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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평점 :
박민규의 글은 소설이라 불리고는 있지만, 그의 글쓰기 스타일은 차라리 시적인 것에 가깝다. 시적이라고 해서 거창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그저 그가 언어를 사물이나 대상을 지시하고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대신 그 자체를 목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해서 하는 말이다. 독백과 타인의 말이 뒤섞여서 나타나는 것이나 한 줄짜리 문장을 한 문단으로 대체해버리는 것, 행갈이를 자주 사용하는 것, 자신의 말이나 생각을 전술한 뒤 그것을 활용하여 변주하는 방식으로 말놀이를 되풀이하는 것 등을 볼 때, 그의 글은 산문의 외양을 띠고 있음에도 산문의 세계와는 어느 정도, 어쩌면 꽤나 거리를 둔다.
형식적으로 그러하다면 박민규의 글은 퍽 실험적이고 전위적으로 보일 법도 한데, 막상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외형상 그의 소설은 우리가 보아왔던 소설들과 견줄 때 파격적일 수 있지만, 재기로 가득 찬 그의 문장 하나하나는 생각보다 훨씬 잘 읽힌다. 아니, 최근에 나오는 여느 한국소설보다도 높은 가독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말은 박민규의 문장력이 그만큼 탁월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지만, 그의 문장이 기존의 규범과 관습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겉보기에는 신선하고 독창적일지언정 독자들을 불편하게 하는 글쓰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박민규의 글에는 구어와 문어, 전달하는 말과 전달되는 말이 마침표와 쉼표의 무분별한 남용 속에 마구 혼재되고 있는데, 이는 자연스레 비문의 양산으로 이어진다. 이 소설집에 발견되는 적지 않은 비문들까지 단지 '무규칙이종소설가'라는 이유로 눈감아줄 만큼 모든 독자가 관대하지는 않다.
현실과 환상의 넘나듦. 좋다, 이것 자체만 놓고 시비를 건다면 구닥다리라고 욕 먹기 딱 좋다. 문제는 박민규의 소설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현실 인식과 환상이 결합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가 하는 점이다.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은 예외없이 1인칭 시점을 취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도저하고 지독한 1인칭이다. '나'라고 하는 인물들은 쉴 새 없이 "인간은 ...인 법이다." "세상은 ...인 것이다" "...했으니 ...겠지" 식의 단정들을 쏟아내고 있는데, 물론 그러한 판단들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다. 박민규 소설에 미덕이 있다면 젊은 청년들의 고단한 삶과 성장과정을 누구보다 담담하고 차분하게 포착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으니. 그러나 세계에 대한 저런 무시무시한 자기 인식이 소통되지 않고 출구를 확보하지 못할 때, 돌아오는 것은 독자에게 부담스러운 나르시시즘뿐이다. 박민규가 제시하는 환상들도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소설 속 인물들이 고통과 좌절을 환상으로 견디고 이겨내는 세계는 단절과 비약을 주식으로 삼는 시적 세계이지, 이성과 질서를 무기로 하여 세상과 대결하는 산문적 세계가 아니다. 사랑하는 것, 귀찮은 것 모두모두 냉장고에 넣어버리는 것도 재미있고, 지친 어느 날 너구리가 등을 밀어주는 것도 근사하다. 하지만 그 다음엔? 주인공들은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라고 말한 다음, 기린에게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라는 대답을 들은 다음,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박민규 역시 그 이상 소설을 진행시키지 못하고 소설을 끝낸다. 당연하게도, 환상만으로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도 "세상은..." 하며 자기 임의로 세상을 재단하고 말 것인가? 환상을 가로지르지 못하고 그 뒤의 현실과 맞서지 않으면 환상은 자폐가 된다. 자폐는 나르시시즘과 샴쌍둥이가 아니겠는가.
독자들과 평단에게서 한목소리로 찬사를 듣는다는 것은 작가에게 대단한 행운이자 축복이겠지만, 박민규의 경우 솔직히 이 같은 현상이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80년대 문화적 기표들을 차용했던 사람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사이의 청춘을 쓸쓸하게 그렸던 작가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현실과 환상을 자유롭게 오가던 작가가 드물었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박민규의 문장들이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며, 나아가 재밌고 웃기는 소설들이 이것 외에도 많은데, 박민규에 대해 그처럼 높은 평가가 나오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누가 좀 댓글로 그 이유를 알려주면 좋겠다. 박민규의 등장이 진정 "대한민국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신선하고 충격적인 사건 하나"(이외수)란 말인가? 해설을 쓴 신수정은 이렇게까지 말한다.
"박민규를 행복한 작가라고 할 수 있을까. 2003년 [지구영웅전설]로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고 연이어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이력을 생각하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요컨대 그는 모든 작가 지망생들이 꿈꾸되 쉽게 이룰 수는 없는 그런 종류의 작가가 된 것이다. [세계의 문학], [문학동네], [문학`판], [동서문학], [창작과비평], [한국문학], [현대문학] 등 국내 유수의 문예지들이 그에게 소설을 청탁했으며, 비평은 그가 발표한 소설들에 대한 주목으로 그의 열정에 보답했다. 독자들은 또 어떤가. 그들은 무엇보다도 그의 소설의 참신함에 열광했으며 쇄를 거듭하는 판매부수가 이를 증명해주었다. 이 정도라면 대단하지 않은가. 문단의 관심과 비평의 주목, 그리고 독자들의 사랑. 작가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이것 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 그는 그야말로 2000년대 한국 문단이 가장 사랑한 문학계의 총아라고 할 만하다."
신수정의 이 말 속에 아마 지금 한국문학이 처한 위기상황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지도 모르겠다. 박민규에 대한 높은 평가가 어떻게 지속적으로 재생산되는지도 대강 짐작이 가고. 나는 박민규가 '무규칙이종소설가'라는 조금은 유치한 자기패션부터 벗어던지기를 바란다. '무규칙이종'이란 말에서 오는 거칠고 반항적인 면모를 그의 글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위에서 보듯 너나 할 것 없이 그에게 소설을 청탁하고, 그의 소설이 많이 팔리며, 이걸 또 평단이 상찬할 정도라면, 그의 소설은 퍽이나 안전하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 직함을 계속 달고 싶다면 그것에 알맞게 저런 일방적인 찬사들이 무색해지도록 좀더 불온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