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行 야간열차 문학과지성 시인선 341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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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사랑하던 황인숙은 끝내 고양이가 되고 말았다. "사람이기를 멈추고/쉬는 시간이다"라고 일갈하더니, "기와 지붕, 슬레이트 지붕, 콘크리트 지붕, 천막으로 덮인 지붕,/굽이굽이 지붕들의 구릉과 평원을 굽어"보는 사이, "사람이기를 멈춘 내/영혼에 이빨이 돋는다"며 고양이가 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아는 이 모두를 저버"리며 "기울어진 지붕, 흔들거리는 처마,/말하자면 기우뚱함에, 그리고 지붕과 지붕 사이의 허공"에 "환장"하는, "空中空間의 활용자인 고양이"임을 긍정하기에 이른다. 고양이로 거듭난 그녀는 가볍고 활달하고 유쾌하다. 인간일 적 가졌던 약간의 음울함과 적적함도 다 떨쳐 버린 것 같아 부럽기까지 하다.

대신 인간으로서, 시인으로서 황인숙은 파삭 늙었다. 고양이를 자임하는 시편들 외의 작품들은 평범하다 못해 지루해졌고, 나이가 든 만큼이나 시의 피부도 그녀 특유의 탄성과 긴장이 사라져 버석거린다. 마흔 살을 넘겨 펴 냈던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나 [자명한 산책]만 해도 전반적인 정조야 어쨌든 시의 탄력만은 첫 시집 못지않게 팽팽히 유지하고 있었기에, 황인숙이야말로 한국 시인들의 고질병인 조로증을 극복한 예외적인 시인이라고 내심 생각했건만, 조금 안타깝다. 그녀가 주변의 소소한 일상과 풍경에 보내는 연민과 애정 어린 시선들에 울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울림은 고양이의 삶에서 풍기는 가벼움과 대비되며 청승맞게 다가온다. 늙어가는 한 시인의 내면풍경이 그렇다면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겠으나, 고양이의 눈으로 쓴 시와 달리 인간의 눈으로 쓴 시는 시가 되지 못하고 날것의 정서로만 남은 것 같아 민망하다.

어차피 시인도, 독자도 늙어가기 마련인데, 왜 예전처럼 젊게 시를 쓰지 못하냐고 나무라는 건 부당할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자기가 좋아서 고양이가 된 시인에게 왜 인간의 시선으로 쓴 시의 정서 환기력이 예전만 못하냐고 뭐라 하는 것도 번지수를 잘못 찾은 볼멘소리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어쩌면 시인은 이런 반응을 원하고 야생고양이마냥 지붕만 바라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만큼 우리 삶은 비루하고 재미없다는 것, 그러니까 고양이처럼 심드렁하면서도 고고하게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 그러나 우리네 삶은 지질하고 옹졸하기 짝이 없어서 고양이처럼 초연하고 가벼운 유유자적한 삶을 그냥 두지 않는다. 한가하게만 보이는 고양이가 사실은 "잔인하고 무정한 이 거리에서/구사일생으로 살아가"며, "도둑고양이, 길고양이, 골목고양이"라는 낙인 속에 인간들에게 "시끄럽다, 더럽다, 무섭다"는 이유로 해코지를 당하는 건 그 때문이다. 황인숙은 이렇게 말한다. "생각해보세요, 어느 편이 진짜 그런지." 그리고 덧붙인다. "고양이들이 사라진 동네는/사람의 영혼이 텅 빈 동네입니다./이만저만 조용한 게 아니겠지요./그러면, 좋을까요?" 좋을 것 같지 않다. 그렇게 대답할 수 있게 만든 건 고양이가 된 황인숙과 이 시집의 힘이다. 그럼에도 고양이가 된 황인숙이 인간으로 영영 돌아오지 않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잔인한 부탁이겠지만, 예전처럼 인간에 대해서도, 사랑에 대해서도 젊고 활기차게 노래해 줬으면 좋겠다. 리스본에서 쓴 시들처럼 늘어지지 말고. (그러고 보니 몇 편 되지도 않는 리스본 여행시편과 관련해 시집의 제목이 정해진 이유를 생각해 보지 못했다. 정말 이기적이고 애정 없는 독자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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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8-03-15 0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긴한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어요. ㅠ_ㅠ
그래서 저도 추천으로 대신합니다. 으흐

