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의 잃어버린 세계 - 캄브리아기 폭발의 비밀을 찾아서
마틴 브레이저 지음, 노승영 옮김, 이정모 감수 / 반니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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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은 삼엽충 이전의 화석이 발견되지 않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1859년《종의 기원》을 쓸 무렵, 선캄브리아기 지층에서는 화석이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화석의 증거를 얻을 수 없었던 다윈은 불안하기 조차 했다.

지구 역사에서 캄브리아기 때에는 '캄브리아 대폭발'이라고 할 정도로 생명체가 가히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캄브리아기는 5억 4200만 년 전에 시작되었으니, 선캄브리아 시대는 45억 년 지구 역사의 90%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 이전의 선캄브리아기 지층에서는 화석이 발견되지 않아 생명의 흔적이 감지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책 제목이기도 한 “다윈의 잃어버린 세계”다.

과연 '잃어버린 세계'는 어떻게 된 것일까? 다윈의 딜레마는 깊어져 갔다. 그 당시 다윈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었기에 결국 이 딜레마는 후대 학자들에게 과제로 남겨졌으니.

케임브리지대 고생물학 교수 마틴 브레이저는 이러한 “다윈의 잃어버린 세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룬다.

5억 4,400만 년 전에서 5억 4,300만 년 전의 100만 년 사이에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동물 하나가 눈을 떴다. 눈 달린 삼엽충이 나타난 것이다. 눈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다. 빛에 적응해야 했고, 벌레 같았던 동물들은 갑옷을 두르고, 경고 색을 과시하고 위장 형태와 위장 색을 띠거나, 추적하는 적을 따돌릴 수영 실력을 갖추어야 했다.

마틴 브레이저에 따르면 캄브리아기 폭발의 원인은 '눈'이 아니라 '입'이라고 말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탄산석회로 한층 단단해진" 강력한 이빨의 출현이다. 입의 시대에는 ‘프로토헤르트지나’라는 골격 화석이 등장한다.

저자는 다윈의 잃어버린 화석을 찾기 위해 세 지역을 중점적으로 탐사했다. 그가 이끄는 발굴팀은 시베리아, 중국, 외몽골을 여행하며 알다노트레타나 아나바리스테 같은 패각 화석에 보존된 패턴을 조사했다. 이 패각 화석들은 다윈의 잃어버린 세계를 찾는데 소중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나는 책을 펼쳐 들었을 때 고생물학에 익숙하지 않은 데다 낯선 용어도 많이 나오는 바람에 읽어내기가 여간 녹록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읽어 나갔다. 반 쯤 읽었을 무렵일까, 어느새 흐름을 따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너나 할 것 없이 뛰어든 다른 고생물학자들과의 경쟁적인 발굴 장면은 마치 미지의 세계를 탐사하는 모험가들 마냥 흥미로왔다.

게다가 현미경으로만 관찰할 수 있는 아주 작은 화석인 '미(微)화석' 연구라든가 고대 생물의 몸부림 흔적이 표면에 새겨진 ‘흔적 화석’에 대한 이야기는 재미로움을 넘어서서 경이에 가까웠다. 지구의 역사를 밝혀내는 데 앞장서는 학자들의 뜨거운 열정과 세심한 관찰력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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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정오에서 세상을 바라보다
서태옥 글.사진 / 초록비책공방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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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옥
, 그는 어느 날 인생의 정오를 지나며 시작했다. 우리의 감정을 위로해줄 그 무언가를 찾는 여정을.

이 책은 그간 페이스북과 블로그에 틈틈이 올린 사진과 글이 영글어진 것이다. 독서광인 아내가 일러준 좋은 글, 자신의 심금을 울려준 말을 모아 좋은 생각, 힘이 되는 생각으로 정리하고, 이에 어울려도 좋은 사진들을 발품손품 팔아 찍었다.

그는 책에 담긴 소소한 생각들을 너도 나도 읽어서 우리가 살아갈 힘을 얻고, 인생을 헤쳐 나갈 의지를 키우기를 바란다.

