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타적() 애국주의를 뜻하며 징고이즘(jingoism)과 유사하다.

프랑스의 연출가 코냐르가 지은 속요() 《삼색모표() La Cocarde Tricolore》(1831)에 나오는 나폴레옹 군대에 참가하여 분전하고, 황제를 신()과 같이 숭배하여 열광적이고도 극단적인 애국심을 발휘했던 N.쇼뱅이라는 한 병사의 이름에서 유래한 말이다.

근대적인 애국심은 시민적 자유에 뒷받침된 향토애의 확대로서 건전한 애국심(patriotism)으로 합리화되지만, 19세기 후반 이후 근대국가 체제의 모순이 격화됨에 따라 지배계급은 인간의 마음속에 잠재하는 에스노센트리즘(ethnocentrism), 즉 자집단()을 절대화하고 타집단()을 공포와 시기심으로 대하는 원시감정을, 매스컴과 결부된 선전과 교육으로 동원하여 대내적 억압과 대외적 침략을 위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이것은 국민국가에 대한 헌신이라는 이타적() 감정과 국가에의 동일화에 의한 자아확대()의 욕구를 충족시키게 되어, 무뢰한()의 마지막 피난처라는, 지나치게 편협한 애국심인 쇼비니즘 또는 징고이즘을 초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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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독서일기(from 2004.7.20)

 



 

 

 

1. 작품의 역사적 고증- 실존하는 이야기인가?

*제목 : 마비용 수도사(베네딕트회)의 편집본을 바탕으로 불역한 멜크 수도원 출신의 수도사 아드송의 수기
*원저자: 멜크 수도원의 아드소
편집자 : 마비용 수도사
불역자 : 벵자맹 발레(1754~1824), 프랑스의 사제(1842년, 라 수르스[La Source] 수도원 출판부, Paris)
이탈리아어역자 : 움베르토 에코(1968년)

→ 라 수르스 수도원의 아르네 라네슈테트 수도사는 발레 수도사라는 사람이 라 수르스 수도원 출판부에서 책을 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밝혀줌.
→ 그러나 1970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밀로 테메스바르라는 사람이 쓴 소책자 『장기놀이에서의 거울 이용법』이라는 책에서 아타나시우스 키르허라는 신부가 아드소의 수기로부터 인용한 대목을 찾아냄.

※ 이 사층의 저자를 설정한 까닭, 『장미의 이름 창작 노트』에서 에코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는 중세의 리듬고 중세적 순진성에 익숙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중세의 연대기를 읽고 또 읽었다. ... 그런데 읽기 과정에서 나는, 작가들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재발견했다. 그것은 책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다른 책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이미 세상에 유포된 다른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호메로스도 이것을 알고 있었고, 아리오스토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 라블레와 세르반테스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내 이야기는, 잃어버렸다가 발견된 원고 이야기(당연한 일이지만 이것 역시 인용의 꼴을 하고 있다)에서 시작하기만 하면 될 터이다. 그래서 나는 바로 서문에 착수하면서 나 자신의 기술(記述)을 액자에 제4레벨에, 말하자면 세 화자의 이야기를 뚫고 들어가야 이를 수 있는 레벨에 두기로 했다. 그러니까 나는, 아드소가 썼다고 마비용이 주장했고, 마비용이 썼다고 발레가 주장하는 바를 쓰게 되는 것이다.
(p.36-39)

2. 이 책의 지리적 시기적 배경
*문제의 수도원 위치 : 폼포사와 꽁끄 사이
*사건의 시기 : 1327년 11월 말, 원고가 쓰여진 시기는 1380년대.

