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뒤흔든 최대 역모사건 - 조선 천재 1000명이 죽음으로 내몰린 사건의 재구성
신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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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과 기축옥사, 오래전 국사 교과서에서 스치듯 배웠던 기억은 있지만 솔직히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기축옥사는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계기로 일어나 옥사로, 무려 1,000여명이 연루되어 화를 입은 "조선 최대의 역모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교과서가 아주 짧게 서술한 이 사건을 문화사학자인 신정일이 재구성했다.

 

전주에서 태어난 정여립은 고을의 자랑거리였지만, 아무런 끈이 없었던 그에게 출사는 쉽지 않았다. 보통 호남 출신들은 동인의 편에 섰지만, 그는 이이가 있는 서인의 편에 들어갔다. 그는 이이의 추천으로 관직을 얻지만 이이가 죽고나자 스승을 비판하며 동인의 편에 섰다. 그의 성격은 상당히 꼬장꼬장했다고나 할까. 임금인 선조 앞에서도 고개를 들고 눈을 내리깔지 않았으며, 선조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싫은 내색까지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관직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그곳에서 그는 대동계를 조직하고 고을, 나아가 호남의 민심을 얻게 된다.

 

이이가 죽자 서인들은 세력을 잃게 되고, 그 중에서도 송익필은 노비의 신분으로 떨어져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게 된다. 그는 정여립의 대동계 조직이 그를 비롯한 서인 모두에게 희망을 되돌려 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송익필 각본, 정철 연출의 "정여립 역모사건"이 터지게 된 것이다.

 

"정여립 역모사건"에 대한 견해는 분분하다. 정말 송익필의 각본에 정철이 연출을 맡아 날조된 사건이라는 시각도 있고, 실제로 정여립이 역모를 계획해서 이것을 빌미로 동인 세력을 밀어내고자 했던 '사화'라는 시각도 있다. 또 단순히 날조냐 진짜냐를 떠나 그것이 담고 있는 역사적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 날조냐 진짜냐를 떠나 "정여립 역모사건"은 동학혁명을 초래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정여립의 천하공물설과 대동사상은 허균의 변혁사상인 호민론으로, 정약용의 탕무혁명론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 이후 전라도는 반역의 고장으로 찍혀 차별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한 분노가 쌓이고 쌓여 마침내 동학농민혁명으로 분출하게 된 것이다.

당시 호남의 한 선비는 "전라도에 인재가 나려면 앞으로 400년은 지나야 한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신기한 것은 그로부터 400년이 지나 그곳 출신의 대통령이 나왔다는 것이다.

 

정치와 권력, 그 앞에서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다. 가족이든 친구든 스승이든,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밟고 올라가야만 했다. 자신의 형을 고변하려고 살피던 정여립의 동생이나 출사시켜준 스승을 비방한 정여립, 자신의 가문을 살리기 위해 수많은 선비들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을 날조한 송익필 등. 권력 앞에서는 원칙도 소신도 모두 무너져버리는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보인다.

 

"임금이 임금 같지 않다. 임금이 우리를 사랑해주지 않는데 왜 신하인 우리들만 임금을 사랑해야 하는가?" (p. 103)

 

"백성의 마음은 곧 천명이니 백성을 괴롭히는 군주는 갈아야 한다." - 맹자 (p. 107)

 

며칠 있으면 우리 손으로 임금다운 임금,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를 뽑을 수 있는 날이 온다. 부디 그 기회를 스스로 져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2007/12/12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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