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들뢰즈
클레어 콜브룩 지음, 백민정 옮김 / 태학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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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금 선정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은 현재까지 나온 들뢰즈 입문서 가운데 단연 최고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의 저작들을 관통하고 있는 일관된 흐름들을 이처럼 핵심만 추려 명쾌하면서도 간결하게 쓴 책을 그동안 본 적이 없다. 저자는 <왜 들뢰즈인가?>라는 제목이 붙은 이 책의 서론에서 들뢰즈의 주요 개념들--삶, 사유, 생성, 반복, 비인칭적인 것--이 기존의 현상학이나 구조주의적 방법론들과 어떻게 변별되고 무엇을 새로이 포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더없이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 본문 전체에 걸쳐 이러한 문제의식을 잃지 않고 각 개념들을 다양한 사례들 속에서 '사용'하고 '반복'하고 있어 글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생성'이라는 들뢰즈 철학의 핵심을 그대로 실감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또한 들뢰즈가 그랬던 것처럼 문학 작품을 풍부하게 인용하고 있어 빠른 이해를 돕는 동시에 들뢰즈 철학이 실제로 '실험'되는 구체적인 양상을 살필 수 있도록 해준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저자가 들뢰즈를 직접 인용하면서 설명하는 부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 별 다섯 개를 끝내 주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문장 자체가 너무 평이하고 간명한 나머지, 간혹 '정말 이렇게만 생각해도 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의적인 해석이라고 의심되는 부분도 발견되는데, 적어도 책 안에서는 이러한 의문을 확인할 길이 없다. 들뢰즈 자신의 글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만 읽고 들뢰즈가 무엇을 말하는지 다 알았다고 떠들고 다니면 바보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바꾸어 말하면 실제로 그러한 느낌이 들 만큼, 이 책은 광범위한 들뢰즈 철학의 본질적인 내용들을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다. 어쩌면 저자는 들뢰즈의 글을 읽는 것 자체보다는 들뢰즈가 말하는 것처럼 사유하고 살아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끝으로, 읽는 데 큰 무리가 없으니 번역 역시 크게 흠 잡을 곳은 없다고도 할 수 있겠다. 다만 영어의 'power', 불어의 'puissance'에 해당하는 번역어로 '역능'을 계속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주 눈에 거슬린다. 요즘에는 다들 '역량'이라고 하던데. 그리고 이제는 어느 정도 일반화된 '배치'라는 번역어 대신 '아상블라주'라는 영어번역어를 그대로 쓰고 있는데, 아상블라주의 불어 원어는 'agencement'로 사실 아상블라주 외 일부에서 통용되는 다른 영어번역어가 몇 가지 더 있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배치'라는 역어를 포기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다. <천의 고원들>, <에세이들 : 비판적이고 임상적인> 등의 번역어야 책 이름이니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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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회고록
