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스터디 - 미국대학 교양교육 핵심과정과 한국에서의 인문학 공부안내
마크 C. 헨리 지음, 강유원 외 편역 / 라티오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여기저기서 주목받는 책이어서 잔뜩 기대하고 들춰보았는데, 기대와는 달리 크게 실망스럽다. 160쪽밖에 안 되는 분량으로 고대 그리스부터 근대에 이르는 서구 인문학의 각 분야를 개관하고 추천도서 목록을 정리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작업임을 읽어 보면 금세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각 분야의 소개는 지나치게 개괄적이고 간략한데다가, 굉장히 전통적이고 보수적 시각으로 일관되어 있다. 서구중심적인 거야 그렇다 쳐도, 20세기 중반 이후에 등장한 다양하고 풍성한 이론적 성과들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오히려 이에 대단히 적대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모습은 이 책이 옹호하고자 하는 인문학과 교양의 가치를 무척 의심스럽게 한다. 이 책은 몇몇을 제외하면 무려 40-50년 전에 출간된 영어권 책들을 각 분야 최적의 참고서로 제시함으로써, '70년대 이후 인문학 커리큘럼과 방법론상에 나타난 일대 지각변동을 애써 무시하고자 한다. 그 지각변동을 일으킨 정치성을 얄팍하고 하찮은 시도들도 폄훼하는 이상, 이 책은 교양의 타락을 슬퍼하는 전통주의자들의 방만한 훈계 이상의 위상을 얻기 어려을 것이다. 한편 역자들이 정리하여 덧붙인 한국어 참고자료의 경우 양은 풍부하지만 세부 주제에 따른 정리가 미흡하고 책에 대한 간략한 소개도 없이 서지사항만 밝히고 있어, 과연 알라디너들의 마이리스트들보다 효과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하는 걱정마저 든다. 

이 책의 구매 의사가 있으신 분이라면 일단 오프라인 서점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부분만이라도 살짝 들여다 보고, 두고두고 곁에 둘 만한 책인지 잠시 음미해 본 다음에 구매 여부를 결정하길 바란다. 감히 말하건대, 문학이든 철학이든 역사든 이 책에서 다루어진 내용보다 더 충실하고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안내서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역자 서문과 저자 서문은 괜찮은 조언들을 제법 담고 있긴 한데, 이미 강유원의 책을 몇 권 접한 이에게는 그 역시 새로운 내용은 아닐 듯싶다. '고전' 읽기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가 필요하다면 차라리 강유원의 [서구 정치사상 고전 읽기]를 고르기 바란다. 훨씬 유용하고 재미있으며, 정치사상 텍스트를 다루고 있음에도 인문학 공부에 관련하여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이 제법 많다.


댓글(5) 먼댓글(1)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roo의 생각
    from roo's me2DAY 2009-01-22 14:11 
    서구중심적인거야 그렇다쳐도,20세기 중반 이후에 등장한 다양하고 풍성한 이론적 성과들을 전혀 반영하지 않고 오히려 이에 '대단히 적대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모습은 이 책이 옹호하고자하는 인문학과 교양의 가치를 무척 의심스럽게 한다.-제 소감도 이와 같습니다
 
 
limelight 2009-01-22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들춰보지 마시고 한번 세심하게 읽어보시면 조금 생각이 달라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문구 이외에도 많은 문구들이 이 책에서 와닿았는데, 인문학 공부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온 이들의 생각과 태도라서 그런지, 그리고 "어떤 커리큘럼도 모든 커리큘럼을 포괄하진 못한다... 핵심커리큘럼을 끝내면 여러분은 자신의 무지를 깨달을 때에만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헀던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심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라는 원저자의 말처럼 한번에 모든 것을 다 얻으려는 욕심을 버려서인지, 인문학적 통찰력을 얻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소 보수적이고 정통적인 시각에서 인문학 본래의 보편성 추구의 목적을 느낄 수 있어서 오히려 신선했구요. 그리고 20세기 중반 이후의 다양한 성과들을 다루고 있지 않은 것은 이 책에 나온 기본적인 인문학 공부를 한 후에 그것들을 공부해도 그리 늦지 않기 때문일 것 같기도 하고, 아직 검증되지 않은 그런 것들까지 다루면 정말 과욕이기 때문일 것 같기도 하고요. 20세기 중반 이후의 위대한 학자들도 이 책에 나온 고전공부를 먼저 하고 그런 이론들을 세울 수 있었을테니까요.

"플라톤에 대한 가장 좋은 입문서는 바로 플라톤의 저작이다. 플라톤에 관해 쓴 다른 저자의 책, 즉 2차문헌을 거치지 말고 먼저 원전을 읽는 것이 좋다."

"철학이 최고라는 플라톤의 주장에 도전할 시인이 있다면 그는 바로 셰익스피어다. 그의 시선은 인간의 넓은 세계 전체에 뻗어 있는 동시에 인간 감성의 가장 깊숙한 움직임을 포착한다."

