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론 [唯名論, nominalism]

명목론()이라고도 한다. 실재론()과 대립한다. 실재하는 것은 개체()뿐으로, 예를 들면 빨강이라고 하는 보편개념은 많은 빨간 것을 갖는 빨강이라는 공통 성질에 대하여 주어진 말, 혹은 기호로서, 빨간 것을 떠나서 빨강이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극단적인 유명론은 이 명사를 주어진 근거로 하여 사물간의 유사성()이라는 것마저 부정한다. 실재론·개념론과 함께 유럽 중세()의 보편논쟁으로 일파()를 이루었다. 11세기 후반기에 로스켈리누스가 이 입장을 대표했으며, 14세기에는 W.오컴이 체계적 이론을 전개하였다.

17세기 때 영국의 경험론 속에서 부활하였는데 T.홉스가 그 대표자이다. 중세에서는 플라톤적 실재론과 결부하였던 정통신학()에 위배되는 것이라 하여 위험사상시되었고, 명백히 유물론적 색채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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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福音主義, evangelicalism]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입장들이 있다. ① 가톨릭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입장, 즉 종교개혁자 특히, M.루터가 말한, “인간은 신앙에 의해서만 의롭다 함을 입는다”는 주장, 즉 이신득의론()이 있다. ② 근대 자유주의신학에 대항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수태와 십자가 및 예수 그리스도부활을 믿는 신앙의 입장이다. 즉, 예수가 가르친 ‘하느님의 나라(천국)’의 복음보다는 그것과 완전히 격리된 관계에서는 아니나 바울로가 주장하는 속죄()와 부활의 신앙을 강조하는 입장, ③ 성서를 지나치게 중시하는 성서주의의 입장, ④ 성서를 중시함과 동시에 성령에 의한 신앙의 체험을 강조하는 체험주의를 가리키는 입장, ⑤ 성서의 신학적 탐구 ·해명보다는 오히려 실제 전도를 중시하는 경우 등이다.

이상과 같이 복음주의는 그것을 주창하는 자의 입장에 따라 다소 그 의미가 다르지만 모두 성서에서 가르치는 복음에 중점을 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아무리 복음주의 입장에 있다고 자처하는 현대의 교파들에도 엄격히 따지고 보면 비()복음적 요소가 다분히 남아 있음을 보게 된다. 즉 율법주의 ·정령숭배사상 등의 요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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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컴 [Ockham, William of, 1285?~1349]

 잉글랜드 오컴 출생. 젊어서는 프란체스코회 수도사가 되고, 옥스퍼드에서 배운 뒤, 그 곳과 파리에서 강의를 하였으나, 이단이라는 혐의를 받고, 몇 가지 명제()는 유죄 선고를 받아, 교황 요하네스 2세와 알력이 있었다. 그는 논리학과 인식론()에서 뛰어나며, 후세에 끼친 영향도 크다.

그의 입장은 유명론()으로서, 중세의 사변신학() 붕괴기에 근세의 경험론적 사상을 준비하였다. 그에 따르면, 인식의 원천은 개체에 관한 직관표상(:notitia intuitiva)으로, 개체가 실재()이고, 보편자()는 실재가 아니며, 또한 개체에 내재하는 실재물도 아니다. 보편자는 정신의 구성물이며, 정신 속에서의 개념으로서, 또는 말로서만 존재하고, 정신 속에서의 보편자의 존재는, 정신에 의하여 사고되는 것으로서의 존재이다. 보편자가 다수의 개()에 관하여 술어()가 되는 것은, 보편자가 다수의 개의 기호로서 이들을 대표하는 것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었는데, 이와 같은 생각은 근세의 영국 경험론자가 답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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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무스 [Erasmus, Desiderius, 1469.10.27~1536.7.12]

 

로테르담 출생. 사생아로 태어나 9세경부터 수도원에서 양육되어, 20세경에 정식으로 수도사()로서의 서원()을 하였다. 1493년부터 캄브레의 주교 베르고프 존(Berg-op-Zoon)의 비서가 되고, 그의 원조를 받아 1495년부터 파리대학에서 신학을 연구하였으나, 이 시절부터 경화()된 가톨릭 교회 제도에 대하여 서서히 비판적인 경향을 띠었다. 주로 고전 라틴문예연구에 몰두하고, 생활을 위하여 영국 귀족의 아들에게 라틴어의 개인교수를 하며, 1499년에는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T.모어, J.콜렛 등의 인문학자와 알게 되었다.

