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드 게임 도코노 이야기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내 어린시절의 트라우마

 

나는 잠을 잘 땐 유난히 예민하다. 아주 작은 소리에도 깜짝 놀라며 일어나곤 한다. 그리고는 벌렁거리는 심장 때문에 다시 잠을 청하기가 힘들어진다. 성격이 예민한 탓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알고보면 그리 예민한 성격도 아니다. 유독 잠을 잘 때만 그런 것이다. 그래서 어떤 계기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된 것이다.

 

문득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이었던가. 엄마가 막 가게를 시작했을 때 가끔씩 가게에서 주무실 때가 있었다. 아빠의 회사도 엄마 가게 근처였기 때문에 나와 동생은 할머니와 지냈다. 그러나 독실한 기독교 신자셨던 할머니께서는 토요일이 되면 시골로 내려가셨다. 그럴때면 나와 동생은 단둘이서 자야만 했다.

그날도 그런 날 중에 하루였다. 잠결에 큰소리가 들렸고,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도 들렸다. 깜짝 놀라서 일어난 나는 그것이 옆집 아줌마 아저씨가 싸우는 소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빨간 벽돌집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회색빛의 촌스러운 시멘트 집이 드문드문 있었고, 대부분은 한옥이었다. 그런 한옥 집에서 방음은 커녕 옆집의 재채기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한참을 옆집의 싸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형광등에서 불꽃이 튀었다. 아직 잠결이라 사태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나는 금새 천장으로 번지는 불꽃을 보고서야 동생을 깨웠다. 그 일이 있은 후 우리 집은 엄마 가게가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엔드게임

 

도코노 일족은 방대한 양의 서적을 암기하는 힘, 멀리서 생긴 일을 아는 힘, 가까운 미래를 예견하는 힘 등 평범한 사람들은 가질 수 없는 신비한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신비한 능력을 절대 남용하거나 오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그 신비한 능력을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사용했다. 『빛의 제국』과 『민들레 공책』에는 그런 도코노 일족이 등장한다.

 

그러나 『엔드게임』에는 지금까지의 도코노 일족과는 이질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눈에는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는 이질적인 '무언가'가 보인다. '그것'은 그들이 '그것'을 보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에 따라서 다르게 보인다. 에이코의 눈에는 '그것'이 멋대로 줄기가 뻗친 '상한 딸기'로 보이고, 도리코의 눈에는 '은색의 볼링핀'으로 보인다. 어떤 것으로 보이는가는 그들의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다. 어린 시절 도리코는 캔 공장에서 끔찍한 모습을 목격하게 되고, 그 캔들이 쏟아지는 소리가 마치 볼링핀이 쓰러지는 소리처럼 도리코에게 들렸다. 그래서 도리코는 하얀색이 아닌 캔처럼 '은색의 볼링핀'을 보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이질적인 '그것'이 눈에 보이면 '그것'을 '뒤집어' 버린다. 그러다가 내공이 부족한 사람들은 '그것'에게 오히려 '뒤집힘'을 당하기도 한다. 누구보다 강하다고 생각했던 도리코의 아버지 하지메가 어느날 사라진다. 도리코와 도리코의 어머니 에이코는 아버지가 '뒤집혔다고' 생각하며, 자신들도 언젠가는 '뒤집힘'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사실 '뒤집힘'은 더이상 의미가 없었다. 서로가 '뒤집고 뒤집히는' 상태가 계속되다 보니, 어느 순간에는 적(흑)과 동지(백)의 개념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두려움으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던 것이다. 더이상 '뒤집힘'이 의미가 없어졌다는 것은 도코노 일족으로서의 그들의 정체성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서 그렇게 믿고 살아가려 한다.

 

끝의 시작의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p. 324)

 

트라우마, THE END.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있듯이, 트라우마도 생각하기 나름이다. 더이상 의미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두려움에 떨었던 그들처럼, 우리가 트라우마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도 이미 실체가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른다. 실체가 없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그것을 극복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시길.

 

현 시점에서는 더이상의 "도코노 이야기"는 없을거라고 한다. 그동안 신비한 능력을 가진 도코노 일족을 엿보는 재미가 솔솔 했는데. 상상력이 얼마나 무궁무진한지, 온다 리쿠의 머리 속을 한번 들여다 보고 싶을 정도이다. 그녀의 다음 작품에는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가 펼쳐질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2007/08/03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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