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드 게임 도코노 이야기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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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 어린시절의 트라우마

 

나는 잠을 잘 땐 유난히 예민하다. 아주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라며 일어나곤 한다. 그리고는 벌렁거리는 심장 때문에 다시 잠을 청하기가 힘들어진다. 성격이 예민한 탓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알고보면 그리 예민한 성격도 아니다. 유독 잠을 잘 때만 그런 것이다. 그래서 어떤 계기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문득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던가. 엄마가 막 가게를 시작했을 때 가끔씩 가게에서 주무실 때가 있었다. 아빠의 회사도 엄마 가게 근처였기 때문에 나와 동생은 할머니와 지냈다. 그러나 독실한 기독교 신자셨던 할머니께서는 토요일이 되면 시골로 내려가셨다. 그럴때면 나와 동생은 단둘이서 자야만 했다.

그날도 그런 날 중에 하루였다. 잠결에 큰소리가 들렸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도 들렸다. 깜짝 놀라서 일어난 나는 그것이 옆집 아줌마 아저씨가 싸우는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빨간 벽돌집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회색빛의 촌스러운 시멘트 집이 드문드문 있었고, 대부분은 한옥이었다. 그런 한옥 집에서 방음은 커녕 옆집의 재채기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한참을 옆집의 싸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형광등에서 불꽃이 튀었다. 아직 잠결이라 사태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나는 금새 천장으로 번지는 불꽃을 보고서야 동생을 깨웠다. 그 일이 있은 후 우리 집은 엄마 가게가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엔드게임

 

도코노 일족은 방대한 양의 서적을 암기하는 힘, 멀리서 생긴 일을 아는 힘, 가까운 미래를 예견하는 힘 등 평범한 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신비한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신비한 능력을 절대 남용하거나 오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그 신비한 능력을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다. 『빛의 제국』과 『민들레 공책』에는 그런 도코노 일족이 등장한다.

 

그러나 『엔드게임』에는 지금까지의 도코노 일족과는 이질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눈에는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는 이질적인 '무언가'가 보인다. '그것'은 그들이 '그것'을 보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다르게 보인다. 에이코의 눈에는 '그것'이 멋대로 줄기가 뻗친 '상한 딸기'로 보이고, 도리코의 눈에는 '은색의 볼링핀'으로 보인다. 어떤 것으로 보이는가는 그들의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다. 어린 시절 도리코는 캔 공장에서 끔찍한 모습을 목격하게 되고, 그 캔들이 쏟아지는 소리가 마치 볼링핀이 쓰러지는 소리처럼 도리코에게 들렸다. 그래서 도리코는 하얀색이 아닌 캔처럼 '은색의 볼링핀'을 보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이질적인 '그것'이 눈에 보이면 '그것'을 '뒤집어' 버린다. 그러다가 내공이 부족한 사람들은 '그것'에게 오히려 '뒤집힘'을 당하기도 한다. 누구보다 강하다고 생각했던 도리코의 아버지 하지메가 어느날 사라진다. 도리코와 도리코의 어머니 에이코는 아버지가 '뒤집혔다고' 생각하며, 자신들도 언젠가는 '뒤집힘'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사실 '뒤집힘'은 더이상 의미가 없었다. 서로가 '뒤집고 뒤집히는' 상태가 계속되다 보니, 어느 순간에는 적(흑)과 동지(백)의 개념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두려움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던 것이다. 더이상 '뒤집힘'이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은 도코노 일족으로서의 그들의 정체성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서 그렇게 믿고 살아가려 한다.

 

끝의 시작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p. 324)

 

트라우마, THE END.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듯이, 트라우마도 생각하기 나름이다. 더이상 의미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두려움에 떨었던 그들처럼, 우리가 트라우마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도 이미 실체가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른다. 실체가 없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그것을 극복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길.

 

현 시점에서는 더이상의 "도코노 이야기"는 없을거라고 한다. 그동안 신비한 능력을 가진 도코노 일족을 엿보는 재미가 솔솔 했는데. 상상력이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온다 리쿠의 머리 속을 한번 들여다 보고 싶을 정도이다. 그녀의 다음 작품에는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질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2007/08/03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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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공책 도코노 이야기 2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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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코노 이야기_두 번째

 

첫번째 도코노 이야기인 『빛의 제국』에는 다양한 능력을 가진 도코노 일족들이 등장한다. 방대한 양의 서적을 암기하는 힘, 멀리서 생긴 일을 아는 힘, 가까운 미래를 예견하는 힘 등 해리포터나 회색의 마법사 간달프처럼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지고 있으면 유용하게 쓰이는 그런 힘들이다.