특히 콜렛의 <바오로 서한> 연구에 자극을 받아 이듬해 파리로 돌아오자 그리스어 공부를 다시 시작하면서 성서연구에 몰두하였다. 그 성과는 《그리스도교 전사필휴()》에 제시되었다. 1506년에는 이탈리아의 각 도시를 역방()하였으며, 1509년에 이탈리아에서 영국으로 여행하던 중에 착상하였고, 런던의 모어의 집에서 단숨에 써낸 것이 유명한 희문() 《우신예찬() Encomium Moriae(Laus Stultitae)》(1511)이다. 이 내용은 ‘어리석음의 여신()’이 세상에는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 많은가를 열거하며 자랑을 늘어놓는 형식을 취하여, 철학자 ·신학자의 공허한 논의, 성직자의 위선 등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서술되었다. 1461년 그리스도교 군주들 사이에서 그리스도교적인 평화가 체결되기를 간절하게 희망한 《그리스도교 군주의 교육》을 간행하였다. 또 그리스어 《신약성서》의 최초의 인쇄 교정본()을 간행하고, 《히에로니무스 저작집》을 간행하는 등 다채로운 활동을 하여 인문주의자의 왕으로 추앙받게 되었다. 만년은 고국에 돌아가서 바젤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는 교회의 타락을 준열하게 비판하고, 성서의 복음 정신으로의 복귀를 역설하였으므로 제자들 중에서 많은 종교개혁자가 나왔다. 휴머니즘()이란 ‘보다 인간적인 학예’를 초래하려는 운동인데, 가톨릭 교회에 속하는 에라스무스가 ‘그리스도교의 복위·복원’을 원하여 가톨릭 교회 제도를 비판하고, 성서의 교정을 하고, 고대학예를 소개함으로써 경화된 사고방식 ·견해를 시정하려고 한 것은 바로 휴머니즘의 정도를 제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417년부터 M.루터종교개혁운동이 격화하는데, 에라스무스는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은 할지언정 이것에 반역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루터의 지나치게 정열적인 실천행동에는 동의할 수 없었으며 여러 차례 루터로부터의 유혹이 있었지만, 그와 행동을 같이하기를 거부하였다. 중년 이후부터 만년의 에라스무스는 그에게서 비판을 받은 가톨릭 교회 내의 광신자들과 그가 추파를 던지면서도 좀처럼 한편이 되어 주지 않는다고 분노하는 신교도 중의 광신도들 사이에 끼어 곤경에 처하였다.

에라스무스의 영향은 전유럽에 미쳤는데, 세계주의적 정신의 소유자로서 근대자유주의의 선구자이며, 특히 프랑스의 16세기의 문화사상사에 미친 영향은 뚜렷하다. 저서에는 주로 라틴어로 쓴 신학적인 것이 많으나 문학작품으로 현재까지도 유럽의 사려깊은 사람들의 마음의 양식이 되는 《격언집() Adagia》(1500) 《우신예찬》(1511) 《대화집() Colloquia》(1518)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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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Luther, Martin, 1483.11.10~1546.2.18]

1483년 11월 10일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만스펠트로 이주하여 광부로 일하다가 광산업을 경영,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하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다. 그는 엄격한 가톨릭신앙의 소유자였고 자식의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마르틴은 1501년 에르푸르트대학교에 입학, 1505년 일반 교양과정을 마치고 법률공부를 시작하였는데, 자신의 삶과 구원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무렵 도보여행 중 낙뢰()를 만났을 때 함께 가던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 해 7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업을 중단,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 계율에 따라 수도생활을 하며 1507년 사제()가 되고, 오컴주의 신학교육을 받아 수도회와 대학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다. 1511년 비텐베르크대학교로 옮겨, 15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513년부터 성서학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는 이때, 하느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신임을 재발견하였다. 이 결과가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1517년 ‘95개조 논제’가 나왔는데, 이것이 큰 파문을 일으켜 마침내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그는 교황으로부터 파문칙령()을 받았으나 불태워 버렸다.

1521년에는 신성로마제국 의회에 환문되어 그의 주장을 취소할 것을 강요당했으나 이를 거부, 제국에서 추방되는 처분을 받았다. 그로부터 9개월 동안 작센 선제후()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크게 공헌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는 분명한 구분을 지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 ·대결하면서, 성서강의·설교·저작·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는데, 영주()들간의 분쟁 조정을 위하여 고향인 아이슬레벤에 갔다가, 병을 얻어 그곳에서 죽었다.

그의 업적은 대부분 문서 형태로 남아 있어, 원문의 큰 책이 100권(바이마르판 루터전집)에 이른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1520)는 《로마서 강의》(1515∼1516)와 함께 초기의 신학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루터는 상황 속에서 자기를 형성하고 발언하는 신학자였기 때문에, 만년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저서와 강의를 통하여 그의 사상을 남김없이 토로하였다.

그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느님께 반항하고 자기를 추구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신앙의 응답을 통하여 자유로운 봉사, 이 세계와의 관계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면에서는 특히 모든 직업을 신의 소명()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 그 이후의 직업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이러한 견해는 성서에만 그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실천한 것도 중요한데, 1525년 카타리나와 결혼한 것도 이같은 실천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정세 속에서 이러한 신앙적 주장을 관철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인데, 칼뱅이나 다른 종교개혁자와 함께 종교개혁을 르네상스와 함께 근세에의 전환점으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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