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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나무의 파수꾼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3월
평점 :
일본 추리소설계를 대표하는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중의 한 명인 히가시노 게이고(ひがしの けい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소재를 자유자재로 변주하는 능력을 가진 탁월한 이야기꾼' 이라는 온라인의 작가 소개에 공감하게 되는 작가다. 그의 책을 안 읽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권만 읽은 사람은 드물 거라는 이야기도 하게 된다. 옆지기의 경우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한 권을 무심코 읽고 나서는 작가의 책을 계속 찾아읽게 되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일드를 자주 찾아보았던 나는 히가시노 게이고 원작의 드라마나 영화들을 꽤 좋아했다. 덕분에 신작이 나오면 우리는 늘 찾아읽게 된다.

녹나무의 파수꾼
히가시노 게이고
소미미디어
어머니와 유부남의 불륜으로 태어난 평범하지 않은 출생,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자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지만 그다지 여유롭지는 않았던 유청소년기를 지나온 주인공 레이토. 독립한 후에는 웨이터를 거쳐 직장에 취직하였으나 해고된 후, 절도죄로 감옥에 가게 생겼다. 이야기는 이런 레이토가 유치장에서 나오는 대신 ‘월향신사’라는 곳의 ‘녹나무’를 지키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초판 한정의 즐거움.면지의 작가 싸인을 흐믓하게 바라보며 책장을 넘겨 본격적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본다.

이 곳의 녹나무는 이른바 영험한 나무로,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러 온다. 녹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쉽게 떠오르지는 않았느나 표지의 일러스트를 보며 상상해본다. 반짝반짝 빛나는 점들이 신비롭게 느껴지는 표지다.
기원(祈願) 이 아닌 기념(祈念)
“아까부터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왜 기념(祈念)이라고 하지? 소원을 비는 거라면 보통은 기원(祈願)이라고 하잖아.”
레이토에게 녹나무를 지키는 일은 처음에는 간단해보였으나 녹나무에 '기념' 이라는 것을 하는 이들을 관리하면서 궁금증이 쌓여가게 된다. 기도가 아닌 '기념' 이라고 표현되는 어떤 것. 그들의 태도에는 무언가 석연찮은 것이 있다. '기념' 이라는 것이 어떤 일인지 레이토에게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덕분에 독자들도 주인공과 함께 그 비밀을 궁금해할 수 밖에 없다. 그믐날과 보름날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부터 '기념' 을 하는 이들의 혈연적 관계 등 레이토가 하나씩 깨달아가는 사실들을 통해 함께 추리해보게 된다. 작가의 전작들에서 보여지는 흡입력 있는 전개와 교묘히 배치되어 있는 소재, 인물관계들은 이 소설에서도 여전하다.
주인공의 성장, 변화
녹나무의 비밀을 밝히는 것에 더하여 불행해보이는 가정환경에서 자라난 주인공, 집도 돈도 꿈도 전망도 없다던 그의 성장 또한 이 소설의 또 다른 감상포인트다. 외부의 평가로도, 스스로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레이토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말이다. 그의 성장에는 녹나무 파수꾼을 물려준 이모, 그리고 녹나무에 기념을 하러 온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자양분이 된다.
" '결함 있는 기계는 아무리 수리해도 또 고장이 난다. 그 녀석도 마찬가지로 결함품이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그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도록 해.”
뭔가가 굴러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레이토는 새삼 느꼈다.그 뭔가를 '인생의 톱니바퀴' 라고 해버리는 건 약간 과장일지도 모르지만.
- p261
특히 무뚝뚝한 말로 꾸중을 하는 듯 하지만 레이토를 챙기는 이모, 치후네의 말들은 레이토의 마음을 움직인다. 기회가 없어 배우지 못했던 것들을 배워가고, 경험하고 스스로의 생각을 쌓아나간다. '결함품' 이라고까지 비유당했던 레이토가 조금씩 움츠린 어깨를 펴고, 스스로의 생각을 표현하기 시작할 때 나는 전율을 느꼈다.
레이토의 삶의 방식에 참견은 하지 않겠어요. 그녀는 감정을 억누르는 목소리로 조용히 말했다. 다만 한 가지 충고를 하자면,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인간이라는 건 없습니다. 어디에도 없어요. 어떤 사람이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만은 똑똑히 기억해두도록 하세요.
- p476
어느 틈에 이렇게 제몫을 해내는 사람으로 커버렸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이 정도면 녹나무를 맡겨도 괜찮겠구나 하고.
- p527
그런 말 말고 상상을 해보도록 하세요. 이 세상은 피라미드고 사람은 그것을 형성하는 돌멩이 하나하나예요. 피라미드 전체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나는 지금 어느 위치에 있는지 상상하는 거예요. 모든 것은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위를 향하는 것도 아래로 떨어지는 것도 레이토 하기 나름, 레이토의 자유예요
- p530
녹나무, 그리고 사람들. 다시 녹나무 파수꾼
책을 펼치며 상상했던 모습은 아니었지만 분명 녹나무의 기적은 존재했다. 면지에 작가가 써놓은 힌트처럼 옆사람과 서로 마음을 열고 만날 수 있는 것도 가능할 정도로.
언어의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생각 모두를 언어만으로 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녹나무에게 맡기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후략>
- p373
그러나 나는 녹나무의 기적보다도 사람들이 주고 받는 선한 영향력에 더욱 눈길이 갔다. 레이토는 그녀와 함께 있으면 전부 다 공부가 된다며 치후네에게 감사를 전한다. 그러나 사람의 삶은 서로 주고 받는 것이 아니던가. 레이토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치후네도 레이토를 통하여 힘을 얻는다. 치후네는 녹나무의 기적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해져 오는 게 있다는 걸(p549)' 깨닫는다.
새삼스럽게 이 역할이, 녹나무 파수꾼이라는 이 일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 깨달았다.
나아가 이런 일을 맡겨준 치후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p412
이번 작품도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처럼 살인사건이나 탐정이 등장하지 않는 추리소설이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에서 처럼 작가가 그동안 일관되게 추구해온 인간 내면에 잠재한 선의에 대한 믿음은 이번 작품에서도 그 빛을 발하는 듯 했다. 범인을 찾는 추리가 아니더라도 녹나무의 진실, 등장인물들의 비밀 등 추리해볼만한 요소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무심코 지나쳤던 소재나 등장인물들의 상태, 배경들이 교묘히 연결되기 시작하면서 감탄을 불러일으키며 더욱 흡인력을 발휘했다. 레이토와 치후네 외의 다른 인물들의 이야기들도 살아 움직인다.
녹나무라는 배경 때문일까. 개인적으로 영화보다는 애니메이션으로 나오면 더욱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