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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를 만나다
빈센트 반 고흐 그림, 메릴린 챈들러 맥엔타이어 시, 문지혁 옮김, 노경실 글 / 가치창조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젯밤에 고흐를 만났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처음으로 고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벽의 차디찬 기운이 옷 속으로 스며들 때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아쉬웠다. 아침이 되자마자 다시 그를 만나러 갔다. 그러나 아무런 이야기도 나눌 수가 없었다. 아침의 또렷한 정신으로는 그를 제대로 만날 수가 없는가보다. 다시 밤을 기다려야겠다.
회색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 (1887,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고흐만의 붓터치가 안면을 감싸고 있는 그림. 덕분에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어떤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내면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생동감 같은 것. 옆눈짓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는 그, 약간 토라진 것 같기도 하고. 무엇을 보고 있는거지? 굳게 다문 입술, 그에게 물어보아도 대답해 줄 것 같지는 않다.
반 고흐의 침실 (1888,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삐뚤삐뚤한 방, 이런 방에서는 도저히 휴식을 못 취할 것 같다. 방이 너무 불안정해 보인다. 그래도 고흐에게는 편안한 곳이겠지. 그는 일부러 그의 방을 이렇게 그려냈겠지. 자신만이 이 편안한 공간을 누리기 위해서, 아무도 불편할 것 같아 찾아오지 않게 만들려고. 침대 위로 액자가 떨어질 것 같다. 똑바로 걸어주고 싶은데.
아를의 공원 입구 (1888, 워싱턴, 필립스 컬렉션)
왜 벤치에 앉아있는 사람은 모두들 검은 옷차림일까. 노랑의 길과 극명하게 되조되는 색감. 아마 9월과 10월의 어느 날이겠지. 나뭇잎이 햇빛이 많이 투과된 곳만 노랗게 물들어 있으니.
고흐는 외로웠다.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공원으로 나가니 함께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검게 표현했으리라. 자신보다 그들이 더 외로워 보이도록, 더 우울해 보이도록 말이다.
우체부 룰랭의 초상 (1888, 디트로이트, 디트로이트 아트 인스티튜트)
풍성한 수염도 멋지고, 짙은 색의 제복도 멋지다. 아마도 동생 테오와 편지를 주고 받다가 우체부와 친해졌겠지. 무언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듯,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눈빛에는 무언가가 비어있다. 일이 힘들었던 것일까, 아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씨 뿌리는 사람 (1888, 오테를로, 크뢸러 뮐러 미술관)
발 아래 빌밭이 마치 파도처럼 석양에 넘실거린다. 지는 태앙인데 너무 찬란하다.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가장 찬란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마치 고흐 자신처럼.
바위들 (1888, 휴스턴, 휴스턴 미술관)
어떻게 바위를 그릴 생각을 했을까. 그러니까 고흐다운 것이겠지. 바람이 불어도 흔들림이 없는 고흐와는 달리 나무는 바람 부는대로 제 몸을 향하고 있다. 나무에 이는 보라빛 바람을 잡고 싶다.
아이리스 (1889, 로스앤젤레스, 폴 게티 미술관)
노랑이 주조를 이루던 이전의 그림과는 다른 색감이 마음에 든다. 병실 창 밖에 피어있는 이 아이리스를 보면서 고흐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정적이거나 우울한 것 보다는 오히려 활기가 느껴지는 그림이다. 치료 덕분인가.
노란 하늘과 태양이 있는 올리브 숲 (1889, 미니애폴리스 아트 이스티튜트)
씨 뿌리는 사람에 등장하는 태양보다 덜 강렬한 태양. 반면에 대지는 꿈틀거리고 있다. 이전보다 색채가 많이 절제된 느낌이다.
연인이 있는 관목 풍경 (1890, 오하이오, 신시내티 미술관)
고흐에게 연인이 생겼기 때문일까. 그림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색감도 싱그러운 톤으로 바뀌었다. 그의 거친 붓터치마저 부드러워졌다고나 할까.
다정히 걸어가고 있는 연인이 보이다.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앞모습이리라. 그들이 걸어와야 할 길이 그들의 앞에 놓여있다. 과연 그들은 얼마만큼 걸어갔을까.
클림트의 노랑은 "황금빛 유혹"이라 했다. 그렇다면 고흐의 노랑은 "열정과 갈망"이 아닐까. 그는 끊임없이 태양을 그렸다. 그는 달과 별을 밤에 뜨는 태양이라며 태양이 사라진 밤 하늘을 그렸다. 해바라기, 진정한 그의 자화상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쉬지않고 태양만 바라보는 해바라기꽃과 고흐, 그 열정이 닮았다.
2007/11/28 by 뒷북소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