3. 각 판본의 저자와 언어 및 문체
*아드소, 독일 수도사, 베네딕트 수도회, 14세기 라틴어
*장 마비용, (이름으로 보아 프랑스 수도사인데 주석에는 밝혀져 있지 않음), 베네딕트 수도회, 17세기 라틴어
*발레 수도사, 프랑스, 19세기 신 고딕불어
*에코, 이탈리아, 20세기 이탈리아어

4. 대강의 줄거리
이 소설에는 중심이 되는 두 개의 사건이 있다. 하나는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살인 사건과, 또 하나는 교황과 황제,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둘러싼 정치적 사건이다. 당시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긴 교황측은 권력을 놓고 황제와 반목하는 중이었고, 그 와중에 프란체스코회가 엄격주의파(청빈 강조, 무소유 주장, 성직자의 재산 소유 반대)의 주장을 받아들여 교황권과 대립, 황제권과 결탁하는 삼파전에 휘몰리게 된다. 제 4의 세력 베네딕트회는 황제권과 교황권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며, 수도자의 입장에서 재속 성직자의 권위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프란체스코회의 엄격주의파 수도사들을 비호했다.
이러한 대립을 타결하기 위해여 양측은 각각 사절단을 파견하여 협상을 하기로 결정하였고, 협상의 장소로 문제의 수도원을 선택, 황제측은 사절단의 일원으로 바스커빌의 윌리엄을 파견한다.
한편 협상 장소로 정해진 수도원에서는 협상 날짜는 다가오는데, 계속해서 의문의 살인 사건이 발생하자 다급해진 수도원장이 명민한 윌리엄에게 사건 해결을 부탁한다. 수도원장으로서는 황제측, 교황측 사절단이 도착하기 전에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면 교황측 사절단은 이것이 황제측의 음모라 생각하여 협상이 불가능하게 되거나, 수도원 내에서는 철저히 보장되는 수도원장의 사법권이 약화될 수도 있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사건을 조사하던 윌리엄은 이 사건이 베네딕트회의 엄격한 규율과 웃음에 관한 논쟁, 장서관에 숨겨진 비서들을 둘러싼 사건임을 알아내고 수사를 진행한다.
그러나 세번째 희생자가 속출하는 가운데서도 사건을 그렇다할 해결을 보지 못하고 황제측 사절단과 교황측 사절단이 차례로 도착한다.
프란체스코회 총회장 체제나의 미켈레를 선봉으로 한 황제측 사절단에는 우베르티노, 윌리엄, 베렝가리오 탈로니 등이 참석하고, 교황측 사절단장으로는 볼로냐의 베르트란도 델 포제토 추기경과 경호원으로는 이단 심판관으로 악명 높은 베르나르 기가 참석한다.
드디어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그리스도의 청빈'에 관한 논쟁을 벗어나 서로를 비방하는 싸움에 그친다. 베르나르 기는 레미지오를 구실로 소형제파의 이단성을 드러냄으로써 프란체스코회가 주장하는 '청빈'을 사실상 일소하며, 레미지오를 이단죄와 수도원 살인 사건의 살인자로 지목, 아비뇽으로 소환하려 한다. 이로써 사실상 협상은 교황측의 승리로 돌아가나, 이단 심판이 있은 다음날 조과 성무때 말라키아 죽음으로써 살인 사건은 계속된다.

5. 작품 속으로

*시대적 배경
① 1309년 : 교황 클레멘스 5세가 아비뇽으로 교황청을 이전함으로써 로마는 그 지역 군주들의 분쟁의 소용돌이가 됨.
→ 1314년 : 프랑크푸르트의 5제후, 바이에른의 루드비히를 황제로 천거 / 이와 동시에 라인의 영주와 쾰른의 대주교,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를 황제로 천거

② 1316년 : 요한 22세(프랑스, 까오르의 자끄 뒤에스) 교황으로 참칭, 로마로의 복귀에 대한 약속을 뒤집고 아비뇽에 눌러 앉음.

③ 1322년 : 바이에른의 루드비히, 프리드리히 거세. 이에 요한 22세는 루드비히를 파문, 반면 루드비히는 요한 22세를 배교자로 비방

*페루지아 헌장 : 프란체스코 참사회, 총회장 체제나의 미켈레. 성직자의 소유를 정당화하는 교황측에 대해 '무소유'를 회칙으로 삼는 프란체스코회의 헌장. '그리스도의 소유는 영구 소유가 아니라 일시적 사용임을 주장. 1323년 요한 22세는 이를 묵살.
★ 엄격주의파 :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의 정신과 회칙을 엄격히 준수하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내 영성을 강조하는 무리
★ 요아킴의 천년왕국설 : 맨발의 명상가들 출현(이는 곧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가리킴) → 가짜 그리스도의 출현에 의한 묵시록 시대 → 성령의 시대

