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두통 - 뚜렷한 절망과 은밀한 위로
올리버 색스 지음, 강창래 옮김, 안승철 감수 / 알마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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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색스는 옥스퍼드대학교 퀸스칼리지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이 책 초판을 낸 것이 1970, 37세 때였다.

내가 보기에 색스는 자신이 지닌 전문성을 어떻게 확장하면 좋을지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는 호손덴 상, 포크 상, 구겐하임 상 등 여러 문학상을 받을 정도 뛰어난 필력을 보여 주었다.

 

관심을 가지는 분야도 다양해서 뇌과학, 인지과학, 여행기, 음악 등 광범위하다. 특히 그는 한 가지 주제나 특정 사례를 몰입해서 파고드는 데 일가견이 있다.

 

또한 뇌신경과 인지 장애를 앓는 환자들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우리 삶의 대안적 존재방식,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는 생활 모습, 또는 전혀 다른 인간으로 변화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거침없이 뿜어낸다. 재미있어 읽는 맛도 좋지만, 교양적 차원에서 배움의 무게도 적지 않다.

 

이 책 역시 그랬다. 아니, ‘편두통이라는 주제로 500여 쪽이 넘는 대작을 써내다니 절로 입이 벌어질 판국이다. 이 책은 초판을 낸 시점에서 22년이 지나 편두통에 관한 새로운 매커니즘을 추가하고 편두통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되는 약과 요법도 두루 섭렵했다.

 

편두통으로 인한 고통에 대한 묘사는 지난 2천 년 동안 계속되었다 한다. 그간 숱하게 임상적 증세를 기술 교과서는 물론이겠거니와 문학, 그림과 음악 등 다양한 인문학적 영역에서 서술되고 묘사되어 왔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볼 수 있다.

 

책은 크게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편두통 증상

2부 편두통의 발생

3부 편두통의 기반

4부 편두통 치료법

5부 편두통이라는 보편적인 경향

 

저자에 의하면 전체 인구 중 대략 10분의 1이 일반 편두통으로, 50분의 1이 고전 편두통으로, 그리고 아주 적은 수의 사람들이 희귀한 편두통 변종으로 고통받고 있다. 또한 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편두통 유사증상과 독립된 아우라에 시달리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오진되는 경우가 많아 그 수를 정확히 짐작하기 어렵다.

 

색스는 우선 두통과 욕지기가 대표적인 증상인 일반 편두통 증례로 시작한다. 이어 편두통의 일반적인 모습을 모두 갖고 있는데도, 특별히 두통이라는 요소가 없는 복합적인 증상을 보이는 편두통 유사증상을 소개한다. 다양한 문헌을 검토하고 폭넓은 환자 사례를 소개하고 있어 임상 교과서를 대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밖에서 찾아 헤대던 경이로움을 우리는 스스로 지니고 다닌다. 아프리카의 모든 것, 그리고 아프리카의 경이로움이 우리 안에 있다. - 111

 

색스에 따르면 토머스 브라우니 경의 이 말이 편두통 아우라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묘사다. 편두통 아우라에서 일어나는 감정적인 상태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a. 갑작스럽게 시작한다.

b.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의식의 전면에 나타나는 내용들과 부조화를 이룰 때가 많다.

c. 너무나 강렬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d. 수동적이며 강제로감정 변화가 일어난다.

e. 짧게 지속된다(몇 분 이상 지속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f. 정적이고 시간이 정지된 느낌을 준다. 이런 상태는 깊어지고 강렬해질 수도 있지만, 어떤 이 일어났다는 느낌이 없는데도 생길 수 있다.

g. 적절하게 묘사하기가 불가능하거나 아주 어렵다.

 

위의 증상이 보이면 간혹 간질이나 인체에 다른 병이 있음을 암시할 수도 있지만. 분명히 편두통 자체로 수많은 복합적인 뇌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높은 수준의 뇌 기능 변화는 대부분의 편두통 아우라에서 발생한다.

 

편두통으로 인한 중요한 장애의 범주는 다음과 같다.

a. 시각 인식의 복합적인 장애 : , 모자이크, 시네마토그래픽 비전 등

b. 몸을 사용할 때와 인지할 때의 복합적인 어려움

c. 모든 범위의 말하기나 언어 장애

d. 두 개나 여러 개의 의식이 있는 상태. 종종 기시감이나 미시감

 

이런 심각한 편두통 증상들은 서로 배타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여러 수준에서 겹친다. 여기서 모자이크 비전이라는 용어는 시각저인 이미지가 조각나서 만들어진 비규칙적인 면과 수정 같은 다각형 면들이 모자이크처럼 잘 맞춰진 것으로 보인다는 뜻이다.

