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모노프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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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노프] 당황스럽고 낯선 어느 동시대인의 이야기

 

 

 

그의 파란만장하고 위험천만한 인생이 어떤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모노프, 그 자신과 러시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우리 모두의 역사에 대해서 말이다.” - 엠마뉘엘 카레르


여러모로 당황스러움의 연속이었던 독서였다. 소설의 대상이 우리나라와 역사적으로 밀접한 러시아의 대표적인 야권 인사임에도 그간 우리가 알고 있는 바가 별로 없었음을 깨달아 당황스러웠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이력이 당황스러웠다. 러시아의 생존인사를 소재로 500쪽 넘게 써내려 간 이 책이 프랑스 작가가 쓴 프랑스 소설이라는 점도 당황스러웠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렇지 않을까. 한때 프랑스와 미국에서 시와 소설로 이름을 날렸던 작가였고, 지금도 자주 국제 뉴스에 등장하는 정치인이지만, 그의 문학 작품은 단 한권도 우리나라에 번역된 적 없고, 푸틴 외의 다른 러시아 정치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당장 언론 기사만 보더라도 어떤 기자는 리모노프를 급진 좌파라고 어떤 기자는 극우라고 기사를 쓴다. <리모노프> 우리말 번역본을 낸 열린책들과 역자가 내린 결론은 극우. 이렇게 평가가 갈리는 이유는 무지 때문도 있지만, 그만큼 리모노프가 정체성도 인생도 혼란스러운 인물이기 때문이다.

 

 

에두아르드 리모노프는 몰라도 엠마뉘엘 카레르를 아는 애독가는 꽤 많다. 페미나 상 수상자이고, 현재 프랑스 문단의 중요 작가 중 한 사람이며, 열린책들에서 작품을 꾸준히 번역하고 있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이번 번역도 역시 카레르 작품 번역을 일임해오던 전미연 역자가 번역하였다. <리모노프>로 국내 애독가들 사이에서 카레르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연초에 이 책을 선물 주려하고 읽기를 강요하던 지인들이 얼마나 많던지. 겨우 겨우 말려 한권만 받고 등 떠밀려 읽으면서 읽는 내내 들었던 생각은 이 책이 뭔지는 알고 권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 리모노프는 쥐뿔도 모를 텐데 하며 말이다. 그만큼 녹록지 않은 소설이다. 현대 러시아의 정치사와 문학사를 어느 정도 알아야 재미를 붙일 수 있다.

   

  

대조적인 두 유명 인사의 삶. 알렉산드르 솔제니친과 에두아르드 리모노프 모두 1974년 봄에 고국을 떠났지만, 세상은 솔제니친의 출국 소식에 더 떠들썩하게 반응했다. - p.139


리모노프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는 내가 인도네시아에서 2년을 보내고 귀국한 직후였다. - p.229


리모노프는 다름 아닌 펜을 든 다르타냥이었다. 인생을 살려면 패거리가 필요해, 파리에 이보다 더 생기 넘치는 패거리는 없지, 하고 그는 생각했다. - p.276


에두아르드에게는 다른 계획들이 있었고, 발칸 반도 농사꾼들의 싸움보다는 조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훨씬 관심이 많았지만, 나이 오십을 코앞에 두고 여태 참전 경험도 없었고, 남자라면 언젠가 한 번쯤 꼭 필요한 경험이라는 생각에 좋다고 말했다. 그는 들뜬 마음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 p.322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장중한 대결에서 프랑스는 시종일관 전자의 편을 들었는데, 프랑스인들이 이렇게 끝까지 감정적으로 고르바초프의 편을 들었다는 사실이 나는 놀랍기까지 하다. - p.356

 


중학생 때 무척 재밌게 읽은 단편 소설 중에 전광용이 쓴 <꺼삐딴 리>라는 작품이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이인국은 출세에 눈 먼 기회주의자로 기가 막히게 시류에 영합해 친일에서 친소로 다시 친미로 입장을 바꾸며 살아남는다. 우리 문단에도 이인국과 같은 기가 막힌 처세로 평생 애증의 원로로 묵직한 위치를 지킨 작가들이 여럿 있었다. 리모노프는 기질이 좀 더 소년스럽고 충동적이기에 완전히 같은 맥락으로 놓기는 힘들지만, 그도 러시아의 이인국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책을 읽는다면 우리 독자도 이 책에 조금 더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리모노프>의 번역을 마치며 역자가 이렇게 많은 인명이 나오는 작품은 처음이다. 아마 앞으로도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 같다.”고 할 만큼 이 책은 러시아 현대사의 거목들이 대거 등장한다.

 

 

우크라이나 하급 장교의 아들로 태어나 깡패, 거지, 작가, 집사, 군인, 정치가를 모두 경험한 1943년생 사내. 뾰족하고 전투적인 성격을 고려해 레몬(리몬)과 수류탄(리몬카)에서 딴 가명 리모노프처럼 그의 인생은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을 만큼 거침없고 대책 없다. 카레르는 상종할 가치가 없는 이상한 인간이지만 그만큼 굴곡진 러시아 현대사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보고 리모노프에 집착한다. 그러나 단순한 전기소설에 그치지 않고 소설 속에 자신 역시 등장시킨다. 그래서 살아 있는 작가가 쓰는 살아 있는 작가의 전기로서 주인공의 인생과 자신의 인생을 나란히 서술하고 기본적으로 두 가지 시점에서 소설이 전개되게끔 만들어 두었다. 이러한 작업은 <러시아 소설>과 함께 카레르의 뿌리 찾기탐구 일환이기도 하고(카레르의 어머니가 러시아계 역사가), 운명공동체인 동시대인으로서의 고민의 발로이기도 하다. 그래서 읽는 이 역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현대 사회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에 빠지고, 긍정적인 방향은 아니지만 조국의 역사를 온 몸에 아로새긴, 너무나 러시아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한 사내에게 인간으로서 연민을 느낀다.

 

 

에두아르드의 정치관은 혼란스럽고 피상적이었다. 두긴의 영향을 받으면서 혼란은 더해졌지만 피상적인 면은 줄어들고 인용은 풍부해졌다. 두긴은 파시즘과 공산주의를 대립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똑같이 숭배했다. 그가 숭배하는 위인 목록에는 레닌, 무솔리니, 히틀러, 레니 리펜슈탈, 마야코프스키, 율리우스 에볼라, , 마시마 유키오, 게오르그 그로덱, 에른스트 윙거,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안드레아스 바더, 바그너, 노자, 체 게바라, 스리 오로빈도, 로자 룩셈부르크, 조르주 뒤메질, 기 드보르가 뒤죽박죽 올라 있었다. 한계를 시험할 심산으로 에두아르드가 찰스 맨슨도 추가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면 옆으로 조금씩 밀어 자리를 내줄 것 같았다. 친구의 친구도 친구니까. 빨간색이나 흰색이나 갈색이나 매한가지니까. 중요한 것은 니체의 지적처럼 오로지 엘랑 비탈이므로. 에두아르드와 두긴은 자신들의 동지인 야권 인사들이 큰 인물들이 아니라는 데 금방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 p.372

 