저자는 보건복지부에서 감사업무를 맡고 있다. 정말 숨 가쁘게 달리는 하루, 그 바쁜 와중에도 천천히 가면서 잠시 멈출 곳에서 쉬어 가기를 원하고, 그래서 천천히 주변 상황을 다 포용하면서 자기 소명을 다하는 그런 사람이 되자고 다짐하는 멋진 남자다.

 

아내 생일과 결혼기념일도 꼬박꼬박 챙기는 살가운 남편이다. 아니, 쇼핑 카트 안에 아내의 물건을 슬며시 채워 넣어줄 줄 아는 멋쟁이다. 장인어른의 마지막 투병, 그는 출장 중 늦은 밤에 잠시 어른을 찾아뵙고, 우는 아내의 슬픔을 어루만져줄 줄도 안다.

우리에게 사소한 도움, 따뜻한 말 한 마디, 공감의 눈길, 그리고 토닥토닥아끼지 말고 나누자고 속닥인다. 여백에 머리로만 있던 사람들을 가슴 안으로 들이자고 다독인다. 그렇게 사람과 일과 세상에 좀 더 너그러워지자며 웃는다.

또한 인생을 순항할 수 있는, 그 어떤 쓰나미도 견딜 수 있는 밑짐을 조심스레 찾는다. 위기에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유혹과 고통에 넘어지지 않을 지주 같은 밑짐을. 그래서 업무량도, 껄끄러운 인간관계도, 마이너스 통장으로 이체되는 보수도 역경을 견뎌야 경력이 되듯 그렇게 이겨내고자 한다.


사소한 일상도 작은 도구도 우리의 스승이 된다. 김밥을 말면서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얼마나 잘 어울리며 살아가는지를 배우고, 추운 겨울날 피어나던 하얀 입김을 보며 참 가슴 따뜻하다고 느낀다.

들판에 남은 벼쭉정이를 보고는 고개를 숙이는 미덕을 훑고, 아름다움을 가졌음에도 자세를 낮추는 낙엽에서 겸양의 지혜를 줍는다. 휴가 떠난 날 한숨 푸욱 잤고 나더니 자신 안에 아군이 많이 생겼다고 좋아한다.

그는 또한 사회복지사다. 동료들에게 "아무리 헌신을 강요받더라도 가끔은 쉬면서 감정을 충전하자"는 조언을 잊지 않는다. "충만한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는 것도 사명이니까."

사람보다 귀한 것은 없다!
어떻게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커피를 건넬 때에도 격려 한 스푼, 애정 두 스푼을 넣어주자. 그렇게 하루에 한 번씩 나를 인정해 주고, 그리고 하루에 한 사람을 진심으로 인정해 주자.

 

이렇듯 성과를 내야 인정받은 현실에서 그는 제 힘껏 몸을 태워 끓기 직전까지 온도를 올려놓은 99가 홀대 받지 않는 사회, 아흔 아홉 번의 외로운 망치질이 대접받는 사회를 소망한다.

"에스키모가 슬픔이 가라앉고 걱정과 분노가 풀릴 때까지 하염없이 걷다가 마음의 평안이 찾아오면 그때 돌아서는 것처럼 때로는 지친 심신을 내려놓고 자신을 다독여 주자."

책을 다 읽고 나니 귀접기가 숱하게 달렸다. 책갈피도 제법 두툼하다. 욕심을 버려야 하건만, 이런 과욕은 놓치고 싶지 않다.

어디, 오늘 오래된 친구와 막걸리 한 잔 나눌까?
그리고
모든 하루를 마치고 들어설 때,
전쟁 같은 집안일, 모든 걸 견딘 아내에게 건네는 말

오늘도 수고한 당신, 나 왔소.”

