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두 문학과지성 시인선 342
오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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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어떤 대상의 '본질'을 밝히고자 한다면, 가장 쉬운 방법은 그것에서 '본질적이지 않은 것', 곧 '없어도 그만'인 것들을 하나하나 지워나가는 것이다. 본질적이지 않은 것을 구별해내기가 어려울 경우에는 다른 대상에도 존재하는 것들, 다시 말해 그 대상에만 고유하게 속하지 않는 것을 없애버리면 된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고갱이를 아마 본질적인 것, 아니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게다.

오규원의 유고시집 [두두]는 그렇게 해서 언어라고 불리는 것의 환원 불가능한 본질을 우리에게 아름답고 섬뜩하게 보여준다. 그것이 아름다운 이유는 언어 사용자인 인간에 의해 속속들이 의미화되지 못한 어느 경지 너머로 언어 그 자체가 자유로이 펼쳐놓는 세계가 마치 피안의 우주인 양 더없이 오묘하기 때문이고, 그것이 섬뜩한 이유는 그 낙원이 아무리 미세한 현미경을 들이댄다 한들 인간이 죽었다 깨어나도 다가갈 수 없는, 곧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세상이 결코 전부가 아님을 담담하면서도 강건하게 역설하는 내밀한 풍경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물질성이라는 날줄과 씨줄로 모든 인간적인 의미들을 걸러내고 남은 자리에는 언어가 제 스스로 노닐고 사랑했던 흔적들(나는 '노닐고 사랑했던'이라고, 과거형으로 썼다. 그 이유는 곧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로 가득하다. '어둠은 '제비꽃'을 만드는 걸로 모자라 그 밑에 "제비꽃의 그늘도/하나 붙여놓"는가 하면(10쪽), 나뭇가지에서 떨어진 이파리는 제가 떠나온 그곳을 하늘에게 부탁해 "그 자리를 허공에 맡긴다"(36쪽) '구멍'이라고 하는, 장자부터 시작해서 많은 문학도와 철학자들에게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 되어 왔던 탁월한 사유대상은 "지나가는 새의 그림자가 들어왔다가/급히 나와 새와 함께 사라"(56쪽)짐으로써, 인간들이 사로잡아 의미를 부여하고 또 낱낱이 파헤칠 여지 자체를 앗아가 버린다. 그럼에도 인간 세계를 벗어난 '순수' 언어의 움직임과 질서는 별다른 꾸밈을 필요치 않는 정갈하고 단정한 것이어서, 인간에게 포섭된 언어들이 해석과 전달의 욕망에 짓눌려 토해내는 장광설을 결코 허락하지 않는다. 이 시집에는 10행 이상 되는 시가 거의 없으며, 각 행도 지극히 짧게 정제된, 군살 빠진 뼈만, 아니 뼈도 사라진 근육만을 남긴 채 최소한의 언어로 무한히 충만한 공간을 만들어나간다.

물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온갖 의미들을 덜어내고 사물로만 남은, 또는 추상으로서만 남은 언어의 물질성이 시집 전체에 도드라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고작 사물이나 추상을 의인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그런 의혹을 전혀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의인화란 하나의 존재가 된 언어의 무한한 활동들을 그저 인간들이 간편히 이해하기 위해 덧씌우는 거추장스러운 해석이 아닐까? 다시 말해 사물이 된 언어라는 존재를 인간에 대한 비유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언어 고유의 세계를 낯설고 기괴한 무엇으로 파악한 나머지, 이를 친밀하고 편안한 세계로 길들이고자 사후적으로 가하는 폭력이지 않을까? [두두]에서 언어들은 '있음'과 '움직임'으로서 나타나되, 성별도, 부모도, 자식도, 국적도 없다. 뿌리도 없이 막되먹은 이러한 서자들의 세계가 불편하다면, 그 속의 예측 불가능한 관계들을 모조리 인간적인 질서로 바꾸어 이해해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는 결국 우리에게 주어지는 언어들의 난장이란 하나의 결과물일 뿐, 우리의 의미체계가 물질적 언어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꼴이 되지 않는가? 우리가 애지중지하는 언어란 결코 투명하지 않고 중립적이지도 않은 인간중심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렇기에 우리의 언어가 무력해지는 사태에 직면하였을 때 이를 익숙한 것으로 바꾸지 않으면 불안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대놓고 폭로하는 셈인 것이다. 본질로서의 언어가 생동하는 우주는 우리가 미리 알 수 없는 곳에 자리한다. 다만 그들이 왔다가 사라진 놀이터만을 뒤늦게 발견할 수 있을 뿐.

일견 선(禪)적인 세계로 보이기도 하는 [두두]는 이러한 의미에서 그 어느 시집보다도 정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온갖 잡스러운 말들이 절제되지 않은 채로 횡횡하는 오늘 그리고 이곳에서, 최소한의 언어로 최대치의 시공간을 수놓은 [두두]의 세계는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경이롭다. 한국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시 창작법을 저술한 섬세하고 날카로운 문예교수이자, 김수영과 김춘수와 더불어 '시론'이라고 불릴 만한 방법론을 탄탄하게 구축한 한국현대시사의 몇 안 되는 시인이론가(이런 말도 있나?)였던 오규원은 유고시집이 단지 미발표된 (태작이 대부분인 경우가 많은) 습작들을 한데 모아두는 것 이상이 될 수 있음을 또 하나의 선례로 남겼다. 이 땅의 젊은 시인들이여, 오규원을 배우라. 오규원만큼 언어에 치열하게 매달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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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8-09-09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너무 어려운 리뷰예요. 다음에 낮에 와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다시 읽어야겠네요
근데 첫 줄은 참 와닿네요. 대상의 본질에 대해 알려면.. 음... 맞는 말 같아요. 나의 본질부터 알기 위해 없어도 될 것들을 없애보는 연습을 해야겠네요. 그럼 알 수 있을까요? ^^

결혼식 잘 치루고 신행도 잘 다녀오고 신혼집도 다 정리하고.. 인사드리러 왔어요. 잘 지내세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