그는 특히 대단하다끔찍하다는 두 단어를 즐겨 썼다. 무조건 대단하거나 끔찍하거나 둘 중 하나지, 중간은 없는 사람이었다. 리모노프를 처음으로 만나고 나서 자하르는 생각했다.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자하르는 리모노프가 쓴 글을 모조리, 심지어 유소년의 상큼하고 설익은 세계관이 드러나 있다고 그 스스로 평가하는, 리모노프가 젊은 시절에 쓴 시들까지 찾아 읽었다. 이제 리모노프에게는 더 이상 유소년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고, 세계를 떠돈 긴 세월동안 과거에 품었던 환상은 다 깨지고 말았다. ‘타인의 적대성을 전제로 삶의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리모노프는 말했다. 이야말로 유일하게 현실적인 세계관이며, 타인의 적대성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는 여차하면 죽이겠다는 각오로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용감해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그와 단 몇 분만 같이 있어도 날을 세운 단단한 근육질의 몸이 뿜어대는 기운이 느껴졌고, 그가 이런 덕목을 모두 지닌 사람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서 선량함의 흔적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타인에 대한 관심은 있는 사람이다. 언제나 호기심이 살아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선량함, 부드러움, 무방비 상태, 이런 것은 없다. 때문에 리모노프를 존경하고 그의 측근이라는 자리를 세상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자하르였지만 정작 리모노프와 함께 있을 때는 불편했다. - p.413

      

에두아르드가 평생을 꿈꿔 오던 것이었다. 어릴 때 <몬테 크리스토 백작>을 읽으면서. 간수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들려주던 용감하고 침착하고 주체적인 사형수의 얘기를 엿듣고는 그를 청소년기의 우상으로 삼으면서. 소설의 주인공을 자처하는 사람에게 감옥은 놓쳐서는 안 되는 인생의 한 장이었고, 에두라르드는 괴로워하기는커녕 순간순간을,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가 영화 속에서 이미 수없이 본 장면들 모두를 즐겼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 p.461

 

 

몬테 크리스토처럼 감옥에 간다는 사실 때문에 설레고, 남자라면 인생에 한번쯤 전쟁이라며 인종 청소 하러 자진 참전하는 것만 보고 그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다. 물론 소설은 소설인지라 <리모노프> 속 리모노프의 대사나 사생활 묘사 등과 관련하여 리모노프가 억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디테일은 카레르의 상상의 발로라 하더라도 굵직굵직한 행보들은 뉴스로도 확인할 수 있는 실제 사실들이다. 다시 서론의 논의로 돌아와 그의 현재 정치적 입장을 평가한다면 급진 좌파 민족주의가 맞다. 그가 이끄는 민족 볼셰비키당이 극우 민족주의 이론가였던 두긴과 함께 창당했기 때문에 오해를 받는 것인데 두긴은 당을 떠나 푸틴 진영으로 합류했고, 현재의 민족 볼셰비키당은 반푸틴, 좌파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러시아의 미래를 걱정하고 강한 러시아를 꿈꿨으며 장기간 조국을 떠났다는 점에서 카레르는 리모노프(민족주의로 극복)와 솔제니친((제대로 된)공산주의)로 극복)를 비교한다.

 

 

극우든 극좌든 현재 러시아의 민족주의 바람은 러시아를 제외한 모든 세계인들이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소련 붕괴의 패닉과 냉전 시대의 강한 러시아(소련)에 대한 향수도 있고, 현재 러시아가 직면한 각종 사회적 어려움을 잊을 도피처나 극복할 대안으로 민족주의 만큼 좋은 구실이 없다. <리모노프>2011년 출간된 책으로 그 해 자국(프랑스)에서 르노도상과 문학상의 상을 수상하고 2012년 네덜란드에서 유럽문학상을 받았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리모노프는 여전히 정치인으로서 건재함을 과시하며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을 통합해야한다는 등의 궤변을 늘어놓으며 극단적 민족주의자로 살아가고 있다. 작년 우리 출판계의 유행 이슈 중 하나는 문학, 비문학 모두에서 나타난 개인적 관점에서의 역사 읽기였다. 그래서 <나의 한국 근현대사>, <소년이 온다>, <투명인간>,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등이 선전하였다. 카레르의 작가적 입지도 있지만 <리모노프>가 올초 번역된 것도 이 이슈의 연장선인 감이 없지 않다. 재작년과 작년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으로 대박을 쳤던 열린책들이 올해 <리모노프>로도 선전을 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P.S.- 정치인으로서의 리모노프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아래 링크한 박노자 교수의 블로그 글을 읽어보시길. 2011년에 쓴 글이지만, 리모노프와 좌파 민족주의에 대해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지금도 참고 삼아 읽기 괜찮은 글이다.

>>> 보편적 현상으로서의 좌파 민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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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 어려운 시대에 안주하는 사토리 세대의 정체
후루이치 노리토시 지음, 이언숙 옮김, 오찬호 해제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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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絶望の国の幸福な若者たち(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2011;일본)

 

 

절망에서 나는 오늘도 꽤 잘 삽니다  

 

 

 

2013년 한 소셜커머스 업체에서 톱스타 전지현을 내세운 광고를 내세웠다. 메인 카피는 “○○이 있어서 나는 오늘도 꽤 잘 삽니다”였다. ‘꽤 잘 삽니다’, 필자는 문득 이 카피가 이태백, 인구론, 3․5․7포 등의 주인공인 청년들의 삶을 잘 표현한다고 생각하였다. 심지어 히키코모리도 말이다. 본의 아니게 직접 그렇게 살아본 적도 있어서 안다. 어른의 인생룰 중에 ‘나잇값을 못하면 자유로워지는 대신 외로움을 얻는다’는 것이 있다. 혹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독 남의 이목을 신경 쓰며 ‘나이에 맞는’ ‘평균’적인 삶을 맞추려 아등바등한다고 비아냥대는 사람이 많은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세상은 생각보다 급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20대 중후반에 취업을 하고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 사이에 결혼과 출산을 마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30대의 신입사원이 있어도 그 주인공이 ‘나’가 될 확률은 극히 희박하며, 어느 순간부터 연애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만날 친구의 범위가 극히 적어지는 것을 경험한다.

 

 

필자는 3포 중이다. 직업은 없지만 별별 일을 하고 있는 소위 말하는 ‘프리랜서’이고 수입이 롤러코스터를 타서 가끔 강제 히키코모리가 된다. 아무리 절약을 해도 주거는 해결하지 못해 독립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빨대를 꽂았다. 집안일을 전담하고 웬만한 수리나 공사를 스스로 하는 대신 숙식을 제공받았다. 식사는 거래처 미팅이나 아르바이트에서 거의 해결하고, 여러 루트에서 예쁨 받고 음식을 얻었다. 그렇게 살면서, 경조사 불참하고 최소한의 친분관계만 맺으면 꽃다운(?) 2말3초에도 교통비 제외하고 한 달에 10만원 정도면 충분히 산다. 임금이 남으면 신나게 적금도 붓고 학자금 대출도 갚고 경조사도 나간다. 당신이 (더 잘 알지 못하겠으나) 히키코모리로 살아도 몇 가지 가능한 소득생활이 있는데 필자의 경우는 매글을 했다. 첨삭(교정), 타이핑, 기고, 대필, 광고알바, 공모전 등 다양한 일거리가 있지만, 당신이 엄청난 재능이 있지 않는 한은 밖에서 발품 파는 것만큼 벌지 못한다. 대인 관계는 상품권 쿠폰 전송으로 해결하였다. 적응하니 외로움도 모르겠고 살만 하였다.

