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서 여행을 멈추다 - 멈추는 순간 시작된 메이의 진짜 여행기
메이 지음 / 삼성출판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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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추는 순간 시작된 메이의 진짜 여행기
매일 매일 반복되는 일상, 더 나아짐도 뒤떨어짐도 없는 지루한 일상에 우울해 하고 있던 즈음에 '멈추는 순간 시작된 메이의 진짜 여행기'를 만나게 되었다.
나처럼 메이도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고, 언제나 똑같은 일요일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그녀 안에서  '지금 당장 떠나야만 해!'라고 누군가가 외쳤다. '떠나지 않으면 내 인생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지 않을 거야!'라며 초조감이 그녀의 등 뒤에 달라붙어 괴롭히자 '그래! 그림 여행을 떠나자! 인도로.' 그렇게 결심하며 인도로 향했다.
 
"세상은 인도와 다르다는 걸 깨달았죠. 인도는 억울한 일이 많은 나라예요. 많은 사람들이 너무 가난하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해요. 인간다움 삶을 산다고 할 수도 없죠." - 람 (p. 39)
 
처음 그녀가 인도를 향할 때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첫 여행 이후 늘 그리워하던 인도를 돌아다니며 그림 여행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골랄기또리아라는 인도의 한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혼자 인도를 바꿔 보겠다고 발버둥치고 있는 람을 만난 이후 그녀의 여행은 멈춰 버렸다. 그녀는 마음껏 물을 사용할 수 있는 편한 호텔이 아니라 마을의 흙집을 얻어 묵었고, 입맛에 맞지 않는 그들의 음식을 함께 나눠 먹으며 가까워지려고 했다. 혼자 발버둥치고 있는 람을 도와 공연을 준비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녀처럼 여행을 온 사람들도 함께하기 시작했고, 여행에서 만난 지니는 그녀처럼 여행을 잠시 멈추고 마을에서 함께 생활했다.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도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처럼 먹고 생활한다고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나아지려는 노력도, 더 나아질 수 있다는 믿음도 없었다. 그들의 노력은 인도 사람들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이 변화를 당했다고나 할까. 항상 자신을 먼저 생각했던 메이는 여행을 통해 바깥세상과 타인을 향해 눈을 돌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더이상 변할 수 있는게 없다고 판단한 메이는 여행에서 돌아오고, 지니는 잠시 멈추었던 여행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언제나 자신을 향해서만 여행을 하고 있던 나는 이제 가끔은 바깥세상과 타인을 향해 눈을 돌릴 수 있게 됐다. - 메이 (p. 112)
 
그녀가 '인도, 내 인생의 배꼽'이라고 표현했듯이, 여행자들에게 인도는 상당히 매력적인 곳이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이는 대학 시절에 인도 여행을 떠났다가 그곳에 매료되어 몇 년을 그곳에서 보낸 사람도 있다. 아마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접할 수 있으리라.
잠시였지만 메이 덕분에 답답하고 지루했던 내 일상에 숨통이 트였다. 언젠가는 그곳을 직접 보게 되리라. 그날을 기대하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2007/12/19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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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 - 조선 천재 1000명이 죽음으로 내몰린 사건의 재구성
신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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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과 기축옥사, 오래전 국사 교과서에서 스치듯 배웠던 기억은 있지만 솔직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기축옥사는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계기로 일어나 옥사로, 무려 1,000여명이 연루되어 화를 입은 "조선 최대의 역모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교과서가 아주 짧게 서술한 이 사건을 문화사학자인 신정일이 재구성했다.

 

전주에서 태어난 정여립은 고을의 자랑거리였지만, 아무런 끈이 없었던 그에게 출사는 쉽지 않았다. 보통 호남 출신들은 동인의 편에 섰지만, 그는 이이가 있는 서인의 편에 들어갔다. 그는 이이의 추천으로 관직을 얻지만 이이가 죽고나자 스승을 비판하며 동인의 편에 섰다. 그의 성격은 상당히 꼬장꼬장했다고나 할까. 임금인 선조 앞에서도 고개를 들고 눈을 내리깔지 않았으며, 선조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싫은 내색까지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관직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그는 대동계를 조직하고 고을, 나아가 호남의 민심을 얻게 된다.

 

이이가 죽자 서인들은 세력을 잃게 되고, 그 중에서도 송익필은 노비의 신분으로 떨어져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게 된다. 그는 정여립의 대동계 조직이 그를 비롯한 서인 모두에게 희망을 되돌려 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송익필 각본, 정철 연출의 "정여립 역모사건"이 터지게 된 것이다.