④ 1327년 루드비히 황제, 요한 22세 척결, 프리드리히와 제휴, 밀라노 대관식

*장소
수도원 건물 : 수도원의 신학적 정위에 성공한 요새 같은 수도원. 장서관이 유명


*등장인물
① 아드소(아드송, 프랑스식) : 부친은 루드비히 황제의 직신, 멜크 수도원의 젊은 베네딕트 회 수련사, 이 책의 화자

② 바스커빌의 윌리엄 :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박식한 수도사. 자연과학, 논리학적에 크나큰 관심과 재능이 있음. 문제의 수도원에서 일어난 의문의 살인사건을 면멸히 풀어나감

③ 당시 요한 22세에게 이단으로 몰려 아비뇽을 도망친 수도사들 : 체제나의 미켈레(프란체스코 수도회 총회장), 파도바의 마르실리오(이탈리아의 정치학자), 장됭의 장(빠리 대학 교수), 오캄의 윌리엄(프란체스코회의 철학자, 신학자), 카잘레의 우베르티노

④ 바라지네의 레미지오 : 이 수도원의 식료계 수도사, 돌치노 파에 가담했다가 <대머리산>에서 대대적인 숙청이 있을 당시 살바토레를 데리고 이 수도원으로 옮겨옴. 돌치노 파 숙청 당시 돌치노의 밀서를 가지고 이 수도원에 들어왔다가 그것을 계기로 베르나르 기에게 이단심판을 받는다.

⑤ 수도원장 : 윌리엄에게 수도원에서 생긴 의문의 죽음을 해결해달라고 은밀히 부탁, 교황측과 황제측 사이에서 베네딕트회 수도원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노력하는 매우 정치적인 인물. 수도회 관례상 장서관의 사서가 수도원장직을 승계하나, 예외적으로 이 지역 영지의 서자라는 뒷배경을 안고 수도원장직에 오름.

⑥ 오트란토 사람 아델모 : 젊고 유능한 채식장인 수도사. 첫번째 죽음의 희생자. 본관 옆 벼랑 아래에서 시체로 발견. 그러나 떨어져 죽은 곳의 창문은 굳게 닫혀 있음. 누군가 아델모의 죽음에 대해 수도원장에게 고해했으나, 고해성사의 내용은 발설할 수 없다는 원칙에 의해 윌리엄에게 관련 사실을 말해주지 못함.

⑦ 카잘레 사람 우베르티노 : 프란체스코 회의 엄격주의파 수도사. 복음서의 청빈을 주장하며 부패한 성직자,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을 공격. 그가 프란체스코회와 타협하지 않자 요한 22세는 그를 베네딕트회로 넘김. 수도원에서 있었던 협상 후 교황측 사절단을 피해 다른 수도원으로 도망치나 후일 의문의 죽음을 당함.

◆ 잠깐! 제1일 6시과에서 아드소가 묘사하는 팀파늄의 묘사
이는 아마도 수도원 교회 건물 입구의 상단에 부조된 팀파늄의 심판 장면을 묘사한 듯. 이 팀파늄은 요한 묵시록의 내용에 충실하다.

그런데 보라, 하늘에 한 옥좌가 놓여 있고 그 옥좌에 어떤 분이 앉아 계셨다. 그리고 앉아 계신 분의 모습은 벽옥과 홍옥같이 보였으며 옥좌 둘레의 후광은 비취옥같이 보였다. 그 옥좌 둘레에는 또 스물 네 개의 옥좌들이 있었고 그 옥좌들에는 스물 네 명의 장로들이 앉았는데 흰옷을 걸쳐 입고 그들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옥좌로부터는 번개와 소리와 천둥소리가 나오고 옥좌 앞에는 일곱 개의 횃불이 불타고 있었는데 그것은 하느님의 일곱 영들이다. 또 그 옥좌 앞에는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가 있었다.
그리고 옥좌 가운데와 옥좌 둘레에는 앞뒤가 눈들고 가득한 생물 넷이 있었다. 그런데 첫째 생물은 사자 같았고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았으며 셋째 생물은 그 얼굴이 사람과 같았고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았다. 네 생물은 각각 여섯 객의 날개를 가졌고 그 둘레와 그 안은 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요한 묵시록 4.2~8, 200주년 신약성서)