 

다음 그림을 보면 편두통으로 인한 모자이크 비전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아래 그림들은 직업적인 화가 아닌 편두통 아우라를 경험한 사람들이 시각적인 현상을 그린 것이다 (영국편두통협회 제공).

 

 

 

 

 

 

 

이어 색스는 편두통성 신경통, 반신마비 편두통, 눈마비 편두통, 가성 편두통 등 다양한 편두통의 증상과 사례를 소개한다. 그에 따르면 편두통은 정서적으로 강한 스트레스와 요구가 있을 때 나타날 수 있으며, 심할 경우 정기적으로 발작을 일으키기도 한다. 편두통은 정신-신체적 질병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편두통을 관리하는 일반적인 방법 중에 발작을 촉발하는 상황을 피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또한 편두통 환자나 증상을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여 주는 것이 중요하다. 좋은 관계를 시작하면서 의사소통을 제대로 해야 완화되거나 치유될 수 있다.

 

발작 초기에 진한 차와 커피를 연달아 마시는 것은 언제나 추천할 만하다고 하니 참고하자. 골치가 아픈 일이 있으면 커피 한 잔!’하고 외쳐볼 일이다.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할 경우에는 의사를 찾아야 할 것이다.

 

옮긴이 강창래 선생은 편두통원문이 색스의 다른 책과는 달리 명료하지 않아 번역하는 동안 어려움이 많았고, 용어를 이해하기 위해 의학 전문 사이트를 끝없이 뒤져야 했다고 토로한다. 가히 전문 서적에 가까운 원서를 우리말로 옮기는 고충이 어떠했을지 어림하기 어렵겠다.

 

선생은 비록 비전공자이지만 뇌 과학에 공부할 기회도 있었고, 평소 관심도 많아 선뜻 번역을 맡았다고 하니, 그 직업 정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뇌 전문가 안승철 교수의 감수를 거치고, 편집부의 수개월에 걸친 노고 덕분에 수려한 미문으로 탄생했다. 올리버 색스의 열정과 필력의 진면목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올해 2판이 나온 지 꼭 22년이 되는 해이니 3판을 기대해도 좋을까? 하지만 벌써 그의 나이 80세를 넘겼으니 좀 어렵지 싶다. 내심 후학들이 색스의 노고를 이어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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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이 2014-05-31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싶은데, 분량상 현재로선 부담이 되었는데 좋은 서평 정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사랑지기 2014-06-18 23:02   좋아요 0 | URL
아! 답변이 늦었지만, 넘 감사드립니다~ ^^
 
왜 종교는 과학이 되려 하는가 - 창조론이 과학이 될 수 없는 16가지 이유
리처드 도킨스 외 지음, 존 브록만 엮음, 김명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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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설계(intelligent design)'는 성서에 쓰인 창조론을 신봉하는 미국 기독교 근본주의가 주장하는 이론이다. 그들은 '창조론'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은 이러한 지적 설계 운동이 세계를 선도하는 미국 과학을 위기에 몰아넣고, 그럼으로써 과학발전과 이에 따른 기술발전에 의해 추동되는 미국 경제에 엄청난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것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전부가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지적 설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미 헌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정교분리주의'를 걷어차 버리려는 것이다.

"국회는 한 종교를 국교로 정하거나 혹은 자유로운 신앙 생활을 제약하는 어떤 법률도 만들지 못한다." - 미 헌법수정조항 제1조

엮은이 존 브록만은 각 분야의 진화론관련 최고 과학자 16인이 쓴 지적 설계 운동의 주장을 반박하는 열여섯 편의 에세이를 모았다.

그는 굳이 이들이 나서지 않아도 과학과 이성이 진화론 편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고 전제한다. 이어 '창조론-진화론' 논쟁에서 특정 질문들이 계속 고개를 들고 있어 자연선택이 어떻게 답을 줄 수 있는지 공개 발언대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토로한다. 이 책이 나오게 된 배경이 여기에 있다.

창조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1. 생물의 주요 집단들은 조상 없이 갑자기 생겨났다.
이 주장은 약 5억 4천만 년 전에 수많은 다세포 생명 형태가 비교적 갑자기 출현한 캄브리아기 대폭발을 말한다. 화석기록에 의하면 이전에 더 단순한 형태가 있었고, 다른 주요 집단들은 훨씬 나중에 점진적으로 출현했다.

