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데리다의 유령들 ROUTLEDGE Critical THINKERS(LP) 6
니콜러스 로일 지음, 오문석 옮김 / 앨피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자크 데리다는 가장 입문서를 쓰기 어려운 사상가임에 틀림없다. 그의 사유 및 글쓰기가 그 자체로 독립적이거나 완결적이지 않고---이것이야말로 데리다가 적극적으로 저항하고자 하는 오래된 관념이다---다른 사람의 글쓰기에 대한 꼼꼼한 독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텍스트가 한두 개의 명제로 명료하게 요약되고 정리될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부터 부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압축과 공식화, 키워드 요약 등이 부득이하게 요청되는 입문서라는 글쓰기의 형식은 데리다를 그 대상으로 삼는 한, 가장 데리다에 역행하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설령 이렇게 쓰는 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약 50여 권에 이르는 그의 저작---아직도 유작이 출간 중이다---에 수록된 주요 논의들을 맛보기 차원에서라도 한 권에 모두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리다를 소개하는 글은 세계 곳곳에서 줄기차게 씌어져 왔고 또 씌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데리다를 읽고자 하는 수요는 많은 데 반해, 데리다로 들어서는 문턱은 높아 보이기 때문인가 보다.

이 책의 미덕이라면 저자가 짧은 분량 안에 데리다를 소개하고 요약하는 행위에 내재된 위험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고, 이러한 자의식을 책 전반에 걸쳐 비교적 일관되게 유지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에 있다. 저자는 데리다 저작의 발표년도를 따라 데리다를 설명하지도 않고, 장과 절을 나누기는 했지만 해당 파트의 소주제에 그리 얽매이지도 않는다. 그 대신 자신의 부가설명을 가능한 한 아끼고 데리다의 목소리를 직접 인용을 통해 들려주고자 애쓴다. 토막글이긴 하지만 어쨌든 데리다의 글을 곧바로 접할 기회를 많이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는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2003년에 발표된 책(원서)인 만큼, '90년대 이후 데리다의 저작에서 두드러지는 그의 정치적 면모에도 주목하고 있는데, 여전히 '차연', '텍스트 바깥은 없다', '포스트모더니스트' 정도의 수식어로만 데리다를 이해하고 있는 국내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데리다에 대한 생각을 처음부터 달리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부록으로 실린 데리다의 저작과 인터뷰, 기타 선집 목록은 데리다만이 아닌 다른 입문서를 집필하고자 하는 사람이 모범으로 삼기에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우 알차게 정리되어 있어 데리다를 좀더 공부하려는 사람에겐 여러모로 유익할 것 같다. (다만 한국어로 번역된 단행본, 인터뷰, 논문 등을 따로 밝혀주지 않은 점은 유감이다)

그러나 이상의 유용함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말한 우려들이 모두 해소된 건 아니다. 데리다의 특유한 논법을 설명하는 데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하면서도 데리다의 '주요' 개념들을 대부분 언급하고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다행스럽지만, 은유, 유령, 환대, 번역, 여성성, 회화 등---많은 사람들이 데리다와 관련하여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들이다---에 대한 데리다의 흥미로운 논의들이 누락되거나 불충분하게 다루어진 건 아쉬운 부분이다. 사실 데리다의 '주요' 개념들도 보충설명이 좀더 있었으면 하는 경우가 많았고, 문학 작품 등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는 것이 오히려 이해를 더 어렵게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데리다를 직간접적으로 전혀 접해보지 못한 사람에게 권하기는 조금 부담스럽다. 그런데 시중에 구할 수 있는 데리다 입문서 가운데 이만한 책도 딱히 없는 것 같다. (데리다 초기 사상에 대한 입문서로는 김형효 교수의 [데리다의 해체철학](민음사, 1993)이 제격이나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다) 데리다의 저작 가운데 번역되지 않은 책이 훨씬 많고 번역된 책들조차 번역의 질이 참담한 경우가 태반이라고 하니, 일단은 이 책으로 데리다를 시작해야겠다. 한국어로 씌어진 좋은 데리다 입문서가 나오기를, 그리고 데리다의 저작들이 마저 충실하게 번역될 수 있기를 기대할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박민규의 글은 소설이라 불리고는 있지만, 그의 글쓰기 스타일은 차라리 시적인 것에 가깝다. 시적이라고 해서 거창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그저 그가 언어를 사물이나 대상을 지시하고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대신 그 자체를 목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해서 하는 말이다. 독백과 타인의 말이 뒤섞여서 나타나는 것이나 한 줄짜리 문장을 한 문단으로 대체해버리는 것, 행갈이를 자주 사용하는 것, 자신의 말이나 생각을 전술한 뒤 그것을 활용하여 변주하는 방식으로 말놀이를 되풀이하는 것 등을 볼 때, 그의 글은 산문의 외양을 띠고 있음에도 산문의 세계와는 어느 정도, 어쩌면 꽤나 거리를 둔다.

형식적으로 그러하다면 박민규의 글은 퍽 실험적이고 전위적으로 보일 법도 한데, 막상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외형상 그의 소설은 우리가 보아왔던 소설들과 견줄 때 파격적일 수 있지만, 재기로 가득 찬 그의 문장 하나하나는 생각보다 훨씬 잘 읽힌다. 아니, 최근에 나오는 여느 한국소설보다도 높은 가독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말은 박민규의 문장력이 그만큼 탁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지만, 그의 문장이 기존의 규범과 관습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겉보기에는 신선하고 독창적일지언정 독자들을 불편하게 하는 글쓰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박민규의 글에는 구어와 문어, 전달하는 말과 전달되는 말이 마침표와 쉼표의 무분별한 남용 속에 마구 혼재되고 있는데, 이는 자연스레 비문의 양산으로 이어진다. 이 소설집에 발견되는 적지 않은 비문들까지 단지 '무규칙이종소설가'라는 이유로 눈감아줄 만큼 모든 독자가 관대하지는 않다.

현실과 환상의 넘나듦. 좋다, 이것 자체만 놓고 시비를 건다면 구닥다리라고 욕 먹기 딱 좋다. 문제는 박민규의 소설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현실 인식과 환상이 결합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 하는 점이다.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은 예외없이 1인칭 시점을 취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도저하고 지독한 1인칭이다. '나'라고 하는 인물들은 쉴 새 없이 "인간은 ...인 법이다." "세상은 ...인 것이다" "...했으니 ...겠지" 식의 단정들을 쏟아내고 있는데, 물론 그러한 판단들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박민규 소설에 미덕이 있다면 젊은 청년들의 고단한 삶과 성장과정을 누구보다 담담하고 차분하게 포착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그러나 세계에 대한 저런 무시무시한 자기 인식이 소통되지 않고 출구를 확보하지 못할 때, 돌아오는 것은 독자에게 부담스러운 나르시시즘뿐이다. 박민규가 제시하는 환상들도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소설 속 인물들이 고통과 좌절을 환상으로 견디고 이겨내는 세계는 단절과 비약을 주식으로 삼는 시적 세계이지, 이성과 질서를 무기로 하여 세상과 대결하는 산문적 세계가 아니다. 사랑하는 것, 귀찮은 것 모두모두 냉장고에 넣어버리는 것도 재미있고, 지친 어느 날 너구리가 등을 밀어주는 것도 근사하다. 하지만 그 다음엔? 주인공들은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라고 말한 다음, 기린에게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라는 대답을 들은 다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박민규 역시 그 이상 소설을 진행시키지 못하고 소설을 끝낸다. 당연하게도, 환상만으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도 "세상은..." 하며 자기 임의로 세상을 재단하고 말 것인가? 환상을 가로지르지 못하고 그 뒤의 현실과 맞서지 않으면 환상은 자폐가 된다. 자폐는 나르시시즘과 샴쌍둥이가 아니겠는가.