좋은 것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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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의 탄생 - 우리는 왜, 어떻게 질병에 걸리는가
홍윤철 지음 / 사이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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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홍윤철 교수는 서울대학교 예방의학교실에서 환경의학에 대한 교육과 연구를 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오랜 기간 연구해온 성과를 정리하면서 독자에게 풀어내고 싶은 방담(放談)이 있었을 것이다.

홍 교수는 우리가 인류의 조상이라고 알고 있는 문명 이전의 수렵채집인들은 과연 현대인게 유행하는 질병을 앓았을까?”라는 화두로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조상이 살았던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화두는 이어진다. 왜 우리의 조상들은 이러한 병을 앓지 않았을까? 이와 같은 변화 그리고 그 차이는 근본적으로 어떤 이유 때문인가?

인류의 건강은 긴 역사를 통해 유전자가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며 생존력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확보되었다. 그렇다고 한 번 적응했다고 해서 다가 아니다.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계속해서 적응해야만 했다.

우리 세포는 DNA 코드의 서열 변화 때문에 다양하게 분화되지만, 세포 안에서 유전자 발현이 달라지면서 그 기능이 달라지는 경우도 많다. 후자는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후성유전(저자는 후생유전이라고 명기하고 있으나 후성유전으로 용어가 바뀌었다)이다 *후성유전에 관한 상세 설명은 맨 아래 보론 참조

후성유전은 우리 몸에 생기는 암이나 질병의 발현 기전을 위한 연구에 많이 활용되고 있다. 가령 암의 경우 비록 가족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무조건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식습관이나 흡연, 오염물질 등 외부 환경과의 상호 작용에 대한 반응으로서 생길 때가 많다. 이 원인 물질이 DNA 결합 분자를 대체하면서 DNA를 교란시킬 때 암이나 당뇨등 만성질환이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잘못된 결합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우리는 암이나 만성질환을 퇴치할 수 있다. 이처럼 후성유전은 교정 가능하다.

어쨌든 저자의 관심은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홍 교수에 따르면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지닌 맹점은 생존 경쟁을 만들어 내는 환경을 간과했다는 점이다. 유전자를 둘러싼 환경을 제대로 보지 않고는 대립유전자 간의 생존 경쟁이란 의미가 없다는 것.

저자는 질병의 원인이 사람에게 들어와서 병을 일으킨다기보다는 인간의 유전자가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부적응 상태가 질병을 일으킨다고 본다. 오늘날 환경에 대한 이러한 부적응은 고혈압, 당뇨, 알레르기, 암과 같은 질병의 유행으로 나타나고 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에서 환경적 요인이 각 대륙간 문명의 불평등을 초래한 주요 요인이라고 주장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환경적 변화는 인류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변해 왔기 때문에 부차적이라고 지적한다. 이보다는 환경적 변화에 대한 인류의 적응의 차이가 중요하다. 급격한 환경 변화에 우리 몸의 유전자는 충분히 적응할만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지 못해 다양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관통해서 주장하고 있는 핵심은 다음 세 가지다.

첫째, 인류의 유전자는 인류가 생활해 온 환경과는 별개로 독립적으로 진화해 온 것이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면서 형성되었다.

둘째, 1만 년 전 수렵채집에서 농경목축으로 생활양식이 전환되면서 시작된 문명화 이전 시기에는 인류의 조상에서 오늘날 우리가 흔히 보는 만성질환은 찾아보기 어렵다.

셋째, 인류는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의 두 가지 커다란 혁명적 환경 변화를 거치면서 새로운 환경을 맞이하게 되었고, 유전자가 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질병이 탄생하게 되었다.

책은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질병의 탄생을 서술하고, 2부는 질병을 탄생시킨 환경 요인 그리고 3부는 문명이 만든 질병을 다룬다.

홍 교수는 농업혁명이 질병 탄생의 서막을 열었다고 평가한다. 인류가 농경 시대 들어 군집 생활을 시작하면서 질병이 대규모로 유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어 질병을 탄생시킨 환경 요인으로 영양, 기후 변화, 햇빛, 운동(오래달리기 예), , 담배, 산업 혁명 화석 연료 등 8가지를 든다.