잘지내시죠? :)

비로그인 2009-01-21 0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시집을 읽지 않았는데요. 그래서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아마도 소설 '리스본 행 야간 열차'에서 일상에서 벗어난 주인공을, 말씀하신 시집의 내용으로 비교하자면 사람에게서 벗어난 고양이와 같은 자신의 모습과 연결시키고자 했던 저자의 의도가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론 이후 삶 - 데리다와 현대이론을 말하다
자크 데리다 외 지음, 마이클 페인.존 샤드 엮음, 강우성.정소영 옮김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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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 이후 삶]은 이 책의 편집자가 자크 데리다, 프랭크 커모드, 크리스토퍼 노리스, 토릴 모이, 이렇게 네 사람의 거물들과 개별적으로 진행한 대담 및 토론을 모은 책이다. 영미 학계에서 문학 연구의 주류로 부상한 뒤로 한동안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다 최근 쇠퇴일로에 접어들었다는 '이론 연구'의 공과를 되짚고, 이론 및 이론의 쇠락이 가져올 문학 연구의 변화가 어떠할지 모색해 보는 기획에서 마련된 대담집이지만, 네 사람이 각자 삼고 있는 화두는 조금씩 다르다. 데리다의 경우 이론, 위증, 약속, 유령, 여성, 윤리, 종교, 책임 등 자신의 관심사를 두루 들춰보이고 있고(그러나 토론의 전제가 되는 데리다의 강연문이 빠진 채 강연 다음 날의 토론문만 들어 있어 감질만 오르게 한다), 노리스는 문학과 철학의 관련상 및 해체론에 대한 속류적 이해가 불러왔던 폐해들을 논의하는 데 집중하며, 모이는 페미니즘 일반과 자신의 지적 여정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바탕으로 이론의 보편성과 정치성을 이야기한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데리다의 사진과 서명을 큼지막하게 박아넣은 이 책의 표지는 부당하고 또 뻔뻔하다. 데리다가 참석한 토론문이 분량상으로는 가장 많고, 나머지 세 사람의 대담에서 데리다가 빠짐없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이 모든 논의들을 데리다만의 것으로 포장하여 마치 데리다의 책인 양 팔아먹으려는 시도는 얄팍한 상술이라고밖에는 설명이 안 된다. 황당해서 원서 표지를 찾아 보았더니, 거기에는 특정 인물의 사진 같은 것 없이 데리다와 커모드, 노리스와 모이의 이름이 똑같은 크기와 글자체로 공평하게 찍혀 있거늘, 이 무슨 몰염치인지. (물론 번역본에도 오른쪽 하단에 대담 참여자가 '공평하게' 적혀 있기는 하다. 잘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옮긴이들 이름은 번역의 노고가 무색하게 정말 작은 글씨로 써놨다;;) 책을 펼쳐 책날개의 저자 소개를 보면 또 한번 실소를 머금게 된다. 데리다의 주요 저서가 "[그라마톨로지], [에코그라피], [시네퐁주], [글쓰기와 차이], [법의 힘]"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에코그라피]와 [시네퐁주]는 각기 나름의 의의를 확보하고 있는 책임에는 분명하지만, 70여 권에 달하는 데리다의 저서 가운데 두세 번째로 언급될 만한 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저 책들을 데리다의 대표작으로 굳이 거론한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저 두 권과 [그라마톨로지]는 이 책을 출간한 '민음사'에서 발행한 바 있는 책들인 것이다! '발행한 바'라고 쓴 건 공교롭게도 세 권 모두 절판되어 지금 시중에서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라마톨로지]는 동문선에서 새로 번역해서 냈다)어차피 자기네가 새로 펴내지도 않는 책들인데, 쉽게 살 수 있고 또 중요한 저작인 [목소리와 현상]이나 [마르크스의 유령들] 대신 저 책들을 소개글에 집어넣을 필요가 있나. 한마디로, 가증스럽다.