 

 

강신주가 말하는 좋아하는 일을 하며 충분히 휴식하는 인간, ‘상담이 거의 필요 없는 자본주의를 극복한 인간’에 거의 다다랐다. 하지만 필자의 ‘행복’은 몇 년 째 울면서 ‘나는 행복합니다’를 열창하는 한화 팬의 ‘행복’ 같은 것이었다. 필자는 그 ‘꽤 잘 살만 함’이 무서워서 ‘프리랜서’가 아닌 ‘백수’라고 말하며 오늘도 이력서를 넣고 2,3,4잡을 뛴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의 저자 후루이치 노리토시는 2011년 일본 최대 출판사 고단샤에서 같은 제목의 원서를 출간하며 이런 특수한 상황의 나라는 일본밖에 없는 것 같다고 하였다. 하지만 2014년 말 나온 우리말 번역본을 읽으며 한국과 일본이 어쩌면 이렇게 닮았을까 싶었다. 민음사도 그렇게 생각해서 번역했을 것이다. 원서가 출간된 지 4년이 넘은 지금 일본의 사회학 연구는 저출산 고령화 관점에서 전 세대 전 방위를 다룬다. 사토리 세대의 절약? 주 1만원 내외로 쓰는 노인들이 등장하였다.

 

 

전쟁 중의 ‘젊은이 희망론’은 1990년대에 사업자들을 위해 내세운 정책과 매우 비슷하다. 거품경제가 붕괴하고, 일본은 기업의 수를 늘리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발표했다. 그때 정계‧재계에서 나온 메시지들을 살펴보면, 사업가는 일본 경제의 구세주이며 고용창출도 담당하고 ‘공공’과 윤리를 중시하면서, 실패한 경우에는 자기 책임을 다하는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진정 사업가는 ‘편리한 협력자’인 것이다. 단지 사업가에 국한하지 않고, 오늘날에도 정치인이나 경영자, 문화계 인사까지 “젊은이는 좀 더 노력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어른들이 적잖다. 이러한 지적 자체는 환경할 만한 일이다. 나도 젊다는 이유만으로 다양한 혜택을 받아 왔다. 이 책을 출판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내가 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다만 ‘젊은이 희망론’은, 종종 암묵적으로 젊은이들을 편리한 협력자‘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젊은이에게 권리나 구체적인 혜택, 기회는 주지 않고, 그저 ‘노력하라.’라고만 다그치는 행동은 무책임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다. 아무튼 황군의 병사가 되어야 했던 과거의 젊은이들과 달리, 오늘날 일본의 사업가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경우가 아닌 이상) 목숨을 잃게 될 정도의 일은 겪지 않아도 되니, 그나마 다행이다. - p.61

 

그런 이시하라 신타로(78세)가 지금에 와서는 “젊은이에게 자위대, 경찰, 소방관, 청년 해외 협력단처럼 ‘타인을 위해 몸을 혹사하는’ 직업을 갖게 해, 일 년 동안 구속해야 한다. 공공을 위한 봉사를 통해 심신을 긴장시킴으로써, 감정을 관장하는 뇌관을 단련시킬 수 있다.”라고 당당히 말하고 있다. 1955년 당시에, 이 사회가 이시하라 신타로라는 ‘젊은이’에게 얼마나 많은 기회를 줬었는지 벌써 잊었다는 말인가? 그렇겠지, 잊었겠지. - p.68

 

절반 이상의 젊은이들이 스스로 ‘행복하다.’라고 느끼면서, 동시에 ‘불안하다.’라는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 p.131

 

판매 부수 누계가 2억 부를 돌파한 현대판 성서 <원피스>에 흐르는 사고방식은 ‘동료를 위해서’로 요약될 수 있다. <원피스>의 인물들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동료들에 대한 헌신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있다. 뚜렷한 적도 없고, 절대적인 악도 없는 그 세계에서, 루피(19세, 후샤 마을) 일행은 끝을 알 수 없는 ‘동료 찾기’를 이어 간다. 현실의 젊은이들도 사정은 (루피 일행과) 마찬가지다. 이제 딱히 ‘젊은이 문화’라고 지칭할 만한 공통성이 사라진 시대에,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물리적으로 ‘동료’와 함께 지내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다. 사회학자 야마다 마모루(38세)도, 현대의 젊은이들이 자아 정체성의 근간을 가까운 인간관계 등 여러 가지 ‘관계’ 혹은 ‘집단에의 참여 자체’에서 찾고 있다고 언급했다. - p.140

   

먼 나라의 혁명보다도 계란덮밥 - p.182

 

 

사토리(득도) 세대. 인생에 있어 가장 정력적이고 성취 목표가 많은 나이에 붙이는 단어가 ‘득도’라니, 듣기만 해도 슬퍼진다. 연애는 운에 맡기거나(초식) 관심을 끊고(절식), 취업이 안 되면 이런 저런 알바를 하며 살 만큼 벌며(프리터) SNS로 욕망의 허기를 채우며 그럭저럭 잘 산다. 정치나 사회문제에 별 관심은 없지만 SNS에서 화재가 된다거나 뭔가 재밌어 보이면 놀이를 하듯, 친구를 사귀러 가듯 참여한다. 걱정하다가 비난하다가 하며 청년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삼촌 세대(40대)에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고민한다. 일본에 단카이 세대와 사토리 세대가 있다면 한국은 부자 관계로 더욱 세대적 결속이 끈끈한 베이비붐 세대와 3포 세대가 있다. 3포 세대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며 다독이는 베이비붐 세대의 위로와 X세대의 연민을 받는다.

 

 

40대에게 휘둘리는 사토리 세대처럼 3포 세대도 486 세대와 반목한다. 지금은 586으로의 진입을 앞두고 베이비 붐 세대와 조금 다른 색깔의 ‘힐링 멘토’로 인기 몰이 중이지만, 과거 20대 개새끼론을 내세우며 자신의 자식인 촛불 소녀만이 희망이라 외치던 이들이었다. 대부분은 사토리 세대처럼 3포 세대도 손톱 숨기고 저항하지 않는 ‘차별에 찬성하는 괴물’이 되었지만, 비슷한 미래를 영위하게 된 촛불 소녀들을 고소해하며 그들과 10대들을 거짓선동하고 486을 욕하는 재미로 사는 ‘일베라는 괴물’이 된 자도 있다. 사토리 세대에서 넷우익이 있다면 3포 세대엔 일베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행동방식은 진심보다는 패션(코스프레)이고 게이미피케이션으로 정의할 수 있는 흥미성 참여 양태이다. 원피스적 세계관을 가진 사토리 세대처럼 3포 세대는 악플보다 무플이 두렵고 좋아요에 집착한다.