 

▲이집트 테베 서쪽 지구에 있는 기원전 13세기 전후 묘지 관리인 센네젬의 무덤안에 그려진 벽화. 가축을 이용해 농사를 짓는 이집트인의 모습

코넬대 스펜서 웰스 교수 역시 저자의 시각과 일치한다. 그는 판도라의 씨앗에서 농경이 인류에게 낀친 '불행' 중 하나로 이전에는 별로 염려하지 않았던 전염병이 한꺼번에 수많은 생명을 앗아갔던 사례를 들고 있다.

지구 온난화는 무더위와 사막화 등으로 인한 피해 뿐만 아니라 모기 등 질병매개곤충 의 과잉 번식으로 새로운 질병을 초래할 수 있다. 가령 우리나라의 경우 동남자 등지에 서식하던 뎅기열 모기가 국내 남부 지방에서 일부 서식하기 시작했고, 뎅기열 환자 국내 유입도 매년 늘어나고 있다.

또한 산업 혁명은 도시화로 인해 열악한 위생 문제를 가져왔다. 이에 결핵, 콜레라, 장티푸스등 또다른 질병 탄생의 시기였다.

하지만 우리는 산업 혁명 덕도 보았다. 이와 함께 눈부시게 발전한 과학 기술은 신선한 야채, 우유 그리고 육류의 공급을 크게 늘리는 데에 기여했다. 그간 큰 위협이 되었던 질병의 원인과 발생 기전을 규명하고, 치료제와 백신을 개발함으로써 인류의 건강 수준을 대폭 나아졌다.

한편 산업화는 점차 고도화되면서 생활 환경을 질적으로 변화시키게 되었다, 이는 또다른 질병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우리 몸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에는 무리였다. 너무 짧은 기간에 수많은 변화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적응 과정 속에서 어긋나는 부분들이 생겨나고 병원체와 인간 사이에 형성된 균형이 깨지면 2003년 사스와 2009년 신종 플루같은 팬데믹 상황이 발생했다.

끝으로 저자는 문명이 만든 질병으로 전염병, 비만, 당뇨, 고혈압, 심혈관질환, 알레르기, , 우울증 등 8가지를 꼽는다. 이는 앞서 열거한 환경적 요인들과 그 관련성을 두고 설명한다.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들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가령 지구 온난화 등 기후변화 문제는 산업화 이전에는 용어조차 생소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는 위기 중에서 최우선적으로 다루어야할 과제가 되었다.

주제가 무엇이든 통사적 고찰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질병이라는 부담스런 주제임에도 저자는 전문적인 식견과 풍부한 사례를 들어 잘 풀어나갔다. 문체도 깔끔해서 읽는 재미도 좋고 읽는 속도도 난다. 자고로 과학을 다룬 교양 도서는 이랬으면 싶다.

 

[보론] 후성유전이란 무엇일까?

DNA
는 세포 속에서 벌거벗은 상태로 있지 않다. 다양한 단백질 분자들로 이루어진 옷을 입고 있다. 이 분자들은 DNA와 화학결합을 이룬다. 전문가들은 이 결합을 DNA 메틸화, 히스톤의 디아세틸화 등의 방식으로 부른다. 이 분자들이 중요하게 부각된 이유는 결합된 분자들이 DNA의 행동을 바꾸어, 유전자 활성을 더 높이거나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분자들은 일시적으로 붙어 있을 수도 있지만 평생 갈 수도 있다. 평생 가는 경우 이 정보도 유전되기도 한다. 우리 몸에 있는 간세포나 근육 세포의 경우 DNA 유전 정보는 똑같다. 그런데 어떤 것은 간세포로 분화하고, 어떤 것은 근육 세포가 되는가는 바로 후성유전으로 설명할 수 있다
.