이른바 '이론가'들의 저작이 상대적으로 잘 팔린다는 알라딘에서조차 세일즈포인트가 그리 높지 않은 걸 보면, 현재까지 이 책의 전체 판매량은 퍽 저조할 것이고 이 출판사에서 나온 다른 데리다의 저작처럼 몇 년 뒤 절판의 운명을 피해가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데리다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것이 상술이라는 내 말은 틀린 셈이 된다!) 그러나 판매량의 저조한 이유가 출판사 측의 가증스러운 태도가 밉기 때문은 아니다. 판매 부진의 이유는, 이 책의 대전제라고 할 수 있는 "문학 이론, 곧 우리 세계에 대한 '사유'는 벌써 왔다 갔고, '본격' 이론의 전성기도 지나가 버린 듯하다"(5쪽)라는 편집자의 말 자체가 한국의 상황에서는 그리 적실하지 않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겐 잠시 반짝하는 유행이란 게 있었을지는 몰라도, "'본격' 이론의 전성기"는 없었다. 들뢰즈와 푸코, 그리고 지젝 정도를 제외하면 이론가들의 주저조차 번역이 안 된 경우가 허다한데, 다시 말해, 이론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촉구될 정도로 학계가 이론에 지배된 적이 없었는데, 느닷없이 '이론 이후'를 들고 나오는 것은 아무래도 황당하다. 게다가 이론의 정치성이 대학 제도 속으로 편입되면서 특유의 창조성과 역동성을 잃어버린 영미권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이론 연구가 대학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대학 밖의 자생적 연구공간에서 더욱 심도 있게 논의되어 온 까닭에, 오히려 이론 본연의 면모가 더욱 충실히 발휘되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론, 탈구조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 지난 수십 년간의 지적 흐름들을 철저하게 영미권의 맥락에서 돌이켜 보는 이 책이 한국에서는 내용의 질과 무관하게 조금 뜬금없게 읽힐 수밖에 없다. 대학 정식 교과과정에서 ('문학'만을 위한 이론이 아닌) '이론'을 접할 기회가 여전히 흔치 않은 듯한 이 땅의 문학 전공자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론 이후'의 삶이 아니라 좀더 '이론과 함께하는' 삶이다.

뭐, 이 책에서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들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영미권 학계와 관련된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을 살펴보는 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으며, 레비나스를 바라보는 데리다의 입장 변화에 관한 노리스의 조심스러운 우려나 보부아르 및 실존주의를 흥미롭게 재조명하는 모이의 시도 등은 해체론과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귀 기울여 볼 법한 이야기들이다. 그렇다고 책꽂이에 꽂아두면서 두고두고 펼쳐 볼 책은 아니다.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며칠 전 모 인터넷헌책방에 이 책이 '새책수준'이라는 참고사항을 달고 판매되고 있는 걸 보았다. 초판이 작년 8월에 나온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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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2-09 2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10 1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슬램덩크 그로부터 10일 후 (SLAM DUNK 10 DAYS AFTER)
이노우에 다케히코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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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 [슬램덩크]의 일본 판매부수가 1억 권을 넘겼다. 이에 [슬램덩크]의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독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었다. 그는 [슬램덩크]의 주요 등장인물 여섯 명의 일러스트를 그린 뒤, 이를 일본의 6대 대표일간지에 자비를 들여 전면광고로 게재했다. <요미우리신문>에 강백호가, 아사히신문에는 서태웅이, <니혼게이자이>에는 채치수가 작가를 대신하여 독자들에게 그간의 고마움을 표했다. 한국의 인터넷매체에까지 이 사실이 보도될 정도로 반향은 엄청났다. 모처럼 [슬램덩크]의 감동을 되살린 독자들은 작가에게 감사인사를 되돌려주었고 작가의 팬사이트는 연일 게시물로 넘쳐났다. 작가는 다시 한 번 고민했다. 이러한 성원과 애정에 어떻게 하면 보답할 수 있을지.

