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두나무 왼쪽 길로 - 전5권
박흥용 지음 / 황매(푸른바람)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호두나무 왼쪽 길로]는 길에 대한 이야기다. 쿤데라도 말했지만, 길은 도로와 다르다. 도로는 종착지가 없으면 의미가 없을 터. 목적 없이 서성이는 것을 도로는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나 길은 길을 가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다. 길은 방황하고 주저하며 무언가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것이다. 주인공 상복은 오토바이를 탄다. 오토바이를 타는 동안, 상복에게는 대도시의 다차선도로도, 오지의 포장되지 않은 샛길도 모두 길이다. 자동차를 타지 않기에 상복은 길 위에서 땅에 발을 디딜 수 있고 바람과 구름을 맞이하며 함께 숨쉰다. 무엇보다 길 위에서 상복은 사람들을 만난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이 상복에게 땅의 내력을 들려주고 지나온 삶의 궤적을 들려준다. 더 이상 여행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기원이란 목적을 상정하는 것이므로 길 위의 여행자에게는 불필요한 것이다. 대신 실핏줄처럼 이어지는 끝을 알 수 없는 길, 그리고 사람 찾기만이 끈질기게 남아 있을 뿐. 그래, 실핏줄처럼 뒤엉켜 있으면서도 어딘가에 서로 연이 닿아 있는 것이었다, 스무 살 상복이 조금씩 받아들이기 시작한 사람들의 관계란 것은. 길 위에서 하나같이 청승맞고 비루한 사람들과 마주치며 예견치 못한 여정으로 이끌리는 상복은 고단하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그것이 바로 삶이란 것인데. 상복은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니,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토록 피곤하고 원망스러운 삶이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가 함께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를 위무하고 견디기 위해서는, 나아가 이겨내기 위해서는 헤아릴 수도 없는 무수한 이름 없는 사람들이 삶이라는 길 위에 함께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역사와 공동체, '광주'는 결코 다른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상복은 어머니를 용서하고 아버지를 인정하며 자신의 서러운 여행과 운명을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성장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 성장소설이 좋아도 지나친 나르시시즘적 귀결은 부담스러운 사람들, 오토바이에 관심 있는 사람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 여행을 좋아하지만 이 땅에는 별로 관심을 가져보지 못했던 사람들, 관광명소를 찾는 데 눈이 벌개진 사람들, 그리고...... 어떻게든 이곳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이 두루두루 읽었으면 좋겠다. 한컷 바라보고 숨 한번 고르며 먼 곳을 쳐다볼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이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무슨 내용이냐고? 그저 길에 대한, 사람에 대한, 역사에 대한, 우리에 대한 이야기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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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5-07-15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 파란 세이버>에 이어 이 책이 나왔나봅니다.
저번 알라딘에서 세일할 때 사둘 걸.
품절이네요. 아쉬워라.^^
(오늘 시아일합운빈현님이 '길' 사진 페이퍼 올린 것 보셨어요?^^)

사량 2005-07-15 1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낱권으로는 사실 수 있어요. ^^ 한국일보에 연재되었던 작품이라고 하네요.

2005-07-17 01: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량 2005-07-17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 감사합니다. '속삭임'이란 것 처음 들어보네요.^^

2005-07-18 14: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량 2005-07-18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 넵, 슈슝~

비로그인 2005-07-19 0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좋네요. 근데 전 5권이예요? 너무 길다. -_-; 한권도 읽기 벅찬데... 그쵸?
쿤데라가 그런말을 했어요? 얼마전에 쿤데라의 책을 처음 접했는지라...
" 길은 길을 가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다. 길은 방황하고 주저하며
무언가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것이다 " 이 대목 상당히 좋네요. 그렇죠. 길이란...
전 항상 그런 생각을 해요. 내가 나의 길을 제대로 찾아가고 있는 걸까?
하지만 길이 도로가 아니니깐. 그런 생각은 어쩌면 필요없는 생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드네요. 길에서는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테니깐요. ^-^
한권이면 사 볼텐데.. 5권이라.. 엄두가 안나요 -_ㅠ

사량 2005-07-19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길과 도로에 대한 쿤데라의 언급은 다음과 같습니다.

"길 : 사람들이 걸어가는 대지의 벨트, 도로는 비단 사람들이 그 위를 자동차로 달려간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한 지점을 다른 한 지점과 연결하는 하나의 단순한 선이라는 점에 의해서도 길과는 구분된다. 도로는 그 자체로는 어떤 의미도 갖지 않는다 ; 단지 그것이 두 지점을 연결해 준다는 의미뿐. 길은 공간에 대한 경의이다. 길의 한 토막 토막이 그 자체로 하나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러나 도로는 신난 듯이 공간의 가치를 저하시켜, 오늘날의 공간이란 인간의 이동의 한 장애요 시간 손실일 뿐 다른 그 무엇이 아니게 되었다."
--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불멸], 청년사, 1992, 283쪽.