 

"정여립 역모사건"에 대한 견해는 분분하다. 정말 송익필의 각본에 정철이 연출을 맡아 날조된 사건이라는 시각도 있고, 실제로 정여립이 역모를 계획해서 이것을 빌미로 동인 세력을 밀어내고자 했던 '사화'라는 시각도 있다. 또 단순히 날조냐 진짜냐를 떠나 그것이 담고 있는 역사적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 날조냐 진짜냐를 떠나 "정여립 역모사건"은 동학혁명을 초래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정여립의 천하공물설과 대동사상은 허균의 변혁사상인 호민론으로, 정약용의 탕무혁명론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 이후 전라도는 반역의 고장으로 찍혀 차별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한 분노가 쌓이고 쌓여 마침내 동학농민혁명으로 분출하게 된 것이다.

당시 호남의 한 선비는 "전라도에 인재가 나려면 앞으로 400년은 지나야 한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신기한 것은 그로부터 400년이 지나 그곳 출신의 대통령이 나왔다는 것이다.

 

정치와 권력, 그 앞에서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다. 가족이든 친구든 스승이든,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밟고 올라가야만 했다. 자신의 형을 고변하려고 살피던 정여립의 동생이나 출사시켜준 스승을 비방한 정여립, 자신의 가문을 살리기 위해 수많은 선비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을 날조한 송익필 등. 권력 앞에서는 원칙도 소신도 모두 무너져버리는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보인다.

 

"임금이 임금 같지 않다. 임금이 우리를 사랑해주지 않는데 왜 신하인 우리들만 임금을 사랑해야 하는가?" (p. 103)

 

"백성의 마음은 곧 천명이니 백성을 괴롭히는 군주는 갈아야 한다." - 맹자 (p. 107)

 

며칠 있으면 우리 손으로 임금다운 임금,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를 뽑을 수 있는 날이 온다. 부디 그 기회를 스스로 져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2007/12/12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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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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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였던가? 교과서에서 「선학동 나그네」를 접한 이후, 주변 사람들의 추천은 있었지만 일부러 그의 작품을 찾아 읽지는 않았다.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한'이라는 것이 그닥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전 영화 《천년학》이 개봉되었을 때 우연한 기회로 『천년학』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천년학』은 이청준의 연작소설 『남도 사람』이 영화의 개봉을 맞아 새롭게 출간된 것이었다. 이 책에는 이미 이전에 영화를 통해 많이 봤던 「서편제」와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가 담겨져 있는데, 「선학동 나그네」를 영화로 만든 것이 바로 《천년학》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보지 않았다. 영화까지 보러갈 만큼 소설이 내 가슴에 꽂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청준 작가가 모자란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나는 그러한 소재들에 공감을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사실 제목은 끌렸지만 이전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역시 깊은 공감을 얻지는 못할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씩 읽어나갈 때마다 심호흡을 하며 잠시 멈추어야만 했다. 이번 작품에서도 그는 여전히 망국의 설움, 전쟁의 고통, 이념의 갈등 등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것들을 겪은 사람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가슴이 저릴 정도였다.

 

표제작인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는 일본의 노예 교육을 피해 지난날의 소련으로 유학길에 오른 유일승 씨가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조국을 잊고 살아야만 했던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선인들의 독립투쟁을 억압하기 위해 지금의 중앙아시아 우즈베크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한 그는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고국도, 고향도, 가족도 모두 잊고 살아야만 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이름까지 유일승에서 노일승으로, 유 세르게이로 바꾸면서 말이다. 곧이어 고국에서 전쟁이 터졌고, 그는 또 한번 그곳을 잊어야만 했다. 그렇게 잊고 지냈던 고국에서 월드컵이 열리자 그는 잊고 지냈던 가족과 고국을 찾아온다. 그러나 다시 고국을 잊으려고 돌아간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것들과 함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상실감이 너무 컸던 탓일까. 

사실 잊고 지내야 했던 그의 심정을 100% 공감하지는 못했지만, 가슴 한켠에서부터 시린 어떤 것이 내 목구멍으로 넘어왔다. 책의 순서대로가 아니라 일부러 표제작부터 읽었던 것인데 잠시 책을 덮어두어야만 했다. 역시 대작가는 달랐다.

 

이 책에는 유일승 씨 뿐만이 아니라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간 이들도 있고, 강제로 멕시코까지 끌려가 노동을 착취 당했던 이들도 있다. 그들은 모두 '잊고 지내는 것만이 사는 길'이었고, '잊고 지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가 제목이 되었을 것이다.

이 작품집에 실린 또다른 소설인 「이상한 선물」을 쓰는 도중에 작가는 병원으로부터 폐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정말 제목처럼 '이상한 선물'을 받은 것이다.