전면광고가 나간 지 서너달이 지난 뒤, 작가는 [슬램덩크]의 무대가 되었던 카나자와현으로 갔다. 바다를 끼고 있는 그곳에는, 옥상에 오르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폐교가 한 곳 있었다. 작가는 [슬램덩크]의 주인공들이 다녔을 법한 옛 고등학교 건물을 통째로 빌렸다. 팬들을 위한 마지막 이벤트를 준비하기 위해서. 교실의 모든 책걸상을 치우고 칠판을 지웠다. 그리고 그 칠판에, [슬램덩크]의 결말에서 10일이 지난 뒤의 에피소드를 펼쳐놓았다. 작가는 23개 교실의 칠판에, 그 뜨거웠던 전국대회를 마치고 학교로, 일상으로 돌아온 등장인물들의 짤막한 이야기를 한편 한편 분필로 직접 그렸다. 독자들은 딱 3일간, 분필로 그려진 그들의 후일담을 들을 수 있었다. 23개의 교실을 모두 돌고 나면 옆방에서 [슬램덩크]의 단행본과 애니메이션을 다시 만날 수 있고, 복도를 건너 체육관을 향하면 농구를 즐길 수 있었다. 그렇게 3일 동안 [슬램덩크]만의 세상으로 사람들을 초대했던 작가는 행사 마지막 날 저녁, 자신이 칠판에 그렸던 이정환과 윤대협, 정우성, 그리고 강백호와 채소연을 직접 지움으로써 이벤트를 마무리했다. [슬램덩크 그로부터 10일 후]는 이 모든 것들의 기록이다.

책의 내용을 미리 알지 못해 구입을 망설였기에, 나는 어느 도서관을 찾아 서가 한켠에 서서 이 책을 읽었다. 뜬금없게도 눈물을 삼키느라 조금 고생해가면서. 그러나 다른 사람들도 그러할지는 모르는 일이다. 아마 각자가 지닌 [슬램덩크]의 기억만큼만, 딱 그만큼만 가슴 뛰고, 감사하고, 용기를 갖게 되겠지. 그러므로 별 다섯 개를 너무 신뢰하진 마시라. 다만 읽기 전에 채소연처럼 한 번만 자문해 보면 좋겠다. "슬램덩크...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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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
강명관 지음 / 소명출판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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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말하건대, 강명관 교수의 [국문학과 민족 그리고 근대]는 한국문학 전공자는 물론이거니와, 한국사와 한국철학, 나아가 넓은 의미의 '한국학'(저자에 따르면 이것 역시 심히 문제적인 개념이 아닐 수 없다)을 공부하고 이해하려는 사람 모두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다. 이 책에서 강명관 교수가 줄곧 주장하는 바, 곧 한국문학사가 '민족'이라는 상상적이고 허구적인 개념에 사로잡혀 민족주의를 공고화하는 기제로 사용되어 왔고 또한 '근대'라는 서구중심적 목적론에 강박적으로 집착해 왔다는 사실이 그 자체로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민족과 근대에 대한 편집증이 이 땅에서 펼쳐진 문학 활동 및 사상의 전개 양상을 얼마나 왜곡하고 정형화시켰는지 강명관 교수만큼 적나라하게 파헤친 학자는 없었다. 특히 그가 '제도적으로' 속해 있는 학문 분과인 '한국고전문학' 쪽에서는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고려와 조선 시대의 한문학 역시 국문학의 일부라는 사실에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지만, 한문학이 국문학의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기까지는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강명관 교수는 해방 직후 민족주의적 열정에 들려 국문학사를 구상하던 사람들이 단지 '남의 글자'로 씌어졌다는 이유로 한문학을 국문학에서 몰아내려 했던 시도들을 하나하나 소개하면서, 민족주의가 지향하는 순수성과 우월성이 학적 연구와 결합할 때 잉태될 수 있는 지적 폭력을 낱낱이 고발한다. 한문학의 자산이 완전히 부정될 경우 개화기 이전의 국문학은 더할 수 없이 가난해진다는 자명한 진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기에, 이 정도는 과욕이 빚어낸 시행착오쯤으로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주의적 관점이 '근대'를 향한 열망과 결합되면 사정은 심각해진다. 근대를 확고한 기준으로 삼고 모든 문학적 운동이 근대를 정점으로 전개되어 왔다는 관점 아래 문학사를 서술하는 것은 역사의 흐름과 발전상 자체를 치명적으로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국사시간에 조선 후기역사를 설명하면서 자주 언급하는 말 가운데 이른바 '자본주의 맹아론'이란 것이 있다. 아주 간단히 말해, 민족주의와 더불어 근대성의 한 축을 이루는 자본주의가 자생적으로 형성될 조건이 조선에서도 이미 마련되어 있었음을 증명하고자 하는 이론이 자본주의 맹아론이다. 그리고 이를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테제가 바로 1970년대 한국 학계의 주도적 담론이었던 '내재적 발전론'이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의도한 바는 조선의 근대적 성격이 개항과 더불어 '이식'된 것이 아니라 내재적으로 발현되고 있었던 것임을 밝힘으로써, 일제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는 식민사관을 적극적으로 부정하고자 함이었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강명관 교수에 따르면 근대는 서구에 한정된 특수한 역사적 경험이기 때문에, 식민사관의 극복에만 얽매인 나머지 근대성의 단초를 찾아내고 이를 역사적 발전의 자연스런 전개과정으로 봉합시키려는 것은 결과적으로 한국사에서 서양사를 구현하려는 불가능한 시도와 다르지 않은 것이 되어 역사 기술의 왜곡과 오류, 기형화를 필연적으로 자초할 수밖에 없다. 이는 다음과 같은 딜레마를 낳는다.

