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자살, 매력적 파괴욕 

인간의 본성인지는 모르겠으나, 누구나 뭔가를 한번쯤 부숴버리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사는 듯하다.

질서정연하게 서있는 것들을 한 번쯤 부숴버리고 싶은 파괴욕.

이상하게 몸이 뒤틀리면서, 거북함을 느낄 때, 그 것들을 전복하고 싶은 욕구.

그런 파괴욕의 정점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마 자신의 존재를 파괴하는 것일 거다.

그렇기 때문에 명문화는 되어있지 않지만, 어떤 종교도 자살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고 금기시하는 것을 본다면, 자살은 굉장히 위험한 것으로 비추어 짐은 틀림없다.

한동안 자살 싸이트가 유행했었다. 아니 지금도 유행이다.

쉽게 편하게 아름답게 자살하는 법에 대한 연구는 끝도 없이 이어졌고, 그런 방법들로 실제 자살하는 경우도 종종 일어나고 있다. 2007년의 대한민국의 자회상, 아니 어쩌면 전지구적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왜 자꾸 사람들은 자살에 집착하는가? 난 여기서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 따위의 사회학적 연구를 들먹거릴 생각은 없다.

오히려 난 그 탐미주의적인 '미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거다.

그 극단에 서 있는 욕망의 정점. '자신을 파괴한다'...

죽음의 욕망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신이 주어진 질서에 그대로 저항해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다는 점에서 '새로운 윤리'를 만들어 내는 생성적 욕망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생성을 이야기했던 자들 중 많은 이들이 자살을 선택하곤 했다(예를 들면 들뢰즈의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을 거다.).

 

김영하-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나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살해하도록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나는 사람들이 무의식 깊은 곳에 감금해두었던 욕망을 끄집어내고 싶을 뿐이다. 일단 풀려난 욕망은 자가증식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상상력은 비약하기 시작하고 궁극엔 내 의뢰인이 될 소질을 스스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p.16)

주인공의 직업은 자살청부업자. 자살하고 싶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 자살을 부추기는 것은 아니다. 그가 끝끝내 찾아오지 않을 것 같으면 아예 일을 시작하지 않는다.

이 시대에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에게는 단 두가지의 길이 있을 뿐이다. 창작을 하거나 아니면 살인을 하는 길.(p.17)

그는 자살을 도와주고 그것을 글로 쓰려한다.

"그 남자는 묘한 사람이었어. 그 남자와 이틀을 보내고 나서 나는 자살을 하기로 결심하게 됐더랬어. 나는 그 남자의 권유를 뿌리치고 욕조에서 칼로 동맥을 긋는 방법을 택하기로 했어. 이유? 아무것도 없어. 자살하는 사람들이 무슨 거창한 이유를 가지고 그러는 거 같지만 아냐. 어쩌면 그날의 퍼포먼스 때문이었을지도 몰라. 십 년이 넘게 해오던 동안 난 내가 진짜 예술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날 문득 그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을는지도 몰라. 단 한 번도 나를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어디론가 계속 도망치고 있는 기분으로 나는 평생을 살아왔던 느낌이었어. ... 그 남자를 만나서 나는 내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지 알게 됐어."(pp.149-150)

삶에서 생기를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 죽음을 통해서 제공하려 한다.

그때 유디트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면모를 그녀는 보여주고 있었다. 생기. 그녀는 나와 만난 후 처음으로 얼굴에 생기를 띠고 있었다.(p.85)

"갑자기 신이 나는 거 있죠. 내게 인생이란 제멋대로인 그런 거였어요. 언제나 내 뜻과는 상관없는 곳에 내가 가 있곤 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p.85)

인생이 맘대로 되지 않으나, 끝끝내 자기를 자기 의지대로 끌고 가고 싶은 여자 유디트, 쳇바퀴처럼 도는 그냥 그런 저런 '작업'을 하는 예술가 미미. 그들에게 삶이라는 것은, 그냥 "제멋대로 그런 거"일테고, 거기에서 어떤 '행복' 혹은 '활기'를 찾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가능한 유일한 '생기'를 제공하는 방법은 죽음 뿐이다.

게다가 죽음은 아름답고 매력적이지 않은가?

"눈동자에서 반짝이던 두 점의 빛은 마지막 희망 같은 거에요. 피로와 권태에 찌든 주름살이 얼굴을 뒤덮고 있어도 숨길 수 없는 게 있죠. 그런 희망은 삶을 향한 게 아니라 휴식을 위한 거에요."(p.71)

진정한 휴식(죽음)을 찾아주는 주인공...

그를 우리는 비난해야 하는가? 어떤 근거로? "그래도 생명은 소중한 거에요?" 사실상 그들의 인생은 사회적으로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 아니었나??

갈때까지 밑바닥으로 기어간 막장인생의 유디트. '잘 벗고' '파격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내면을 보여주는 예술가로 불리는 미미.

더 이상 되돌아갈 수 없고, 규정지어진 그들의 구도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그들에게 제시해야하는거지?

물론 다른 길을 한 번 밟어나가면서 전혀다른 결과들이 생겨날 수 있다.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언제나 구심력은 작용하게 마련이고, 쳇바퀴는 계속 굴러가기 마련이다. 김영하의 이 때의 감성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다(1996년)

나는 기억한다. 그 무렵 나는 스피드에 중독돼 있었다. 경부고속도로에서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몇 바퀴를 회전한 일도 있었고 서울 도심에선 함정단속을 벌이던 경찰차와 추격전을 벌인 일도 있었다. 또 앞으로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시스템을 저주했고 정치적 무관심을 적극적으로 옹호했고 일하지 않을 권리, 게으를 권리를 찬양했다. 국가가 개인의 환각에 개입하는 것에 반대했으며, 아니 사실은 국가가 하는 모든 일에 저주를 퍼붓고 있었다. 선거 참여를 독려하는 모든 진영을 조소했으며 야당과 시민단체도 거기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얌전히, 선량한 시민으로 그 정체를 감추고 살고 있었다. 골초였고 매일 밤 술을 마셨다. 마셨다 하면 며칠 동안 마셨다. 말하자면 그때의 나는, 죽어도 좋다, 고 생각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 그렇지만 자살을 결행할 만큼 독하지는 못했으므로 일종의 정치적 자살을 결심하고 골방에 틀어박혀 이상한 소설들을 써대기 시작했다.(pp.219-220)


원색의 페인트를 흰 캔버스에 뿌려대는 느낌의 색감과, 금기를 차갑게 비웃으며 써대는 문체가 맘에 들었다. 특히 츄파춥스를 떠올릴 때의 아찔함이란...

극단적인 문화적 레디컬의 냉소가 깃든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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