 


그는 인물을 이야기할 때 바로 소설로 쓰는 것이 아니라 에세이로 먼저 쓰고, 그 에세이를 에세이 소설로, 에세이 소설을 다시 소설로 쓰곤 한다. 그런 방법으로 인물을 쓰는 것은 에세이가 소설에 비해 인물을 보다 직접적이고 주관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가 오직 상상으로만 만들어진 인물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변에서 보고 들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이런 방법으로 담아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낯설게 느껴지지가 않았나 보다.

그는 에세이 소설 「귀항지 없는 소설」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만이 그 어려운 어둠 속 길을 가지 않고 다른 수많은 사람도 각기 자신의 어둠 속 산길을 외롭고 힘들게 가고 있다는 것이 그 각각의 독행자들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일"이며, "자신의 소설은 적어도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말이다. 아직 그가 담아내지 못한 인물들이 많다고 한다. 하루 빨리 그의 병이 완쾌되어 또 다른 독행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으면 한다.

 

언젠가 탄식을 금치 못해하는 내게 시를 쓰는 한 이국 친구가 충고해왔다.

─ 너는 물론 그 길을 계속해가야 한다. 그 밤 산길행이 어째 너 혼자뿐이냐. 네가 가고 있는 산 이웃에도 다른 산들이 있고, 그곳에도 저 혼자 두렵고 어두운 제 산길을 가는 외로운 독행자들이 있을 수 있지 않으냐. 그들은 모두 깨어진 영혼들이다. 네 소설은 그 깨어진 영혼들의 존재, 그 밤 산길의 보이지 않는 독행자들의 존재를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다. 자신만이 그 어려운 어둠 속 길을 가지 않고 다른 수많은 사람도 각기 자신의 어둠 속 산길을 외롭고 힘들게 가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은 우리 삶의 길에 대한 근본적 이해뿐 아니라, 그 각각의 독행자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일이냐. 네 소설은 적어도 그것을 할 수 있다. (「귀항지 없는 항로」, p280)

 

2007/12/10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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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대지
생 텍쥐페리 지음, 최복현 옮김 / 이른아침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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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를 다닐 무렵, 나에게는 우상과도 같았던 사촌 언니가 한명 있었다. 그 언니는 소위 명문고라는 곳에서 항상 1등만 독차지하며 학생회장을 했고, 흔히 명문대라고 하는 곳을 들어갔다. 방학이 되기만 하면 서울로 올라가 언니의 포스를 둠뿍 담아오려고 했다.

우리 집에는 책은 많았지만, 내 또래가 볼만한 동화책은 없었다. 온통 나이 많은 언니 오빠들에게 물려받은 색이 바랜 두꺼운 책 밖에 없었다. 물론 이해도 못하면서 그 책들을 읽곤 했다. 4학년 겨울방학 때였던가? 자신의 책장 앞에서 두리번 거리고 있던 나에게 언니가 책 한권을 꺼내 주었다. 책을 펼쳐보니 모자와 아주 잘생긴 남자 아이가 그려져 있었다. 이전에 엄마가 그림책을 읽어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억상으로는 처음 만난 그림이 있는 책이었다.

그날 이후 항상 "어린 왕자"의 여자 친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프랑스 이름 앞에 붙는 "생"은 귀족에게만 붙는 것이라는 것을 누군가로부터 들었다. 그때부터 "어린 왕자"와 "생텍쥐페리"를 동일시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고, 생텍쥐페리의 다른 작품에서 그의 사진을 보고 나서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내가 상상했던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와 같은 모습이었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생텍쥐페리의 '장미'였던 콘수엘로와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생텍쥐페리의 전설적인 사랑』을 읽고, 그도 우리와 다름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내 머리 속에 들어있던 "어린 왕자"의 환상을 깨 주었다.

『인간의 대지』는 사막 위를 비행하며 우편 배달을 했던 생텍쥐페리의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료 기요메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던 일, 그 사건에 영감을 받아 조종사라는 직업을 그려냈다고 한다.

 

우리와 같은 직업의 소유자들은 해후를 오랫동안 기다리는 습관이 있다. (p. 48)

"생명을 계속 이어가도록 해주는 것, 그건 오직 걸음을 내딛는 거야. 한 걸음 한 걸음 언제나 다시 시작되는 바로 그 똑같은 발걸음 말이지." (p. 67)

 

특히 자신이 실종되면 아내가 보험금을 수령하는데 너무 오래 걸려서 죽든지 살든지 사람들이 발견할 수 있는 곳으로 걸었다는 기요메의 이야기, 그냥 그는 웃으면서 한 이야기였지만 생텍쥐페리에게 영감을 주었듯이 내 가슴에도 깊이 박혔다. 삶과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지만, 때론 사랑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사실 생텍쥐페리를 좋아는 하지만, 나에게는 그리 재미있지 않은 책이었다. 여전히 그는 나에게 "어린 왕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의 인간적인 고민과 조종사로서의 삶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어린 왕자"에 대한 환상을 깨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2007/12/09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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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를 만나다
빈센트 반 고흐 그림, 메릴린 챈들러 맥엔타이어 시, 문지혁 옮김, 노경실 글 / 가치창조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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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에 고흐를 만났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처음으로 고흐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벽의 차디찬 기운이 옷 속으로 스며들 때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아쉬웠다. 아침이 되자마자 다시 그를 만나러 갔다. 그러나 아무런 이야기도 나눌 수가 없었다. 아침의 또렷한 정신으로는 그를 제대로 만날 수가 없는가보다. 다시 밤을 기다려야겠다.