독자들과 평단에게서 한목소리로 찬사를 듣는다는 것은 작가에게 대단한 행운이자 축복이겠지만, 박민규의 경우 솔직히 이 같은 현상이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80년대 문화적 기표들을 차용했던 사람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사이의 청춘을 쓸쓸하게 그렸던 작가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현실과 환상을 자유롭게 오가던 작가가 드물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박민규의 문장들이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며, 나아가 재밌고 웃기는 소설들이 이것 외에도 많은데, 박민규에 대해 그처럼 높은 평가가 나오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누가 좀 댓글로 그 이유를 알려주면 좋겠다. 박민규의 등장이 진정 "대한민국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신선하고 충격적인 사건 하나"(이외수)란 말인가? 해설을 쓴 신수정은 이렇게까지 말한다.

"박민규를 행복한 작가라고 할 수 있을까. 2003년 [지구영웅전설]로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고 연이어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이력을 생각하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요컨대 그는 모든 작가 지망생들이 꿈꾸되 쉽게 이룰 수는 없는 그런 종류의 작가가 된 것이다. [세계의 문학], [문학동네], [문학`판], [동서문학], [창작과비평], [한국문학], [현대문학] 등 국내 유수의 문예지들이 그에게 소설을 청탁했으며, 비평은 그가 발표한 소설들에 대한 주목으로 그의 열정에 보답했다. 독자들은 또 어떤가. 그들은 무엇보다도 그의 소설의 참신함에 열광했으며 쇄를 거듭하는 판매부수가 이를 증명해주었다. 이 정도라면 대단하지 않은가. 문단의 관심과 비평의 주목, 그리고 독자들의 사랑. 작가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이것 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 그는 그야말로 2000년대 한국 문단이 가장 사랑한 문학계의 총아라고 할 만하다."

신수정의 이 말 속에 아마 지금 한국문학이 처한 위기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박민규에 대한 높은 평가가 어떻게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지도 대강 짐작이 가고. 나는 박민규가 '무규칙이종소설가'라는 조금은 유치한 자기패션부터 벗어던지기를 바란다. '무규칙이종'이란 말에서 오는 거칠고 반항적인 면모를 그의 글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위에서 보듯 너나 할 것 없이 그에게 소설을 청탁하고, 그의 소설이 많이 팔리며, 이걸 또 평단이 상찬할 정도라면, 그의 소설은 퍽이나 안전하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 직함을 계속 달고 싶다면 그것에 알맞게 저런 일방적인 찬사들이 무색해지도록 좀더 불온해졌으면 좋겠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돌바람 2006-01-21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 사랑하는 사량님!
너무 속 시원하게 긁어주어서 인사 건네기도 조금 조심스러워요.
한 톨 더 보탤 말이 없어서요.
그래도 반가운 님의 글이 이렇게 차분히 들려주는 이야기가 너무너무 좋아서 마음만 걸어놓을 게요.
잘 읽었어요. 아까 추천하고 갔다가 다시 왔다지요.^^*

2006-01-22 1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량 2006-01-22 2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바람 / 헉, 사랑한다구요? 그런 말 들으면 저 잠 못자요. T_T 저는 돌바람 님 글을 읽고 나면 그 자리에 마음조차 걸어놓지 못한답니다. 한없이 부끄럽고, 또 반성하게 되거든요... 건대입구 지날 때면 항상 돌바람 님 생각하곤 합니다. 또 부끄~

숨은 님 / 그냥 괜시리 딴지를 걸어보고 싶었는지도 몰라요. 제 감각이 고리타분하고 구식이라서 새로운 것에 둔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왜 숨어계십니까? ^^;

2006-02-27 0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2-28 21: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2-28 2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3-04 0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3-11 2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시장미 2006-05-31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량 형! :)

김공욱 2013-02-17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문장력 대단하신데요? 아니요, 비트는 것 절대 아닙니다. 진심입니다.
박민규씨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 드리자면,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무규칙이종작가라느니 파격이라느니 그런 말들이 좀 거슬리는군요. 제가 보기에 박민규씨는 그저 말장난에 심취해 있는, 또는 즐기고 있는 유치한 "젊은이"이가 아닌가 싶거든요. 젊다는 건 그런 거지요. 멋내고 싶고 자랑하고 싶고... 아이고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겼네요. 일단 끊고 다시 오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사량 2013-02-18 08:53   좋아요 0 | URL
너무 오래된 글에 댓글을 남겨주셔서 왠지 부끄럽네요. 저는 이 책을 끝으로 박민규의 글을 전혀 읽지 않았고, 따라서 그의 문학세계가 이후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는 여전히 40대 초반일 테니 의지만 있다면야 얼마든지 더 성장할 수 있겠지요.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김공욱 2013-02-24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렇군요. 저도 그랬기를 바랍니다. 지금 쯤엔 비단 박민규씨 뿐 아니라 우리 순소설의 경향이라고할지 풍조 또는 사조, 아니면 물길이 좀 바뀌었기를 말이지요. 예전에는 순소설 읽기를 꽤 즐겨했었는데 어느날부턴가 그 횟수가 점점 줄어 들더니 결국엔 읽기 자체를 아예 끊어 버리게 되더군요.
그로부터 꽤 세월이 흘렀으니 이젠 읽기를 다시 시도(?)해 볼까 싶습니다. 서점에 가서 서성거리는 즐거움도 아련하고...
만약 여전히 변화가 없다면 까짓 또 탁,덮어버리고 말든지.
수고하세요.
 