 

 

 

신고는 보수 계열 단체에서 직접 활동하고, 고스케는 ‘니코니코동영상’ 등 인터넷을 경유해 활동한다는 점에서 서로 차이가 있지만 ‘우익 계통’의 주장과 공간이 그들에게 ‘마음 둘 곳’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고는 자신의 보수 계열 활동을 영화 감상에 비교했고, 고스케는 민주당의 정책을 ‘비판거리’로 삼아 즐기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정치 활동은 진지하면서도, 동시에 실질적인 (정치 활동의) 대상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 p.206

 

"일본은 대지진을 통해 하나가 될 수 있다."라고 말하거나 모금 활동에 참여하면서 “일본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했다.”라고 언급한 젊은이도 많았다. 아무 일 없이 평온하게 생활하는 한, ‘일본’이 ‘일본답지 않은 요소’를 통해 전면적으로 부각되지 않는 이상, 그것(일본이라는 국가)은 좀처럼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는다.(3장) 그러한 의미에서 대지진이라는 천재지변은 평소와 다른, 즉 ‘일본’이라는 존재의 바깥쪽에서 날아든 것이다. - p.245

 

"삼촌들이 젊은이들을 걱정해 주고 있다!"라고 생각하니 순간 눈물이 날 뻔했지만, 어쩌면 삼촌들이 ‘세대 간 격차’ 문제를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들이 그렇게 할수록 ‘세대 간 격차’ 문제의 해결은 요원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의회제 민주주의를 채택한 일본에서 사회 문제를 세대 문제로 처리해 버리는 한, 젊은 층에게는 승산이 없기 때문이다. - p.284

 

통계적으로도 젊은이의 ‘확연한 빈곤’을 발견해 내기란 어려운 일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아사자 수는 2009년에 1656명이었다. 그런데 이 가운데 20대는 4명, 30대는 15명 정도에 불과했다. 아마도 ‘인터넷카페 난민(일종의 노숙자로 일정한 주거지 없이 인터넷카페를 전전하며 잠자리를 해결하는 사람들을 말한다,’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빈곤’이었기 때문에, 실제 수치와 관계없이 미디어에서도 주목했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사는 사회는 겉보기에 참으로 풍요로워 보인다. 그리고 젊은이들은 더없이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풍요로움과 행복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젊은이의 빈곤 문제가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것(빈곤)이 젊은이들에게 현재의 문제라기보다는 앞으로 나타나게 될 미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젊은 층일수록 같은 세대에 속한 사람들 간의 격차는 적다. 20대의 경우에는 정사원이든, 프리터이든, 급여 격차가 그리 크게 벌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연공서열, 종신 고용을 전제로 하는 급여 체계를 채택하고 있는 일본의 대기업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젊은 사원의 연봉은 규정된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아르바이트의 경우에는 근로하는 날짜와 시간대만 조정하면 같은 세대의 정사원 이상으로 수입을 올릴 수 있다. - p.291

 

 

모든 시대에서 젊은이는 나이와 가능성 외에는 쥐뿔도 없는 약자였다. 기성세대는 늘 요즘 젊은이는 참 문제고 세상은 말세라고 했고, 그 문제적 젊은이가 무럭무럭 늙어 기성세대가 되어 같은 말을 하였다. 대개 한 시대의 평가는 동시대에서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고 한 세대의 평가는 동세대는 객관적으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기변호’는 언제나 가능하다.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가 주목 받은 것도 그 때문이다. 저자는 1985년생, 책을 낼 당시 27세의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연구원이었다. 일본의 젊은이로서 일본의 젊은이들에 대한 평가와 그들이 듣는 충고에 대해 당사자로서 정체성 고민에 빠져 들었다. 그의 전공은 처음부터 사회학이 아니었으나 그런 문제의식들이 그를 사회학자로의 길로 이끌었다.

 

 

책은 젊은이의 한 장을 할애해 정의의 역사와 젊은이론의 역사를 고찰하며 시작하여, 나머지 장은 사토리 세대의 정체성을 다각도로 분석한다. 우리말 번역본엔 원서에 없던 한국어판 서문과 오찬호 교수의 해제가 덧붙여졌다. 치열한 문헌고찰법과 인터뷰가 촘촘하게 저자의 탐구와 어우러져 읽는 맛이 좋은 책이다. 기성세대들은 일본의 젊은이들이 젊은이다움을 잃어버린 ‘이상한’ 득도를 향해 정진한다고 한다. 어려운 시대, 불행한 시대에 저항하지 않고 안주한다고 한다. 저자는 그 이유에 대해 아직 그 불행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성세대가 보는 것처럼 일본의 젊은이들은 대체로 행복하다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 행복이 불안을 업은 행복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정말 비극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언젠가 나타날 것이라는 것을. 지금은 폭풍 전야라는 것을.

 

 

<우리는 차별에 반대합니다>를 쓴 오찬호 교수는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 해제의 제목을 ‘일본은 절망적이고 한국은 ‘더’ 절망적이다’라고 붙였다. 비슷한 이유로 <절망의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들>의 번역본 출간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었다. 찾아 읽은 책이 아니라, 생겨서 읽은 책일 뿐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일본의 전철을 밟아가고 있다며 일본에 관심을 갖지만 아주 똑같지는 않으니까. 그래서 우리 젊은이가 쓴 이런 책을 더 읽고 싶었다. 그러나 읽어보니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배운 바도 많았다. 우리도 우리 사회에 대한 전 세대, 전 방위적 접근이 시작되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상황이 나아질 확률은 거의 없다. 어찌되었든 젊은이는 살아야 한다. 견뎌서 늙은이가 되어야 한다. 요행과 합리화의 유혹을 참고 전력투구해야 한다. 이왕 전투하는 것, ‘나와 너’를 알고 달리면 더 좋으니까 이런 책도 읽어가면서.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 15기 "2015년 2월 좋은 리뷰"로 선정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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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
류동민 지음 / 코난북스 / 2014년 12월
평점 :
절판


서울의 정치경제학: 서울과 삶, 서울의 삶

 

 

서울의 하루는 다른 곳의 하루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해야 살아낼 수 있는 시간이다. 서울의 일 제곱킬로미터는 다른 곳의 일 제곱킬로미터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담고 있어 그만큼 더 빠른 속도로 옮겨 다녀야 겨우 버텨낼 수 있는 공간이다. 압축 성장이 서울을 특별한 도시로 만들었다면, 그 특별함은 다시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특별한 생각과 행동, 실천을 가지게 함으로써 그들의 삶의 방식을 규정해나갈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룬 서울의 장소들은 반드시 특정 공간일 필요도, 심지어는 서울에 있는 장소일 필요도 없다. 그것들은 구체적인 장소이자 적어도 한국에서는 이미 하나의 보통명사가 되어버린 장소들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서울에 관한 책이지만 서울에 관한 책만은 아니다. - 책날개 中(프롤로그 중 일부 확장변형)

 

 

2001년부터 2009년까지 우리나라는 국가 브랜드 슬로건으로 ‘다이나믹 코리아’라는 말을 썼다. 역동적이고 너무도 빠른 나라, 수도 서울은 특히 더 그렇다. 다른 수도나 메트로폴리탄도 그렇지만, 서울을 ‘고향’으로 생각하고 사는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토박이 자체도 적은데다가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본적과 아버지의 연고를 기준으로 단 한번도 살지 않았던 곳이었어도 고향으로 삼아왔기에 더욱 그렇다. 서울에 대한 책은 꾸준히 쏟아진다. 분야와 주제도 각양각색이다. 서울도서관처럼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서울 관련서의 출판을 지원하고 홍보하고 있기도 하다.