 

회색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 (1887,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고흐만의 붓터치가 안면을 감싸고 있는 그림. 덕분에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지만 어떤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내면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생동감 같은 것. 옆눈짓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는 그, 약간 토라진 것 같기도 하고. 무엇을 보고 있는거지? 굳게 다문 입술, 그에게 물어보아도 대답해 줄 것 같지는 않다.

 

반 고흐의 침실 (1888,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삐뚤삐뚤한 방, 이런 방에서는 도저히 휴식을 못 취할 것 같다. 방이 너무 불안정해 보인다. 그래도 고흐에게는 편안한 곳이겠지. 그는 일부러 그의 방을 이렇게 그려냈겠지. 자신만이 이 편안한 공간을 누리기 위해서, 아무도 불편할 것 같아 찾아오지 않게 만들려고. 침대 위로 액자가 떨어질 것 같다. 똑바로 걸어주고 싶은데.

 

아를의 공원 입구 (1888, 워싱턴, 필립스 컬렉션)

왜 벤치에 앉아있는 사람은 모두들 검은 옷차림일까. 노랑의 길과 극명하게 되조되는 색감. 아마 9월과 10월의 어느 날이겠지. 나뭇잎이 햇빛이 많이 투과된 곳만 노랗게 물들어 있으니.

고흐는 외로웠다.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작 공원으로 나가니 함께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검게 표현했으리라. 자신보다 그들이 더 외로워 보이도록, 더 우울해 보이도록 말이다.

 

우체부 룰랭의 초상 (1888, 디트로이트, 디트로이트 아트 인스티튜트)

풍성한 수염도 멋지고, 짙은 색의 제복도 멋지다. 아마도 동생 테오와 편지를 주고 받다가 우체부와 친해졌겠지. 무언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듯,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눈빛에는 무언가가 비어있다. 일이 힘들었던 것일까, 아님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씨 뿌리는 사람 (1888, 오테를로, 크뢸러 뮐러 미술관)

발 아래 빌밭이 마치 파도처럼 석양에 넘실거린다. 지는 태앙인데 너무 찬란하다.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가장 찬란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마치 고흐 자신처럼.

 

바위들 (1888, 휴스턴, 휴스턴 미술관)

어떻게 바위를 그릴 생각을 했을까. 그러니까 고흐다운 것이겠지. 바람이 불어도 흔들림이 없는 고흐와는 달리 나무는 바람 부는대로 제 몸을 향하고 있다. 나무에 이는 보라빛 바람을 잡고 싶다.

 

아이리스 (1889, 로스앤젤레스, 폴 게티 미술관)

노랑이 주조를 이루던 이전의 그림과는 다른 색감이 마음에 든다. 병실 창 밖에 피어있는 이 아이리스를 보면서 고흐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정적이거나 우울한 것 보다는 오히려 활기가 느껴지는 그림이다. 치료 덕분인가.

 

노란 하늘과 태양이 있는 올리브 숲 (1889, 미니애폴리스 아트 이스티튜트)

씨 뿌리는 사람에 등장하는 태양보다 덜 강렬한 태양. 반면에 대지는 꿈틀거리고 있다. 이전보다 색채가 많이 절제된 느낌이다.

 

연인이 있는 관목 풍경 (1890, 오하이오, 신시내티 미술관)

고흐에게 연인이 생겼기 때문일까. 그림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색감도 싱그러운 톤으로 바뀌었다. 그의 거친 붓터치마저 부드러워졌다고나 할까. 

다정히 걸어가고 있는 연인이 보이다.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앞모습이리라. 그들이 걸어와야 할 길이 그들의 앞에 놓여있다. 과연 그들은 얼마만큼 걸어갔을까. 

 

클림트의 노랑은 "황금빛 유혹"이라 했다. 그렇다면 고흐의 노랑은 "열정과 갈망"이 아닐까. 그는 끊임없이 태양을 그렸다. 그는 달과 별을 밤에 뜨는 태양이라며 태양이 사라진 밤 하늘을 그렸다. 해바라기, 진정한 그의 자화상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쉬지않고 태양만 바라보는 해바라기꽃과 고흐, 그 열정이 닮았다.

 

2007/11/28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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