모데라토 칸타빌레 (구) 문지 스펙트럼 19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도입부에 등장하는 젊은 연인들 사이의 살인사건을 제외한다면 딱히 특별할 사건이랄 것도 없고, 극적으로 긴밀하게 구성되어 있지도 않으며,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심심하기만 하고, 대화들이란 것도 횡설수설과 중언부언으로 가득해 보일지 모를 이 소설에서 당신은 무엇을 읽어낼 것인가. 일종의 유한마담인 안 데바레드와 공장노동자 쇼뱅의 입을 빌려 뒤라스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소리를 들을 것을, 시들어가는 목련꽃이 온몸으로 뿜어내는 어느 봄날의 기운을 해독할 것을 나지막한 속삭임으로 우리에게 권한다. 아이가 피아노를 치기 싫어하는 것도, 살인사건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안과 쇼뱅이 정녕 무엇을 원하는지도 애써 이해하려고 들지 말라. 다만 까페 안으로 스며드는 아련한 석양의 붉은 빛을, 노을이 별빛으로 변해가는 우수를, 바다에 이르지 못한 채 철책을 벗해야 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곡조를 알 수 없으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방향을 잃은 세레나데처럼 입가를 맴도는 소나티네를, 대서양일지 지중해일지, 아니면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태평양일지, 가깝지만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눈물어린 소금기를, 그리고 천천히 찾아오는 거역 불가능한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맡아라. 불가능하다면 그들처럼 포도주가 가져다주는 달콤한 환각과 저릿함에 몸을 내맡겨도 좋을 것이다. 포도주가 당신의 오감을 섬세한 더듬이로 만들어줄 테니.

그때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안과 쇼뱅이 왜 그토록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시간에 집착하였는지를. 사랑의 순간은 섬광처럼 강렬하게 찾아오지만, 그것은 결국 섬광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기에 안타깝게도 우리 곁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랑할 시간은 많지 않다. 따라서 대화는 다급해진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해요"라는 말을 함부로 뱉을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사랑이란 안의 것도, 쇼뱅의 것도 아닌 바다와 대기, 바람 속에서 그저 솟아오르는 것이기에, 그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대신, 태양과 공기의 충실한 기호 해독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 대화가 겉돌고 모호해보일지언정 그들을, 뒤라스를 탓하지 말라. 그들은 어딘가에서 소리 없이 솟구치는 사랑의 기미를 이겨내지 못해, 스스로 통제하지 못해, 그리고 표현하지 못해 더욱 아프고 절절하게 사랑해야 한단 말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대화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계속하십시오"를 반복하며 밀물처럼 닥쳐오는 무수한 사랑의 기호들을 끊임없이 해독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뒤라스를 나무라지 말고 당신이 직접 바다와도 같은 그 넓은 대화의 행간에 뛰어들어 몸을 적셔라. 그리고... 사랑하라, 모데라토(보통 빠르기로) 칸타빌레(노래하듯이)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돌바람 2005-09-23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량님, 사량님!
멋지다. 멋지다!
저, 펑크님이 책을 보내주셔서 김사량의 소설을 첨으로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량님이 무척이나 기다려졌어요. '태양과 공기의 충실한 기호 해독자가 되어야 한다...사랑하라,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 랄랄라^^

사량 2005-09-23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바람님, 리뷰 올리자마자 찾아와주셨네요. 반갑고 고마워서 미치겠는데 무력한 제 언어가 이를 감당하지 못합니다.ㅠㅠ 그동안 조금 아프고 고된 사정이 있어 심신이 많이 지쳐 있었답니다. 알라딘에도 자주 못 들어왔구요. 그런데 그 와중에 용케도 돌바람님의 김사량 리뷰는 읽을 수 있었어요. 아마 말없이 어디선가 돌바람님이 저보고 읽으라고 불렀었나봐요. 서럽도록 아름다운 글이었어요. 나도 무언가 쓰고 싶은데... 하는 욕망을 간절히 불러일으키는 글이었구요. 댓글을 달고 싶었으나 아무래도 리뷰로 먼저 사람들께 인사를 해야한다는 생각에 간신히 참았어요. 게다가 펑크님이 책을 보내주셨다니 마음 한구석이 싸했답니다. 펑크님은 제 닉네임이 김사량에서 따온 것임을 가장 먼저 알아준 분이신 동시에 제 방명록에 처음 족적을 남겨준 분이시기도 해서 제가 늘 고마워하고 있거든요. 그렇게 인연을 만들어가는 알라딘 친구들이 부럽기도 하고, 또 이런 이야기를 자연스레 꺼낼 수 있어서 참 기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리뷰, 아무거나 좋으니 하나라도 빨리 써보고 싶었는데, 쓰자마자 이렇게 댓글 남겨주시니 어찌나 행복한지 모르겠어요. ^^ 고마워요.

돌바람 2005-09-23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제가 더 행복한 걸요. 글자를 읽을 거냐, 행간을 읽을 거냐, 저는 늘 이런 것에 배가 고파서요. 사량님의 글들은 행간에서 건져올린 치열함이 첫만남 이후 늘 제게 보여서, 펑크님처럼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반갑고 따뜻하답니다. 오래 뵐 수 있으면 좋겠어요 ^^

비로그인 2005-09-23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리 없이 솟구치는 사랑의 기미를 이겨내지 못해, 스스로 통제하지 못해, 그리고 표현하지 못해 더욱 아프고 절절하게 사랑해야 한단 말이다. -> 이 부분 너무 와닿아요
사량님 글이 이렇게 잘 읽어지는거 오랫만인 듯하네요. 근데.. 바뿌셨어요?
너무 오랫만에 보는 것 같아요. ^-^ 안부 묻고싶었는데........ 참. 우리 말놓고 지내요
요즘 저 계속 캠폐인중이예요. 형이라고 부르면 안될까요? 오랫만에 보니 더욱더.
반갑습니다. 사량형!! ^-^ (허락도 안해줬는데. 하고 보는 심보. ㅋㅋ)

사량 2005-09-24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바람 / "몸둘 바를 모르겠다"라는 말은 아마도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인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저도 돌바람 님 오래오래 뵙고 싶습니다.

가시장미 / "캠폐인" 중이라 함은 캠 가지고 폐인 놀이하는 거 말하는 겁니까? ^^ 가시장미님, 믿지 않으시겠지만 그동안 많이 보고 싶었더랬습니다. ㅠㅠ 댓글도 달고 싶고 좋은 시도 보내드리고 싶었는데, 이래저래 사정이 여의치 않았어요. 지금도 썩 나아진 것만은 아니지만, 언제 자세히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지요. 나중에 번개 또 하게 되면 저도 불러줘요. ^^ 그리고... 말을 놓고 싶으시다면 앗싸리 세게 나오셔야죠. 사량형이 뭡니까, 치사하게. 사량아, 하고 편하게 부르세요. 그러면 저도 가시장미야, 하고 기꺼이 말을 놓겠습니다. 장미야, 꼭 그래야 해. 알았지? ^^

비로그인 2005-09-25 0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흐흐흐. 사량아. 너가 정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지? 근데말야.
언젠가는 무지막지하게 후회하게 될꼬야!!! 우헤헤헤헤헤 =_=
안그래도 지금 술취해서 어지러운데. 이런 글을 보니. 정신이 더 마구 없음.
근데 너무너무 좋네. ^-^* 10배는 더 가까워진 것 같아서........
근데. 인심쓰는김에 더 쓰지. 내가 누나하면 안될까?! 으하하하하하 -_ㅡ*)~
알써알써. 장난이야. 누나하면 맛난거 사줘야 하니깐. 그냥 친구하자. 근데말야.
한번 말 놓으면 영원히 말 놓는거야. 치사하게 나중에 나이가 몇살 많니..하면 안돼!
으흐흐흐흐흐. 이리저리 사정이 많았다니. 참 궁금하기도하네. 기회가 된다면.
무슨 사정이 그렇게 많은지. 또, 그것들로 인해. 마음속에 남은 앙금은 없는지..
썩 나아진 것이 아니라니... 지금도 많이 힘들고 괴로운지. 괜찮은 건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데. 참 거시기하네. 기회라는 것을 만들면 그만이지만.
참. 만드는 것이 쉬운것도 아닌지라.. ^-^; 곧 보세. 여유 생기면. 연락하소.