"프랑스혁명 이후 세계는 인간과 신의 싸움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 더 정확하게는 인간 집단과 인간 집단의 싸움이 벌어지는 곳으로 변화하였다. 지배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대립과 투쟁은 근대 이후 오늘날까지 세계를 파악하는 기본적인 입장 중의 하나이다."

"제인 오스틴(1775~1817)의 작품들을 읽어라. 그것은 문명화된 영혼의 가장 확실한 표지다."

"과학이 역사적 과정 속에 처한 인간들의 세속적 활동이라 해서 과학이 거둔 놀라운 성과들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 것이 진실임을 과학사는 밝혀 왔다. 과학이 거둔 놀라운 성과에 담긴 역사성을 올곧게 이해하려는 것은 그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역사적 과정에서 빚어진 빛과 어둠을 모두 놓치지 않으려는 시도이다. 이는 과학의 가치를 부정하기는커녕 과학의 문화적 유산을 긍정적으로 계승하는 것이다."

"모든 경제사상은 나름의 방식으로 풍요와 부의 증진, 자유, 평등 모두를 추구한다. 문제는 어떤 종류의 부(개인적인 부냐, 사회적인 부냐, 그리고 화폐 자본이냐, 실질적 재화냐), 어떤 종류의 자유(재산권의 자유냐,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자유냐), 그리고 어떤 종류의 평등(투표권에 국한된 정치적 평등이냐, 물질적 삶의 경제적 평등이냐)을 선택할 것인가이다."

사량 2009-01-23 0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limelight님 /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역시 님이 인용하신 "어떤 커리큘럼도 모든 커리큘럼을 포괄하진 못한다"라는 말에 적극 동의합니다. 오히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책의 시각이 못마땅한 겁니다. 자신들의 견해 역시 특정한 관점에 따른 선별과정을 분명히 지니고 있을 텐데, 그 견해를 불변하고 보편타당한 것인 양 제시하고 있거든요. 님께서 셰익스피어와 관련하여 인용한 "그의 시선은 인간의 넓은 세계 전체에 뻗어 있는 동시에 인간 감성의 가장 깊숙한 움직임을 포착한다"라는 문장만 봐도, '인간' '세계' '감성'이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단일한 개념인가 하는 이의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영미소설을 거론할 때 유일하게 언급한 제인 오스틴의 경우도 그래요. "문명화된 영혼의 가장 확실한 표지"라고 하는데, '문명화'라는 말부터가 아주 음험한 말인데다가 저렇게 막연한 말로 수식할 수 있는 작가가 과연 제인 오스틴뿐이겠습니까. 이런 질문에 대답할 수 있으려면 역시 20세기 중반 이후의 이론들에 힘입을 필요가 있는데, 이 책의 저자들은 비아냥으로 일관할 뿐이지요. 그 이론들에 지면을 많이 할애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지 인문학과 교양을 근본적 차원에서 심문하는 그 문제의식을 존중할 필요가 있고, 그렇지 않을 경우 감정적이고 동어반복적인 '권위에의 호소'에 머물기 십상이라는 말을 하고 싶을 뿐입니다. 20세기 사상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삼총사' 가운데, 뒷부분에 단편적으로 몇 차례 언급되는 맑스를 제외하고 니체, 프로이트가 본문에서 거의 논의되지 않는 책을 권하기란 저로서는 쉽지 않네요.

limelight 2009-01-23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인문학 정신이 무엇이냐 혹은 고전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부터가 그 사람의 세계관을 반영한다고 볼 때, 저는 이 책에 동의하는 편이고, 님은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 같기도 합니다. 저 역시 니체를 포함한 근현대 학문을 위주로 공부했지만 인문학 정신의 토대는 고전에 담긴 보편성이라고 보고 있으며, 고전이라 할 수 있는 것도 이 책에서 언급된 범위 정도면 타당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여기 나온 책들만 공부해도 석학이 될 것 같은 느낌이거든요.^^ 능력만 된다면 니체를 공부하기 이전에 니체가 깊이 연구했던 희랍고전들을 제대로 이해하고 싶은 게 제 욕심이기도 하고요. 물론 이후에는 지금 현재 한국에서 살고 있는 나와 시대를 이해할 좀더 세부적이고 다양한 이론들도 공부해야겠지요. 이 책의 저자도 자신의 견해(미국의 모든 대학의 교양교육 커리큘럼을 조사한 것이고 유명 교수들을 직접 인터뷰한 이후에 쓴 책이기 때문에 이 책의 내용 자체가 그만의 주장이 아니기도 합니다)가 보편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제시하는 위대한 고전들이 보편정신(보편타당성이 아니라)을 추구했다는 것을 잊지마라는 뜻으로 저는 읽었습니다.

this 2009-02-22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량/ 고견 잘 봤습니다. <인문학 스터디>의 강연회가 있었는데 녹음파일이 올라왔습니다. 시간이 되시면 다운받아서 들어보셨으면 합니다.

아래는 다운 주소입니다.
http://allestelle.net/resources/2009/02/02/1172

사량 2009-02-23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정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길어서 전부 듣진 못했지만, 여전히 강유원 선생은 정력적이고 유머가 넘치네요. ^^ 다만 어느 분의 서평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은 조금 듣기 거북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