또한 토끼나 박쥐 같은 일부 집단이 조상 화석 없이 완전히 새로운 유형으로 화석기록에 출현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다윈 조차 곤혹스러워했던 문제였다. 다윈 시대 당시 중간 화석이 거의 발견되지 않아 창조론자의 이런 류의 반박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어려웠다.

2.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는 일어나지만, 오직 '같은 종류'내에서만 일어난다. '종류들' 사이의 진화적 이행은 일어나지 않는다.
진화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공통조상을 보여주는 수많은 증거를 갖고 있다. 그 증거로는 중간 형태의 화석들뿐 아니라, 발생학, 유전체 비교 그리고 흔적 기관의 존재 등이 있다.

3. 우리는 지구가 젊은지 늙었는지 모른다.
창조론에서 지구 역사 6000년이다. 하지만 오래된 지구설을 뒷받침ㅂ하는 과학적 증거는 상당하고, 이 증거들은 여러 연대추정 방법들로 부터 나온다. 지구 역사가 6천 년에 불과하다는 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탄소연대추정법 등을 사용하면 오래된 역사도 밝혀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4. 자연선택은 복잡한 생물을 만들 만큼 충분히 강력하지 않다.
종의 분화와 자연선택은 다르다. 단순 생물에서 고등 생물로 진화하는 것은 일방향성 측면에서 그렇지, 다양한 고등 생물로 분화하듯이 진화하는 것은 아니다. 단 단일 종의 생물에서 눈과 같은 복잡한 기관이 생기거나 심해에서 퇴화하는 것에 관해 창조론은 설명하지 못한다.

 


스탠퍼드대 이론물리학 레너드 서스킨드 교수는 "근본적인 창조주의자들은 설득해봐야 소용없다"면서, "상충하는 논쟁 앞에서 쩔쩔매며 어쩔 줄 모르는 대다수 지각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라"고 조언한다.

캘리포니아대 고생물학자 팀 D. 화이트 교수는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15만 5천 년 전 헤로토 남성을 통해서 진화론에 대한 지론을 피력한다.

성서의 창조 이야기는 수백 년 동안 전해 내려왔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인간은 창조된 이래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연구한 바에 따르면 우리와 비슷했던 두발보행 영장류들이 지난 6백만 년 동안 반복적으로 멸종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과거는 일부가 비어 있는 현재가 아니다. 증거를 바탕으로 하는 진화적 관점은 과거 세계들이 매우 다르고 복잡하고 매혹적이었음을 알려준다. 증거에 대한 연구는 진화를 우리를 위한 세상을 창조하기 위한 과정으로 보기보다는, 그 결과에 우연히 우리가 포함된 현재 진행 중인 거대한 실험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 109쪽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지구가 1000억 개의 은하로 이루어진 우주에서 생명이 살고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생각은 무모하고 자만심에 찬 것이라는 경각심이 들지 않는가?"라고 반문하면서, 다른 행성에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을 제기한다.

하지만 도킨스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정작 다른 곳에 있다. 그는 우리가 지구 생명의 어떤 측면이 너무나 복잡해서 그것이 설계된 것이 분명하다는 증거를 발견한다면, 외계의 지적 존재에 의해 설계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이때 초자연적 설명은 설명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책임을 회피하기 때문이다.

지적 설계를 주장하는 창조론자들이 주장하는 대표적인 논증은 다음과 같다.

1. 눈은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하다.
2. 그러므로 눈은 점진적으로 진화할 수 없었다.
3. 그러므로 눈은 설계된 것이 틀림없다.

이와 관련하여 부록에 첨부된 존 E. 존스 판사가 내린〈펜실베이나 중부 미국 연방 지방법원 판결문〉(2005. 12)을 보면 명쾌한 판결이 내려져 있다.

"환원 불가능하게 복잡한" 체계들은 다원주의, 혹은 어떤 자연적 메커니즘을 통해서도 생산될 수 없다는논증이 예증하듯이, 지적 설계 옹호자들은 주로 진화론을 부정하는 논증을 통해 설계론을 주장한다. 하지만 우리는 진화론에 대한 반론이 설계를 지지하는 논증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전문가 증언이 밝혔듯이, 생물학적 체계들이 어떻게 진화했는지 지금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앞으로도 설명할 수 없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 304쪽

종교(믿음)와 과학(이성) 사이의 논쟁 핵심은 창조론-진화론을 둘러싼 것이다. 믿음은 이성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또한 왜 그러한 지 그 이유를 따지지 않는다. 그냥 온-오프의 문제지 않을까?