로드무비 2005-09-28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너무 좋아요.^^

사량 2005-09-29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감히 로드무비님의 리뷰들에 비기겠습니까...ㅠㅠ

히피드림~ 2005-10-07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건 또 언제 쓰셨답니까? 다들 모여있는데 혼자 지각한 기분이네요.^^;; 오늘 또 이렇게 사량님 서재에서 배우고 가네요.추천 꾹~

사량 2005-10-08 0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앙, punk님... 반가워요. ㅠㅠ

2005-10-20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1-10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6-02-08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허,
읽고싶어라~~
딱 읽고 싶게 쓴 멋진 리뷰네요.
땡스투요~~

사량 2006-02-08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발마스님께서 거미줄로 가득한 이곳에 친히 왕림해주실 줄이야! 감격감격ㅜㅜ 그런데 아마 저런 투의 문장은 다시는 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겐 나름대로 사연이 있는 책이라서요.. 아무튼 정말 감사합니다.
 
노동소설 혁명의 요람인가 예술의 무덤인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3
유기환 지음 / 책세상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른바 ‘노동소설’이라는 개념과 실재는 우리에게 익숙한 듯 하면서도 낯설다. ‘노동’이라는 단어 속에서 우리는 멀리는 1920-30년대의 신경향파 문학 및 카프(KAPF)의 창작물들을, 가깝게는 1980년대의 정화진·방현석·안재성 등의 작품들을 떠올리면서, 이들로부터 노동자들과 그들의 의식을 작품의 전면에 배치하고자 했던 일련의 문학적 흐름들을 어렵지 않게 연상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같은 특성들을 하나의 양식이나 장르로서 개념화하는 과정에서 정작 노동소설이라는 용어는 리얼리즘, 혹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주 사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하기 위함이든, 노동소설의 한계를 지적하려는 시도이든, 지금/여기에서 노동소설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노동소설이라는 용어에 드리워진 양가적 성격, 즉 노동소설의 익숙하면서도 낯선 무언가를 고려하는 것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종류의 글에 가장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은 개념의 외연과 내포를 확정하고 이를 일관성 있게 사용하는 것이라 할 때, 노동소설 개념의 양가성과 애매성은 논증의 방향성 자체를 처음부터 좌초시킬 수 있는 암초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노동소설의 개념 설정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차원에서 정리되고 해명되어야 한다. 첫째, 노동소설의 사전적 정의는 무엇인가. 둘째, 노동소설은 다른 소설들과 어떻게 변별되는가. 셋째, 어떻게 노동소설의 현재적 의의를 발견할 수 있는가.

유기환의 [노동소설, 혁명의 요람인가 예술의 무덤인가] 역시 노동소설의 양가성을 언급하는 것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그러나 저자가 주목하는 노동소설의 양면적 성격이란 노동소설 개념 자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소설’이라 불려 왔던 일반적인 작품들에 각각 부여되어 온 “혁명의 요람”과 “예술의 무덤”이라는 상반된 평가로부터 비롯된다. 이 같은 전제 아래 저자의 기획은 “마르크스의 유산을 어떻게 상속할 것인가의 문제”(12쪽)와 “하나의 예술 장르로서의 노동소설의 미학적 특징”(17쪽)을 조화롭게 통일시키는 것이다. 이때 저자는 노동소설이라는 개념 자체를 문제시하고 재검토하지 않으며, 노동소설의 외연과 내포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노동소설을 정의하고 있는 부분이 이백 페이지가 넘는 글 속에서 고작 한 페이지에 그칠 리가 없다. 말하자면 이 책의 가장 치명적인 결점은 바로 이와 같은 무책임한 개념 정의에 있다. 엉성하게 설정된 개념으로 말미암아 논의 전체가 전반적으로 취약하고 부실하게 흐르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노동소설을 “(동일한 집단 의식과 동일한 역사적 전망을 가진) 사회계급으로서의 노동자들이 보여주는 동태적 이야기”(18쪽)으로서 정의한다. 이러한 정의는 “노동자에 의해 씌어진 소설”이나 “노동 문제를 다루는 소설”이라는 기준을 적용할 경우 그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는 사정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저자의 정의 역시 불분명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사회계급이 반드시 프롤레타리아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며, 동일한 집단 의식과 역사적 전망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계급 내부에서도 다양한 구성원들의 이해 관계 및 권력 관계가 존재한다. 노동자들의 정체성은 성과 인종의 문제와도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보다 역동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노동해방소설’ 대신 노동소설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어야 하는 까닭은 1980년대 한국의 컨텍스트에 크게 힘입고 있는 노동해방소설이라는 표현이 아직까지는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하지만 개념의 적절성은 보편적인 권위로부터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저자 자신의 치밀한 논증과 근거 제시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진정 노동소설이라는 말의 보편성을 내세우고자 했다면 저자는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관련 문헌이라도 인용해야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노동소설을 다루는 ‘보편적인’ 소설 이론가들의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노동소설에 대한 개념 정의가 충분하지 못하다 보니 텍스트를 선정하는 데서도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졸라의 [제르미날], 고리키의 [어머니], 런던의 [강철군화], 한설야의 [황혼]을 분석 대상으로 선택한 저자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서로 다른 자본주의적 경험을 가진 나라의 소설일 것. 둘째, 각기 그 나라 노동운동 상승기의 소설일 것. 셋째, 각기 그 나라, 그 시대의 대표작일 것. 말하자면 공간성, 시간성, 예술성이 선택 기준”(20쪽)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자본주의적 경험”과 “노동운동 상승기”를 설명하는 부분은 본문을 통틀어 “프랑스의 선진자본주의, 러시아의 후진자본주의, 미국의 직접적 봉건 체험 없는 자본주의, 한국의 강요된 이식자본주의”(같은 곳)라고 약술하는 대목이 전부이다. ‘선진’. ‘후진’, ‘이식’ 등의 민감한 단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저자의 비정치성과 몰역사성이 놀랍기도 하거니와, 문학과 경제 체제의 복잡다단한 관련 양상을 각주 하나 없이 한마디로 요약해버리는 학문적 불성실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더구나 “그 나라, 그 시대의 대표작”(대체 ‘대표작이란 또 무엇인가?)이 곧바로 예술성을 담보하게 되는 것이라면, 노동소설의 미학적 특질을 밝히고자 하는 저자의 논의는 시작과 동시에 이미 완결되는 것이 아닌가? 저자는 문학성을 인정받은 작품들에 안전하게 무임승차하려 했던 것에 불과한 것인가?