 

 

작동과 소진이라, 왠지 제목이 무척 서글프게 느껴졌다.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란 제목 뒤로 곧바로 ‘그리고 삶은 어떻게 소진되는가’라는 부제가 붙는, 사실상 한 덩어리이나 길이 때문에 임의로 본제와 부제로 나눈 듯한 책. 저자 소개를 확인하지 않았으면 당연히 사회학 서적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저자는 충남대 경제학과 교수 류동민, 물론 정치경제학은 경제학 내 분과학문이 맞다. 그런데 이 책에서 수식이나 시장이론 같은 흔한 경제학적 기제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경제학보다는 정치학에 정치학보다는 사회학에 가까운 책이었다. 물론 이 학문들 모두 사회과학이라는 큰 틀로 묶이고, 역사적으로도 서로 밀접한 ‘동료 학문’이긴 하지만.

 

 

'반포'는 적어도 서울에서 살아온 사십 대 이상에게는 특별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름이다. 이렇듯 공간은 그 무엇이건 내용물이 채워지기를 다소곳하게 기다리는 텅 빈 그릇 같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담기는 다소곳하게 기다리는 텅 빈 그릇 같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담기는 내용물에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실체인 셈이다. - p.16

 

동호대교를 따라 강북에서 강남으로 건너와서 지하철3호선을 따라 올라오면 양쪽으로 유명한 성형외과 거리가 펼쳐진다. 중국 시장을 겨냥한 탓에 간자체 한자로 쓰인 간판은 얼핏 보면 차이나타운이라 해도 믿을 만한 정도다. 유학생들이 많이 모리는 대학 근처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단 근처에서 보는 ‘양꼬치’나 ‘환전’을 의미하는 한자와 성형외과 거리에서 보는 ‘정형(성형의 중국 식 표현)’이나 ‘미인’을 의미하는 한자는 그래서 마치 ‘맨숀’과 ‘○○팰리스’, ‘고시원’과 ‘오피스텔’ ‘헬스클럽’과 ‘피트니스’의 대비와도 흡사한 느낌을 준다. - p.92

 

공장에서 기계를 빨리 마모되도록 만듦으로써 새로운 기계로 바꾸려는 행동이 경제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가 생각해보면, 땅값 상승으로 떠받쳐온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유인 구조가 얼마나 기형적으로 만들어지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이를 훨씬 더 철저하고 우아한 배제의 원리가 적용되는 공간과 비교해본다면 그 역설을 더욱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안전요원이 주민의 얼굴을 알고 있을 정도로 통제가 되는 최고급 주상복합아파트들이나 의원 전용 출입구와 엘리베이터가 따로 잇던 국회의원회관 등을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 p.112

 

1970년대 말 대기업 신입사원의 월급은 십만 원가량이었다. 그리고 당시 대치동 은마아파트 삼심 평대의 분양가는 이천만 원 정도였다. 그러니 앞에서 말한 비율은 강남 아파트를 기준으로 할 때 대략 15에서 16이 되었던 셈이다. 그런데 국민은행 부동산 통계에 따르면 2014년 8월 현재 서울의 아파트 3.3제곱미터, 즉 한 평당 평균 가격은 1933만 3천 원이다. 대략 평당 이천만원으로 잡으면 삼십 평짜리 아파트 가격은 평균적으로 육억 원 정도 하는 셈이다. 대기업 신입사원의 연봉을 삼천만 원으로 잡으면 약 이십 년치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물론 이것은 서울시 전체 평균이므로 강남 지역에 있는 아파트라면 비율이 훨씬 높아서 20을 훌쩍 뛰어넘을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지난 한 세대 동안 학력자본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불평등이 얼마나 심해졌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 p.186

 

테헤란로 근처 구역을 담당하는 서초경찰서 앞에는 땡볕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보도에 간이의자까지 펼쳐놓은 채 집회 신고를 하러 온, 감히 무슨 일인지 말을 걸어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체격이 우람한 젊은이들의 긴 행렬이 눈에 띈다. 자동차 회사 앞 버스정류장에서 맞아떨어졌던 예측은 이번에도 틀리지 않는다. 차림새나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내 서글픈, 그러나 그다지 틀리지도 않는 본능으로 판단하건대 대기업의 정사원, 말하자면 와이셔츠에 넥타이 메고 출근하여 책상 앞에 앉아 일하는 이는 분명 아닐 이 젊은이들은 어디서 왔을까? 제아무리 컴퓨터 네트워크가 발전해도 마지막 순간의 교류는 사람의 손을 통해 이루어지듯, 사회를 움직이는 신경망의 말단부에서 관계자와 비관계자 사이에 출입금지의 벽을 둘러치는 역할을 그렇게 아마도 비정규직일 젊은이들이 맡고 있다. - p.195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 동상이 길목을 차지하고 있는 광화문 앞 광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어른거리는 국가주의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사실 서울 시내를 장식하는 상징적 조형물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 그리고 누가 만들 것인가는 매우 복합적인 정치경제학의 산물이다. (...) 과거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주로 억압적 국가에 대한 저항이었다면, 이제는 자본의 지배, 국가의 틀을 빌린 자본의 통제 혹은 자본의 언어로 말하는 국가권력에 맞서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지금까지 시간 구조를 뼈대로 삼아 형성된 서울의 공간적 구조를 구별 짓기와 추격의 과정,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환상과 실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민주주의의 문제로 귀착된다. - p.219

 

 

저자 역시 서울 토박이는 아니다. 부산에서 출생했고 서울에서 살다가 지금은 대전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저자에게 서울은 매력적인 문제의식을 촉발하는 강력한 소재였다. 처음 이 책은 저자 개인의 기억의 궤적으로 서울을 톺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것이 책 전체의 기저를 담당한다. 그리고 그것을 사회적 의미로 확장하고 톺아본다. 광화문, 노량진, 반포, 구로공단, 목동, 강남 등 익숙한 서울의 공간들이 우리 사회에서 가지고 있는 상징성에 대해 저자는 집요하게 사유한다.

 

 