후성이란 말은 전성과 대비되는 용어다. ‘전성가 이미 정자와 난자 속에 결정론적으로 정해져 있다는 의미고, ‘후성은 환경적 요인 등에 의해 얼마든지 변화될 소지가 있어 나중에 가 형성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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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나남창작선 116
이병주 지음 / 나남출판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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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의 열풍이 뜨겁다. 그 일등공신은 KBS에서 올 1월부터 방영되고 있는 대하 드라마 정도전일 것이다. 사실 드라마 정도전1996년 방영되었던 용의 눈물과 시대가 겹친다.

  

당시 용의 눈물이 이성계의 조선 개국과 왕자(이방원)의 난이 중심이었다면 이번 정도전은 새 왕조 전후의 정국과 정도전의 개혁 의지를 주로 담고 있다. 드라마 정도전50부로 예정되어 있다고 하니, 올 한 해 내내 관심이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작금의 드라마 인기는 국민들이 새 정치를 열망하는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평소 정도전의 개혁 사상에 관심이 많았다
. 아마 고루한 정치판에 이골이 난 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져 봤음직하다.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정도전을 새롭게 인식하거나, 재조명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이 와중에 지난
1992년 작고하신 나림(那林) 이병주 선생이 쓴 장편 정도전이 재간된 것은 독자 입장에서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겠다. 이 작품은 선생 사후 1993년에 초간 되었으니 그이의 유작이다.

고인의 파란만장한 삶은 우리 현대사의 질곡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의 경력을 보면 국제신보편집국장, 군사 정권에 의한 투옥, 그리고 일련의 사업 실패 등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이후 나이 40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마치 신()이 내린 듯 작품을 써 나갔으니, 장편 35편 등 단행본만 무려 80여 권이나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한국의 발자크라고 칭송하기도 한다.

소설 정도전은 삼봉이 전라도 회진 적소 유배를 당한 시점에서 시작해 방원에 의해 참살되기까지를 다룬다. 선생은 삼봉의 독을 품은 강골이미지로 소설 분위기를 일관하지는 않는다. 자칫 읽는 재미가 사라질 판이니까.

그래서 등장하는 인물이 인고와 소윤 노복 부녀다. 인고는 삼봉이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노비 셋 중 자유의 몸으로 풀어준 해방 노비다. 그는 의리가 있어 유배지 움막으로 찾아와 기꺼이 수발을 든다.

여기서 소윤의 이미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녀는 바람이 건듯 지나며 그녀의 치맛자락을 펄럭 날리더니 삼봉의 수염을 부드럽게 쓸었다. 동시에 지분냄새가 그윽한 묵향처럼 날아와 그의 정신을 얼게만들 정도로 재덕과 미모를 겸비한 여인이다.

소윤은 개원사의 악덕한 주지 박천과 박관 형제의 탐욕의 재물이 되는 비운을 맞아 당시 불교계의 타락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비록 삼봉 곁에 편히 있을 수 없는 처지이나, 그를 향한 순고지정(純固之情)만은 누구 못지 않은, 비련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과연 삼봉과 소윤, 두 사람의 앞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를 지켜보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삼봉의 비극적 운명 탓에 자칫 상투적일 수 있는 소설적 흐름에 생기(生氣)를 불어넣어 준다.

게다가 소윤은 후에 현비 강씨가 되는 지화와도 친분이 있었다. 지화는 새 왕조가 들어서기 전 이성계의 둘째 아내가 되어 있었다. 지화가 현비가 된 어느 날 삼봉은 소윤을 화제 삼아 얘기를 나눈다. 현비는 조선 왕조의 탄생이 그 인연으로 이루어졌다고 회상한다. 왜냐하면 이성계와 삼봉이 만나게 된 것은 소윤이 중간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선생의 재치 있는 해학을 맛볼 수 있었다.

선생은 삼봉을 해동장량에 비유하고 있다. 장량은 유방을 도와 한고조를 세운 일등 공신이었다. 이는 결코 과언이 아니다.