아드소의 묘사에 대해서는 『장미의 이름 上』, p.76~79참조(1997년 개역판)

이 장면에 대해 아드소가 느꼈던 공포에 가까운 경외심과는 달리, 진중권은 그의 책 『춤추는 죽음1』에서 중세인들이 세계의 종말 즉 최후의 심판날을 '즐거운 날'이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드디어 전 인류를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2세기 이전까지 팀파늄, 즉 성당 주현관 위 반구형 부분을 장식했던 것은 해방자 예수가 천군 천사를 데리고 옥좌에 앉아 이 땅에 내려오는 찬란한 장면Adventus Domini이었다."
※참고 : 진중권, 춤추는 죽음1

⑧ 살바토레 : 작은 형제회(프라티첼리) 소속의 흉측하게 생긴 수도사. 돌치노 파에 가담, 레미지오와 함께 이 수도원으로 옮겨옴. 레미지오 이단심판 시 돌치노 파와의 연관성을 베르나르 기에게 말함.

◆잠깐! 당시 이탈리아의 상황
12-13세기, 부패한 성직자들에 대한 반작용으로 가난한 자들의 삶에 주의를 기울이는 운동이 태동. 성 프란체스코가 나타나 청빈에 대한 사랑을 가르치고 분열된 교회를 통합하려함. 그러나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그 조직이 너무도 비대해져 세속화됨. 요아킴의 천년왕국설을 재발결한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소르본 학자들은 요아킴을 이단으로 몰고가나 실패. 이에 교회측은 토마스 아퀴나스와 바뇨레지오의 보나벤투라의 저서를 배포, 종교 이념 논쟁과 종교 재판이 성행. 12세기 말 리용 회의에서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재산 소유를 인정하자, 이에 반기를 든 수도사들은 종신형을 받고 투옥. 후일 교단의 새 지도자 라이몬도 가우프레디는 이들을 방면, 그 중에 안젤로 클라레노(청빈한 프라티첼리)는 프로방스의 수도사 삐에르 올리외를 만나고, 그는 카잘레의 우베르티노를 만나 엄격주의파 운동이 태동. 당시 교황 켈레티누스 5세, 콜로나 추기경, 오르시니 추기경 등은 이들 엄격주의파를 비호. 후임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는 프라티첼리와 엄격주의파 수도사들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 후임 클레멘스 5세는 방관했으나 그 후임 요한 22세에 의해 박해당함. 이론가들은 그리스도나 사도들에게는 개인적으로든 공동으로든 소유한 재산이 없었다고 주장했으나 교황은 이 믿음을 이단으로 몰았다.

* 작은 형제회(프라티첼리) : 안젤로와 우베르티노의 교리에 따라 설교를 받아들인 평민들의 늘어나 이탈리아는 작은 형제회의 탁발승 천지가 되었다. 이에 따라 교단이 인정한 엄격주의파 사제들과 일반 교인의 구별이 모호해졌다. 이런 일반 교인을 프라티첼리, 작은 형제회 탁발승이라 칭한다.

⑨ 장크트 벤델 사람 세베리노 : 수도원의 본초학자, 네 번째 희생자. 문제의 서책을 발견하고 윌리엄 수도사를 찾으나, 시약소에서 천구의에 맞아 시체로 발견.

⑩ 살베메크 사람 베난티오 : 아리스토텔레스에 심취, 특히 호르헤와 은유와 웃음에 대해 논쟁. 돼지 피를 담아 놓은 항아리에 거꾸로 쳐박혀 발견된 두번째 희생자.

◆ 바부앵(프, 베이브윈(英), 바분 - 아프리카의 원숭이)
보쉬의 그림에 묘사된 것처럼 '집이 뾰족탑 위에 서고, 땅이 하늘 위에 있는 거꾸로 된 세계에서 온 동물' . '발 모양의 머리를 가진 조그만 새, 등에 인간의 손이 달려 있고 털북숭이 정수리에서 발이 비어져 나와 있는 동물 등.