나아가 우리는 저자가 은밀히 견지하고 있는 발전론적, 진화론적, 신랄하게 말하자면 서구중심적인 소설관에 의혹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상대적으로 장구한 소설사의 산물인 [제르미날], [어머니]가 상대적으로 일천한 소설사의 산물인 [강철군화], [황혼]보다 예술적으로 나아 보였다”(같은 곳)는 언급은 소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동시에, 이 글의 전반적인 논조를 예감케 한다. 노동소설 개념의 두 축을 이루는 ‘노동’과 ‘소설’에서 저자가 ‘소설’의 형식 자체에는 거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소설의 정의를 충실하게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을 탐색하는 루카치 식의 서구중심적 소설관을 근간으로 삼고 있는데, 이는 별다른 의의 없이 서구 이론의 ‘보편성’을 모든 ‘결핍된’ 문학 작품들이 획득해야 할 선험적인 가치이자 모델로서 받아들이게끔 하는 동인이 된다(저자는 이따금 ‘모범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즉 ‘서구중심적’인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서구중심적’인 ‘보편성’이 상이한 시공간에서 소설이 생산하는 다채로운 차이와 변주를 억압하고 소설의 가치를 판단하는 유일무이한 기준으로 화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 같은 관점이 야기한 대표적인 결과가 본문을 시종 관통하고 있는 이항대립적 이분법 논리의 남용이다. 저자가 공들여 제시하고 있는 육체적 초상, 생활 양식, 사회언어학, 시공간, 성장구조 등의 분석틀은 기본적으로 선명한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다. 저자의 표현대로 ‘가독성’을 높이는 효과적인 수단인 이분법은, 주제와 메시지 전달의 선명성을 텍스트 속의 다양한 가치와 목소리가 형성해내는 복잡한 의미 작용들의 공존과 맞바꾸어 버린다. 이러한 이분법이 자아와 세계의 선명한 대립 하에 타자를 대상화하고 정복하는 서구의 주체철학과 근대 소설 이론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이분법에의 집착은 결국 내용/형식, 혁명/예술, 또한 아이러니컬하게도 노동/소설과 같은 해묵은 대립을 반복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진부한 도식은 진부한 통념만을 낳는다. ‘노동’과 ‘소설’을 변증법적으로 통합시키고자 했던 저자의 야심찬 시도가 “진부하지만 옳은 명제 중의 하나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것이다”(184쪽), “그래도 역시 팸플릿은 팸플릿이고, 문학은 문학이다. 예술의 과도한 도식화는 흔히 예술의 죽음을 부른다”(189쪽) 식의 어이없는 상투형으로 수렴되고 마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저자는 현실과 예술은 엄연히 별개의 것이며 어느 한쪽이 특화되어야 한다는 자승자박의 결론으로부터 결코 빠져나올 수 없다. 설령 “노동소설이 ‘미학적 질’을 더 많이 구현하면 할수록 그 ‘사회정치적 테제’는 더 큰 설득력을 얻는다는 것이다”(192쪽)라고 결론지으며 저자가 이분법의 폐해를 인식하고 이를 미학적 입장으로 극복하려 할지라도, 복합적인 삶의 단면들을 섬세하게 포착할 수 없는, 보편성을 가장한 획일적이고 전통적인 이분법의 잣대로서 미학적 가치가 평가되는 이상, 무엇보다 강력한 전복성으로 뒷받침되어야 할 ‘사회정치적 테제’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소설, 혁명의 요람인가 예술의 무덤인가]는 개념의 부적절한 정의와 그에 따른 연구 방법론에 대한 고민의 결여가 정치성·역사성의 부재와 맞물리며 발생하는 참담한 결과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노동소설이라는 개념은 본문 안에서 테제 소설, 혁명주의 소설, 리얼리즘 소설, 사회주의 소설,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과 크게 구별되지 않은 채 사용되며, 각각의 분석틀로서 사용된 이분법의 대립항만 바꾸어주면 노동소설에서 ‘노동’이란 말을 ‘페미니즘’ 내지 ‘탈식민주의’라는 표현으로 대체하고 관련 작품들에 적용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이는 보편성의 확보라는 저자의 성과를 예증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자의식 부족과 몰역사적, 탈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다. 노동소설만이 갖는 특성과 장점은 미학의 발견이라는 미명 하에 행해지는 과도하면서도 단순한 구조 분석 속에서 거세되고 추상화되고, 따라서 결론 부분에서는 노동소설의 현재적 의의가 아닌 ‘불변의’ 문학과 예술에 관한 새로울 것 없는, 그래서 위험한 일반론만이 되풀이된다. 이들 모두 글의 도입부에서 해결되었어야 하는 노동소설 개념의 양가성의 문제, 즉 익숙하면서도 낯선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외연과 내포의 불일치 문제가 개념 규정의 미비로 말미암아 이론적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오히려 확대재생산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아울러 이같은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둔 채 각 장의 서두마다 전후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필요한 부분만 고르는 식으로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인용하고, 정작 실질적인 논의 과정에서 거의 반영되지 않은 바르트의 영향을 강조하며(단순화시키자면, 바르트에게 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분리되지 않는다. 저자의 글은 이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게다가 바르트의 글의 직접 인용은 단 한 차례도 없다), 모스와 바타이유의 ‘포틀래취’ 논의를 성급하게 도입하는(절망으로 가득한 노동자들의 절박한 집단 행위가 어째서 잉여의 무제한적 소비란 말인가?)등의 시도들은, 혹독하게 말하자면, 모두 사족에 지나지 않는 지적 기만이다. 고작 “(혁명)문학은 예술이며, 예술인 (혁명)문학만이 시대를 뛰어넘는 감동을 보장한다”(194쪽)라는 결론을 얻기 위해 굳이 이들과 같은 쟁쟁한 이론가들이 동원되어야 한단 말인가?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량 2005-07-30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 리뷰를 쓸 여력은 안 되는데 서재 업데이트는 하고 싶어서 오래 전에 써뒀던 글을 그냥 올렸습니다. -_- (퍼퍼퍽!)

비로그인 2005-07-30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쩜 이리도 어렵습니까? ㅠ.ㅠ 배경지식이 없으면 절대 이해를 할 수 없는 리뷰네요
리뷰를 쓸 여력이 안되실정도로.. 흠.... (이하생략) ㅋㅋ

사량 2005-07-30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장미님의 풍부한 심리학 지식이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그것도 어렵긴 마찬가지예요. T_T 그런데 아직 여행 안 가셨네요? ^^ 잘 다녀오시고 에너지 만빵 충전하셔서 저희들에게도 듬뿍 나누어주세요~

2005-07-31 0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량 2005-07-31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 흑흑, 고맙습니다. T_T 정말루...