디디에 에리봉 지음, 송태현 옮김 / 강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20세기 프랑스 지성사를 관통하는 사람의 대담집이라 호기심을 갖고 읽어보았지만, 생각보다 크게 흥미롭지는 않았다. 성장기와 지적 형성 배경을 말하는 부분들은 지루하면서도 생소한 프랑스 인명들이 마구 등장하여 아무래도 낯설고, 정작 우리가 관심을 가질 만한 부분들--이른바 '(탈)구조주의'라는 사상적 흐름을 주도했던 일군의 학자들, 이를테면 푸코, 라캉, 바르트 등과의 관계를 회고하는 부분--은 이들에 대한 레비스트로스 자신의 냉소와 적대감으로 가득차 있어 당혹스럽기도 하고 조금 실망스럽기도 하다. 레비스트로스는 대담 내내 자신의 보수적 성향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는데, 그의 보수성은 2차 세계대전 전후 아주 좋은 조건으로 미국에 남아 교수가 될 수 있었음에도 프랑스행을 고집한 것과 같은 삶의 구체적인 문제부터, 자신의 구조주의적 방법론을 '과학'으로 바라보고자 하여 '속류화된' 구조주의자들의 논의들과는 엄격히 거리를 두고자 하는 것 등의 학문적 태도, 그리고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에 '오염'되는 프랑스어의 현실을 개탄하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화두에 이르기까지 줄곧 일관된 양상으로 이어진다. 특히 지식인의 사회 참여를 강조했던 사르트르에 대해 적의와 냉소를 보이고 '68년 5월'을 평가절하하는 부분에서는 적잖이 실망스럽다. (비슷한 나이이고 대중 앞에 나서는 일도 거의 없었으나, '68년 5월'에서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예감했던 모리스 블랑쇼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디디에 에리봉의 질문은 대체로 무난한 편이지만, 이처럼 '정치'적인 문제와 관련된 대목에서는 매우 날카롭고 매서워 레비스트로스의 진면목을 밝히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인류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그러한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레비스트로스는 지금/여기의 문제들보다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멀리 떨어진 것에 더욱 흥미를 느낀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러한 언명들이 독자들로 하여금 인류학 전반과 레비스트로스의 학문세계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갖도록 할 수 있으면 이 책의 의의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겠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의 유별난 보수성 덕분에 인류학에 대한 관심이 싹 가졌지만. 참고로 이 책에는 '80년대 초 그가 한국을 방문했을 당시의 에피소드가 짤막하게 실려 있는데, 책의 전반적인 내용과 무관하지 않은 부분이어서 재미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한국의 현실이 떠오르는 대목이기도 해서 이래저래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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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 동문선 현대신서 149
로베르 브레송 지음, 오일환 외 옮김 / 동문선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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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로베르 브레송이란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수잔 손탁의 <해석에 반대한다>를 읽으면서였다. 브레송의 영화를 다루고 있는 손탁의 글에 나는 금세 빠져들고 말았는데, 그것이 손탁의 필력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브레송의 영화세계가 내뿜는 매력에서 야기된 것인지 그 당시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뒤, 한국에 발매된 브레송의 DVD를 우연히 보게 되면서 나는 손탁의 글을 읽으며 받았던 감동의 연원에 대해 바로 결론내릴 수 있었다. 브레송의 영화에는 말로 설명될 수 없는 압도적인 영화 고유의 매력이 담겨져 있고, 손탁의 글은 브레송의 영화를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 가장 적확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이 책은 브레송이 아포리즘 형식으로 직접 기록한 영화론인 만큼, 손탁의 글보다 더 명료하게 자신만의 영화미학을 드러내고 있다. 브레송은 자신의 영화를 연극적이고 재현적인 양식에 기대고 있는 '시네마'와는 변별되는 '시네마토그래프'로 명명하는데, 시네마토그래프는 모방을 거부하는 반재현적 성격을 지니고 우연에 주목하며 실험과 재구성, 그리고 관계를 중요시하는 "글쓰기의 새로운 방식", 또는 "느끼기의 새로운 방식"이다. 시네마토그래프의 성격을 뚜렷이 보여주는 데 다음과 같은 두 문장이면 충분하다.

