히 드러낸 전 방위적 인문서처럼 느껴지기도 하였다. 역사책이라고 하기엔 언어학 책에 가깝지만 특정 학문 교양서 같은 느낌은 들지 않는 묘한 책이다. 보르헤스, 마르케스, 롤랑바르트, 벤야민이 한자와 도대체 뭔 관련이 있는지 궁금하다면 책을 펼쳐보시길. 한자를 예상치 못한 대상들과 엮으며 논하는 걸 보고 읽는 내내 감탄하였다.
갑골문에서 보면 ‘해醢’ 자는 처음에는 음식의 종류가 아니라 혹형의 일종이다. 형태를 살펴보면 큰 절구 안에 놓여 있는 것이 음식이 아니라 절망적인 표정을 한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윗부분은 두 손으로 절굿공이를 잡고 있는 회자수로서 산 채로 사람을 내리쳐 육장으로 만들고 있다. 그리고 당연히 사방으로 피가 튀고 있다. - p.211
말이나 돼지, 토끼, 코끼리, 호랑이, 코뿔소 등은 어째서 하나같이 서 있는 것일까? 해담은 너무도 시시하다. 쉬진슝 선생이 내린 해답은 글쓰기 도구의 제약을 받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갑골문의 주요 글쓰기 도구는 이후에도 계속 사용된 죽간으로 붓에 먹물을 묻혀 그 위에 글씨를 썼다. 중국의 동물들은 죽간의 좁고 긴 형태의 제약 때문에 늘 환상적인 진화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 p.245
문자는 완벽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완벽한 문자를 만들려는 야망조차 갖지 않는 것이 좋다는 깨달음이다. 실질적이지 못한 부담이 문자를 긴장시키고, 보수적이게 하며, 가능성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안전하고 배타적인 길로만 가게 하기 때문이다. 가능성이야말로 문자가 우리의 사유에 가져다주는 가장 훌륭한 선물이자 은혜다. - p.331
<한자의 탄생>에 혹했던 이유는 탕누어라는 저자의 책 자체가 초역일뿐더러, 상대적으로 자주 접하지 않는 대만 저자였기 때문이다. 특히 역자의 말에 탕누어의 책은 번역하기 힘들다는 얘기가 나오는 걸 보고 호기심이 증폭하였다. 탕누어는 대만 최고의 문화비평가로 자칭 ‘직업 독자(professional reader)’이다. 학부 전공은 역사학이지만 온갖 분야를 넘나들며 인문학 콘텐츠를 생산한다고 한다. 그래서 <한자의 탄생>엔 한자와 한문에 대한 체계적인 이론 같은 것은 없다. 그와 관련한 기본적인 지식은 있다는 전제 하에 동서양을 넘나들고 언어 일반을 논하고 여러 학문을 논하며 한자를 이야기한다. 책 내내 한자는 장난감이다. 한자를 노닐고 한자가 노니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읽어보시길. 현란한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