히피드림~ 2005-08-02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쓰신 분이 사량님의 신랄한 비평을 읽으면 이불 뒤집어 쓰고 울겠는데요. ^^
학문을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깨닫게 만들어 주십니다.
잘 읽었어요.

사량 2005-08-02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unk / 책세상 우리시대 문고는 글의 완성도를 떠나 참신하고 도발적인 문제 제기가 볼 만한 시리즈인데, 이 책은 그런게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씹어야죠. ^^ 그런데 지난 4월 이후 우리시대 문고가 나오지 않고 있네요. 무슨 일일까요?

히피드림~ 2005-08-02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세상문고 시리즈를 많이 읽으시나봐요. 전 이 시리즈의 제 1호였던 탁석산의 '한국의 정체성'하구 '주체성' 밖엔 읽은게 없네요. 책 값은 싸서 좋았어요.^^ 이 시리즈 중 괜찮은 거 있으면 추천해 주세요. 부탁드려요.^^

사량 2005-08-03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 사실 저도 별로 읽은 건 없어요. -_-;;; '정체성'과 '주체성'도 못 읽었습니다.-_- 워낙 다양한 주제들을 포괄하는 시리즈니 그저 입맛에 맞게 골라 읽으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책세상 우리시대 문고의 경우 시의성을 띤 문제 제기들이 많은 편이어서 출간 당시에 읽지 않으면 조금 김이 빠지는 책들이 꽤 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공임순의 [우리 역사소설은 이론과 논쟁이 필요하다] 같은 책은 매우 흥미롭지만, 보다 폭넓고 구체적인 논의를 원한다면 같은 저자의 최근작 [식민지의 적자들]을 보시는 게 낫지요. 또 고미숙의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역시 무겁기 짝이 없는 제목에 비하면 무척 재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으나, 지금은 비슷한 테마를 더 깊게 다룬 책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어, 2001년이라는 출간시기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 책이 식상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저자들 가운데 소장 학자들이 많아서 그런가 봅니다. 제가 인상 깊게 읽은 책은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간명하게 요악하고 있는 김선욱의 [정치와 진리], 낭만주의의 본질과 정치적 성격을 효과적으로 정리한 김진수의 [우리는 왜 지금 낭만주의를 이야기하는가]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권만 꼽으라고 한다면 기발한 문제의식으로 주류 경제학을 매섭게 비판하고 있는 홍기빈의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를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홍기빈이라는 사람은 <한겨레>에도 정기적으로 칼럼을 쓰고 있는 소장 경제학자인데, 알라딘에서 이 이름으로 검색해 보면 예사롭지 않은 책들이 눈에 띕니다.

히피드림~ 2005-08-05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알라딘에서 나름으로 다 검색해 봤어요.
사량님의 취향(?)도 알수 있었고 추천해 주신 책들에 대해서도 흥미가 솟아나네요.^^ 특히 홍기빈 책은 꼭 읽어보고 싶네요. 고마워요.^^
 
푸코의 맑스 - 미셸 푸코, 둣치오 뜨롬바도리와의 대담 디알로고스총서 1
미셸 푸코.둣치오 뜨롬바도리 지음, 이승철 옮김 / 갈무리 / 200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먼저 제목에 대해서 한마디 해야겠다. [푸코의 맑스]라는 제목에 혹하여 푸코가 주목하는 맑스의 긍정적 또는 부정적 면모, 푸코에게 끼친 맑스의 영향, 푸코의 이론과 맑시즘의 접목 가능성 등 푸코와 맑스의 다양한 관련 양상이 이 책에 담겨 있으리라 기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기대를 접기 바란다. 대담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에서 대담자는 푸코에게서 그러한 이론적 논의를 이끌어 내는 데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기 때문이다. 이 대담집에서 푸코는 비판적 사유와 혁명적 동력을 모두 상실한 채 철저히 속류화되어 역기능만을 초래하고 있던 프랑스공산당과 스탈린주의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따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을 뿐, 맑스의 이름을 자주 꺼내지는 않는다. 그저 맑스주의의 성전(聖典)화가 지배하던 1960대 프랑스 일부의 지적 분위기를 회고하는 가운데, 맑스주의는 분명히 19세기의 에피스테메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잘라 말하면서 당시의 편향성과 극단성을 우회적으로 꼬집고 있는 정도이다. 그런데도 제목이 [푸코의 맑스]라니! 더구나 이탈리아어로 씌어진 원문의 제목은 [푸코와의 대화]가 아닌가. 이 같은 사태의 원인은 엉뚱하게도 이 책의 영역본에 있다. 영역자들이 번역본에다 [맑스에 대한 언급들Remarks on Marx]라는 시덥지 않은 제목을 붙였고, 영역본을 주 텍스트로 삼은 국역자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푸코의 맑스]라는 과격하면서도 야릇한 제목을 달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거야말로 일종의 좌파선정주의 같은 것이 아닐까.

물론 맑스의 이름이 전면에 등장해야 하는 절박함과 필연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국역자 서문과 영역자 서문에는 그런 것들이 잘 드러나 있다. 영역자가 보기에 이 책은 "국지적 전술뿐 아니라 보편적 전략도 제공하는 대중 정치 조직을 통해 혁명적 프로그램을 전진시키고자 하는 한쪽 편의 욕망"과 "그들이 시행하는 기존의 권력관계 분석과 전략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주의를 유지하려는 다른 한쪽 편의 욕망"(영역자 서문, 5쪽)의 대립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국역자에 따르면 전자의 욕망은 "정통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푸코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려는 뜨롬바도리의 시도"이며, 후자의 욕망은 "자신의 이론이 현실의 정치적인 경험들과 더 큰 유관성을 갖고 있음을 주장하려는 푸코의 문제의식"(국역자 서문, 19쪽)과 각각 대응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보편적 전략과 이론적 토대를 갖춘 대중조직을 기반으로 하는 혁명적 프로그램이 곧바로 '정통'  맑스주의 일반의 것으로 환원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맑시즘에 과문함에도 감히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모든 혁명적 프로그램이 맑스의 스펙트럼 안으로 포섭될 수는 없으며, 맑스주의 내부에서조차 그 아래에 하나의 유형으로 환원될 수 없는 엄청난 다양성과 변이로 가득한 세부 프로그램들이 득실득실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책에는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한 언급이 하나의 장으로 독립되어 있는데, 그들은 맑스와 가까우면서도 또 얼마나 먼가?) 게다가 '정통'이란 말의 어감은 교조적인 태도, 기득권에 대한 집착, 아류(?)들을 향한 강한 적대심과 같은 수구적인 느낌을 강하게 주는 말이어서, 오히려 국역자가 맑스주의를 통속적인 차원에서 일반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구심마저 든다. 사실 자신들만이 민중을 대변하고 혁명을 실천할 수 있는 담지자라고 행세하는 태도, 그리고 서로가 '맑스의 적자'임을 자임하면서 진보진영 내 분파싸움을 멈추지 않는 것 등이야말로 이 책에서 푸코가 비판해 마지않던 것이 아닌가.