"창조한다는 것은 사람과 사실들을 변형하거나 발명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사람들과 사실들 사이에, 그리고 '존재하는 모습 그대로' 새로운 관계들을 엮는 것이다." (29쪽)

"관례(상투성)에 젖어 관객을 임의로 처하게 하지 말고, 존재와 사물들에 정면으로 대면케 하라. '예측 불가능한' 인상들과 감각들에 너 자신을 내맡기듯이 말이다. 어떤 것도 예단치 마라." (108쪽)

영화란 우리가 보아 왔던 것, 그리고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지 못했으나 존재하는 것, 또는 늘 보아 왔던 것 안에서 카메라의 눈으로 새로운 관계를 포착하고 형성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영화란 결국 감독의 눈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일진대, 그 감독은 우리가 이미 보아 알고 있는 선입관, 인상, 관습 등과 같은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바로 그 점 때문에 감독은 우연에 몸을 내맡기고 뜻하지 않은 지점에 카메라를 들이댐으로써 예기치 못한 이미지를 포착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실험'이다.

"낚시꾼이 자기 낚싯대 끝에 뭐가 걸릴지 모르듯이 너 역시 네가 잡게 될 것에 대해 무지하라. (어느곳에서도 '난데없이 불쑥 튀어오르는 물고기'" (135쪽)

무심코 넘겨버릴 만한 문장이 단 하나도 없는 이 얇은 책을 읽다 보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왜 영화를 보는가, 내가 영화 속에서 보아온 것은 무엇이었나, 나는 영화를 봄으로써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그럼에도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가...  꼭 영화에만 국한되지 않고 글쓰기 또는 예술 일반에 대해 진지한 성찰의 계기를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이 얇은 책의 가치는 막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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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1-21 0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문선의 책은 워낙 번역 상태가 엉망이라 실패한 책이 많았는데 이 책은 아닌가보네요. 읽어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해체와 저항의 서사 - 최인훈과 그의 문학
김인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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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안타깝다. 최인훈을 거듭나게 하는 새로운 해석의 지평과 웅숭깊은 문학사적 안목 대신, 이 책에는 최인훈을 향한 맹목적인 애정과 숭배만이 넘치고 또 넘친다. 저자는 최인훈의 작품들, 특히 <화두>에서 내용과 형식 양자에 걸친 실험성과 저항성을 탐색하고 이를 최인훈 문학만이 지니는 독자성으로 평가하고자 하지만,  아쉽게도 이러한 야심찬 시도는 저자의 주관적인 독서체험을 억지로 보편화시키려는 것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서문을 열 쪽 가량씩이나 써 가며 최인훈에 대한 열렬한 애정을 고백할 이유가 없을 것이고, <총독의 소리>를 테마로 하는 글에서 느닷없이 <화두>를 비판한 어느 비평가를 질타하는 데 대여섯 쪽이나 할애하는 생뚱맞은 행태를 벌일 리가 없다. 대상에 대해 객관화가 되지 않은 논의를 보는 것은 많이 괴롭다. 서글프게도 저자에게 최인훈은 거의 '물신'에 가깝다. 

프루스트, 조이스, 카프카부터 바르트, 아도르노, 데리다, 들뢰즈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쟁쟁한 이름들이 저자의 감동을 변호하기 위해 동원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문학세계 및 이론적 논의를  전개하는 방식은 지극히 단순하고 일반론적인 차원에 머물고 만다. 책 안에서 이들은 상당수 자신들의 원저작이 아닌 이차문헌에서 인용되고 있거나 제대로 된 인용표시 하나 없이 언급되는 경우가 많고, 직접 일차문헌에서 인용되더라도 해당 인용 부분의 전후맥락이 거세된 채 아포리즘인 양 짧게 실리고 말 뿐이다. '해체'와 '저항'을 다루는 방법이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다 보니, 이를 바탕으로 개진하는 작품 해석 역시 더불어 앙상해질 수밖에 없다. 일반론의 장점은 '이현령비현령'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 아니었나?

