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광기 - 왜 예루살렘이 문제인가?
제임스 캐럴 지음, 박경선 옮김 / 동녘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예루살렘 광기]

예루살렘, 오오 이토록 성스러운 '유토피아'여

  

이스라엘 사람들과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코너에 몰려 있는 상태다. 하지만 그 코너는 그들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다. 그 코너의 한쪽 벽은 서구 문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반유대주의의 오랜 역사다. 기독교 신학은 (...) 유대인들은 유대 본토로부터 추방당하게 되어 있음(예루살렘으로부터의 유대인 배제)을 전제로 삼는다. (...) 1948년 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귀한에 관한 양가서은 이 같은 맥락에서 상당 부분 설명이 가능하다(가령 바티칸은 1994년까지 이 국가를 인정하지 않았다). (...)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대해 취해 온 정책을 비판하는 것이 반유대주의는 아니지만, 이스라엘이 늘 비난의 대상이 되는 현실을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 열쇠는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 대해 다수가 느끼는 본능적인 불편함에 있다. 나머지 한쪽 벽은 식민 정책이다. 유대인들이 여전히 오랜 과거의 역사에 휘둘리고 있듯, 아랍인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역사는 곧 인종차별의 역사다. 식민지의 민족들에 대한 유럽인들의 경멸 말이다. (...) 식민지 개척 세력이 예루살렘에 뿌려 놓은 유대-아랍 분쟁의 씨앗이 단단히 뿌리를 내려 버린 셈이다. (...) 그러나 그 제3자의 존재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인식도, 인정도 하지 않는다. (...) 나는 바로 그 제3자를 지목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3자를 밝혀낸 뒤에야 비로소 그 힘의 작용을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 저자 인터뷰

  

이 책의 저자 제임스 캐럴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다. 예수회 계열 대학에 진학했고 아예 신학교로 옮겨 석사학위를 받는 것으로 모자라 사제가 된다. 신앙인으로서 정점을 찍었다 생각한 순간 열의가 사라지고 혼란에 휩싸였다. 마음을 잡고 영적 성숙을 위해 떠난 예루살렘 성지순례는 그에게 엄청난 확신을 심어주었고, 이 경험으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사제직을 그만 뒀지만 신앙은 더욱 확고해졌다. 그리고 전업 작가가 된다. 그가 몰두하고, 그를 관통하는 두 가지 주제가 있다. 하나는 <아메리칸 레퀴엠><전쟁의 집>으로 대표되는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고, 다른 하나는 <콘티탄티누스의 칼><예루살렘 광기>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다. <예루살렘 광기>는 그렇게 작가 자신의 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한 책이다. 사사로운 동기였지만 그 완성품은 창대한 역작이다.

덤비는 책을 만날 때가 있다. 대개 읽는 이의 수준보다 높은 어려운(데다 두껍기까지 하면 더욱)’ 책들이 그렇다. 반가워하며 주먹 불끈 쥐고 전투 독서하며 책과 승패를 겨룬다. 이런 책 중 뭔지 모를 짜릿함에 휩싸여 읽는 내내 신나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 올해는 <예루살렘 광기>가 처음 만난 그런 책이었다. 역사, 종교, 사회학, 문화인류학 등 배경지식이 얼마나 있어야 이 책을 완전히 읽을 수 있을까 가늠이 되지 않을 만큼 저자의 서술은 종횡무진 한. 서로 중첩되어 이어진 10개의 장은 다시 한 가지 담론을 그린다. 본문 간의 중첩이 저자가 독자를 위해 마련한 유일한 배려이다. 흔히 대중교양서가 가진 친절함(차근차근 설명하며 떠먹여주는)<예루살렘 광기>엔 없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세 종교의 중요 성지인 예루살렘, 그를 둘러싼 인간의 탐욕과 분쟁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 되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가톨릭은 끊임없이 십자군 전쟁에 대해 속죄했지만 20년 전까지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았고, 부시는 그 불편한 단어인 십자군을 다시 입에 올리며 이스라엘과 미국의 긴밀한 유대와 미국의 중동 개입을 대놓고 표를 내기 시작하였다. 빈 라덴 사후 이슬람근본주의 테러리스트들은 예루살렘으로 집결한다. 미국의 출연으로 이 미친 성전의 판은 오히려 더 커졌다. 저자는 예루살렘이 서구 역사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이라 표현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둘러싼 광기의 기원을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 제임스 캐럴은 예루살렘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본성과 종교의 본질을 논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p.11) 이 책은 예루살렘이라는 실제 도시와 그 도시가 던져 주는 묵시종말론적 환상 간의 치명적 순환 고리에 관한 책이다. 다시 말해, 두 예루살렘에 관한 책이다. 땅의 예루살렘과 상상 속 예루살렘, 그러한 이중성은 기독교의 예루살렘과 유대교의 예루살렘, 유럽의 예루살렘과 이슬람의 예루살렘, 이스라엘의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그리고 언덕 위 도시라는 실제 지리상의 예루살렘과 메시아 국가라는 이상으로서의 예루살렘 간 긴장을 통해 한층 두드러진다. (p.13) 수 세기에 걸쳐 환상 속의 그 도시가 현실 속 도시를 만들어 내고, 그 현실 속 도시는 다시 환상 속 도시를 만들어 왔다. 결론은 전쟁이다. 지난 2000년간, 예루살렘의 지배 세력은 열한 차례나 거듭 전복됐고, 거의 모든 경우 극단적 폭력을 수반했으며 그 전면에는 늘 종교가 있었다. 이 책은 그러한 전쟁 이야기, 즉 신성한 땅이 전쟁터가 되는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토마스 무어가 주창한 유토피아는 모든 인류가 꿈꾸는 이상향이지만 실제로 존재할 수 없는 모순의 공간이다. 이러한 유토피아의 속성과 가장 가까운 곳이 예루살렘이 아닐까 싶다. 예루살렘은 4대 문명 중 둘이 속한 비옥한 초승달 지역안에 있는 도시다. 유일신이 말한 약속의 땅이었고, 예수의 주 활동지였으며, 가장 오래된 이슬람사원이 있는 탐나고 탐나는 곳이다. 제임스 캐럴은 종교의 본질을 폭력과 모순으로 규정한다. 신석기혁명으로 인류는 수렵채집 생활을 멈춘다. 그러나 그때 맛본, 살육의 집단흥분이 DNA에 각인되었다. 인류는 이를 종교의식을 치를 때 희생물을 요구하는 희생제의라는 방법으로 타협점을 찾는다. 문제는 이 희생제의를 통해 폭력을 거부하는 종교의 중심에 폭력이 있는 모순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바탕부터 모순이니 교리와 신앙이 비이성적인 것은 당연하다.