⑪ 부르고 사람 호르헤 :
'공허한 말, 웃음을 유발하는 언사를 입에 올리지 말지어다 Verba vana aut risui apta non loqui', 베네딕트회 회칙 제4장에 나오는 말
장님의 노수도사. 요한 크리소스토모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웃지 않았다고 하는 말을 인용하며, 수도사들에게 엄격한 규칙을 강조함.

⑫ 아룬델 사람 베렝가리오 : 장서관의 보조사서. 외모에서 풍기는 음란함을 갖고 있으며 아델모와 동성애의 관계가 의심됨. 아델모가 죽던 날 밤 묘지에서 인사불성이 된 아델모를 마주침. 욕장에서 익사한 세번째 희생자.

⑬ 그로타페라타 사람 알리나르도 : 수도원의 최고령자. 고해신부. 묵시록의 일곱 봉인대로 사건이 전개됨을 암시.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단서를 제공.

⑭ 모리몬도 사람 니콜라 : 유리 세공사

⑮ 웁살라 사람 베노 :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수사학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은유' 또한 하느님의 뜻을 전달하는데 긴요한 수단이라 생각. 세베리노가 죽었을 때 시약소에서 서책을 빼돌려 말라키아에게 주고, 죽은 베렝가리오를 대신하여 보조 사서가 됨.

16. 알레산드리아 사람 아이마로 : 수도원에서 고문서를 빌려 필사함. 수도원의 장서관에 대한 폐쇄적 행위를 비난. 이탈리아 사회가 돈을 중심으로 한 상인들의 사회로 변모함을 인식, 수도원 또한 시세에 발맞춰야함을 강조.

17. 끌롱마끄누아 사람 파트리치오

18. 톨레도 사람 라바노

19. 이오나 사람 마그누스

20. 히어포드 사람 월도

21. 티볼리 사람 파치피코 : 이교도의 시를 많이 아는 사람, 기발한 수수께끼(은유적 표현)에 관한 시를 인용.

22. 말라키아 : 장서관의 사서, 다섯번째 희생자.
◆ 피니스 아프리카에Finis Africae : 장서 목록의 분류 암호. 장서관 비서(秘書)의 보고

6. '장미의 이름'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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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te 2021-02-19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 또한 이 작품에 매료되어 필사를 및 모르는 모든 것들을 조사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라 수르스 수도원의 위치를 프랑스 지도 그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네요.
주인공이 말하기를, *파시(찾아보니 빠시 라고 지도에 있더군요) 근교에 있는*
이라는데, 해당 거리가 있는 프랑스 16구 에는 오래도고 큰 셍제르맹 성당 외에는 찾을 수가 없네요.
.
물론 소설이니까, 가 지명 일 수도 있지만, 아시다시피 이 소설은 굵짉굵직한 부분, 특히 의문의 교회에 들어서기 전 까지는 대부분 실제 지역이며, 많은 실제 인물들을 갖다 쓰지 않습니까?..

그래서 초반에 많이 언급되어지는 라 수르스(La sourse : 프랑스어로 샘물)수도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매우 궁금네요. 구글검색, 네비서검색, 구글 지도검색도 해 보았으나 성과가 없습니다... 부디 가능하시다면 도움을 바랍니다.
 
카르티에 라탱
사토 겐이치 지음, 김미란 옮김 / 문학동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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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사를 전공한 일본인이 석사논문을 준비하면서 재미삼아 쓴 소설이란다. 재미삼아 쓴 소설이 이정도라니 진짜 마음 먹고 쓰면 대작이 나올 듯 싶다. 어쨌든 작가는 문학사 및 종교사에도 꽤 조예가 깊은 듯 16세기의 인물들을 소설 속에 잘 배치시키고 있다.