그런데 이러한 치열한 탐구의 결과물임에도 불구하고, 제목이 저러함에도 불구하고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는 미묘하게 서울과 비서울이 공존한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구체적으로 언급해보면 이 책은 서울을 담은 서울 얘기와 서울에서 확장하는 다른 대상에 대한 이야기와 탈서울의 일반적 관념론들이 뒤섞여 있다. 가까이서 보면 이질적인 뒤섞임이 크게 보면 서로 조화를 이루어 서울을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읽다가 조금 당황스러움, 기막힘, 산만함을 느끼기도 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야 센은 인도 출신이니만큼 빈곤과 기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했다. 그가 인도와 중국 등의 사례를 분석한 끝에 내린 결론은 민주주의가 발전한 곳에서는 기근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었다. - p.86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 예전 파리의 지하철역에 무임 승차를 막기 위해 쓰여 있던 문구라고 한다. 로맹 가리는 이 문구를 발기부전에 빠진 노인의 고뇌를 그린 소설 제목으로 갖다 썼다. 그 경지가 얼마나 절박한 경지인지, 도대체 소설로까지 형상화할 만큼 중요한 것인지 알지 못하겠으나, 백번 양보하더라도 주거 공간이나 일터에 붙어 있는 출입금지 경고문에 비하면 뼈에 사무칠 정도의 아픔과 서글픔이 아니리라 짐작한다. 오래전 어느 글에서 읽었다. 한국사회에서 예식장과 러브호텔은 똑같은 기호를 갖고 있다고. 두 장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마치 우리 곁에 존재하지 않는 듯 웬만해선 드러내지 않으려 하는 그것. 바로 섹스가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곳이라는 점이다. ‘궁전’ ‘황실’ 따위의 이름에 동화 속 공주가 살 듯 한 성을 묘사한 외관이나 인테리어는 지난 세기 서울의 예식장이나 러브호텔에 즐겨 사용되었다. 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섹스 금지의 마법은 드디어 풀리고 남자와 여자의 성관계가 시작된다. 굳이 차이를 따진다면? 예식장이 합법과 축복의 장소로 상정되는 곳이라면, 러브호텔은 아마도 비합법적 관계 혹은 드러낼 수 없는 은밀함과 쑥스러움의 장소라는 것. 그러나 21세기 서울 어딘가에서 동화 속 세계를 묘사하는 외관과 인테리어를 한 예식장이나 모텔을 발견했다면 그것은 그 지역이 이른바 변두리라는 것을 증명해준다. 이제 예식장은 레드 카펫이 깔린 칸느 영화제 개막식장의 입구로 그 은유를 바꾸었다. 이름도 영어나 유럽어를 차용하거나 변형함으로써 결혼식을 쉽게 떠올리지 않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궁전예식장’이 백설공주의 성을 키치스럽게 모방했다면 ‘더 라움’은 대중적인 이미지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전략을 취한다. 들어갈 수 있음과 없음의 차이.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와보라’와 ‘어떻게든 따라가겠다’의 차이인 것이다. 안과 밖의 은유는 이렇든 그 ‘안’이 어떤 곳인가에 따라 위계로서 성립한다. 안과 밖의 은유, 그 위계의 은유가 작동하는 공간의 한편에서는 배제의 논리가, 그 반대편에서는 모방과 추격의 논리가 작용한다. 그리고 두 논리에 공통된 것은, 물신의 논리다. - p.175

 

대학 근처 네거리 뒷골목의 천변을 따라 ‘불나비’나 ‘로즈’ 따위의 이름에 유치한 조명을 갖춘 술집들, 우리가 ‘세느 강변’이라 불렀던 곳을 지나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세느 강변에는 술시중을 들 뿐 아니라 아마 성매매도 가능했을 ‘매미’라고 불리던 여종업원들이 있었다.

“매미가 왜 매미인 줄 아냐?”

“……”

“팔 매, 아름다울 미. 그러니까 아름다움을 파는 사람이란 뜻이거든. 꽤 운치 있는 이름 아니냐?”

늘 자신만만하던 친구가 들려준 얘기였다. 어느 날 그는 ‘세느 강변’에서 술을 마셨다. 식용 알코올을 증류한 뒤 첨가물을 섞은 조악한 양주였을지도 모른다. 그날따라 ‘매미’는 아이 우유 값이 필요하다며 친구에게 돈을 달라며 졸라댔다. 앳된 대학생 손님이 엉큼하게도 그녀의 가슴을 움켜쥔 순간 문득 뿌연 액체가 흘러나왔고, 그는 그 순간 갑자기 북받쳐 오르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 지폐 몇 장을 던지듯 뿌려놓고 달려 나왔다. - p.211

 

 

저자는 서울을 ‘우리의 삶을 운영하는 OS(운영체제)’라고 본다. 그리고 서울이 가진 주 정체성으로 물신과 배제, 추격과 모방, 능력주의 등을 언급한다. 이런 시선이 <서울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경제학자’가 쓴 사회학서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부분이다. 한편 이 책에선 세 가지 ‘도구로써의 서울’ 이 등장한다. 첫 번째는 소비, 주거, 여가, 노동, 종교, 대학, 사교육 등 우리 삶을 이해하는 수단으로써의 서울이다. 두 번째는 케인즈, 마르크스, 피케티 등과 연결되는 학문 이론의 사례로써의 서울이다. 마지막으로는 재개발, 양극화, 지대 등을 통해 한국을 바라보는 거울로써의 서울이다.

 

 

적당한 재미도 있고 어려운 구석도 전혀 없어 대부분의 이들이 쉽고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요즘 일반교양서에서 많이 보이고 있는 ‘에세이 같은’ 교양서 중 하나이다. 다만 읽기는 가벼웠으나 독후감이 영 상쾌하지 않다. 저자가 선택한 자본주의적 프레임들은 하나 같이 자본주의적 삶의 비애와 연결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저자가 실컷 늘어놓은 서울의 정치경제학이 가리키는 것은 ‘삶’이었다. 서울과 삶, 서울의 삶. 다만 그것이 반쪽 같은 구석은 있다. 살아가는 건 늘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이 늘 슬프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은 서울을 알고 서울을 살아가는 이에게 거울 놀이하는 듯한 즐거움을 주는 책이다. 거울 자체는 일면을 비추지면, 거울을 쥔 자가 움직이면 여러 면을 볼 수 있지 않은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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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되고 싶었던 아이 - 테오의 13일
로렌차 젠틸레 지음, 천지은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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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되고 싶었던 아이] 행복이 간절했던 꼬마의 비장했던 13

 

 

 

다섯 살 때 퇴근하신 어머니께서 작은 금붕어 두 마리가 담긴 작은 어항을 내 가슴에 안겨 주셨다. 강아지 까망이 이후로 살아 있는 동물 친구가 생겨 기뻐 날뛰던 나는 까망이와 놀듯 금붕어와 온 동네를 뛰놀기 위해 어항에서 금붕어들을 꺼냈다. 금붕어 두 마리가 손바닥 위에서 팔딱이는 걸 나는 금붕어도 나처럼 새 친구가 생겨 기분이 좋은지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금붕어들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최초로 목격하고 인지한 죽음이었다. 살생을 저지르면서 생명과 죽음을 배운 비참한 경험을 겪고서야, 나는 내가 살기 위해 수많은 살생을 저지르고 사랑하는 무수한 것들의 죽음을 겪는 인간이라는 비극적 존재임을 깨달았다. 내가 스스로 죽을 수 있고 오늘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시기, 사람들은 그런 나를 질풍노도의 중이병(사춘기)’라고 규정하였다. 아홉 살 때 폐렴에 걸린 적이 있다. 양육 경험이 부족하고 큰애바보였던 아버지 덕에 선천적으로 병약해 열 살을 넘기기 힘든 운명인지 오해하고 살아왔고, 그 즈음 하나같이 주인공들이 폐병으로 죽는 드라마와 위인전기에 심취했던 나는 희뿌옇게 변한 흉부 X-레이 사진을 보고 겁에 질려 소아과 바닥에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을 했다. “선생님, 제발 살려주세요. 아홉 살은 죽기엔 너무 어린 나이 같아요.” 평생 놀림권을 획득한 벽 차는 일화지만, 살면서 너무 힘들어 나쁜 마음을 먹을 때마다 그 기억이 번번이 나를 살게 하였다.

