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4년 성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와 그의 ‘영신수련()’으로 단련받은 초대회원들로부터 유래하며 1540년에 로마 교황청의 정식 인가를 받았다. 1541년 4월 8일 초대 총장으로 이그나티우스가 선출되었으며, 1556년 이그나티우스가 죽을 때는 예수회원이 거의 1,000여 명에 이르렀고 4대륙에 걸쳐 사도들이 파견되었다. 제수이트 교단이라고도 하며, 한국에서는 중국식 음사() 그대로 야소회()로 써왔다.

예수회의 목적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회원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의 구원과 완덕을 전심전력으로 추구하는 데 있다. 예수회의 행동양식은 영신수련을 통해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전적인 자기 헌신에서 나오는 영적이며 인간적인 태도이다. 이 회의 기본정신은 창립자의 정신에 따라 회원 각자의 인격완성과 종교·교육·문화·사업을 통하여 높은 도덕심과 인내, 소명()에 따르는 생활을 하도록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회원은 기도와 고행을 통하여 하느님의 능력을 받고 예수처럼 봉사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특히 교육사업에 역점을 두어 1547년 처음으로 예수회 대학을 개설한 이래, 세계 100여 개 국가에 진출하여 226개의 단과대학종합대학을 설립하였으며, 4,000여 개의 중·고교와 기타 교육기관 등을 세워 운영하고 있다. 이 수도회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54년이며 1960년에 서강대학교, 1962년에는 광주가톨릭대학교, 1974년 수원에 ‘말씀의 집’ 등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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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에르 [Xavier, Francisco, 1506.4.7~1552.12.2]

한자명은 방제각(). 에스파냐 북부에 있던 나바라 왕국 귀족가문 출생으로 파리대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동양의 사도'로 불린다. 1534년 27세 때에 이그나티우스데로욜라와 함께 예수회(Jesuit)를 창설하였고, 1540년 로욜라를 초대 총장에 추대, 교황의 공인을 받았다. 일본에 최초로 그리스도교를 전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예수회의 동인도 관구장(), 교황특사로서 동양 일대의 선교책임을 맡아 일하였는데, 1545∼1547년에는 주로 말라카제도 포교에 전념하였다. 1552년 다시 중국에 선교하려고 광둥항[]에 도착하였으나 열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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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 [Ignatius de Loyola, 1491~1556]

 성인(축일은 7월 31일). F.사비에르와 함께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를 창립하였다. 북()에스파냐의 바스코 지방 로욜라 성주()의 아들로 출생, 처음에는 군인으로서 세속적인 생활을 하였는데, 팜플로나전투에서 프랑스군과 싸우다가 중상을 입었다. 병상에서 《그리스도전()》과 《성인전》을 읽고서 그리스도의 병사가 되려고 결심하였다. 그는 만레사의 동굴에서 기도와 고행에 몰두하면서 내적 싸움과 신비적 조명을 경험하고 《심령수업 Exercitia spiritualia》을 썼으며, 후에는 예루살렘을 순례하였다.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려면 학문이 필요함을 깨닫고 32세 때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훗날 그가 파리대학교에서 공부하였을 때 F.사비에르, P.파베르 등 6명을 알게 되었는데, 이것이 후에 '예수회'라는 수도회로 발전하였다. 1540년 그는 예수회의 초대 회장에 선출되어 회원을 양성하고 회헌()을 만듦으로써 그 기반을 다졌다. 그는 종교개혁으로 동요하고 있던 가톨릭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으며, 1622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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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칼뱅 1509.7.10~1564.5.27

프랑스 북부 피카르디 지방 누아용 출생. 아버지는 지방 귀족의 비서 ·경리 등으로 일한 소시민이었다. 1523~1528년 파리에서 신학을, 그 후 오를레앙 부르주의 대학에서는 법학을 공부했다. 1532년 세네카의 《관용에 대하여》의 주해()를 발표하여 인문주의자로서의 학문적 재능을 인정받았다. 1533년 에라스무스와 루터를 인용한 이단적 강연의 초고를 썼다는 혐의를 받고, 은신해 지내면서 교회를 초기 사도시대의 순수한 모습으로 복귀시킬 것을 다짐하고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결별했다.