이런 맥락에서 하버드대 물리학 리사 랜들 교수의 지적은 과학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을 깊이 성찰하게 해 준다.

한 이론의 발전 과정을 보면, 그것은 처음에는 불확실하다가 이후 해결되거나 더 포괄적인 이론으로 흡수된다. 과학적 곤경과 모순은 어떤 이론이 불완전하다는 표시이지 꼭 그것이 틀렸다는 표시가 아닌 경우가 많다. 우리의 이해에 뚫린 구멍들은 과학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질문과 과학 진보를 이끌어내는 유인으로 작용한다. - 250~251쪽

스티븐 J. 굴드 역시 창조론이 창조과학이라고 지칭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는 《힘내라 브론토사우르스》에서 창조론에 맞선 60년 동안의 논쟁이 1987년 대법원 판결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게 되는 과정을 다룬다.

 

 

굴드는 한 때 대선에 세 번이나 출마했던 윌리엄 재닝스 브라이언의 진화론 반대 투장에 대해서도 상세히 고찰한다. 사실 백여 년 전인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진화론과 창조론, 두 진영은 사활을 건 논쟁을 벌이곤 했었다. 굴드나 도킨스 같은 진화생물학자들은 지적 설계를 도저히 수용할 수 없을 것이다.

다윈의 자연 선택 등 진화론도 완벽하지 않다. 아직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빈틈도 많다. 한편 창조론을 내세우는 지적 설계는 단순지 진화론에 반대를 위한 반론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창조론과 진화론을 지지하는 각각의 핵심 쟁점들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서로의 입장에 대해 논리적 사고와 과학적 증거를 통해 논쟁을 진행해 간다면 진화론을 둘러싼 과학계도 이로운 측면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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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명 수업 - 자연의 벗들에게 배우는 소박하고 진실한 삶의 진리
김성호 글.사진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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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 교수는 생물학과 식물생리학을 전공하고, 지리산과 섬진강이 지척에 있는 서남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그는 틈틈이 우리의 동물과 식물을 찾아 산과 들을 헤집으며 기약 없는 탐사를 떠난다.

이 책은 김 교수가 그간 자연에서 배운 생명 수업에 관한 감성 에세이다. 부제로 삼은 자연의 벗들에게 배우는 소박하고 진실한 삶의 진리가 온전히 스며들어 있다.

보기 드문 동·식물 사진에다 편집도 곱게 만들어져 마치 여름철 논두렁이나 눈 쌓인 산자락에서 뛰노는 생명들을 마주대하듯 싱그러운 묘미를 느끼게 된다.

오늘 만난 끈끈이주걱은 나에게 이런 말을 전하는 듯합니다. 생명체에게 스스로 생명을 지키고자 하는 강한 욕구가 없다면 그것을 더 이상 생명체라 할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 281

노란 병아리 말고도 까만 병아리가 있다는 것에서 블랙 스완 처럼 나의 눈으로 직접 보았어도 그것이 다 본 것이 아닐 수 있고, 나의 귀로 직접 들었어도 그것이 전부 들은 것이 아닐 수 있는 겸허를 배운다.

야생 상태의 새를 관찰하면서 먹이를 주어 불러 모으기보다 숲의 가장자리에 옹달샘 하나 만들면 딱 이라는 저자의 아이디어에 감탄하게 된다. 새들이 옹달샘에 날아와 갈증도 달래고 목욕도 할 수 있으니 그 틈에 관찰하거나 사진을 찍으면 된다는 것.

저자는 일부 지자체에서 자연 축제를 위해 철새와 독수리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삼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야생에서 먹이 활동을 하거나 사냥하는 능력이 퇴화되어 영양 실조에 걸리거나 굶어죽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쓸데 없는 간섭이 생태계를 망칠 수 있다는 경고가 아닐 수 없다.

국내에서 호랑이, 표범, 늑대와 승냥이 등이 사라지고 나서 네 개의 발가락 흔적을 찾으면 삵이나 너구리라고 한다. 발톱 흔적이 없으면 삵이요, 있으면 너구리라는 것이다. 오소리, 족제비와 수달은 다섯 개의 발가락을 가지고 있어 구별이 된다고 한다.