 

 

그런 개인적 경험 때문에 항상 의문을 품고 있는 것이 있다. 10세 이하의 건강한 아이가 자신의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게 실제로 가능한 것일까, 아니면 어른들의 욕심일까 하고 말이다. 내 인생의 영화 중에 전쟁을 겪고 있는 어린 아이가 죽음으로 행복을 이루는 작품이 있다. 많은 이들이 그 영화를 동심 파괴 영화이며,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자 판타지라고 했고 나 역시 그 의견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나는 어린 아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하는 것은 대부분 아이 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욕망이 설정한 픽션이거나, 전쟁 등 어른이 아이에게 나쁜 상황을 만들어줘 아이를 겉늙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88년생 작가의 소설 <바람이 되고 싶었던 아이>를 읽으면서도, 비교적 젊기에 순수하고 천진한 마음을 잘 그린 동화라고 느끼기보다 20대 후반도 완전한 어른의 눈을 갖는구나 하며 서글퍼졌다. ‘테오의 13이란 부제가 달린 <바람이 되고 싶었던 아이>는 나폴레옹을 만나기 위해 죽고자 하는 여섯 살 테오의 13일간의 자살준비기이다. 어린 아이가 주인공인 대부분의 문학 작품이 목표하는 것처럼 <바람이 되고 싶었던 아이>도 천진난만한 아이의 눈과 입을 통해 절로 웃음 짓게 하는 동시에 어른의 세계를 낯설게혹은 따갑게봄으로써 반성하게 만드는 책이다.

 

 

아마도 사람들이 저승에 대해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이것 때문인가 보다. 자기들이 사용한 나쁜 말들 때문에 지옥에 갈까 봐 두렵기 때문에 말이다. - p.50

 

"이 책 읽어 보셨어요?"하고 묻거나 "이 영화 보셨어요?"하고 물어보면 어른들은 안 봤다는 대답을 두 가지 방법으로 한다. 1. ", 오래 전에." 2. "뭔가 의미가 담긴 제목이었지." 두 가지 모두 그게 어떤 내용인지 잘 모른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렇게 다 알고 있는 척을 해서 자신은 더 이상 알고 싶은 것도 없고, 또 사람들이 다른 질문도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 p.77 

 

쉬는 시간에 아이들은 며칠 후에 있을 굴리엘모의 생일잔치 이야기를 했다. 평소엔 운동장에 나가서 노는 여자애들까지 모여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생일잔치에 갈 수 있을지 아직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폴레옹이 어디에 있는지 하느님이 신호를 보내 주면 나는 그를 만나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굴리엘모를 안심시키기 위해 생일잔치에 갈 수 있다고 대답했다. - p.103

 

 

이탈리아인인 주인공 테오는 여덟 살 난 남자 꼬마애이다. 테오의 고민은 엄마와 아빠가 너무 자주 싸워 온 가족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빠는 늘 테오에게 인생에서 승리하는 게 중요하며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하였다. 그래서 테오는 부모님과의 전투에서 승리해서 부모님을 서로 못 싸우게 만들어 행복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때마침 부모님께서 주신 생일 선물이 테오의 삶을 바꿨다. 나폴레옹에 관한 책이었는데 그는 모든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이란다. 테오는 부모님과의 전투에서 필승하기 위해 나폴레옹의 조언이 꼭 필요하였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죽은 사람이다. 그래서 나폴레옹을 만나겠다는 단 한 가지 열망 때문에 테오는 자살하기로 결심한다. <바람이 되고 싶었던 아이>는 하루하루 자살하는 방법과 나폴레옹이 있는 곳을 찾으며 묵묵히 자살을 준비하는 테오의 13일을 담은 책이다. 출판사의 연륜 만큼 외국문학을 선택하는 열린책들의 안목을 엿볼 수 있었던 책이었다. 수상 타이틀 하나 없던 신인 작가의 데뷔작 판권을 샀는데(두 번째로 판권을 사서 심지어 영역본보다 우리말 번역본이 먼저 나왔다) 번역 중에 작가가 자국에서 문학상을 탔다. 이탈리아 현대 문학을 중역이 아닌 전공자의 직역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원서엔 테오가 여섯 살로 설정되어 있는데 우리식 나이인 여덟 살로 바꾸는 등 섬세한 번역을 엿볼 수 있어 더욱 만족스러웠다.

 

 

언어와 정서 차이 상 우리나라에서 외서 번역시 제목을 바꾸는 일은 정말 흔한데, 부주의하게 서지사항에 있는 원제를 확인하지 않았다가 고생을 좀 하였다. 대체 왜 책 제목이 바람이 되고 싶었던 아이인지가 궁금한데 책을 두 번 읽어도 테오가 바람이 되고 싶다는 대목이 나오지 않았다. 멍청하면 사서 고생한다고 난독장애가 재발한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저자 홈페이지 뿐 아니라, 원서 출판사나 이탈리아 온라인 서점의 리뷰까지 힘겹게 읽으면서 책을 잘못 읽은 게 아니라는 확신을 얻어야 하였다. 편집자에게 직접 문의해야 확실한 이유를 알겠지만 아마 죽음에 대한 은유적 표현을 그렇게 한 게 아닐까 잠정적 결론을 내렸다. 지금 이 책을 읽고 있거나 후에 이 책을 읽을 독자가 부디 같은 생각과 같은 실수를 안 하길 빈다. 이 책의 원제는 그냥 ‘TEO’, 부제도 따로 없다. 테오의, 테오에 의한, 테오를 위한 책 그 자체이다. 열린책들의 책 소개글을 보고 몹시 기대했는데, 처음 읽을 땐 흩날리는 바람처럼 가볍고 평이해 적잖이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다시 읽었더니 문학상을 받을 만한 구석이 있구나 싶고 책에 대한 감정이 한결 나아졌다. 내내 촌철살인이고 미학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씩 멈칫거리게 하는 괜찮은 문장들이 있어 기분 좋게 완독할 수 있었다.

 

 

- 테오. 때로는 꿈속에서 답을 찾기도 한단다.

꿈은 진짜가 아니잖아요. 아빠가 그랬어요.”

테오, 꿈은 현실보다 더 진짜일 수도 있어. 왜냐하면 네 안에 있는 거니까. 네 거니까.

수지 아줌마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어떻게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꿈속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거지? 꿈속에서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고 또 계속 바뀌는데. 나는 로셀라 선생님의 얼굴과 똑같이 생긴 유령 꿈과 용이 혀로 불을 뿜는 꿈을 자주 꾼다. 어느 날 밤엔 전쟁터에서 누나와 적이 되어 싸우는 꿈을 꾼 적도 있다. 누나는 칼로 나를 찌르면서 말했다. “테오, 사랑하는 나의 동생.” 하지만 누나는 현실에서는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 아주 가끔만 빼고는. - p.106

 