어쨌든 중요한 것은 맑스주의자를 '자임'하는 이들의 비판에 대한 푸코의 대답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푸코에게 쏟아진 비판들 가운데 가장 흔히 눈에 띄는 것은 푸코가 권력을 지나치게 미시적이고 국지적인 것으로 보면서 파편화시키고 있어 이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담보해내기 어렵다는 식의 비판이다. 즉 개별적인 실천들이 고립화되면서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상황을 아우르는 일반적, 총체적인 전망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게 된다는 것이다. 푸코의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문제들을 간결하고 정확한 방식으로 제기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가장 특이하고 구체적인 형태 속에서 그것들을 살펴야만 하지 않을까요?"(144쪽) 푸코가 탐구했던 '특이하고 구체적인 형태'로 우리는 쉽게 감옥이나 정신병동, 판옵티콘 등을 떠올릴 수 있다. 이들을 논의하는 푸코의 방식이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었기에, 푸코는 사소하고 비정치적인 것에 집중할 뿐 총체적인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인식이나 '정치적'인 실천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을 줄곧 들어야 했다. 그러나 푸코에 따르면 감옥이나 정신병동 등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합리성의 구축과 이성의 지배로 말미암는 배제의 매카니즘을 밝히는 것이야말로 가장 일반적이고 역사적이며 정치적인 작업이다. 합리성 자체가 초월적인 개념이 아닌 특정한 시기의 역사적 형성물에 지나지 않고, 합리성이 이성으로 간주되고 이성에 권력이 부여되는 과정 역시 "사회의 기능과 역사에 관한 질문"(146쪽)을 피해갈 수 없으며, 이러한 미시적 논증을 통해 비로소 '근대'라는 일반적 개념이자 가치가 하나하나 설명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지식이 축적, 행사, 생산되는 양상을 추적하는 작업은 권력의 메카니즘을 건드리지 않고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정치성을 피해갈래야 피해갈 수가 없다.

그런데 푸코는 왜 정치적 문제를 회피한다는 비판을 '맑스주의' 진영에서 줄곧 들어와야 했을까? 전기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토록 투사적인 학자도 찾아보기 쉽지 않을 법한데 말이다. 아마도 푸코가 "정당이나 제도의 차원에서 고려되는 사회적 문제"(156쪽)와 같은 거창한 말들을 뱉어내지 못하고, 공산당 등 기성 조직들이 테제로 삼을 만한 논의들을 별로 내보이지 못했다는 데 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왜 정당들이 해결책을 제안하는 지식인들과 관계 맺는 것을 선호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정당들은 하나의 동맹관계를 설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인은 제안하고, 정당은 그것을 비판하거나 다른 대안들을 정식화하는 식으로 말이지요."(150쪽) 따라서 푸코의 작업은 좌파진영을 비롯한 기존 정치집단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쉽고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 "문제들을 최대한 복잡하고 어렵게 제시"(151쪽)해야만 문제의 복잡다단한 성격을 드러낼 수 있고, 손쉬운 해결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문제를 더욱 미궁에 빠지게 하거나 폭력적인 방식으로 귀결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의 복잡성을 드러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야말로 소수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정당의 수뇌부가 해결책을 독점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책 집행자들과 입법자들, 그리고 지식인들이 침묵하고 있을 때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누구인가? 속류 좌파들은 '민중'이라는 대답을 기대할지 모르지만, '아쉽게도' 푸코는 특정 집단을 직접 가리키지는 않는다. 그저 "자신이 속한 권력관계를 인식하고 그것에 저항하여 그것으로부터 탈출하고자 결심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뿐이다. 이러한 익명의 사람들이 직접 혁명적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으며, 스스로 수많은 실천들을 계획하고 집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지식인과 정치인, 그리고 민중의 경계는 무엇을 경험하고 실천하는가에 달려 있는 셈이다. (이는 부록으로 실려 있는 푸코와 들뢰즈의 유명한 대담 <지식인과 권력>의 주요 화두이다. 참고로 이 대담은 스피박의 대표적 논문인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에서 '씹히면서' 더 유명해졌다)

그렇다면 무엇을 경험하고 실천할 것인가? 먼저 "사물들이 어떻게 변환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바뀌고 변경되는지"(164쪽) 알아야 한다. 어떻게? 푸코는 말한다. '책을 읽으라!' -_-;;; "책은 우리를 바꾸는 경험으로서 읽혀지고 있습니다. 그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항상 같은 상태로 존재하지 못하게 하며, 이 책을 읽기 전 사물이나 타자들과 맺었던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그 책이 나 자신만의 경험을 넘어선 확장된 경험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지요."(46쪽)

그 다음에는? 푸코는 말한다. '책을 쓰라!' -_-;;; "경험은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책을 쓰기 전에 이미 생각해 놓은 것들을 소통하기 위해 책을 써야만 했다면, 나는 결코 그 일을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책을 쓰는 것은, 관심이 가는 주제에 대해 내가 무엇을 생각할지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책을 쓰는 동안, 그 책이 나를 변화시키고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바꿔 놓지요. 결과적으로, 각각의 새로운 작업은 내가 그 전의 작업으로 도달한 생각들을 크게 바꾸어 놓습니다."(같은 곳)

중요한 것은 책에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바꾸어 보는 것,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과 같이 생각하지 않는 것, 새로운 것과 관계를 맺는 것, 익명의 타자들과 대화하는 것이다. 푸코는 자신이 계획하지 않고 의도하지 않았던, 그러므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신을 새로운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모든 감응들을 경험, 구체적으로 '한계-경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기에 "실험"(같은 곳)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실험적인 '경험-책'으로부터 모든 실천과 혁명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독자에게 그와 같은 한계-경험을 전달할 수 있을까? 사실 이 책이 염두에 두고 있는 독자층은 조금 애매하다. 각 저자의 입문서로 아주 쓸 만한 데리다의 [입장들]이나 들뢰즈의 [대담] 등의 대담집과 달리, [푸코의 맑스]는 아무래도 푸코가 대충 어떤 얘기를 했는지 정도는 알아야 전반적인 이해가 가능할 것 같은데, 그렇다고 대단히 전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푸코에 대해 조금 주워들은 게 있었는데 이참에 푸코를 제대로 읽어볼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읽으면 좋겠다. 물론 푸코의 기본 개념들에 대한 역주가 그럭저럭 잘 달려 있는 편이고(푸코의 저작에서 해당 부분들을 직접 인용하여 설명한다. 충분하진 않지만, 그건 원 개념이 난해해서이지 역자의 잘못이 아니다), 1968년 5월이나 프랑크푸르트학파 등 익숙한 내용들도 많이 실려 있어, 푸코를 모르고도 나름의 재미는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내가 그렇다. -_-) 특히 종종 드러나는 푸코의 신경질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는 그의 평전에서도 느껴지던 것이어서 그의 이론이나 사상과는 별도로 그 자체로 흥미롭다. ^^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5-07-22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어렵네요. ^-^; -> '경험-책'으로부터 모든 실천과 혁명이 태어나는 것이다.
이부분은 아주 공감합니다. 글 너무 잘 쓰긴것 같아요. 짝짝짝!!