수련과 연꽃의 생태 비교라든지 다양한 버섯 구별하는 방법 그리고 살아있는 화석 산양 이야기 등은 그간 잘 몰랐던 자연에 대한 배움을 채울 수 있었다. 저자의 가슴장화를 뚫고 살을 파고드는 가시연꽃의 형태는 특이했다. 꽃대, 줄기 등에 난 가시는 모두 곧게 서 있는데, 참개구리가 앉을 잎의 위쪽에 있는 가시 만큼은 일정한 방향으로 많이 구부러져 있다는 것이다. 비록 말 못하는 가시연꽃이지만 참개구리에게 작은 쉼터를 제공해줄 줄 아는 여유를 부린다.

 

내가 가장 재미롭게 읽었던 대목은 두 가지다. 각시붕어와 말조개 그리고 큰오색딱따구리 이야기. 두 이야기는 저자가 이미 별도의 책을 통해 소개했을 정도로 공을 들인 관찰기록이다. 특히 큰오색딱따구리 이야기는 세 절에 걸쳐 나온다. 그만큼 김 교수가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반증이리라.

각시붕어는 생김새가 새색시처럼 예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각시붕어의 산란 방법이 특이했다. 산란기가 되면 각시붕어 수컷은 멋진 혼인 색으로 단장하며, 암컷은 긴 산란관을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다닌다. 수컷은 산란에 알맞은 건실한 말조개 하나를 찜해 놓고 암컷을 기다린다. 암컷은 수컷의 외모에는 별 관심이 없고 말조개의 상태에 민감하다고 한다.

그런데 왜 말조개를 선택하는 걸까? 암컷은 말조개 출수공에 산란을 하면 수컷은 입수공에 정액을 뿌려 수정이 일어난다. 수정란은 말조개 아가미의 얇은 막 사이에 자리를 잡아 유실될 확률이 낮아진다는 것. 참 야릇한 생존 지혜가 아닐 수 없다.

큰오색딱따구리 이야기는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 교수는 당시 어느 봄날 지리산 기슭을 더듬다 새끼를 키우는 한 쌍을 발견하고 50일간 새끼 두 마리가 둥지를 박차고 떠나는 순간까지 관찰하고 카메라에 담았다. 평소 흠모하던 안도현 시인을 찾아가 그이의 추천 글을 받아내는 장면도 감동적이었다.

둥지에서 떨어진 새끼 큰오색딱따구리 이야기도 나온다. 어미 새는 둥지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어린 새가 스스로 나무 위로 오를 수 있도록 목을 놓아 소리를 내며 응원할 뿐 일체 도와주지 않는다.

어린 새가 어느 정도 나무에 오르면 어미 새는 더 높은 윗가지로 이동하여 어린 새가 올라올 수 있도록 기다렸고, 마침내 어린 새가 적당한 높이에 올랐을 때 비로소 먹이를 주었다고 한다.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사자가 새끼를 벼랑에서 떨어뜨리듯 어린 새가 스스로 일어설 수 있도록 독려하는 어미 새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내 자식도 이렇게 강인하게 키울 수 있을까하고 반성해 본다. 행여 힘들세라 행여 아플세라 이것저것 미리 챙겨주는 것이 결국은 나약한 아이로 키우는 것을 아닐지 모르겠다. 큰오색딱따구리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었다.

이 책은 내게 자연의 아름다움에 매혹되고 생명의 경이에 감탄하게 해 주었다. 한 문장 한 단락 어디 빼놓을 수 없이 내 인생을 사색하고 세상사를 성찰해 보는 경구가 되어 주었다. 내 아이가 좀 더 크면 이 책을 함께 읽어보련다.

이 지구상에 존재의 의미가 없는 생명체가 있을 리 없습니다.” - 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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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다음 이야기 2 - 제2의 전국 시대, 중원을 지배한 오랑캐 황제들
신동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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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에서 흥미로왔던 부분은 동진이 패망하고 남조의 송이 들어설 때였다. 동진 역시 서진의 사마충 같이 백치 황제가 등장했다. 유유는 동진을 찬탈해 보위에 올랐다. 이가 곧 송무제다. 이로써 동진은 원제 사마예가 건강에서 건국한 후 103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420). 유유는 경우 2년 만에 60세의 나이로 병사하고 만다. 이어 어린 태자 유의부가 뒤를 이어야 했다.

유유는 유방의 부인 여후와 서진 사마충의 부인 가남풍 등이 나라를 어지럽힌 전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자필 유언장을 남겨 모후에게 정사 간여를 금지시켰다. 그 대신 4명의 대신들을 보정 대신에 임명하여 보필케 한다. 문제는 이 네 대신들이 계략을 꾸며 유의부를 폐하고 셋째 유의륭을 옹립했다. 이가 송문제다.