 

두번째 도코노 이야기인 『민들레 공책』에는 '미네코'라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미네코는 자신이 소녀 시절에 겪었던 이야기를 회상하며 우리에게 들려주는데, 그녀의 소녀 시절을 기록한 것이 바로 '민들레 공책'이다.

 

『민들레 공책』은 이런 이야기

 

어린 시절 미네코는 '마키무라'라는 촌락에서 살았으며, 그곳은 대지주 마키무라 가문이 대대로 살아오던 곳이었다. 단순히 대대로 살았기 때문에 '마키무라'라는 가문의 이름이 지명이 된 것은 아니다. 마키무라 가문은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촌락에 학교나 공회당을 세우고 용수로 건설이나 도로 정비를 진행하는 등 많은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마키무라 가문에는 병약한 막내딸 사토코가 있었다. 아버지가 의사였던 미네코는 집안에만 있어서 친구가 없었던 사토코의 친구로 마키무라 가문을 드나들게 된다. 마키무라 가문에는 미네코 외에도 드나드는 아니 상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서양화를 공부하는 시나씨, 청일 전쟁 때 아들을 잃고 발명에 몰두하는 이케히타 선생님, 마키무라 나리님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고 있는 신타로씨, 불사였지만 지금은 부처님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에이케이씨 등 그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토코는 점점 건강해져서 미네코와 함께 머리에 리본을 달고 여학교에 다니자는 약속까지 하게 된다. 그 무렵 미네코는 사토코에게서 '다른' 점을 발견한다. 사토코는 어린 소녀의 생각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깊은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가까운 미래의 일을 암시하기도 한다. 사토코가 곧 누군가가 찾아올 것이라고 말한 후에 하루타 일가가 마키무라 가문을 찾아온다. 그리고 '마키무라' 촌락, '마키무라' 가문과 도코노 일족에 얽힌 이야기들을 듣게 된다.

 

백년 전 마키무라 가에서는 큰며느리를 맞아들였는데, 부지런하고 예쁜 며느리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며느리 몰래 며느리를 조사한 당주는 며느리가 신비한 힘을 가진 도코노 일족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느 평화로운 가을날 오후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며느리는 안절부절 못하며 산이 무너질 것이라고 했다. 며느리의 말을 믿지 않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 그녀는 산이 무너지기 직전 마을에 있던 경종을 울려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그러나 정작 며느리 자신은 피하지 못했다. 나중에 그 며느리가 '먼 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이후로 마키무라 가는 일족을 찾아 여행을 다니는 도코노 일족들에게 도움을 주게 된 것이다.

 

"일족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우리 일이라네. 단순히 말이나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일족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애와 정신을 자기 안에 통째로 보존하는 것이야. 그것을 우리는 '넣는다'고 하거든." (p. 172)

 

 

'인물' 중심의 이야기

 

『굽이치는 강가에서』, 『여섯번째 사요코』, 『네버랜드』,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 『라이온하트』 등 그동안 온다 리쿠의 작품들은 '사건'이 중심이었다. 인물과 배경이 설정되면 사건이 발생하고, 그 사건이 어떻게 해결될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책에서 눈을 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물론 추리 소설이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다.

반면에 『민들레 공책』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중심이다. 이야기가 다 끝나갈 무렵에서야 사토코가 자신의 힘을 발휘하여 마을에 헌신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마키무라' 가문에 머물고 있는 다양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이다. 그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마키무라' 가문에 머물고 있으며, 독자들은 그들의 사연에 귀기울이게 된다.