그는 이른바 ‘돌연한 회심()’에 의해 복음주의적(), 즉 프로테스탄트주의의 입장을 명확히 했다. 1535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이단에 대한 박해로 신변의 위험을 느낀 그는 스위스의 바젤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1536년 복음주의의 고전이 된 《그리스도교 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저술하였다. 이것은 박해받고 있는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티즘에 대해 변호하고 그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무렵,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위해 함께 일할 것을 G.파렐에게서 요청받고 그의 종교개혁 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런데 처음부터 신권정치()에 기반을 둔 엄격한 개혁을 추진하려 했기 때문에 파렐과 함께 추방되어,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설교자() ·신학교수로 있으면서 《로마서 주해》를 저술, 추기경 사드레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는데, 3년 후에는 상황의 변화로 다시 제네바에 초빙되어 거기서 《교회규율》(1542)을 제정하고 교회제도를 정비하여, 세르베토스 등의 인문주의자들을 누르고 제네바의 일반 시민에게도 엄격한 신앙생활을 요구하여, 신정정치적 체제를 수립하였다. 제네바는 그 후 종교개혁파의 중심지로서 전 유럽에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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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의 역사 대원동서문화총서 10
막스디몬트 / 대원사 / 1990년 7월
평점 :
절판


유태인 하면 나치가 떠오르고, 그것은 자연스레 아우슈비츠로 연결된다. 하지만 그들은 약 2000년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밖은 냉정한 군중들이며, 현재 전세계 가장 많은 부호들의 민족이기도 하다. 또한 4000년 만에 나라를 다시 찾았지만, 그로 인해 또 다른 민족들이 같은 운명에 놓이게 되었으며 중동지역을 분쟁의 소용돌이로 만들었다.
이 책은 나처럼 1세기 혹은 20세기의 유태인에만 익숙한 사람들에게 중세와 르네상스, 근대와 현대 속의 유태민족의 순탄치만은 않은 여정을 보여준다.

역사속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많은 민족/국가들은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기 보다는 어떠한 요인에서건 이름만을 남긴 채 사라진 경우가 많다. 이례적으로 유태인들은 거의 4000년동안 나라 없이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4000년전의 유태인과 지금의 유태인은 정신적으로 거의 달라진 것이 없다. BC 6세기에 바빌로니아로부터 나라를 빼앗긴 유태인들은 1948년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을 재건하기까지 모순적인 대우를 받으며 전 세계를 떠돌아다녔다. 막스 디몬트는 그러한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도 유태인이라는 민족성이 변질되지 않은 이유들에 주목한다.

1부 군주와 황색의 별에서는 중세에서 르네상스기에 유태인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가를 고찰한다. 서구사의 두 가지 커다란 맥인 기독교와 봉건제도 하에서 유태인은 비非기독교도이며 봉건제도의 어느 계급에도 속해있지 않았기 때문에 종교재판의 심판을 비껴나갈 수 있었다. 또한 봉건제에 부재한 상인계급을 맡음으로써 자유롭게 살아나간다. 농노들이 봉건제에 묶여 어디로도 갈 수 없던 시기에 유태인은 자신을 박해하고 추방하는 곳으로부터 떠나 새롭게 그들을 받아들여주는 곳으로 이동한다. (서유럽에서 동유럽으로) 기독교도들은 유태인들을 두려워하면서도 끊임없이 원하는 모순을 보여왔다. 그들은 기독교도에게 유태교로의 개종을 강요한 적도 없고, 고위직에 올랐어도 기독교도를 짓밟고 올라선 일이 없는데도 기독교도들은 유태인들을 두려워했다. 그러면서도 유태인을 다시 불러들인 나라는 상업이 발달하고, 정치가 안정됐다.

2부 근대 사상의 틈새에서는 18세기 계몽주의와 더불어 변화하는 서구사회에서 유태인들의 사상 또한 어떻게 변화하였는가를 고찰한다. 변질된 내셔널리즘과 인종차별주의가 결합하여 어떻게 반셈주의가 탄생하였는가를 살펴보고, 드레퓌스 사건을 필두로 유태인에 대한 악의적 박해를 돌아본다. 또한 서구사회에서 유태인이 과학/철학 분야에 기여한 면모를 지적하고, 스피노자, 마르크스,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등 유태인 학자들의 업적을 소개한다.
다음으로 문명 사상 가장 야만적 행위인 유태인 학살과, 시오니즘을 근간으로 한 이스라엘 재건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을 통해 중세와 르네상스기의 유태인들에 대해 소상히 알 수 있었고, '탈무드와 토라'라는 불변의 유태인 문화도 시대에 따라 융통성 있는 약간의 변화를 보였음을 알게 되었다. 약간 중언부언하는 점과 전개가 산만한 점이 아쉽긴 하지만, 메모하면서 읽으니 혼돈스럽게 얽혀있던 유태인에 대한 상이 정리되는 느낌이다.

한 가지 더.
책표지가 이전에 읽은 책 『미켈란젤로의 복수』에 나온『천지창조』의 '술취한 노아'다. 거기다 아불라피아에 대한 역사적 근거도 얻을 수 있어 너무나 기쁜 우연의 일치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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