다행히 송문제는 17세에 즉위해 30년 동안 재위하면서 송의 기반을 착실히 닦았다. 나는 송문제 부분을 읽다가 눈이 휘둥그레지는 기발한 착상을 접할 수 있었다.

원가 22년(445) 유의륭은 임읍(베트남 중남부와 캄보디아)를 치게 했다. 임읍의 국왕 범양매가 전국의 병사를 모아 결전을 치렀다. 이 싸움에 철갑으로 무장한 많은 코끼리 부대가 등장했다. 송나라 군사는 이런 진세를 처음 본 까닭에 크게 당황했으나, 즉시 사자가 백수의 왕이라는 것을 생각해 내 수많은 사자 모형을 만들었다. 과연 코끼리들이 크게 놀라 달아났다. 놀라운 발상이 아닐 수 없겠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송문제는 한창 활약할 무렵 태자 유소에게 피살당하고 만다. 박숙비에게 폐태자의 기밀을 얘기하는 바람에 유소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이 말을 들은 유소가 야음을 틈타 기습을을 했던 것이다. 정도전이 이방원의 기세를 꺾으려다 기습당해 비명에 횡사한 것처럼.

저자는 선비족 탁발규가 386년에 창업한 북위에 대해 높이 평가한다. 바로 효문제(탁방굉)가 실시한 호한융합 정책 때문이었다. 당시 한족 학자들은 북방 민족(선비족) 출신인 그를 폄훼하기도 했다. 저자에 따르면 "탁발굉이야말로 남북 민족이 하나로 융합해 현대의 중국 민족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당대 최고의 인물"이었다!

한편 북위가 북연을 정벌할 때 고구려가 등장한다. 북연의 황제 풍홍은 북위에 10여 개 큰 군(郡)을 잃으면서 힘이 날로 쇠약해졌다. 북귀군 4만 명이 도성 아래까지 오자 풍홍은 아들을 인질로 보냈다. 당시 풍홍은 은밀히 고구려에 사람을 보내 구원을 청했다. 고구려 장수왕이 이를 받아들였다. 436년 풍홍이 일족과 백성을 이끌고 고구려 땅으로 망명하니 북연은 패망하고 말았다(117쪽).

여기서 눈을 뗄 수 없었던 부분이 있었다. 풍홍의 손녀가 훗날 북위의 태후가 되었는데, 그녀가 바로 그 유명한 풍태후다. 풍태후는 지략과 과단성, 잔인함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녀는 헌문제 탁발홍을 독살하기에 이른다. 할아버지의 복수를 대신해 준 것일까?

신동준 선생은 풍태후에 관한 이야기를 10여 쪽에 걸쳐 하고 있다. 유방의 부인 여후, 측천무후, 서태후 등과 비견될 정도로 명성이 드높았기 때문일 것이다. 탁발홍 사후 등극한 황제가 바로 효문제 탁발굉이었다.

사실상 2권은 북위에 관한 역사가 중심이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저자는 분량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130여 쪽을 할애한다.

 

이어 저자는 북조와 남조의 역사를 교대로 서술해 간다. 아래 연대표를 참고하면 흐름을 따라잡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한다. 아울러 말미에 덧붙여진 주요 연대표와 연호도 함께 보면 좋겠다!

 

 

저자는 위진 남북조 300여 년 역사를 훑으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속어에 '호랑이 자식이 개일리 없다'고 한다. 그러나 사서를 이와 전혀 다른 현상을 볼 수 있다. 부친은 개세(蓋世)의 영웅인데 반해 아들은 천하의 망나니인 경우가 많았다. 전한 제국을 세운 유방의 경우를 보자. 그의 아들 한혜제 유영은 종일 황음한 모습을 보이며 정무를 돌보지 않았다. 삼국 시대 촉나라 유비의 뒤를 이어 42년 동안 제위한 유선의 경우에는 비록 제갈량 같은 현신이 보좌하기는 했으나 결국 패망을 면치 못했다. - 391쪽

이외에도 저자는 몇 가지 사례를 더 든다. 가령 서진의 무제 사마염은 백치 아들인 혜재 사마충에게 보위를 넘겨주었고, 수문제 양견에는 황음무도한 아들 수양제 양광이 있었다. 그렇기에 수는 그 치세가 40년을 넘지 못했다.

한편 당태종 이세민의 나약한 아들 고종 이치는 결국 측천무후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명태조 주원장의 경우도 한없이 어질기만 한 태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황태손인 건문제 주윤문에게 보위를 넘겼다가 결국 내란이 일어나 연왕 주체가 이를 빼앗았다.