 

『민들레 공책』을 읽다보면 사토코에게 어떤 '사건'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사건이 언제쯤이면 실체를 드러낼 것인가였다. 그러나 사실은 아무런 사건도 없이 '마키무라' 가문에 머물고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끝났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들었던 궁금증이지만, 책을 덮을 때까지 알 수 없었던 것이 하나 있다. 이 책에는 '리본', '뉴 센츄리', '스케치', '빵', '찬스', '포즈', '모델', '발코니', '홀' 등과 같은 단어들이 굵게 표시되어 있다. 외래어들을 굵게 표시한 것 같은데, 작가의 의도인지 역자의 의도인지 어디에도 이에 대한 설명이 나와있지 않다. 분명이 설명이 있었는데, 내가 놓쳐버린건지. (혹시 아시는 분 계시면 살짝 알려주세요^^)

 

자기가 행복했던 시기는 그 당시에는 모르는 법입니다. 이렇게 과거를 돌아보고 처음으로 아아, 그때가 그랬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인생은 수많은 돌멩이를 주워 짊어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계절이 지나간 뒤에, 지친 손으로 바구니를 내려놓고 지금까지 주운 돌멩이를 살펴보면 그중에서 몇 개인가 작은 보석처럼 빛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p. 10)

 

사람은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은 걱정하지 않는 법이야. 자기가 손에 넣었다가 잃을지도 모르는 것, 다른 사람이 자기보다 먼저 손에 넣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지. 지금 세계가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명확하지 않나. (p. 87)

 

저희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거울을 보거나 냇가에서 몸이라도 굽히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은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자기 자신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그것이 아주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인은 볼 수 있지만, 자기 자신만은 절대로 볼 수 없다. 이것은 중대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아이는 타인만을 보고 생활합니다. 자기라는 존재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타인도 자기와 마찬가지로 감정이나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희는 성장함에 따라 문자 그대로 자기를 발견하는 셈입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자기 모습을 찾아내어갑니다. 저는 이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p. 181)

 

2007/08/02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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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 쉽게 하기 - 풍경 드로잉 - 그림 그리는 즐거움을 배운다! 스케치 쉽게 하기 4
김충원 지음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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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치 쉽게 하기』 시리즈는 「기초 드로잉」, 「인물 드로잉」에 이어 이번이 벌써 세번째이다.

그동안 『스케치 쉽게 하기』 시리즈를 읽으면서 그림은 아무나 그리는게 아니라는 내 생각이 나도 연습하면 그릴 수 있다는 용기가 생겼다. 그래서 거의 10년 만에 스케치북이라는 것을 사서 한장씩 한장씩 그려보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잘 그려야 된다고 생각하니 선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이내 자신감을 상실하고 지워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작가 김충원은 그런 것에 개의치 말라고 했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그렇게 한다고 말이다. 어차피 내 그림을 보는 사람도 없는데 선이 비뚤비뚤 해지라도, 사실과 다르더라도 그냥 열심히 그리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림은 나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니까, 남들이 보는 것과 똑같이 표현하려면 그냥 편하게 사진을 찍어버리면 될테니까. 

학창 시절 가장 많이 그렸던 것이 풍경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인물 드로잉」보다 더 쉽게 다가왔다.

 

일상에서 만나는 수많은 정경들은 나만의 언어로 담는 시간

스케치는 세상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방법입니다. (표지글)

 

풍경 드로잉을 잘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제를 파악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대로 다 그려 넣을 필요는 없다. 주제를 정해서 주제에 맞는 부분만 트리밍해서 그리면 된다.

80%를 보고 20%를 그린다. 초보자일수록 대상을 관찰하기 보다는 자신이 그리고 있는 그림에 집중하게 된다. 드로잉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대상을 관찰하는 것인데, 자신의 그림에만 집중하다 보면 사실과 다른 그림을 그릴 수 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프로급 화가들도 처음부터 멋진 그림을 그릴 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해서 멋진 작품을 그려낼 수 있었듯이 사실과 다른 그림을 그렸다고 절대 포기하거나 주저하면 안된다.

 

나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다시 그리도록 시작하게 만들어 준 책. 나에게 하나의 꿈을 심어주고 간다. 언제가는 나도 기억에 담아 두고픈 풍경을 카메라가 아닌 스케치북에 담을 수 있겠지 하는 꿈.

 

2007/07/29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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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 지식과 교양을 디스플레이하다
고전연구회 사암 엮음 / 포럼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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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는 학교 도서관이 나의 서재라고 생각했었다. 읽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찾아가서 읽고 싶을만큼 읽을 수 있는 곳. 그래서 내 책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대학을 졸업하고 더이상 도서관이라는 곳을 찾아가서 책을 읽을만큼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졌을 때, 읽고 싶은 책들은 모두 사 볼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인 여유가 생겼을 때야 비로소 내 책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권 한권 쌓여만 가는 책들을 보면서 이 책들만을 위한 공간이 있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서재, 아마 책을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꿈의 공간일 것이다. 『서재 : 지식과 교양을 디스플레이하다』를 통해 세련되고 멋진 서재들을 엿볼 수 있다는 생각에 많이 설레였다. 그러나 책을 펼쳐드는 순간 '디스플레이'라는 단어만 보고 그렇게 생각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재 : 지식과 교양을 디스플레이하다』에는 옛 사람들의 서재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단순히 물질적인 의미에서의 서재 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독서에 대해 가졌던 가치관까지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책이다.