"내재적 발전론은 이미 정답으로서의 결론을 미리 전제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국사 내부에서 근대로의 주체적 발전경로는 그것의 객관적 존재 여부에 관계없이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당위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연구 결과 근대로의 주체적 발전경로가 확인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국인 스스로 식민지 사학의 정체론을 인정하고, 일제의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인정하며, 한국인의 트라우마는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에게도 근대로 향한 자생적 주체적 발전경로가 있지 않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부정의 답은 애당초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106쪽)

그 결과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전근대/근대의 도식적 이항대립들을 달달 외워왔고,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동이 곧 근대로의 이행과정이라고 별다른 의심없이 받아들였다. 주자학/실학, 한문학/국문학, 이(理)/기(氣), 평시조/사설시조, 사대부/평민 등등. 강명관 교수가 이 책에서, 그리고 이 책을 포함해 작년 여름에 한꺼번에 발간한 [안쪽과 바깥쪽], [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 [농암잡지평석]에서 동시에 천착하는 작업은 이러한 이항대립이 국(문학)사에서 근대성을 재구성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구축된 상상적 가공물임을 자세하게 논증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알고 있는 실학은 주자학이라는 탁상공론의 관념세계를 탈피하고 현실적인 문제들을 고민하는 실용적인 학문이자, 중국의 영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토착 학문으로, 자생적인 근대의 서막을 알리는 대표적인 기념비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실학은 부분적으로 주자학과 차별되는 면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주자학을 대체하고자 했던 학문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많으며, 오히려 주자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려는 측면이 더욱 강했던 학적 시도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강명관 교수의 주장이다. 즉 어떻게든 근대적인 무언가를 찾아내고 이를 개념화하려는 의지가 앞서 나열한 대립쌍들을 구성하여 한쪽을 열등한 전근대적인 것으로, 다른 한쪽을 우월한 근대적인 것으로 표상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바로잡으려면 어찌해야 할 것인가? 강명관 교수의 결론은 자명하다. 자생적 근대성을 찾아야 한다는 문제 설정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존재했다고 믿어 왔던 '조선 후기의 근대'는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서구의 '근대 찾기'가 만들어낸 가공적 구성물에 불과한 것이다. 나의 내부에 있는 서구사는 명백히 타자이다. 타자를 배제하고 주체를 찾는다면서 헤맨 끝에 우리는 나의 내부에 있는 타자를 발견하고 주체로 오인했던 것이다. 여기서 나아가 중세니 근대니 하는 시대 구분 자체를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할 것이다. 이 시대 구분을 따른다면, 서구중심의 역사 기술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고, 서구의 폭력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162-163쪽)