정치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후계자를 잘 선정해야 후환이 없는 법이다. 그렇기에 사회주의권은 유독 후계자 선정에 공을 들인 모양이다. 직장인이라면 어떨까? 역시 후임자를 잘 만나야 한다. 그래야 못다 이룬 과업(?)을 잘 마무리 지을 수 있다. 자칫 판도가 뒤집히는 것은 고사하고 희생양이 되기 쉬운 것이 우리 현실이다.

시리즈 1·2권을 다 읽어내기란 결코 만만치 않았다. 분량 제한 탓인지 단편적인 연대기적 서술이 중심을 이루는데다, 적지 않은 왕조의 흥망성쇠가 이어지다보니 맥락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허나 저자의 작은 일침이 정신을 번쩍 차리게 한다.

수천 년에 달하는 장구한 역사를 지닌 중국을 이해하는 데에는 절대적인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사상과 사고방식, 생활 양식, 문화 유형은 역사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중략) 중국에 대한 '지피'가 전제되지 않는 '지기'는 사실 속 빈 강정이나 다름없다. - 445쪽

나는 이 책을 통해 오늘을 사는 현대인으로써 필요한 생존과 삶의 지혜를 배운다. 수 천 년의 역사가 흐른 시점에서 한 국가의 부귀영화는 덧없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속에는 흥망성쇠의 징조가 항상 드러나 있었다.

탄광 안 카나리아나 사라센의 탑처럼 현실의 징조를 미리 간파하고 조기에 대응할 수 있다면 우리는 큰 위기를 슬기롭게 모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과거와 역사를 통해 오늘을 사는 많은 혜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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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다음 이야기 1 - 제2의 전국 시대, 중원을 지배한 오랑캐 황제들 삼국지 다음 이야기
신동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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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준 선생의 필력은 거침이 없는 듯하다. 이번에는 삼국지 다음 이야기를 들고 우리를 찾아왔다.

삼국지 다음 이야기는 위진 남북조 시대를 다룬다. 우선 위진 남북조 시대 연대를 잠깐 보자. 난 항상 헷갈려서 자신이 그닥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춘추 시대 (B.C. 771 ~ B.C. 453)

전국 시대 (B.C. 453 ~ B.C. 221)

 

진 (B.C. 221 ~ B.C. 206)

초 (B.C. 208 ~ B.C. 205)

서초 (B.C. 205 ~ B.C. 202)

한 (B.C. 202 ~ 220)

   전한 (B.C. 202 ~ 8)

   신 (8 ~ 23)

   후한 (25 ~ 220)

삼국 시대 (220 ~ 280)

   위 (220 ~ 265)

   촉한 (221 ~ 263)

   오 (229 ~ 280)

진 (265 ~ 420)

   서진 (265 ~ 316)

남북조 시대 (317 ~ 589)

   동진 (317 ~ 420)

수 (581 ~ 618)

당 (618 ~ 907)

위 연대에서 '위진 남북조'만 따로 간추려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위에서 보듯 위진 시대(220 ~ 316)는 조조가 세운 위(220 ~ 265)와 사마씨가 세운 서진(265 ~ 316)이 존속한 96년이다. 사마씨의 시조는 조조의 참조였던 사마의다.

 

 

남북조 시대 (420 ~ 589)는 서진의 후신인 동진 (317 ~ 420)을 포함한 한족의 남조 정권과 북방 민족의 북조 정권이 대립하다가 581년 수에 의해 통일될 때까지를 말한다. 그 시기는 282년이다. 이렇듯 위진 남북조 시대 (220 ~ 589)는 370년간 지속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현재 한족 사가들은 이 당시를 역사상 가장 고통스럽고 어두운 시기로 보고 있다. 그래서 북방 민족이 세운 북조 정권을 ‘5호 16국의 난’이라고 표현한다. 이 시기(314 ~ 439)는 흉노, 갈, 선비, 저와 강 등 5호가 대두하여 흉노의 한(漢)을 세운 후 선비족의 북위가 통일할 때까지를 말한다.

중국 학자들은 북위가 들어선 시점부터 수가 통일할 때까지를 진정한 남북조 시대로 보고 있기도 한다. 이는 한족 중심의 사관(史觀)에 의한 그릇된 중화 개념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오, 진(서진 및 동진) 그리고 남조의 송, 제, 양, 진의 6개 한족 왕조를 일컬어 육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저자는 북조는 결코 야만의 문화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강건한 상무 정신을 토대로 뛰어난 정치·군사 문화를 독자적으로 만들어 나중에 수·당의 시기에 천하 통일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평한다.

