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크 데리다는 가장 입문서를 쓰기 어려운 사상가임에 틀림없다. 그의 사유 및 글쓰기가 그 자체로 독립적이거나 완결적이지 않고---이것이야말로 데리다가 적극적으로 저항하고자 하는 오래된 관념이다---다른 사람의 글쓰기에 대한 꼼꼼한 독서로 구성되어 있으며, 텍스트가 한두 개의 명제로 명료하게 요약되고 정리될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부터 부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압축과 공식화, 키워드 요약 등이 부득이하게 요청되는 입문서라는 글쓰기의 형식은 데리다를 그 대상으로 삼는 한, 가장 데리다에 역행하는 것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설령 이렇게 쓰는 것이 가능하다 할지라도, 약 50여 권에 이르는 그의 저작---아직도 유작이 출간 중이다---에 수록된 주요 논의들을 맛보기 차원에서라도 한 권에 모두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리다를 소개하는 글은 세계 곳곳에서 줄기차게 씌어져 왔고 또 씌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데리다를 읽고자 하는 수요는 많은 데 반해, 데리다로 들어서는 문턱은 높아 보이기 때문인가 보다.
이 책의 미덕이라면 저자가 짧은 분량 안에 데리다를 소개하고 요약하는 행위에 내재된 위험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고, 이러한 자의식을 책 전반에 걸쳐 비교적 일관되게 유지하고자 노력한다는 점에 있다. 저자는 데리다 저작의 발표년도를 따라 데리다를 설명하지도 않고, 장과 절을 나누기는 했지만 해당 파트의 소주제에 그리 얽매이지도 않는다. 그 대신 자신의 부가설명을 가능한 한 아끼고 데리다의 목소리를 직접 인용을 통해 들려주고자 애쓴다. 토막글이긴 하지만 어쨌든 데리다의 글을 곧바로 접할 기회를 많이 제공한다는 점에서 이는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또한 2003년에 발표된 책(원서)인 만큼, '90년대 이후 데리다의 저작에서 두드러지는 그의 정치적 면모에도 주목하고 있는데, 여전히 '차연', '텍스트 바깥은 없다', '포스트모더니스트' 정도의 수식어로만 데리다를 이해하고 있는 국내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데리다에 대한 생각을 처음부터 달리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부록으로 실린 데리다의 저작과 인터뷰, 기타 선집 목록은 데리다만이 아닌 다른 입문서를 집필하고자 하는 사람이 모범으로 삼기에 적격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매우 알차게 정리되어 있어 데리다를 좀더 공부하려는 사람에겐 여러모로 유익할 것 같다. (다만 한국어로 번역된 단행본, 인터뷰, 논문 등을 따로 밝혀주지 않은 점은 유감이다)
그러나 이상의 유용함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말한 우려들이 모두 해소된 건 아니다. 데리다의 특유한 논법을 설명하는 데 적지 않은 분량을 할애하면서도 데리다의 '주요' 개념들을 대부분 언급하고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다행스럽지만, 은유, 유령, 환대, 번역, 여성성, 회화 등---많은 사람들이 데리다와 관련하여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들이다---에 대한 데리다의 흥미로운 논의들이 누락되거나 불충분하게 다루어진 건 아쉬운 부분이다. 사실 데리다의 '주요' 개념들도 보충설명이 좀더 있었으면 하는 경우가 많았고, 문학 작품 등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는 것이 오히려 이해를 더 어렵게 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데리다를 직간접적으로 전혀 접해보지 못한 사람에게 권하기는 조금 부담스럽다. 그런데 시중에 구할 수 있는 데리다 입문서 가운데 이만한 책도 딱히 없는 것 같다. (데리다 초기 사상에 대한 입문서로는 김형효 교수의 [데리다의 해체철학](민음사, 1993)이 제격이나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다) 데리다의 저작 가운데 번역되지 않은 책이 훨씬 많고 번역된 책들조차 번역의 질이 참담한 경우가 태반이라고 하니, 일단은 이 책으로 데리다를 시작해야겠다. 한국어로 씌어진 좋은 데리다 입문서가 나오기를, 그리고 데리다의 저작들이 마저 충실하게 번역될 수 있기를 기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