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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맑스 - 미셸 푸코, 둣치오 뜨롬바도리와의 대담 ㅣ 디알로고스총서 1
미셸 푸코.둣치오 뜨롬바도리 지음, 이승철 옮김 / 갈무리 / 2004년 11월
평점 :
먼저 제목에 대해서 한마디 해야겠다. [푸코의 맑스]라는 제목에 혹하여 푸코가 주목하는 맑스의 긍정적 또는 부정적 면모, 푸코에게 끼친 맑스의 영향, 푸코의 이론과 맑시즘의 접목 가능성 등 푸코와 맑스의 다양한 관련 양상이 이 책에 담겨 있으리라 기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 기대를 접기 바란다. 대담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에서 대담자는 푸코에게서 그러한 이론적 논의를 이끌어 내는 데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기 때문이다. 이 대담집에서 푸코는 비판적 사유와 혁명적 동력을 모두 상실한 채 철저히 속류화되어 역기능만을 초래하고 있던 프랑스공산당과 스탈린주의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따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을 뿐, 맑스의 이름을 자주 꺼내지는 않는다. 그저 맑스주의의 성전(聖典)화가 지배하던 1960대 프랑스 일부의 지적 분위기를 회고하는 가운데, 맑스주의는 분명히 19세기의 에피스테메를 공유하고 있다는 점을 잘라 말하면서 당시의 편향성과 극단성을 우회적으로 꼬집고 있는 정도이다. 그런데도 제목이 [푸코의 맑스]라니! 더구나 이탈리아어로 씌어진 원문의 제목은 [푸코와의 대화]가 아닌가. 이 같은 사태의 원인은 엉뚱하게도 이 책의 영역본에 있다. 영역자들이 번역본에다 [맑스에 대한 언급들Remarks on Marx]라는 시덥지 않은 제목을 붙였고, 영역본을 주 텍스트로 삼은 국역자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푸코의 맑스]라는 과격하면서도 야릇한 제목을 달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거야말로 일종의 좌파선정주의 같은 것이 아닐까.
물론 맑스의 이름이 전면에 등장해야 하는 절박함과 필연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국역자 서문과 영역자 서문에는 그런 것들이 잘 드러나 있다. 영역자가 보기에 이 책은 "국지적 전술뿐 아니라 보편적 전략도 제공하는 대중 정치 조직을 통해 혁명적 프로그램을 전진시키고자 하는 한쪽 편의 욕망"과 "그들이 시행하는 기존의 권력관계 분석과 전략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주의를 유지하려는 다른 한쪽 편의 욕망"(영역자 서문, 5쪽)의 대립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국역자에 따르면 전자의 욕망은 "정통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푸코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려는 뜨롬바도리의 시도"이며, 후자의 욕망은 "자신의 이론이 현실의 정치적인 경험들과 더 큰 유관성을 갖고 있음을 주장하려는 푸코의 문제의식"(국역자 서문, 19쪽)과 각각 대응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보편적 전략과 이론적 토대를 갖춘 대중조직을 기반으로 하는 혁명적 프로그램이 곧바로 '정통' 맑스주의 일반의 것으로 환원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맑시즘에 과문함에도 감히 단언할 수 있는 것은, 모든 혁명적 프로그램이 맑스의 스펙트럼 안으로 포섭될 수는 없으며, 맑스주의 내부에서조차 그 아래에 하나의 유형으로 환원될 수 없는 엄청난 다양성과 변이로 가득한 세부 프로그램들이 득실득실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책에는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한 언급이 하나의 장으로 독립되어 있는데, 그들은 맑스와 가까우면서도 또 얼마나 먼가?) 게다가 '정통'이란 말의 어감은 교조적인 태도, 기득권에 대한 집착, 아류(?)들을 향한 강한 적대심과 같은 수구적인 느낌을 강하게 주는 말이어서, 오히려 국역자가 맑스주의를 통속적인 차원에서 일반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구심마저 든다. 사실 자신들만이 민중을 대변하고 혁명을 실천할 수 있는 담지자라고 행세하는 태도, 그리고 서로가 '맑스의 적자'임을 자임하면서 진보진영 내 분파싸움을 멈추지 않는 것 등이야말로 이 책에서 푸코가 비판해 마지않던 것이 아닌가.
어쨌든 중요한 것은 맑스주의자를 '자임'하는 이들의 비판에 대한 푸코의 대답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푸코에게 쏟아진 비판들 가운데 가장 흔히 눈에 띄는 것은 푸코가 권력을 지나치게 미시적이고 국지적인 것으로 보면서 파편화시키고 있어 이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담보해내기 어렵다는 식의 비판이다. 즉 개별적인 실천들이 고립화되면서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상황을 아우르는 일반적, 총체적인 전망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게 된다는 것이다. 푸코의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가 문제들을 간결하고 정확한 방식으로 제기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가장 특이하고 구체적인 형태 속에서 그것들을 살펴야만 하지 않을까요?"(144쪽) 푸코가 탐구했던 '특이하고 구체적인 형태'로 우리는 쉽게 감옥이나 정신병동, 판옵티콘 등을 떠올릴 수 있다. 이들을 논의하는 푸코의 방식이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었기에, 푸코는 사소하고 비정치적인 것에 집중할 뿐 총체적인 역사적 상황에 대한 인식이나 '정치적'인 실천과는 거리가 멀다는 비판을 줄곧 들어야 했다. 그러나 푸코에 따르면 감옥이나 정신병동 등에 대한 연구를 통해 합리성의 구축과 이성의 지배로 말미암는 배제의 매카니즘을 밝히는 것이야말로 가장 일반적이고 역사적이며 정치적인 작업이다. 합리성 자체가 초월적인 개념이 아닌 특정한 시기의 역사적 형성물에 지나지 않고, 합리성이 이성으로 간주되고 이성에 권력이 부여되는 과정 역시 "사회의 기능과 역사에 관한 질문"(146쪽)을 피해갈 수 없으며, 이러한 미시적 논증을 통해 비로소 '근대'라는 일반적 개념이자 가치가 하나하나 설명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지식이 축적, 행사, 생산되는 양상을 추적하는 작업은 권력의 메카니즘을 건드리지 않고서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정치성을 피해갈래야 피해갈 수가 없다.