위진 남북조 시대를 조망함으로써 난세를 바라보는 안목을 제공하고자 한다. 시작은 위나라의 조조에서 비롯된다. 조조는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흉노와 오환 등의 북방 민족을 백성으로 적극 끌어들여 군사력 강화의 계기로 삼았다.

저자는《자치통감》을 기본으로 하되,《삼국지》,《진서》,《송서》,《남제서》,《양서》,《진서》,《위저》 등 관련 사서를 두루 인용했다. 인용된 문헌만으로도 이미 기가 죽은 나는 과연 책 내용을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삼국지 다음 이야기' 1권은 조조가 위를 세운 시대부터 동진 말기(5세기초)를 다룬다. 저자에 따르면 이 시기는 제2의 전국시대에 버금갈 정도로 무차별적인 정복 전쟁이 만연했다

하지만 저자의 시선은 대체로 위진남북조 시대, 특히 북방민족의 화려한 등장에 긍정적인 편이다.저자에 따르면 이 시기에 문학과 음악, 회화, 서법, 종교 등 전 분야에 걸쳐 불교와 도료, 유교, 법가, 명가 등 수많이 사상이 각축을 별이면서 제2의 전국시대를 영위했다.

또한 위진남북조 시대는 동아시아 역사의 분수령에 해당된다. 뒤이은 통일 왕조 모두 이 시기에 마련된 사상과 제도 등을 토대로 천하를 운영할 수 있었다. 그 예로 삼국 시대 당시 위무제 조조와 위문제 조비 때 만들어진 둔전제와 구품중정제가 서진남북조 때 들어와 부병제, 균전제, 과거제 등으로 정립된 것이다. 이들 제도는 이후 약간의 손질이 있기는 했으나 그 골격만큼은 청조 말까지 그대로 유지됐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조조에 대한 왜곡을 바로 알게 되었다. 저자는 리쭝우의《후흑학》과 이중톈의《삼국지 강의》에서 조조는 마음이 시커먼 심흑(心黑)의 대가로 묘사된다.

신동준 선생은 조조가 적의 속셈을 훤히 알고 역으로 그 허점을 찌를 줄 아는 당대 최고의 전략가였다는 점에서 볼 떄 심흑의 대가였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전장에서만 발휘된 것으로 사마의와 달리 사람을 다룰 때 심흑을 구사한 적이 없다.

마오쩌둥도 조조를 심흑의 인물이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의 희로애락을 그래도 드러내는 심백의 인물에 가깝게 보고 있다. 사실 난세에 보인 조조의 탁월한 리더십은 오늘날에도 배울 점이 많겠다. 주어진 상황을 냉철히 진단하는 통찰, 인재를 단박에 알아보는 지감, 미련없이 포기할 줄 아는 결단 등 그 예이다.

한편 사마씨에 의해 성립된 서진 이야기는 자못 흥미로왔다. 진무제 사마염은 왕위를 백치 황제라 불린 사마충에 넘기면서 형제·친인척 간 내분, 팔왕의 난이 벌어져 나라 멸망을 재촉했다. 후계자를 잘 정해야 함을 배울 수 있는 대목.

여기서 사마충의 비 가남풍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녀는 '황음무도한 여인'이었다. 백치 황제를 대신해 천하를 좌지우지했고, 온갖 음란한 짓을 다 벌였다. 측천무후의 등극을 위한 전조였을까? 훗 사마충 곁에 어진 현비(賢妃)가 있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요즘같이 목숨을 걸고 고언을 마다하지 않았던 대쪽같은 선비 정신이 아쉬울 때도 없다. 당시 진원달은 이에 비견될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흉노족의 실력자 유총이 황후를 위해 황의전을 화려하게 수리하려 하자 고언을 간한다. 이 때 그는 쇠사슬을 허리체 차고 나무와 묶고 있었다.

진노한 유총은 참수하라고 명했으나, 위사들이 쇠사슬을 풀지 못해 쩔쩔 맸다. 마침내 황후까지 나서 만류하자 화를 풀게 되었다. "경은 응당 짐을 두려워해야 하는데 오히려 짐이 경을 두려워하게 만들었소." 저자는 진원달과 같은 인물이 있었기에 유씨 나라가 그나마 일시 지속될 수 있었다고 평한다.

중국이 G2의 강자로 부상한 지금, 중국 역사 전반에 대한 통찰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간 내가 잘 몰랐던 위진남북조의 역사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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