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대지
생 텍쥐페리 지음, 최복현 옮김 / 이른아침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 나에게는 우상과도 같았던 사촌 언니가 한명 있었다. 그 언니는 소위 명문고라는 곳에서 항상 1등만 독차지하며 학생회장을 했고, 흔히 명문대라고 하는 곳을 들어갔다. 방학이 되기만 하면 서울로 올라가 언니의 포스를 둠뿍 담아오려고 했다.

우리 집에는 책은 많았지만, 내 또래가 볼만한 동화책은 없었다. 온통 나이 많은 언니 오빠들에게 물려받은 색이 바랜 두꺼운 책 밖에 없었다. 물론 이해도 못하면서 그 책들을 읽곤 했다. 4학년 겨울방학 때였던가? 자신의 책장 앞에서 두리번 거리고 있던 나에게 언니가 책 한권을 꺼내 주었다. 책을 펼쳐보니 모자와 아주 잘생긴 남자 아이가 그려져 있었다. 이전에 엄마가 그림책을 읽어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기억상으로는 처음 만난 그림이 있는 책이었다.

그날 이후 항상 "어린 왕자"의 여자 친구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프랑스 이름 앞에 붙는 "생"은 귀족에게만 붙는 것이라는 것을 누군가로부터 들었다. 그때부터 "어린 왕자"와 "생텍쥐페리"를 동일시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고, 생텍쥐페리의 다른 작품에서 그의 사진을 보고 나서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내가 상상했던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와 같은 모습이었는데, 실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생텍쥐페리의 '장미'였던 콘수엘로와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생텍쥐페리의 전설적인 사랑』을 읽고, 그도 우리와 다름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내 머리 속에 들어있던 "어린 왕자"의 환상을 깨 주었다.

『인간의 대지』는 사막 위를 비행하며 우편 배달을 했던 생텍쥐페리의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해 죽은 줄로만 알았던 동료 기요메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던 일, 그 사건에 영감을 받아 조종사라는 직업을 그려냈다고 한다.

 

우리와 같은 직업의 소유자들은 해후를 오랫동안 기다리는 습관이 있다. (p. 48)

"생명을 계속 이어가도록 해주는 것, 그건 오직 걸음을 내딛는 거야. 한 걸음 한 걸음 언제나 다시 시작되는 바로 그 똑같은 발걸음 말이지." (p. 67)

 

특히 자신이 실종되면 아내가 보험금을 수령하는데 너무 오래 걸려서 죽든지 살든지 사람들이 발견할 수 있는 곳으로 걸었다는 기요메의 이야기, 그냥 그는 웃으면서 한 이야기였지만 생텍쥐페리에게 영감을 주었듯이 내 가슴에도 깊이 박혔다. 삶과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지만, 때론 사랑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사실 생텍쥐페리를 좋아는 하지만, 나에게는 그리 재미있지 않은 책이었다. 여전히 그는 나에게 "어린 왕자"의 이미지가 강하다. 그의 인간적인 고민과 조종사로서의 삶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어린 왕자"에 대한 환상을 깨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2007/12/09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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