나는 장량도 좋지만, ‘유기’(劉基, 1311~1375)와도 처지가 비슷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유기 역시 주원장을 도와 새 왕조[] 건국에 앞장선 일등 공신이었다. 하지만 유기는 삼봉이 아들 둘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것에 비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명 건국 후 공신에 봉해진 37명 중 주원장 생전에 숙청된 이들이 무려 31명에 달했다고 전한다.

유기 또한 성품이 강직하고 악을 싫어하며 직언을 서슴치 않았던 탓에 적도 많았다. 결국 그는 강경발언으로 파직당해 낙향하게 되는데, 이 무렵 유기는 쓰라린 심정을 달래면서 욱리자(郁離子)를 썼다고 전한다. 게다가 삼봉(1342~1398)과 동시대 인물이니, 삼봉이 유기에 대해 들은 바가 있지 않을까 싶다.

한편 선생은 여말선초 변혁기를 둘러싸고 다양한 인물들간의 권력 암투와 합종연횡(合從連橫)하는 모습을 장대한 필치로 실감나게 그려낸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겠다. 이런 맛에 역사소설을 읽는 것이려니.

드라마 정도전이 어떻게 전개되어 나갈 것인지 선생의 작품을 통해 그 실마리를 챙겨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가령 이성계에게 군사(軍師)로서 정도전이 있었다면, 이방원에게 책사(策士)는 누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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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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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실패하면 바로 주눅 들거나 우울해지곤 해요. 하지만 한 번 실패했다고 제 모든 걸 부정하지 않는 자세가 필요해요. 만화 속 주인공들도 나 같은 게 뭐라는 식의 자기비하의 말은 하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어요."

작가 마스다 미리가 올해 1월 동아일보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녀는 얼굴을 내보이지 않는 신비주의를 고수한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만화 캐릭터로 자신의 이미지를 대신했다.

"작품마다 테마를 정하고 제 나름의 대답을 찾기 위해 고민합니다. 신작의 경우 한 번뿐인 인생의 무게가 테마예요." 나는 미리의 말을 읽고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에서는 어떤 테마를 추구했을까 잠시 생각해 본다.

이번 작품의 주인공은 서점직원 경력 10년차 신지 쓰치다. 올해 나이 서른 둘, 싱글 경력 6년차 노총각. 월급 25만 엔, 정년까지 28. 그리고 7년 동안 방 한 칸짜리 원룸에서 살고 있다.

그는 퇴근 후 혼자서 저녁을 때우고, 가끔 밤하늘을 바라보며 되뇐다. “도대체 몇 명의 우주비행사가 우주로 갔을까?” 그의 고민은 바로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

특이하게도 미리는 실제로 이 만화에 등장해서 쓰치다와 대화를 나눈다.

"저, 서점에 가는 거 좋아해요. 책을 인터넷으로 구입하면 조금 무미건조한 느낌."
서점을 어슬렁거리며 이런 책이 있네! 읽어보고 싶어하는 거. 저 좋아 해요."

 

 

작가가 괜히 등장했겠는가? 미리와 헤어진 쓰치다는 몹시 책을 읽고 싶어져서 가까운 서점에 들른다. 거기서 발견한 책이 바로 개같은 내 인생. 레이다르 옌손와 니클라스 다르께가 함께 쓴 이 작품은 열두 살 소년 잉게마르의 성장을 다룬 소설이다.

잉게마르는 고독할 때면 1957년 실험을 위해 우주에 쏘아 올려진 개 라이카를 생각한다. 홀로 인간 대신 쓸쓸히 죽어간 라이카. 잉게마르는 읊조린다. “난 그 개보다 낫다.”