옛 사람들은 '서재'라는 공간에다가 이름까지 붙여주며 아꼈다. 가깝게 지내는 사람에게 '서재'가 생기면 그 서재만을 위해 글을 써주었다. 그 이름과 글 속에는 그네들의 세계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백공 김득신과 그의 서재인 '억만재'에 얽힌 이야기였다. 

'억만재(億萬齋)'는 글자 뜻 그대로 김득신이 글을 읽을 때 1만 번이 넘지 않으면 멈추지 않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명문 사대부가의 자손이었던 김득신은 왜 그토록 여러 번 글을 읽었던 것일까? 사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매우 둔해 10살이 되어서야 겨우 글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배우고 돌아서면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기억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심지어 남들은 과거에 합격하는 스무 살 때 비로소 글을 지게 되었다. 자신의 아둔한 능력을 깨달은 그는 다른 사람이 수 십 번 읽을 때 자신은 몇백 번 혹은 몇 천 번 읽고, 또 다른 사람이 몇백 번을 읽으면 자신은 몇천 번 혹은 몇만 번을 읽었다고 한다. 덕분에 그는 59세라는 지긋한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기에 이른다.

비록 아둔했지만 자신의 아둔함에 굴하지 않고 끊임없이 독서열을 불태웠던 그. 정약용 선생도 말했듯이 부지런히 노력하여 결실을 얻은 그가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워 보였다.

 

정약용이 말한 세 가지 병통이란 잘 외우는 사람은 소홀하기 쉽고, 글을 빨리 짓는 사람은 들뜨기 쉽고, 재빨리 깨닫는 사람은 거칠기 쉽다는 것이었다. 반면 어리석고 노둔하더라도 계속 노력하는 사람은 넓어지고 뚫리게 되어서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P.254)

 

2007/07/29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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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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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리쿠, 그녀의 작품들이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이 여러 출판사를 통해 앞다퉈 출간되고 있다. 내가 그녀를 만난지 불과 1년만에 그녀의 작품들이 결국 나의 책장 한켠을 완전히 점령하고 말았다.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 왠지 그녀답지 않은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그녀의 이야기 속에는 항상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공포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호텔 정원처럼 탁 트인 공간에서는 그런 은밀하고 스멀스멀한 공포가 생길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거울의 방' 같은 이야기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거울의 방'은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여 있어서 거울 속에 거울이 있고, 또 그 거울 속에 거울이 있고... 끊임없이 안으로 들어가도 거울이 존재한다.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을 읽으면서 마치 '거울의 방'에 서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대신 거울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야기가 존재한다.

읽지 않은 분량보다 읽은 분량이 더 많아질 때까지도 이야기의 구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몇 번씩 머리 속으로 상황을 그려보고 나서도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아 좌절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은 크게 '호텔 정원에서', '나그네들',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의 세 가지 이야기로 나누어져 있으며, 세가지 이야기들이 번갈아가며 등장한다.

 

호소부치는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이라는 각본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의 개연성이 부족해 보이고, 어떻게 결말을 써야할지 고민이 돼서 평소 남들과 다른 명쾌한 두뇌로 조언을 주었던 구스노키에게 자문을 구한다.

호소부치의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은 <고백>이라는 일인극을 준비하던 가미야라는 각본가가 <고백>의 주인공을 발표하기 전날 호텔 정원에서 열린 파티에서 독살 당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얼마 후 가미야가 죽은 호텔 정원에서 <고백>의 주인공 후보였던 두 여배우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여배우가 독살을 당하고 만다.

 

각본가 가미야가 준비하고 있던 <고백>은 세 명의 여배우와 형사가 등장한다.