   

(pp.268~269) 하느님은 막강한 통치자에서 친구로 진화했다. 한 종족에게만 충실한 하느님이 아니라, 도처의 모든 인간에게 충실한 친구인 단일한 하느님이 된 것이다. 따라서 성서는 상대적 약자의 관점에서 풀어낸 사회적 서사로, 스스로 한 민족을 창조해내고 그 민족에게 자기비판의 원칙 즉 예언을 주었다. 성서는 희생자가 된 민족 스스로도 타인을 희생양 삼으려는 충동을 지니고 있음을 경고했다. 폭력의 충동을 느꼈던 성서 속 하느님이 폭력을 거부했다. 이 하느님은 홍수로 지구를 한차례 멸망시킨 뒤 이렇게 맹세했다. “다시는 아니하리라.” 당시 유럽인들은 중세시대 이래 문화적, 경제적, 종교적 대변혁을 또 한 차례 겪었으나, 이는 다시는 아니하리라라는 서사의 번복이었다. 우리는 기독교가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규정해 유대교의 부정적 이미지에 대비시키고, 유럽 대륙이 외부의 적인 이슬람교에 맞서 단일화된 문화로 결집했음을 지켜보았다. 인간 본성이 무엇이든, “네 적을 사랑하라라는 평화운동에서 출발한 종교가 또다시 전쟁의 후원자가 되었다. 천년왕국을 향한 열병에서 수많은 운동이 생겨났고, 그중 십자군운동과 그 정신이 가장 결정적이었다. 라틴인과 잔틴인 사이뿐 아니라 라틴인과 아랍인 간의 수많은 무력 충돌로 대대적인 변화가 촉발되었다.

  

그래서 팽팽하게 대립하는 각 종교간 이해관계에서 어느 누구도 승자도 선도 있을 수 없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은 이스라엘을 두고 서로 주인임을 자처하는 동시에 자신의 피해를 부각하지만 세 종교 모두 역사적으로 과오가 있다. <예루살렘 광기>는 각 시대별로, 종교별로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과 그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나열하고 분석한다. 이 책의 가장 큰 성과는 현재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 대한 지배적 관점이 얼마나 기독교 편향적인지 밝힘으로서 독자들이 다시 생각하도록 돕는 것이다.

 

<예루살렘 광기>를 관통하는 흥미로운 개념은 성서 <요한묵시록(요한계시록)>에 입각한 묵시종말론적 사고. <요한묵시록>은 신구약을 통틀어 가장 논란이 되는 성서이다. 인류의 종말과 구원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석을 놓고 수많은 교파가 갈려 이단전쟁을 낳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학자나 성직자가 조심스럽고 보수적으로 다룬다. 그러면서 신자들을 단속하는 각인기제로 강력하고 요긴하게 사용해왔다. 반유대주의의 기저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을 둘러싼 세 종교의 전쟁의 표현만 다를 뿐, 결국 묵시종말론적 사고에 입각한 성전이다. 누가 극단적 공포를 견디고 유일신의 선택을 받는지, 신의 도시의 주인인지를 놓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다.

세계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다. 이 세 종교를 통해 인간의 본성과 종교의 본질을 규정한다는 것은 심한 비약의 위험한 시도일 수 있다. 그러나 네 대륙(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아메리카)의 이해관계가 얽힌 유일 무일한 갈등이고, 제법 설득력 있는 분석이다. 결론부에서 저자는 좋은 종교에 대해 고민한다. 그의 평생을 지배하는 질문이기도 하지만 종교가 있는 이라면 누구나 생각하게 되는 문제이다. 저자의 명민한 통찰력을 통해 다각적으로 예루살렘의 특수성을 배울 수 있었고, 세계를 보는 눈을 좀 더 키울 수 있었다. 색인과 주석 등까지 포함해서 660쪽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고 꽤 어려운 편인데도 피곤하지 않고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오타도 없고 바르게 용어 표현한 바른 역자와 편집자의 꼼꼼한 작업 덕인 것 같다. 빨간 표지처럼, 한여름 더위가 싹 가실만큼 빠져들었던 강렬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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