내가 보기에 나의 우주는 아직 멀다의 모티프가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우리는 한 발짝 떼도 사람에 치일 정도로 과밀한 도시에 살고 있지만, 막상 우주에 홀로 남겨진 라이카 마냥 고독한 존재. 때로는 무인도에 있는 것처럼 답답함을 느끼기도 하는 그런 존재. 싱글남 쓰치다의 마음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 후배 주선으로 미팅에 나간 쓰치다는 같이 공감할 수 있은 상대를 만난다. 호시 신이치의 초 단편 이야기. 우주에 나간 비행사가 사고로 지구로 귀환하지 못한 슬픈 이야기. 하지만 상대는 이미 짝이 있었고, 친구 야요이의 부탁으로 마지못해 나온 입장이었던 것.

다음 날 쓰치다와 점장이 나눈 대화,
미팅, 차였다며
?”
점장님, 제 우주는 아직 멀고 멉니다.”

 

어쨌든 야오이가 자신에게 호감을 보인다는 말에 관심을 갖게된 쓰치다는 야오이와 데이트를 하게 된다. 그런 어느 날,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 물었다가 거절당한다. 야오이는 다음 날 일정이 있었던 것.

방에 돌아와 하염없이 자책하던 쓰치다에게 온 야오이의 메시지. “오늘은 즐거웠어요. 다음에는 꼭 쓰치다 씨 집에도 가보고 싶어요.” 쓰치다는 콧노래를 부르며 때 아닌 야밤에 조깅까지. ‘지금, 우주에 가까워진 기분이야.’ 남자란 바로 이런 거! ^^

자 여기서 끝나면 좀 섭섭하다. ‘개 같은 내 인생에 한 줄기 빛은 없을까? 바로 심금을 울리는 따뜻한 책이 곁에 있다. 작가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우리 인생을 그래도 살맛나게 하는 것은 책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가령 쓰치다가 100쇄가 넘은 그림 책 100만 번 산 고양이를 보면서 갑자기 맛본 아주 어린아이였을 때의 기분이 시공간을 넘어, 지금, 내 속으로 들어와 있는 신비함같은 거.

11살 손녀의 사십구재를 위해 평소 손녀가 즐겨보던 만화책을 사러 온 다케우치 할아버지. 마음 착하게도 쓰치다는 할아버지 집에 들러 위로해 준다. 며칠 후 할머니는 쓰치다가 마련한 따뜻한 책 전시전에 들러 창가의 토토를 고른다.

서점을 다시 찾은 할아버지, 오랜만에 아내가 웃었다면서 다시 책을 찾는다. 우리 인생은 그렇게 책을 통해, 이야기를 통해 위로받으며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렇듯 이 책에는 작가가 권하고 싶은 책, 마음 따뜻한 책 열여섯 권이 등장한다.

한편 끝머리에 쓰치다가 수짱의 연애에서 수짱과 잠시 조우하는 장면이 나온다. 즉 이전 작품에서 나왔던 쓰치다가 이번에는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 사실 이런 방식을 처음 고안한 이는 프랑스의 발자크였다. 그는 동일 인물들을 다른 작품에 재등장시킴으로써 여러 작품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했다.

 

발자크의 새로운 시도는 다른 작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전한다. 이런 방식은 재등장 인물들의 연대기적 삶을 따라가 보거나, 다른 환경에 처했을 때 어떻게 변하는지 혹은 대처하는 지 엿보는 묘미를 안겨준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도 다음 작품을 기약하는 주인공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유모차를 끌고 서점을 찾은 여성이 눈에 띈다. 그녀의 독백, "무인도에 있는 것 처럼 느껴지는 답답함"이란 표현은 작가가 혹할 만큼 눈에 띄는 테마 같지 않는가?

미리의 책들은 참 따뜻하다. 썩 잘 그린 느낌은 들지 않지만, 어딘가 모르게 친숙하다. 주인공의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내 일상과 닮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문득 대화나 인물의 독백을 통해 불쑥 던져지는 질문들이 마치 나도 뭔가 답을 내놓아야 할 것처럼 움찔거리게 만든다.

동병상련이라 했던가. 언젠가 쓰치다랑 술 한 잔 기울여 보고 싶다. 뭐 하려고? 우주 이야기. , 야오이도 부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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