더욱 커다란 문제는 이러한 이론적 논의와 작품 분석이 결합하는 과정에서 매우 좋지 않은 사례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저자가 문학비평가임을 내세우고자 한다면 자신의 사유가 기본적으로 해당 작품에서 비롯되었음을 무엇보다 먼저, 그리고 궁극적으로 밝힐 수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걸 참 잘한 사람은 김현이다) 그러나 저자는 두어 편의 수록글을 제외하면 최인훈의 텍스트를 먼저 언급하면서 이론을 이끌어내는 대신, 장황하고 동어반복적인 이론적 바탕을 미리 제시하고 그리고 나서 그에 적합해 보이는 최인훈 문학세계의 일단을 이곳저곳 짜맞추어 간다. 그럴 거면 굳이 문학비평가라는 직함을 달 이유가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문학'비평가는 작품만으로 사유를 시작하고 끝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저자는 치밀한 이론적 논의를 펼치지도 못했으면서 텍스트를 매만지는 섬세한 손길까지 잃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정말로' 읽을 만한 내용이 별로 없다. 내용/형식, 리얼리즘/모더니즘과 같은 전통적 이분법이 아무런 고민 없이 줄곧 사용되고 있어 논의의 도식화가 자주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해체와 탈중심성을 말하고 작품(work)의 관점이 아닌 텍스트(text)의 관점을 받아들이고자 하면서도 최인훈의 작품에 어떻게든 멋들어진 키워드를 부여하고 이로써 일관된 해석의 코드를 마련하려 안간힘을 쓰는 이중적 인식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결과적으로 <가면고>를 비교적 꼼꼼히 다룬 글을 제외하면 솔직히 권해주고 싶은 글이 없다. 냉정히 말해,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은 최인훈과의 대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직접 최인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읽다 보면 그야말로 '우문현답'이란 것이 무엇인지 통렬하게 체험할 수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충실하게 정리되어 맨 뒤에 수록된 '최인훈 관련문헌'이 저자의 성실성만큼은 어느 정도 보장해주고 있다. 그나마 별 두 개를 주는 것은 순전히 대담과 참고문헌 때문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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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5-04-07 1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지만, 이 리뷰는 별다섯을 주어아겠네요.^^
 
김수영 전집 1 - 시 김수영 전집 1
김수영 지음, 이영준 엮음 / 민음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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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히 김수영에 관심이 있고 그저 그의 시를 읽고 싶은 정도라면 이 책을 고르는 데 그리 주저할 필요가 없겠지만, 적어도 문학 전공자나 김수영을 '제대로' 알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구입하기 전에 꼭 한번 재고해보아야 할 것이다. 최대한 원문과 가깝게 작품들을 수록했던 1981년판과 달리, 이번 판은 보는 사람에 따라 원작을 '훼손'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여러 부분에 수정을 가했기 때문이다. 한자 노출을 최대한 줄였고, 사어화된 한자어들을 한글로 바꾸었으며, 외래어들을 외래어표기법에 맞게 대부분 고쳤다. 현재 통용되는 한글맞춤법 규정에 따랐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원칙에 대한 평가는 문학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솔직히 당혹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턱을 괸 채 의자에 앉아 있는 김수영의 모습을 담은 유명한 흑백사진이 컬러사진으로 바뀌었다고나 할까. 김수영이라 하면, 나는 지금 보아선 어색하기 짝이 없는 괴상한 외래어와 순화되지 않은 한자어들, 그리고 세월에 마모되지 않은 날카로운 어감의 말들 등이 뿜어내는 괴이한 힘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아마 그처럼 거칠고 투박한 '날것'들이 그의 명민한 정신과 맞물려 오늘날에도 그 싱싱함을 잃지 않고 있다는 데 깊이 매혹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2003년판 김수영 전집은 그저 매끈하기만 하다. 혹시 매끈함과 당대성을 바꿔치기한 것은 아닐까. 적어도 이것만은 기억하자. 김수영이 시를 썼던 시기는 2003년이 아니었다는 점을. 이 책이 단순한 시선집이 아니라 '전집'이자 '정본'을 표방하고자 했다면, 가독성보다는 정확성과 충실성에 더 비중을 두고 편집방침을 세웠어야 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아주 다양한 판본들로 존재하지만, 그 많은 판본들에는 대부분 엘리자베스 왕조 때 쓰였던 말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 않은가. 글쎄, 문학이란 게 과연 무엇일지 고민해보자. 참고로 헌책방에 가면 1981년판 김수영 전집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부담없이 읽고 싶은 사람은 백낙청이 엮은 <사랑의 변주곡>(창작과비평사)이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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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 2006-01-11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뿌리서점>에 가서 샅샅히 찾아 보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습니다. 저번에 <숨어있는책>에서 찾아봐도 그렇고... 오늘 혹시나 싶어 인터넷 헌책방에서 찾아보니 역시 보이지 않네요. 이런글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혹시 구판 파는곳 아시는분 메일 부탁드립니다. for_no_on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