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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일주의 역사 - 마젤란에서 우주여행까지, 인류의 역사를 바꾼 모험들
조이스 E. 채플린 지음, 이경남 옮김 / 레디셋고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세계를 처음 일주한 사람들이 남긴 가장 불운한 유산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꿈을 심어준 것이다."
세계 일주의 역사는 대양과 신대륙을 두고 패권을 다툰 강대국들의 각축장의 역사였다. 저자 조이스 채플린(Joyce E. Chaplin)은 서두에서 위와 같이 토로한다. 그녀의 단언은 19세기에 들어 더욱 뚜렷해졌다.
그간 약 3백년 동안 일주 항해를 통해 얻은 경험과 기술은 "지구와 관련된 물질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인간의 보편적 성취에 고무"되었고, 이러한 특권은 소수 국가들만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세계 일주 탐험은 해외에 제국의 영토를 갖고 있거나, 갖기를 원하는 나라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녀는 하버드 대학교에서 초기 미국사(Early American History)를 강의하고 있다.
Joyce E. Chaplin (출처: http://scholar.harvard.edu/joycechaplin)
이 책은
16세기부터 현재까지 무려 5백 여 년의 세계 일주에 대한 역사를 다룬다. 이제 책을 펼쳐 들면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첫 항해에 나섰던 위대한 영웅들을 만나게 된다.
그녀가 총 776쪽에 걸쳐 펼쳐 보이는 방대한 지오드라마는 총 3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1막은 지구의 크기 앞에서 갖게 되는 '두려움', 이어 2막은 인간이 그 거대한 지구를 길들일 수 있다는 '자신감'. 마지막 3막은 그렇게 길들이는 행위가 정말 유익한 것인지 헷갈리게 되는 '의구심'이다.
내가 보기에 이는 저자가 '찰리 채플린'과 성이 같은데 착안, 영화나 드라마처럼 구도를 잡아보려 한 듯싶다. 이또한 나름 독창적이지 않을까.
마젤란이-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세계 최초로 일주에 나선 때는 1519년 8월이었다. 이어 드레이크, 댐피어 등 뛰어난 모험가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은 한편으로 약탈꾼의 면모도 지녔다. 식수, 식량과 무기 등 보급품을 실어 갔지만 쓸 만한 지도와 해도가 거의 없던 시절 헤매기 일쑤였고, 그러다보니 원주민들과 교역하기도 했지만, 여의치 않을 때에는 약탈 등 폭력적 방법으로 연명해야 했다. 사실 마젤란이 여행 도중 사망(1521년 4월)한 것도 막탄 섬에서 벌린 원주민과의 전투 때문이었다.
이 책에는 이와 관련하여 흥미진진한 내용이 깨알같이 흩어져 있다. 가령 현지에서 수로 안내인을 납치하는 장면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 했다. 또한 탐험에 필요한 로프와 작은 모자가 은화 수백 개보다 더 가치가 있었고, 모험담은 대나무 마디를 잘라 양쪽을 밀랍으로 막고 거기에 보관되었다고 한다. 사실 저자가 방대한 세계 일주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훑어볼 수 있는 것도 다 그들이 남긴 기록 덕분일 것이다.
처음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각축전이었고, 나중에는 영국과 네덜란드가 가세한다. 그들은 앞서 얘기한 것처럼 교역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약탈과 해적질로 향신료, 금과 은 그리고 보물들을 끌어 모았다. 이렇듯 신대륙에서 끌어 모은 수많은 재화와 부는 유럽의 중상주의를 부흥시켰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10살 때 댐피어의 탐험 이야기를 읽은 후 바다를 유달리 동경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니얼 디포는 댐피어의 모험담을 흉내 내어 '로빈슨 크루소'를 창조해 냈다.
하지만 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손실도 컸다. 신선한 물과 과일을 구하기 위해 경쟁국이 건설한 기지나 원주민들과 전쟁도 벌여야 했고, 대양에서 강풍과 폭풍을 만나 악전고투해야 했다. 또한 괴혈병과 말라리아 등 질병 그리고 향수병으로 인한 죽음도 부지기수였다.
가령 앤슨 일행은 괴혈병을 치료하기 위해 잠시 육지에 상륙하곤 했는데, 그는 땅이 인간에게 맞는 성분이며, 야채와 과일이 인간의 유일한 약이라고 주장했다. 스위스 출신 의사였던 요하네스 호퍼는 고향을 유별나게 그리워하는 증세를 가리켜 '노스탤지어'라는 용어를 만들기도 했다.
시인 바이런의 할아버지 존 바이런 이야기도 나온다. 그는 선원들의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한 인간미 넘치는 지휘관이어서 선원들의 환호를 받았다. 한편 돈 후안 뺨치는 준수한 용모와 매력으로 애정 행각을 벌였다고 전한다. 사실 바이런 이후 선원들의 사망률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가 이끌던 항해 때 괴혈병으로 죽은 선원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이어 토마스 쿡은 바이런의 항해를 벤치마킹하여 새로운 배 관리 시스템을 도입한다.
