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인문학 2 - 섬뜩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언캐니의 세계 이미지 인문학 2
진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미지 인문학2] 섬뜩한 아름다움에 몰두하는 포스트디지털리언

 

<이미지 인문학1>을 읽으며 2권이 몹시 궁금하였다. 1권의 본문을 읽고 예고된 2권의 목차를 보며 1권은 총론적 성격이 강하며 저자가 포착하는 ‘이미지 인문학’의 본질은 2권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1권을 통해 미학에 대한 기초 소양 유무와 관계없이 포스트디지털시대의 예술을 읽는 최소한의 눈과 힘을 기를 수 있다. 그를 바탕으로 도전한 2권에서 독자들은 본격적으로 현시대를 이끄는 포스트디지털 이미지와 맞닥뜨린다. ‘섬뜩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언캐니의 세계’라는 부제처럼 <이미지 인문학2>의 키워드는 ‘푼크툼’과 ‘언캐니’이다.

 

 

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함으로써 사진의 존재론에 본질적 변화가 생겼다. 그 변화는 ‘지표성의 상실’로 요약된다. 롤랑 바르트는 <밝은 방>에서 사진의 본질을 지표성에서 찾았다. 사진의 지시대상은 “대물렌즈 앞에 놓이는 필연적으로 실재적인 사물”이며, “그것이 없이는 사진도 없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디지털 카메라는 이 사진의 존재론을 위협한다. 장 보드리야르의 말대로 “사진은 사라짐의 순간을 보존하나 합성 이미지에서 실재는 이미 사라져”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위기에 처한 것은 바르트가 사진의 본질로 제시한 ‘푼크툼’의 개념이다. <카메라 루시다>에서 바르트가 내린 푼크툼의 정의를 다시 인용해보자. “이 자국, 이 상처들은 점이다. 스투디움을 방해하러 오는 이 두 번 째 요소를 나는 푼크툼이라 부르겠다. 왜냐하면 그것은 찌름, 작은 구멍, 작은 반점, 작은 흠, 주사위 던지기이기 때문이다. 사진의 푼크툼은 그 자체가 나를 찌르는 (또한 나를 상처 입히고 괴롭히는) 우연이다.” 푼크툼은 “절대적 특수자”. “최고의 우발성”으로서 발생하는 사건이다. - pp.37~38

 

 

정신분석학에서 ‘언캐니’는 “그동안 억압되어왔던 것이 통합된 정체성이나 미적 규범이나 사회질서 등을 파열시키면서 회귀”하는 것을 볼 때 생기는 심리적 분위기로 정의된다. (...) ‘언캐니’는 독일어 ‘운하임리히’의 역어로, 주지하다시피 심리학자 에른스트 옌치가 도입한 개념이다. 그는 언캐니의 감정을 “살아 있는 듯한 존재가 정말로 살아 있는지, 혹은 그 반대로 생명 없는 대상이 실은 살아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운 상태”로 정의했다. 옌치와 달리 프로이트는 (...) 유아기의 거세 환상은 성장과정에서 억압되고 망각되지만, 삶에서 경험하는 여러 사건을 계기로 끝없이 되돌아온다. 번번이 되돌아오는 이 환상은 원래 낯익은 것이지만 동시에 망각된 것이기에 의식에는 낯설게 느껴진다. 바로 여기서 ‘낯익은 낯섦’이라는 언캐니의 정의가 성립하게 된다. “언캐니는 억압에 의해 낯선 것이 되어버렸으나 원래는 낯익던 현상이 되살아나는 것과 관련된다. 억압되었던 것이 되살아나면서 주체는 불안해진다. 주체가 이해하기 힘든 모호한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언캐니는 이 불안한 모호함 때문에 생기는 직접적 결과다.” - pp.140~141

 

 

진중권은 포스트디지털 시대는 기본적으로 초현실주의의 맥락에서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초현실주의를 후기 프로이트 이론 관점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요컨대 디지털 카메라로 구현된 포스트디지털 시대의 이미지들은 사진의 본질인 지표성을 상실함으로서 존재의 해방성이 증폭되고 그로 인해 모호하고 우발적이며 특수한 ‘푼크툼’의 성질을 가진다. 그래서 존재하면서 존재하는 자신을 스스로 해치며 의미든 정체성이든 확장시킨다. 이는 기존의 기술을 계승하면서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구축하면서, 낯익으면서 낯선 ‘언캐니’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들 이미지를 보는 현세대인들이 느끼는 공통적인 감정을 진중권은 ‘세계감정’이란 용어로 표현하는데, ‘푼크툼’과 ‘언캐니’의 속성 때문에 포스트디지털 이미지에 대한 일차적 ‘세계감정’은 거부감과 공포감이다. 그럼에도 이 섬뜩함에 아름다움을 찾으며 빠져드려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푼크툼’와 ‘언캐니’의 개념을 접하며 처음 떠올린 것은 연꽃사진 사건과 쿠사마 야요이였다. 전자는 우리나라에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기 시작하던 2003년, 디지털카메라 커뮤니티였던 디시인사이드에서 유행한 연밥사진 합성이었다. 쿠사마 야요이는 강박과 환영이란 주제로 망과 점에 집착한, 원으로 가득한 미술 작품만 발표하는 아티스트이다. 흔한 식물에 지나지 않은 연밥의 알알이 박혀 있는 속성이 다른 이미지와 합성되며 혐오와 희열을 불러일으키며 엽기문화를 열었다. 정신병원에 사는 천재 예술가란 별명을 가진 쿠사마 야요이는 유년시절 트라우마로 인한 지독한 강박증을 앓고 있는 작가인데 자기치유와 강박표출이 얽혀 독특한 미적 세계를 구축하였다. 전자는 해프닝으로 끝났고 후자는 예술이 되었지만 평범한 것을 낯설게 하고 혐오와 쾌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는 공통점이 있다.