각본가 가미야가 <고백>의 주인공을 발표하기 직전 죽게되자, 세 명의 주인공 후보가 용의자 선상에 오르게 된다. 일인극 <고백>의 주인공이 되려면 각본가 가미야가 제공한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의 큰 틀을 바꾸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각자의 여배우들이 자신의 이야기로 각색을 해서 오디션에 참가해야만 했다. 여배우에게 있어서 자신의 삶을 연극을 통해 고스란히 보여준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었지만, 가미야가 워낙 대단한 각본가였기 때문에 그녀들은 오디션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고백>은 한 여배우를 협박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고, 오디션을 통해 주인공을 뽑는다고는 했지만 사실 주인공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형사는 <고백>을 자신 앞에서 연기해 보라고 여배우들에게 주문한다. 오랫동안 형사 일을 해오면서 거짓말을 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온 그는 범인이 하는 거짓말을 금방 알아볼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래서 한 명의 여배우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그녀는 순순히 자신의 범행을 자백했다. 사건이 종결된 후 우연히 범행 장소를 다시 찾아가게 된 형사는 그녀가 가미야를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실 그녀는 오랫동안 가미야를 사랑해 왔다. 그러나 가미야는 그녀를 한번도 돌아봐주지 않았을 뿐더러, 그녀보다 어린 여배우와 재혼을 해버렸다. 우연히 가미야의 집을 방문하게 된 그녀는 가미야가 어이없는 사고로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사고사와 가미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를 사랑해왔던 그녀의 사랑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그녀는 스스로 그를 죽인 범인을 연기하게 된 것이다.

 

사랑하는 남자를 죽인 여자.

그렇게 되는 것이 당신이 바라는 바였습니다.

당신이 그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에.

당신이 누구보다 깊이 사랑한 그 사람을, 마지막까지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이 여의치 않았던 그를, 가장 마지막에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스스로를 연기해 온 것입니다. (p.339)

 

'나그네들'은 가장 온다 리쿠다운 이야기가 등장하는 부분이다.

마치 스멀스멀한 공포가 피어오를 것만 같은 어두운 밤, 두 남자가 선로를 따라 길을 걷고 있다. 그들은 예전에는 기차역이었지만 지금은 극장으로 개조되어 연극 무대로 바뀐 곳을 찾고 있다. 나이든 남자와 젊은 남자는 자신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걷고 있다. 그 극장에서 상영되었던 연극과 관련된 괴기스러운 이야기, 한 호텔 정원에서 죽은 젊은 여자의 이야기, 새 아버지의 양녀를 좋아했던 남자의 이야기 등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는 하나같이 물음표가 남는 이야기들이다.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의 경계

 

이렇게 마구 섞여 정리가 되지 않았던 이야기들은 결국 호소부치의 각본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로 정리가 된다. 그리고 비로소 온다 리쿠의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의 혼란스러움도 정리가 되고, 그녀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했던가를 생각하게 된다.

보르헤스는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를 독자들이 실재(實在)라고 믿게 하기 위해 가상의 책을 만들어 인용하곤 한다. 어느 책에서 인용했다는 것까지 나와있는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 독자들은 당연히 실재(實在)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결국 그 책마저 그가 가상으로 만들어 낸 책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엄청난 혼란이 찾아온다. 과연 어디까지가 실재(實在)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에 대한 경계를 알 수 없어서 생기는 혼란이다.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을 읽으면서 나는 보르헤스의 이야기를 읽을 때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야기 속에 또다른 이야기가 존재하고, 또다른 이야기 속에 또다른 이야기가 또 존재하는 이야기의 연속. 『삼월은 붉은 구렁을』처럼 이야기의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온다 리쿠, 그녀는 독자들에게 쉽게 읽혀지는 이야기가 아닌 이처럼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이야기를 택했던 것일까.

그것은 이야기의 중심이 되고 있는 호텔 정원을 들여다 보면 알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호텔 정원'이라는 공간은 그리 은밀한 곳이 되지 못한다. 호텔 정원은 탁 트여져 있는 공간으로 다른 사람을 관찰하기 쉬운 곳이다. 반대로 다른 사람들도 나를 관찰하기 쉬운 곳이다. 즉 내가 관객이 되어 다른 사람들의 연기를 볼 수 있기도 하지만, 내가 배우가 되어 다른 사람들이 나의 연기를 볼 수 있기도 하다. 그녀는 경계가 없는 현실과 허구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역시 무대와 현실은 동전의 앞뒤. 보잘 것 없는 허구라도 현실의 일부. 항상 시대와 함께 나란히 달리는, 그것이 연극이지. (p. 116)

 

2007/07/28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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