시대적 배경은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고, 칼뱅이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초석을 마련하며, 로욜라와 프란치스코 사비에르가 카르티에 라탱에서 예수회 소모임을 시작한 시기이다. 소설의 화자 드니 쿠르팡과 천재 신학자이자 홈즈의 전신이자 완벽한 남자인 마지스테르 미셸은 이들과 함께 카르티에 라탱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을 파헤치면서 배후에 숨어있는 사이비 종교(?)의 전모를 밝혀낸다. 처음에는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던 각각의 살인 사건은 결국 하나의 장소, 하나의 인물로 모아지고 그것은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종교적 혼란기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소설의 소제는 종교와 성(性)으로 좁힐 수 있을 것 같다. 종교에 관해서는 정사(正史)를 바탕으로 가톨릭 교회의 내외적 쇄신의 움직임을 배경에 깔고 있다. 내적으로는 로욜라의 예수회가, 외적으로는 루터 및 칼뱅 등의 프로테스탄트가 1500년의 가톨릭 교회를 공략하니, 재림 예수를 사칭하는 자는 얼마나 많았으며 그에 따르는 우매한 무리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그 가운데 세력을 넓히기 위해 살인도 서슴치 않는 무리가 있었을 것임은 소설적 상상이 아니어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한편 성(性)에 관해서는 동정(童貞)에서 프리섹스주의자(?), 근친상간에서 난교까지 극단적 양상을 다 보여준다. 드니 쿠르팡은 어서 동정을 벗어버리고 진정한 남자가 되고픈 유혹을 받지만, 여자가 순결을 소중히 여기는 만큼 자신의 동정을 소중히 여긴다. 한편 소르본이 인정한 천재 신학자이자 수도자의 몸인 마지스테르 미셸은 너무도 적나라한 쾌락을 즐긴다. 프랑스의 '콘돔'이라는 지방에서 유래했다는 돼지 창자를 사용하고, 쾌락의 유혹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것에 굴복당하지 않는 진보적이고 초인적인 인물이다. '존재는 신이다'라는 명제적 인물이라고나 할까, 르네상스의 최전방에서 성의 해방 아니 초월을 극명히 드러내는 이 소설의 중심적이고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다.

사실 이 소설은 미셸이 펼치는 전지적 시점의 추리 때문에 추리 소설적 재미는 떨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16세기 파리의 지리적, 사회적, 풍속적 면모를 사료에 근거하여 묘사하였기 때문에 무언가 '얻는 재미'가 있다. 사실 여부를 판단할 순 없지만 역사적 실존 인물들에 성격을 부여했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예를 들어 칼뱅은 날카롭고 신경질적이고, 로욜라는 호탕하지만 정이 많고, 사비에르는 침착하고 다감하게 묘사하여 백과사전 속에 들어있던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가끔 농밀한 묘사에 흥분을 일으키게도 하지만, 그것에 초연할 수 있다면(^^;;) 재밌고도 진지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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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벨레 [Du Bellay, Jean, 1492~1560]

글라티니 출생. 1526년에 바욘, 1532년에 파리의 주교()를 지내고, 프랑수아 1세를 섬겨, 영국 ·이탈리아에 외교관으로 파견되었다. 1535년에 추기경이 되어 1536∼1537년의 프랑스와 신성() 로마 제국 사이의 전란 중에는 육군 중장으로서 활약하였다. 1541∼1544년 리모주 주교, 1544∼1553년 보르도 대주교가 되어, 1546∼1556년에는 르망 주교를 겸임했는데, 앙리 2세의 대관()과 동시에 신임을 잃고 1553년 이후에는 로마에서 살면서 오스티아의 주교를 역임했다. 라틴어로 쓴 《시집》 《서간집》 등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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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1세 Francois I [1494.9.12~1547.3.31]

코냐크 출생. 프랑스 르네상스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앙드렘백작 샤를 드 바루아의 아들로서, 1514년 국왕 루이 12세의 공주 클로드와 결혼, 루이 12세에게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천성이 명랑하고 활달하였으며, 낙천적이고 무인()의 호방함을 지닌 한편, 기지와 우아한 감각도 지녔다. 즉위하자마자 이탈리아에 원정, 마리냥에서 승리를 거두어 밀라노를 손에 넣었다. 1519년, 독일 황제의 선거에 출마하여 합스부르크가()의 카를 5세에게 패배하였다. 이어서 카를 5세에게 도전, 1525년 이탈리아의 파비아에서 싸움에 져, 포로가 되어 유폐되었다.

이듬해 1526년 석방되자 다시 카를과 전쟁을 벌여, 싸움은 1544년의 화의() 때까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왕은 이탈리아를 통하여 고대의 학문과 예술에 심취, 루아르 강변에 르네상스 양식의 성관()을 세우고, 고전학자들을 초빙하여 ‘휴머니즘(인문주의)’의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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