 

 

과학에서는 언캐니한 감정의 원인으로 다양한 설명이 제시되었다. 인간인 줄 알았던 대상에서 기대하는 행동이 나오지 않을 경우(기대 위반), 그 대상을 생명의 범주에 집어넣을지 말지 혼란스러운 경우(정체성의 역설), 그 대상이 건강한 생체와 달리 어딘지 유전적으로 병약해 보이는 경우(진화 미학), 그 대상이 감염 위험이 있는 병약한 것으로 보일 경우(혐오 이론), 그 대상이 죽음에 대한 본능적 공포를 불러일으켜 내면의 방어기제를 작동시키는 경우(공포 관리) 등. 그런가 하면 조커의 웃는 입과 실제 표정의 괴리나 더빙된 영화의 입 모양과 음성처럼, 인간행동을 구성하는 다차원의 신호들이 미묘한 부조화를 이룰 때 언캐니 효과가 발생한다는 설명도 있다. - p.97

 

 

현대인이 점점 갈수록 무엇이든 좀 더 자극적인 것을 찾는 것도 ‘푼크툼’과 ‘언캐니’로 설명할 수 있다. 진중권이 2권에서 소개하는 ‘푼크툼’과 ‘언캐니’의 대표적인 작가들로는 강형구, 키스 코팅엄, 매튜 바니, 오론 캐츠 그룹, 패트리샤 파치니니 등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미학을 구축하기 위해 진중권이 2권에서 소개하는 작가들의 이미지는 그림을 사진으로 다시 CGI로 만들거나, 수많은 사진을 합성한 후 다시 컴퓨터그래픽화하거나, 인간과 동물의 합성을 주력으로 하거나 배양육을 미술의 영역으로 가져오는 등 다채로운 방식으로 관람자로 하여금 이질감을 느끼게 한다. 이 섬뜩한 충격감을 구현하기 위해 상당히 수고스러운 일이 필요함에도 마다 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작업 방식 자체가 창조적 유희로서 기능한다.

 

 

(로봇 영역에서 논의되는) 일본과 달리 미국에서는 ‘언캐니 밸리’에 관한 논의가 주로 CGI를 둘러싸고 이루어진다. 그것은 로봇과 애니메이션에서 미국과 일본의 취향이 엇갈리기 때문이다. ‘동반자 로봇’에 집착하는 일본에서는 로봇에 되도록 인간에 가까운 외양을 부여하려 하나, ‘기능성 로봇’에 주력하는 미국의 로봇 산업은 인간과 똑같은 외관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애니메이션에서는 사정이 뒤집힌다. 일본의 ‘아니메’가 초당 7~8프레임의 움직이는 만화로 남으려 한다면, 미국의 애니메이션은 아날로그 시절부터 실사에 가까운 초당 24프레임의 사실주의를 지향해왔다. 이렇게 만화를 실사에 가깝게 만들다 보니 로봇이 아닌 CG의 영역에서 ‘언캐니 밸리’의 문제를 떠안게 되는 것이다. - p.109

 

 

일본의 로봇 공학자 모리 마사히로는 인간이 인간을 닮을수록 호감과 친밀감을 느끼지만 일정 수준 이상 닮으면 섬뜩함을 느끼며 긍정적인 감정이 급격히 떨어지는 현상을 발견하고 이를 ‘언캐니 밸리’라는 함수로 명명한다. <이미지 인문학2>의 후반부는 로봇과 CG 등 인간, 실제와 닮은 무언가들의 속성에 깃든 ‘언캐니’함에 초점을 맞춘다. 이는 인공성과 동물성, 생명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고민으로 확장한다. <이미지 인문학2>의 초반부는 1권도 그러했듯 디지털 이미지의 본질부터 정의하기 위해 사진 미학이 리얼리즘에서 포토리얼리즘으로 다시 합성리얼리즘으로 초점이 옮겨감을 포착한다. 그리고 후반부로 자연스럽게 화제를 연결해 합성리얼리즘의 재능과 공포적 속성이 건드리는 철학과 과학을 바라본다. 

 

요컨대 진중권의 ‘이미지 인문학’은 갑자기 튀어나온 생소한 개념이라기보다, 인문학적 관점으로 예술을 분석하는 미학의 속성을 십분 발휘하여 미술을 보다 풍부하게 감상하고 최신 미술의 경향을 정의하는 한 기제라고 볼 수 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다는 창조강박,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하는 시대에 합성에의 탐닉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것이 혐오·공포·위화감 등을 기저에 깐 유희라는 점에서 재미있다. 진중권의 분석에서 결국 우리의 ‘언캐니’한 감정은 존재상실의 위기의식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합성이 거듭되면 원본은 쉽게 망각된다. 혹은 그 본질을 흩트리고 해체한다. 그 대상은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어쩌면 인간이 대체될 수 있고 존재감을 상실하는 ‘사라짐’의 공포와 싸우기 위해, 그래서 살아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이 기기묘묘한 이미지들을 모순적으로 탐닉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