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해변의 카프카 (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춘미 옮김 / 문학사상 / 200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In dreams begin the responsibilities.(상권, p.256)
꿈 속에서 책임은 시작된다.
거꾸로 말하면 상상력이 없는 곳에서 책임은 발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무라 카프카-나카타 사토루를 축으로 한 두 개지만 하나인 이야기. 주인공이 둘인 이야기는 수없이 많지만, 다른 점은 이들이 공시적으로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잠'을 통해 같은 꿈을 공유하며, 그 안에서는 하나가 된다, 아니 그렇게 짐작해 볼 수 있다.
15세의 '오이디푸스' 다무라 카프카는 신탁이 아닌 아버지의 저주를 피해 모험을 떠나지만, 이 21세기의 카프카 역시 정해진 운명을 피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딱히 그렇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은, 저주의 현실화가 구체적 증명은 불가한, 주인공들의 심증만으로 확신하게 되는 모호한 실현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오이디푸스는 눈알을 파내고 죽음으로써 자신의 비극적 현실을 극복하지 못했지만 우리의 다무라 카프카군은 세계의 끝에 도달하기 위해, 진짜 세계에서 가장 터푸한 15세 소년이 되어 또다른 세계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한편 전시에 집단 혼수상태에 빠진 후로 기억의 일부를 잃고, 다무라 카프카군과 정신의 일부를 공유하게 된 것으로 짐작되는 나카타 사토루는 인간의 언어에 서투른 대신 고양이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기이한 노인이다. 문명화 이전의 순수한 심성과, 초능력을 지닌 나카타는 꿈의 세계에서 하드코어적으로 고양이를 살해하는 조니 워커-다무라 고이치를 죽이고, 떠나본 적이 없는 도쿄시 나카노 구를 벗어나 정신적 자아인 다무라 카프카를 찾아 고무라 도서관을 향해 여행을 시작한다.
'사람과 사람을 잇는 관계의 고리' 속에서 다무라 고이치(조니 워커)-사에키 상- 다무라 카프카-나카노 사토루의 관계성이 드러나고, 사쿠라-오시마-호시노는 이들이 현실로부터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붙잡아주는 끈의 역할을 한다. 폴 오스터의 『리바이어던』에서 느꼈던 '알고보니 이 사람은 저 사람을 알고, 저 사람은 이 사람을 알고, 결국 세상을 구성하는 사람들은 잘 짜여진 게임판의 말들과 같은' 필연적 관계에 놓여있음을 느끼게 한다.
이 소설속에는 다양한 공간들이 설정되어 있다. 먼저 현실의 다무라 카프카와 그의 아버지 다무라 고이치의 집. 이 곳은 어머니와 누이가 사라져버리고, 아버지와 소통이 부재한 폐쇄적 공간이다. 다무라 카프카는 저주를 피해 공간 이동을 하지만, 고무라 도서관 또한 응축된 감정들이 고여 표출되지 못하는 소용돌이 같은 곳이다. 오시마 상이 안내해주는 숲 속의 집과 그 숲에서 연결되는 비현실계의 공간 또한 폐쇄적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됴쿄시 나카노 구도 나카타에겐 보이지 않는 경계로 둘러쳐진 한정된 공간이었다. 이들은 모두 폐쇄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이동을 하지만, 옮겨간 곳 또한 열려진 곳은 아니다. 마치 하나의 큐브에서 또다른 큐브로 이동한 듯한 답답한 느낌이다. 그래서 하루키가 말하는 '세계의 끝'이란 그 단어가 내포한 무한의 이미지 보다는 그 끝에 실제로 낭떠러지가 있을 것만 같은 막막함이 있다.
이 소설은 특이한 구성방식, 초현실적 인물들 뿐만 아니라 감각적인 문장들로 우리들의 다양한 지적 욕구들을 채워준다. 책을 읽고나니 무미건조한 일상에서 환상특급열차를 타고 이상한 세계에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