강명관 교수의 결론에 동감하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저 문장들에는 한국학, 아니 식민주의를 경험한 비서구에서의 '자생적' 학문이 결코 피해갈 수 없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부딪히게 될 고민과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지만, 어쩌면 바로 그 점 때문에 다소 원론적이고 상투적인 문제 제기에 불과하다고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세한 찬반여부를 떠나서 강명관 교수의 주장을 일단 신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것이 면밀한 당대적 인식 아래 텍스트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를 거친 뒤에 제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강명관 교수는 사후적으로 구축된 현재의 관점에서 필요에 따라 텍스트의 구성요소를 취사선택하는 대신, 해당 텍스트가 생산된 당대의 맥락에 텍스트를 배치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태도가 절실함을,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인문학 연구의 기본적인 접근법임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민족과 근대라는 개념을 집어던지든, 아니면 좀더 믿어보든지 간에, 힘들더라도 먼저 텍스트 하나하나를 자세히 읽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이 모든 것들을 차분히 생각해 보자. 우리에게 역사란 무엇인가, 한국학이란 무엇인가, '민족' 없이 한국문학, 한국역사, 한국철학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 '근대'라는 문제설정 대신 그 무엇으로 생성과 변이를 설명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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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8-01-19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사량님, 좋은 리뷰 반갑습니다. :-)
저도 이제 국학 분야 연구소에서 일하게 돼서 그렇지 않아도 이런 류의 책들을 찾고 있던
참인데, 마침 사량님이 좋은 선물을 하나 주셨네요. ^^
앞으로도 좋은 선물 계속 부탁해용~~~

사량 2008-01-19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 님께서 저와 알라디너들에게 선사한 선물들을 생각하면 마지막 문장이 심히 부담되는 걸요.;;; 아무튼 고맙습니다. 국학 분야 연구소에서 일하게 되셨다니 무척 궁금합니다. 발마스 님 서재에서 관련 이야기 많이 접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

balmas 2008-01-31 0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저도 앞으로 이쪽 이야기를 좀더 자주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번역은 반역인가 - 우리 번역 문화에 대한 체험적 보고서
박상익 지음 / 푸른역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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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제 번역이라는 지적 작업이 갖는 중요성은 단지 지식인들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공감대를 얻어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한국 학문의 융성과 심화를 가로막아 온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번역에 대한 홀대 및 무관심이었다는 사실은 적어도 인터넷서점에서 독자리뷰를 읽는 사람들의 머릿속에서만큼은 확실히 입력된 듯하다. 이 책은 이 땅의 척박한 번역 현실에 대한 그간의 문제 제기들을 집대성했다고 말할 수 있는 책으로, 이제 막 번역의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사람이 읽으면 여러 방면으로 깨우치는 바가 많을 것이다. 다만 이런저런 호기심으로 번역에 관심을 가져왔거나 알라딘서재를 자주 기웃거렸던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하는 이야기가 그다지 새로울 게 없을 수도 있다. 곧 있으면 초판이 나온 지 2년이 된다는 사실만 보아도 그렇다.