우리 집의 행복을 되찾으려면 서둘러야 한다. 그러면 누나도 다시 행복해질 것이고, 나도 그럴 거다. 비록 그때가 오면 나는 보이지 않겠지만. 나는 다행히 바보가 아니라서 보이지 않게 되는 유일한 방법을 알고 있다. 바로 죽는 것이다. 갑자기 추위가 느껴졌다. 죽는다는 건 아이들이 아니라 노인들한테 일어나는 일이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어린 아이가 죽을 때는 하나의 가능성이 죽는 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더 자라지 못하고, 아이도 낳지 못하고, 할머니나 할아버지도 되지 못하는 게 어른들한테는 슬프게 느껴졌나 보다. 그렇지만 나는 어차피 결혼도 하고 싶지 않고 아이도 낳고 싶지 않다. 우리 반 여자아이들도 좋아하지 않고, 여자아이들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이불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공기를 마셨다. 창문으로 아침 햇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유령 퇴치용 램프를 껐다. 이제 무서움 따위는 없었다. 내 전투의 가장 어려운 한 걸음이 될 테지만, 이제 나는 죽음이 불행한 것이 아니며 그저 눈에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계속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임을 안다. - p.173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을 더 이상 보지 않을 수만 있다면 지금 죽어도 괜찮다는 테오. 좋은 말만 대충 하는 어린이 도서 속 나폴레옹에 대한 묘사를 철썩 같이 믿는 테오가, 구글에서 자살만 검색하지 않고 나폴레옹’(의 패배)에 대해서도 검색했더라면 어떤 반응이었을까. 그 나이 특유의 저돌적인 기세, 너무나 순수하고 간절한 바람 때문에 귀여우면서도 마음 한편이 짠하였다. 그리고 어른이 어린 아이의 시선을 흉내 낸 것임을 알면서도 테오가 수긍하지 못하는 어른의 이율배반적이거나 무책임한 모습들을 보며 뜨끔해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하였다. 한편 테오처럼 우리가 13일 동안 삶과 죽음에 대해, 그리고 가장 열망하는 한 가지 바람에 대해 몰두한다면 얼마만큼의 깨달음을 얻을까 궁금해졌다. 일기장처럼 하루하루 끊어져 있는 이 책은 그 소소한 전개와 구성처럼 결말도 아주 특별한 것은 없다. 다만 테오의 치기어린 질주에 브레이크 같은 결말이었고, 테오의 13일이 헛되지 않으면서 아무도 울지 않아도 되는 결말이어서 좋았다. 다 읽고 책을 덮으니 표지에서 뒷짐 진 나폴레옹과 테오의 뒤로 제제나 어린 왕자, 니콜라나 토토 같은 익숙한 아이들이 아른거리는 듯하였다. 반가워 손을 뻗으니 다시 두 사람만 남았다. 바람이었나 보다.



p.s.- 이번 열린책들의 우리말 번역본 표지는 Marco Cazzato의 원화를 커버하여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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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5-02-05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 나이로 10살쯤 되는건데.. 예를 들어 아빠 어디가 같은 데 나오는 애들 보면 테오가 전신적으로 너무 순진한 면은 있어요.

이섬 2015-02-05 18:43   좋아요 0 | URL
서평에도 썼지만 원서엔 여섯살 설정. 역자가 번역하면서 여덟살로 바꿨어요. 그 정도 나이면 충분히 가능한 미숙함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 이러나 저러나 테오가 어른들의 상상 속에 구현된 아이라고 느꼈습니다

CREBBP 2015-02-05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덞살이라고 하기엔... 구글링이랑 좀 성숙한 거 아닌가요 ㅎㅎㅎ 이래저래 안맞는 듯
 
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안녕하세요. 이섬입니다.

2월 1일이 되어 다시 돌아왔습니다.

주말 그런 거 저는 몰라요ㅋㅋ

 

2015년 1월~6월 알라딘 신간평가단 15기로 활동합니다.

담당분야는 인문/사회/과학/예술

알라딘의 비문학 고전, 인문, 역사, 사회과학, 과학, 예술/대중문화, 만화>교양만화 카테고리에 업데이트 되는 신간들을 반년 동안 매의 눈으로 모니터합니다.

 

그래서 제 서재에서는

매월 초(웬만하면 산뜻하게 1일 목표!!) 제가 고른 지난 달 신간 베스트 5를 페이퍼로

그 중에서 그룹원끼리 토의 끝에 고른 궁극의 신간 1권을 리뷰로

만나보실 수 있겠습니다. 반년 동안 잘 부탁드려요!! 북플 친구 대 환영!!

 

그럼 이섬이 고르고 고른

2015년 1월 인문/사회/과학/예술 신간 BEST 5 출발!!

매월 인문,사회,과학,예술에서 각각 한권씩 고르고

다섯번째 책은 비문학 고전, 역사, 만화>교양만화에서 한권을 고릅니다.

* 단, 읽은 책은 제외하였습니다. 이 리스트는 읽고 싶고 서평 쓰고 싶어 안달난 책 *

 

처음 페이퍼를 썼던 지난 달,

12월 신간들을 좀 더 치밀하게 검토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이번에는 최대한 샅샅이 목록을 훑어 보았습니다.

검토한 1월 신간은

인문 270↑+사회 330↑+과학 300↑+예술 200↑+다섯번째 책 선택을 위한 알파 검색

입니다. 그래도 혹여 제가 미처 못 본 1월 신간이 있다면!! 흑흑 너무 죄송합니다.ㅠㅠ

제가 날개 없는 천사거나 욕망 많은 변태면 무급으로 경향 분석까지 싹 해드릴텐데

일단은 주제도 출판사도 겹치지 않게 고르고 고른 다섯권의 신간 소개만 하겠습니다. ^-^

 

 

 

 

 

 

 

 

 

 

 

 

 

 

 

 

[인문] 아나키와 예술/앨런 앤틀리프/이학사/2015.01.20

아나키즘은 예술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보통 아나키즘은 정치사회학적으로 분석하기 마련인데 미학과 예술사의 관점에서 아나키즘이 끼친 영향력을 분석한 흥미로운 신간이 나왔습니다. 레어아이템입니다, 이건 읽어야 해!! 

 

[사회] 불평등의 창조/조이스 마커스/미지북스/2015.01.20

불평등은 사회과학의 영원한 탐구 주제입니다만 피케티 열풍이 몰아쳤던 작년을 겪었던 지금 자본론 등 더욱 이 주제에 대해 관심이 많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딱 맞춰 효자손 같은 시원한   신간이 나타났네요. 

 

[역사] 빵의 지구사/윌리엄 루벨/휴머니스트/2015.01.05 

식탁 위의 글로벌 히스토리, 음식의 지구사로 읽는 빵에 관한 모든 것. 이 한 문장만 봐도 침이 고이고 책을 만지고픈 생각이 드시지 않나요? 

 

 

 

 

 

 

 

 

 

 

 

 

 

[과학] 과학하고 앉아 있네/이정모外/동아시아/2015.01.20

지식도 스낵처럼 소비하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올 1월 조금만 출판계에 관심을 가졌던 독자라면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과 <과학하고 앉아 있네>라는 팟캐스트 기반 신간 소식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알라딘 신간평가단도 이 뜨거운 신간을 놓칠 수 없었습니다.

 

 [예술] 이중섭의 사랑, 가족/최석태,최혜경/디자인하우스/2015.01.06

ㄷㅜㅇㅅㅓㅂ, ㅈㅜㅇㅅㅓㅂ, 그 낙관만 봐도 가슴 뛰는 이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이자 생전에도 죽어서도 가난과 표절로 고통받는 이중섭 관련 신간이 나왔습니다. <이중섭의 사랑, 가족>은 2016년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미리 준비하는 마음으로 그가 가족들과 나눈 작은 그림과 글들을 모아, 평전과 작품집과 서간집 사이의 형태로 책을 구성하였습니다. 단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편지들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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