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이청준 지음 / 열림원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중학교 때였던가? 교과서에서 「선학동 나그네」를 접한 이후, 주변 사람들의 추천은 있었지만 일부러 그의 작품을 찾아 읽지는 않았다.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한'이라는 것이 그닥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전 영화 《천년학》이 개봉되었을 때 우연한 기회로 『천년학』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천년학』은 이청준의 연작소설 『남도 사람』이 영화의 개봉을 맞아 새롭게 출간된 것이었다. 이 책에는 이미 이전에 영화를 통해 많이 봤던 「서편제」와 「소리의 빛」, 「선학동 나그네」가 담겨져 있는데, 「선학동 나그네」를 영화로 만든 것이 바로 《천년학》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보지 않았다. 영화까지 보러갈 만큼 소설이 내 가슴에 꽂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청준 작가가 모자란다는 뜻이 절대 아니다. 나는 그러한 소재들에 공감을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 사실 제목은 끌렸지만 이전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역시 깊은 공감을 얻지는 못할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씩 읽어나갈 때마다 심호흡을 하며 잠시 멈추어야만 했다. 이번 작품에서도 그는 여전히 망국의 설움, 전쟁의 고통, 이념의 갈등 등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것들을 겪은 사람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가슴이 저릴 정도였다.

 

표제작인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는 일본의 노예 교육을 피해 지난날의 소련으로 유학길에 오른 유일승 씨가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조국을 잊고 살아야만 했던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선인들의 독립투쟁을 억압하기 위해 지금의 중앙아시아 우즈베크 지역으로 강제 이주를 당한 그는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고국도, 고향도, 가족도 모두 잊고 살아야만 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이름까지 유일승에서 노일승으로, 유 세르게이로 바꾸면서 말이다. 곧이어 고국에서 전쟁이 터졌고, 그는 또 한번 그곳을 잊어야만 했다. 그렇게 잊고 지냈던 고국에서 월드컵이 열리자 그는 잊고 지냈던 가족과 고국을 찾아온다. 그러나 다시 고국을 잊으려고 돌아간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것들과 함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상실감이 너무 컸던 탓일까. 

사실 잊고 지내야 했던 그의 심정을 100% 공감하지는 못했지만, 가슴 한켠에서부터 시린 어떤 것이 내 목구멍으로 넘어왔다. 책의 순서대로가 아니라 일부러 표제작부터 읽었던 것인데 잠시 책을 덮어두어야만 했다. 역시 대작가는 달랐다.

 

이 책에는 유일승 씨 뿐만이 아니라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간 이들도 있고, 강제로 멕시코까지 끌려가 노동을 착취 당했던 이들도 있다. 그들은 모두 '잊고 지내는 것만이 사는 길'이었고, '잊고 지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곳을 다시 잊어야 했다」가 제목이 되었을 것이다.

이 작품집에 실린 또다른 소설인 「이상한 선물」을 쓰는 도중에 작가는 병원으로부터 폐암 말기라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정말 제목처럼 '이상한 선물'을 받은 것이다.

 


그는 인물을 이야기할 때 바로 소설로 쓰는 것이 아니라 에세이로 먼저 쓰고, 그 에세이를 에세이 소설로, 에세이 소설을 다시 소설로 쓰곤 한다. 그런 방법으로 인물을 쓰는 것은 에세이가 소설에 비해 인물을 보다 직접적이고 주관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그가 오직 상상으로만 만들어진 인물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주변에서 보고 들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이런 방법으로 담아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낯설게 느껴지지가 않았나 보다.

그는 에세이 소설 「귀항지 없는 소설」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만이 그 어려운 어둠 속 길을 가지 않고 다른 수많은 사람도 각기 자신의 어둠 속 산길을 외롭고 힘들게 가고 있다는 것이 그 각각의 독행자들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일"이며, "자신의 소설은 적어도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말이다. 아직 그가 담아내지 못한 인물들이 많다고 한다. 하루 빨리 그의 병이 완쾌되어 또 다른 독행자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었으면 한다.

 

언젠가 탄식을 금치 못해하는 내게 시를 쓰는 한 이국 친구가 충고해왔다.

─ 너는 물론 그 길을 계속해가야 한다. 그 밤 산길행이 어째 너 혼자뿐이냐. 네가 가고 있는 산 이웃에도 다른 산들이 있고, 그곳에도 저 혼자 두렵고 어두운 제 산길을 가는 외로운 독행자들이 있을 수 있지 않으냐. 그들은 모두 깨어진 영혼들이다. 네 소설은 그 깨어진 영혼들의 존재, 그 밤 산길의 보이지 않는 독행자들의 존재를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다. 자신만이 그 어려운 어둠 속 길을 가지 않고 다른 수많은 사람도 각기 자신의 어둠 속 산길을 외롭고 힘들게 가고 있다는 사실의 인식은 우리 삶의 길에 대한 근본적 이해뿐 아니라, 그 각각의 독행자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일이냐. 네 소설은 적어도 그것을 할 수 있다. (「귀항지 없는 항로」, p280)

 

2007/12/10 by 뒷북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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