그러나 저자가 궁극적으로 전하는 긴급하고도 절박한 문제의식이 유효한 이상, 이 책은 단순한 사례모음집으로서가 아닌 일종의 '마니페스토'로서 읽히고 또 읽혀야 한다. 이 땅에서 번역의 의미가 더더욱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결국 한국어의 미래와 맞닿아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본문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자신의 이익만을 집요하게 캐내다가 단물이 빠지면 미련 없이 바다를 건너 버리는 무책임한 엘리트들이 득세했던 이 땅에서, 후대를 위해 한국어텍스트를 축적하는 번역 작업이 얼마나 지난하고 고독할 것인지 감히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영어공용화론이 점점 더 득세하고, 급기야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MBA를 받은 사람이 "한국에서 서비스 산업이 잘 육성되지 않는 것은 언어 문제 때문"이라며 "앞으로 1백 년을 내다본다면 한국어는 경쟁력이 없다"고 자신 있게 단언하며(225쪽), 또 여러 사람들이 이에 고개를 끄덕이는 상황에서, 후세에 넘겨줄 한국어의 자산을 늘리는 데 전력을 다하라고 진심으로 권할 수 있는가? 저자는 "그의 지적이 정확하게 우리의 미래를 꿰뚫어보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섬뜩한 느낌"을 받는다고 하면서, 나아가 "우리가 현재 처한 이 지지부진한 상황이, 실은 우리 사회 상류층과 주류 사이에서 암묵리에 합의되고 있는 '어떤 의도'가 관철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마저 품게 된다"라고까지 말하기에 이른다(같은 곳). 그 "어떤 의도"란 무엇인가. 한국어가 정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는 자본)의 수월한 이동과 효율적인 축적을 감당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면 언제든 이를 버릴 수 있다는 단순하고도 무서운 욕망이 아니겠는가.

대학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을 모아 보면 이미 한국어는 학문언어로서의 위상을 급격하게 상실해가고 있다. 이미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영어 개념어에 한국어 조사를 덧붙여 쓰는 식의 의사소통이 빈번해진 지 오래고, 인문학 쪽에서도 특정 분야를 제외하면 영어강의가 불가능한 사람은 교수가 되는 길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상태다. 본문에서 인용되는 김용옥의 말처럼 인문학 서적을 1년에 다섯 권 내고 받는 인세수입보다 교수의 일년치 연봉이 더 많다는 웃지 못할 사정을 차치하더라도, 한국어로 씌어진 문헌을 읽고 한국어로 사유하고 말하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분위기가 확산되어가는 지금, 번역을 통해 이 땅의 문화적 수준을 드높이자는 주장은 막막하기만 하다. "번역 그 자체가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고 있다. 그러나 비관할 일만도 아니다. 한국 사회가 멸망하기로 작정을 하지 않은 이상 번역과 번역가에 대한 대우가 현 수준에서 머물 수는 없다. 한국은 망하지 않는다. ... 합당한 대우를 받는 날이 올 것이다"(228쪽)라며 젊은 학도들에게 번역을 권장하는 대목은 참담하고 서글프기까지하다. 나도 이 나라가 정말이지 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최소한 책과 공부를 좋아하다가는, 나아가 모국어를 아끼다가는 딱 망하기 좋은 꼴로 가고 있는데 어찌할 것인가.

이 땅에서는 자유로운 번역과 학문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이를 거스르는 방법은 우리 모두가 구조를 뛰어넘고 구조를 뒤흔드는 '초인'이 되는 수밖에 없다. 번역이 돈을 가져다주지 못해도, 연구업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어도, 한국어가 천대받아도, 그 모든 이유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지식과 사상의 민주화를 향한 책임감과 사명감만으로 외국의 고전을 부지런히 한국어로 번역하고 사유하는 것이다. 이는 번역자 자신에게 아무런 득이 없기에 '정상적인' 관점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미친 짓이고, 주류에서 벗어나는 것이기에 불온한 짓이다. 저자는 마지막 문장을 "번역은 결코 반역이 아니다"(229쪽)라고 쓰고 있지만, 모국어로 글을 쓰고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는 이 땅에서 번역이 진정 미친 짓이고 불온한 짓이라면 번역은 참다운 의미에서 반역이다. 번역은 반역이다. 천덕꾸러기 한국어로 불가능한 역모를 꿈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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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8-01-01 0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량님, 아주 좋은 리뷰네요. 재미있게 잘 읽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니다. :-)

사량 2008-01-01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발마스 님, 영광입니다. ㅠ 꼭 새해 복 많이 받으셔야 합니다. ^^

balmas 2008-01-19 0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답변이 늦었네요. 사량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

로드무비 2008-01-22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 마디.
사량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