쿡은 배는 청결하게, 선실은 건조하게 유지하고, 신선한 식수를 비축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는 월리스가 시범적으로 채택했던 3교대 당번(세 집단으로 나눈 다음, 4시간씩 근무한 후 8시간을 쉬는)을 전면 실시했다. 이렇게 해서 선원들은 사망률은 급격히 떨어졌다.
쿡과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다. 바로 쿡과 함께 지구를 두 번 일주한 염소 이야기. 염소는 선원들이 이질에 걸렸을 때 쿡에게 좋은 젖을 선사했다고 한다. 이 염소가 은퇴 당시 은으로 만든 목걸이를 선사받고 쿡의 집에 있는 풀밭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으며 호사를 누렸다고 하니 과히 나쁘지 않은 팔자 아닌가! 한편 해군본부는 왕립 해군 병원에 입원할 수 있는 특혜를 허락했고, 쿡은 이 염소의 사망일을 기록(1772. 3. 28)하기도 했다.
이제 열강들은 항해술의 발달과 더불어 선원들의 건강 유지도 가능하게 되었으니 그간 가졌던 두려움에서 자신감으로 충만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19세기는 가히 세계 일주의 시대가 된다!
이 시기를 문학적으로 묘사한 대표적인 작품 중에 쥘 베른의《80일간의 세계 일주》(1872)가 있다. 저자는 베른의 작품에 대해 근 50여 쪽을 할애한다. 이는 베른의 이야기가 당시 풍습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기 때문이고, 세밀하게 묘사된 내용을 통해 당시 일주하려면 어떤 교통수단에 몇 일이 걸렸는지 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저자 채플린은 이 작품에서 대륙 철도와 기선 여행 가이드, 증기선과 전보 시스템을 통해 당시 시대상을 묘사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가 2005년 봄에 실습선을 타고 버뮤다를 출발하여 우즈홀까지 항해할 무렵《80일간의 세계 일주》에 흠뻑 빠져들었노라고 에필로그에서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접근은 자신의 책이 사적(史的) 서술 중심으로 전개되어 약간 지루했던 앞부분을 단숨에 만회해 준다. 어쨌든 수에즈 운하의 개통(1869)과 더불어《80일간의 세계 일주》는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한편 베른이 영감을 얻는 원천은 당시 '토마스 쿡 앤드 선'(Thomas Cook & Son)이 광고한 세계 일주 여행 상품이었다고 하니, 쿡은 항해술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 모양이다.
"당신이 79일 만에 세계 일주를 한다면, 이 두 손으로 박수를 쳐 드리죠."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은 넬리 블라이(사진)의 세계 일주 여행이었다. 1889년 당시 신문기자였던 그녀는 '자신은 75일 만에 세계 일주를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소식을 들은 베른은 그녀가 성공한다면 박수를 쳐 주겠다고 공언했다. 마침내 그해 11월 뉴욕 항을 출발한 블라이는 72일 6시간 11분의 기록으로 다시 뉴욕에 돌아왔다! 베른은 약속대로 그녀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그녀의 여행기,《72일간의 세계일주》는 국내에 번역, 소개되어 있으니 참고하시라.
한편 마크 트웨인 역시 당시 증기선을 타고 적도를 따라 전 세계를 탐험했다. 그의 여행기,《마크 트웨인의 19세기 세계일주》(1897) 역시 국내에도 번역되었는데, 당시 증기선을 타고 태평양과 건넜던 뭇 사람들의 호기심과 무료함을 달랠 필독서였다고 전한다.
또한 당시 자전거로 세계 일주를 하는 모험도 드물지 않았다. 토마스 스티븐스는 1884년 페니파딩(자전거 초기모델)에 올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 세계 최초 자전거 일주에 성공했다. 10년 뒤 스물 네살의 애니 런던데리는 여자 최초로 자전거로 세계를 일주했다. 그녀의 이야기는《1894년, 애니 런던데리, 발칙한 자전거 세계일주》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무척 반갑게도 1896년 세계 일주 클럽에 합류한 민영환의 일화도 소개되어 있다. 그는 1896년 4월 1일 특명전권대사로 임명되어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제물포항을 떠났다. 이후 아시아와 태평양을 넘고 북아메리카, 대서양을 건너 영국, 도버해협을 거친 유럽 횡단, 러시아 전 지역 일주 등 총 11개국을 총 204일간 여행했다. 당시 민영환의 여행기,《해천추범(海天秋帆)》은 조재곤의 각고의 노력 덕분에 우리도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이어 항공 시대, 우주 시대를 맞아 비행기와 우주 탐사선을 통한 세계 일주를 다룬다. 하지만 아무래도 육지와 대양을 훑는 세계 일주 만큼 썩 흥미롭지는 않았다. 이는 아마도 일찍이 미지의 세계를 찾아 나섰던 모험가들의 애환이 서린 휴먼 스토리가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은 항공과 우주가 강대국들의 무기 각축전이 되고 있다. 비행기가 폭탄을 떨어뜨리기 시작한 이래로 항공 시대의 낭만이 사라졌다는 그녀의 지적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그녀가 이 책을 통해 고찰한 주제는 다음과 같이 대장정의 끝을 맺고 있듯이 결국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휴먼 드라마가 아닐까?
"우리는 지구에서 마지막 커튼을 내리는 대신 지구를 잘 돌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를 몹시 그리워하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