가격이 부담스러우시면 인근 시립도서관을 잘 뒤져보세요. 있을지도 모릅니다. ^^;;;

비로그인 2005-07-21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좋네요. ^-^ 정말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도로는 단지 두 지점을 연결해준다는
의미뿐. 길은 우리의 발검을음 멈추게한다. 오늘도 전 제 발걸음을 멈추고..
저의 길에서 망설이고 있지요. 괜찮겠죠? 길은 누구에게나 방황의 공간이겠죠? ^-^

히피드림~ 2005-07-26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뭔 책이 이렇게 긴가해서 찾아봤더니 만화네요.^^;
저도 성장소설 좋아해요. 한때는 성장소설만 찾아봤답니다. 이 책도 느낌이 좋네요.
특히 사량님의 리뷰 제목이 좋네요. 제목을 근사하게 잘 붙이시는 것 같아요.^^

사량 2005-07-27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unk / 제목이 근사한가요? 그럴 수밖에 없지요. 표절이니까. -_-;;; 저 제목은 정말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만화영화인 <은하철도999>의 마지막회(TV판, 극장판 포함한 그야말로 대단원)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 그리고 소년은 어른이 되었다"라는 마지막 내러이션(자막으로 처리)에서 따온 것입니다. 그 직전 장면, 그러니까 철이와 메텔이 헤어지는 장면에서 메텔의 마지막 대사는 이렇습니다. "안녕, 철이... 나는 너의 추억 속에만 있는 여자, 나는 소년 시절의 마음속에만 있는 청춘의 환영..." 이렇게 적어놓고 나니 조금 청승맞고 닭살스러운데^^ 직접 볼 당시에는 그야말로 펑펑 울었습니다. 아, 생각만 하면 지금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습니다. T_T [호두나무 왼쪽 길로]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가슴에 조용히 스며드는, 그러나 좀처럼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컷과 대사를 군데군데 간직하고 있는 만화랍니다.
 
살아있는 김수영
김명인.임홍배 엮음 / 창비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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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에게 정신적으로 많은 빚을 진 사람으로서 김수영에 관한 저작들이 지속적으로 발간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반가운 일이지만, 한편으로 100살 정도 먹은 한국근대문학사에서 김수영 말고는 재조명할 만한 시인이 결코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조금은 과도한 현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는 상대적인 과도함이다. 어느 시인이나 작가에게서 새로운 문학적, 지적 자양분을 발견하고 섭취하여 오늘의 동력으로 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자 문학 연구의 핵심적인 작업이므로, 굳이 문제를 삼고 싶다면 다른 시인에 대한 의미 있는 성과물들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한국문학 연구자들을 질타하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끝내 우려를 거두지 못하는 이유는 김수영에 집중된 문학 연구자들의 관심이 결과적으로 김수영의 문학적 성취를 아카데미의 테두리 속에서 물신화하는 데까지 이를지도 모른다는 느낌 때문이다.

[살아있는 김수영]은 1990년대 후반 이후의 김수영 연구 논문들을 모은 것인데, 일단 이 책에 수록된 글 열 다섯 편의 수준은 전반적으로 고르다. 필자들도 40대 현장비평가, 소장연구자, 시인, 한국문학에 대해 종종 글을 써 온 외국문학 연구자 등 평단 및 학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사람들로 선별되었다. 김수영의 시, 시론과 산문, 문학사적 의의, 영향관계 등 네 가지 주제 아래 관련 논문들을 모은 점도 무난하고, 특히 김수영의 문학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이는 번역의 문제에 대해 두 편의 글을 실은 것은 이 선집에서 가장 높이 평가할 만한 부분이다.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을 강조했기 때문인지 파격적인 해석을 보여주는 글이 없다는 점(좀더 과감한 읽기를 보여주는 선집으로 김승희가 엮어 프레스21에서 2000년에 발간한 [김수영 다시 읽기]가 있다), 수록글 가운데 삼분의 일 이상이 기존에 발표된 글들을 재수록하거나 개정한 것이라는 점, 치명적인 오타가 몇 개 발견된다는 점, 올초에 발간되었음에도 관련서지목록에 2004년 자료들이 누락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2003년에 민음사에서 나온 개정 [김수영 전집]에 대한 검토가 전혀 없다는 점(이 책의 논문들은 모두 1981년판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2003년판본이 지닌 문제점에 대해서는 직접 보고 판단하시라) 등을 제외하면, [살아있는 김수영]은 내용상 크게 문제될 것이 없는 선집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책이 왜 나오게 되었는지, 다시 말해 김수영 연구서지가 넘치고 또 넘치는 상황에서 왜 또 한 권을 추가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엮은이의 한 사람인 김명인이 작성한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한다.