그런데 푸코는 왜 정치적 문제를 회피한다는 비판을 '맑스주의' 진영에서 줄곧 들어와야 했을까? 전기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토록 투사적인 학자도 찾아보기 쉽지 않을 법한데 말이다. 아마도 푸코가 "정당이나 제도의 차원에서 고려되는 사회적 문제"(156쪽)와 같은 거창한 말들을 뱉어내지 못하고, 공산당 등 기성 조직들이 테제로 삼을 만한 논의들을 별로 내보이지 못했다는 데 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왜 정당들이 해결책을 제안하는 지식인들과 관계 맺는 것을 선호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정당들은 하나의 동맹관계를 설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인은 제안하고, 정당은 그것을 비판하거나 다른 대안들을 정식화하는 식으로 말이지요."(150쪽) 따라서 푸코의 작업은 좌파진영을 비롯한 기존 정치집단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쉽고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다. "문제들을 최대한 복잡하고 어렵게 제시"(151쪽)해야만 문제의 복잡다단한 성격을 드러낼 수 있고, 손쉬운 해결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문제를 더욱 미궁에 빠지게 하거나 폭력적인 방식으로 귀결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의 복잡성을 드러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것이야말로 소수의 '진보적' 지식인들과 정당의 수뇌부가 해결책을 독점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책 집행자들과 입법자들, 그리고 지식인들이 침묵하고 있을 때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누구인가? 속류 좌파들은 '민중'이라는 대답을 기대할지 모르지만, '아쉽게도' 푸코는 특정 집단을 직접 가리키지는 않는다. 그저 "자신이 속한 권력관계를 인식하고 그것에 저항하여 그것으로부터 탈출하고자 결심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뿐이다. 이러한 익명의 사람들이 직접 혁명적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으며, 스스로 수많은 실천들을 계획하고 집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지식인과 정치인, 그리고 민중의 경계는 무엇을 경험하고 실천하는가에 달려 있는 셈이다. (이는 부록으로 실려 있는 푸코와 들뢰즈의 유명한 대담 <지식인과 권력>의 주요 화두이다. 참고로 이 대담은 스피박의 대표적 논문인 <하위주체는 말할 수 있는가?>에서 '씹히면서' 더 유명해졌다)
그렇다면 무엇을 경험하고 실천할 것인가? 먼저 "사물들이 어떻게 변환되는지 그리고 그것들이 어떻게 바뀌고 변경되는지"(164쪽) 알아야 한다. 어떻게? 푸코는 말한다. '책을 읽으라!' -_-;;; "책은 우리를 바꾸는 경험으로서 읽혀지고 있습니다. 그 경험은 우리로 하여금 항상 같은 상태로 존재하지 못하게 하며, 이 책을 읽기 전 사물이나 타자들과 맺었던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그 책이 나 자신만의 경험을 넘어선 확장된 경험을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지요."(46쪽)
그 다음에는? 푸코는 말한다. '책을 쓰라!' -_-;;; "경험은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책을 쓰기 전에 이미 생각해 놓은 것들을 소통하기 위해 책을 써야만 했다면, 나는 결코 그 일을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책을 쓰는 것은, 관심이 가는 주제에 대해 내가 무엇을 생각할지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책을 쓰는 동안, 그 책이 나를 변화시키고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바꿔 놓지요. 결과적으로, 각각의 새로운 작업은 내가 그 전의 작업으로 도달한 생각들을 크게 바꾸어 놓습니다."(같은 곳)
중요한 것은 책에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바꾸어 보는 것,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과 같이 생각하지 않는 것, 새로운 것과 관계를 맺는 것, 익명의 타자들과 대화하는 것이다. 푸코는 자신이 계획하지 않고 의도하지 않았던, 그러므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자신을 새로운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모든 감응들을 경험, 구체적으로 '한계-경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기에 "실험"(같은 곳)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실험적인 '경험-책'으로부터 모든 실천과 혁명이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독자에게 그와 같은 한계-경험을 전달할 수 있을까? 사실 이 책이 염두에 두고 있는 독자층은 조금 애매하다. 각 저자의 입문서로 아주 쓸 만한 데리다의 [입장들]이나 들뢰즈의 [대담] 등의 대담집과 달리, [푸코의 맑스]는 아무래도 푸코가 대충 어떤 얘기를 했는지 정도는 알아야 전반적인 이해가 가능할 것 같은데, 그렇다고 대단히 전문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푸코에 대해 조금 주워들은 게 있었는데 이참에 푸코를 제대로 읽어볼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읽으면 좋겠다. 물론 푸코의 기본 개념들에 대한 역주가 그럭저럭 잘 달려 있는 편이고(푸코의 저작에서 해당 부분들을 직접 인용하여 설명한다. 충분하진 않지만, 그건 원 개념이 난해해서이지 역자의 잘못이 아니다), 1968년 5월이나 프랑크푸르트학파 등 익숙한 내용들도 많이 실려 있어, 푸코를 모르고도 나름의 재미는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내가 그렇다. -_-) 특히 종종 드러나는 푸코의 신경질적이고 냉소적인 태도는 그의 평전에서도 느껴지던 것이어서 그의 이론이나 사상과는 별도로 그 자체로 흥미롭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