사량 2005-07-23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렵게 쓰고 분량이 늘어지는 것 자체가 책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일지도 몰라 부끄럽습니다. 짧게 쓰고 싶은데 왜 안 되지. T_T 참, 전에 모파상 리뷰를 쓰시면서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대해, '진리'의 기준에 대해 고민하셨죠? 어쩌면 거기에 대해서는 푸코가 하나의 대답을 제시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비로그인 2005-07-23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대답이 뭔가요? ^-^

사량 2005-07-23 2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어설프게 대답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직접 읽어보심이.. ^^;;; 지금 구할 수 있는 책으로 [광기의 역사]라는 책이 있어요. 푸코의 박사논문인데, 어렵고 두툼합니다만 그만큼 값진 통찰을 얻으실 수 있을 거예요.

비로그인 2005-07-24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사논문을 읽어보라구요 -_-;; 헉, 그것도 두툼한?! ㅋㅋ 기회가 된다면...
도전해 보겠습니다. ^-^ 추천 감사드려요~

히피드림~ 2005-07-26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점에 나가보면 푸코에 대한 책들이 정말 많아요. 그의 공식적인 저작들과 그것에 대한 해설들, 대담집,강의녹취록 등등 제가 알고 있는 것만 해도 20종이 넘는데 그새 평전까지 나왔나보네요. 포스트모더니즘이 한물 갔다고 하더니 푸코만은 여전히 건재한듯 하네요. 이 책도 최근에 나왔네요.
님의 리뷰를 읽어보니, 역시 푸코는 어려워요.
하지만 항상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그의 모습은 '진실하게' 느껴집니다.

사량 2005-07-27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unk / 사실 평전은 일찍 출간된 편이에요. ^^; 10년 전에 나왔지요. 레비 스트로스, 곰브리치, 조르쥬 뒤메질 등과의 대담집을 펴냈던 디디에 에리봉이라는 사람이 쓴 책인데, 말씀하신 대로 '실천'하는 푸코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아주 뛰어난 평전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시중에서 구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ㅠ.ㅠ 최근에 balmas님께서 푸코 관련 페이퍼를 하나 쓰셨던데(제목이 '천재뮤지션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네요) 국내에서 푸코가 수용되는 양상에 대해 잠깐 말씀하시더라구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chasm 2006-07-14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푸코의 맑스> 역자 이승철입니다. 이렇게 불쑥 찾아뵈도 되나 모르겠네요. 오랜만에 책들을 검색하던 중에 제가 번역한 책에 좋은 리뷰가 달려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글 남깁니다.

리뷰 정말 잘 봤습니다. 저도 번역하면서 느꼈던 책의 장점과 미진한 부분을 잘 지적해주셨네요. 뭐.. 이런 리뷰에 첨언을 하는건 구차한 변명 밖에 안되겠지만.. 리뷰와 관련해 맘에 걸리는 게 있어 한 가지만 답변드리겠습니다. 사실 제가 서문에 사용했던 "정통" 맑스주의란 표현은 맑스주의 일반에 대한 통속화 의도로 사용했던 것은 아닙니다. 제 개인적인 입장은 오히려 맑스주의적 입장에서 푸코의 사상의 특정 부분들을 절합시킬 수 있다는 입장으로, 그런 면에서 서문을 통해 맑스주의와 푸코의 입장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킬 생각은 없었습니다. 서문에서 푸코의 경험 개념이 공통적인 실천의 차원을 가지고 있음을 굳이 강조했던 것도 그와 같은 이유였구요. (실제로 68이후 서구 평의회 맑스주의 진영의 일부는 푸코를 전면적으로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했지요.) 다만 뜨롬바도리를 '정통' 맑스주의라 칭했던 것은, (자신이 서술한 후기에서도 드러나듯이) 그가 푸코와의 대담 내내 푸코 식의 도전에 맞서 당의 실천을 우위에 놓는 전통적인 공산당원의 입장을 꾸준히 견지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정통' 맑스주의란 말은 맑스주의 일반의 교조적 성격 등을 가리키기위해서 사용됐다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형태로의 맑스주의의 전환 가능성 등과의 대비를 위해 사용한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듣고 보니 이 말이 가져다주는 느낌을 고려하지 못하고 사용한 제 불찰이 크네요. 다만, 서문을 통한 제 의도는 둘의 극단적인 대비보다는 둘 사이의 대화의 생산적인 방향으로의 전개에 있었음을 밝힙니다.(역량의 부재로 서문에서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내지는 못했지만..)

아.. 그리고.. 제목의 경우.. 개인적으로 가장 아픈 구석인데요. 서문에 책의 모든 오류의 책임을 역자가 지겠다고 선언한 이상 정말 구차한 변명 밖에 안되지만.. 저로서는 어느정도 출판사의 제안과 사정을 고려할 수 밖에 없었음을.. 살포시(?) 밝히고 싶네요.. 아.. 절대 떠넘기는 건 아니구요. 결국엔 제 책임이니 욕 먹어도 싸지요..뭐.. 하하.. 단지 전혀 맥락이 없는 것은 아니고 앞서 밝힌 서문의 의도와 관련해서 독자들이 주로 저런 방향으로 책을 읽어줬으면 하는 바람이 반영된 제목이긴 합니다.(비슷한 문제의식에서 <부록>에 실릴 인터뷰를 선정하기도 했구요.)

다 쓰고나니 정말로 구차한 변명이 됐군요..ㅎㅎ 서재를 둘러보니 재밌는 리뷰들이 많은데.. 실례가 안된다면 가끔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좋은 책 많이 읽으시고 좋은 리뷰 많이 써주시길..^^

사량 2005-08-28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쿠, 역자 선생님께서 이렇게 누추한 곳까지 찾아와주시다니. ㅠㅠ 찾아뵐 줄 알았으면 저렇게 신랄하게 쓰지 않았겠죠. ^^ 그래도 덕분에 재밌는 책 또 한 권 읽게 되었어요. 고맙습니다. 언제라도 방문은 환영합니다만, 제가 리뷰를 자주 올리는 편이 아닌데다 또 최근에 개인적인 문제가 있어 당분간 서재 업데이트는 쉽지 않을 듯해요. 선생님도 재미난 책 있으면 또 번역해서 소개시켜 주세요. ^^ 거듭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