"김수영에 관한 연구에 있어서 연구자들이나 평론가들 상호간의 간주관적 소통이 특히 희박한 것은 많은 연구자들이나 평론가들이 김수영을 이렇듯 개별자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수영을 문제삼는 글들은 대개 연구자나 평론가 자신의 관점이 두드러지고 다른 사람들의 관점이나 연구성과를 폭넓게 받아들인다거나 그것을 토대로 축조해나간다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말하자면 모두들 제가끔 김수영과 씨름하며 제가끔 김수영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형국이다. (......) 김수영의 전기적 사실, 사상적 근거, 현실인식, 시의식, 시창작방법 등에 관하여 이제는 좀더 협동적이고 축조적인 방식의 공동연구가 이루어질 시점에 이르지 않았는가,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본격적인 김수영학(學)이 시작될 필요가 있지는 않은가. 그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문학사적 사실이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김수영이 제출한 '한국에서의 근대적 시 정신의 정립'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문학사적이면서 정신사적인 과제를 제대로 이행하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책머리에> 5면)

연구자나 평론가 자신의 관점이 두드러진다는 사실 자체가 왜 문제가 되는가? 국문과 대학원생들이 하듯 하나하나 연구사 검토 과정을 밝혀주고 자신의 연구를 이러한 사적 맥락과 관련시켜야 비로소 참다운 연구가 된다는 말인가? 관련 연구자들 사이의 상호 소통은 나름대로 중요한 것이긴 하겠지만, 연구자의 개성이 도드라지는 개별적인 김수영 연구를 '김수영이라는 감옥'으로 비유한다면, 김수영에 관한 국문학계, 또는 평단 외부의 논의는 아예 평가하지 않겠다는 뜻인가? 이 같은 입장에 선다면, 김상환의 [풍자와 해탈, 혹은 사랑과 죽음](민음사, 2000)과 같은 국문학계 바깥의 작업에 대해서는 별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실제로 김명인은 자신의 다른 글에서 이 책에 대한 비호의적인 평가를 내린 바 있다). 사실 소통이 부족한 것은 인문학 전반에 걸친 현상이며, 이는 제도적인 부분을 비롯한 학계 내부의 고질적인 문제가 아닌가? 이에 눈감은 채 개별자적 연구를 문제 삼으며 '협동적이고 축조적인 방식의 공동 연구'라는 미명 아래 김수영학을 세우려는 시도는 김수영에 대한 해석과 평가를 독점하겠다는 뜻으로 들릴 수 있음을 김명인은 명심하기 바란다. '학'을 만든다는 것은 하나의 정설을 마련한다는 것인데, 전기적 사실 이외의 사항들에 대해서 통일된 무언가를 세우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오히려 김수영의 정전화에 따른 신비화가 지속되고 이에 대한 비판을 거세하는 분위기가 도래하지는 않을까? 황현산, 남진우 등을 제외하면 이 책에 글을 수록한 필자들이 대부분 <창작과비평> 및 <실천문학>과 가까운 위치에 있음을 고려할 때, 김명인 등이 상정하는 김수영학이란 다채롭고 예측 불가능한 해석을 처음부터 차단하고 있다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오해를 피하기 위해 밝히자면, 내 정치적, 문학적 감각은 <창작과비평>이나 <실천문학>에 더 가깝다, <문학과사회>나 <문학동네>, <세계의문학> 등보다는).

김수영이 제출하였다는 '한국에서의 근대적 시 정신의 정립'은 얼마든지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자면 김수영만이 점유하는 작업인 것도 아니다. 김수영에 대한 아카데미적 해석은 알아서 지속하라. 대신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김수영의 매력에서 발산되는, "미대륙의 석유가 고갈되는 날"까지 계속될 무한한 해석의 증식을 막지 말라. 학자들이 무어라 말하든, 김수영은 무수한 이름 없는 독자들 속에서 맘껏 뛰놀면서 살아있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학자들은 다른 시인들에게도 좀 눈길을 줘라. 그래야 한국의 시문학사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덜 가난해 보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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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7-08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수영의 시중에는 '눈'이라는 시를 가장 좋아했지요.
근데 같은 제목의 시가 3편이나 있다고 하더군요. 제가 좋아하는 시는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로 시작하는 시입니다. 사량님도 좋아하시나요?
그래야 한국의 시문학사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덜 가난해보이지 않겠는가?
이 부분이 아주 좋습니다. 마음속 쏙 와닿는 표현이네요 ^-^


로드무비 2005-07-08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이트 밀즈의 <들어라 양키들아>도 김수영 시인이 번역했다면서요?
전 그의 시니컬한 얼굴도 휘번득이는 눈도 시도 산문도 다 좋아합니다.
그런데 전 무난하면 별 네 개 주는데ㅎㅎ 좀 엄격하시군요.
(비난하는 거 절대 아닙니다.^^)

사량 2005-07-09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시장미 / 장미님께서 적어주신 <눈>은 동명의 세 작품 가운데 가장 먼저 발표된 시입니다. 그 작품도 좋아하지만, 저는 제일 늦게 씌어진 <눈>이 제일 좋습니다. 단아하고 정갈하게 되풀이되는 맛이 일품이지요. ^^

눈이 온 뒤에도 또 내린다

생각하고 난 뒤에도 또 내린다

응아 하고 운 뒤에도 또 내릴까

한꺼번에 생각하고 또 내린다

한줄 건너 두줄 건너 또 내릴까

廢墟에 廢墟에 눈이 내릴까

사량 2005-07-09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 / 이 책에는 김수영이 [들어라 양키들아]를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라, [들어라 양키들아]의 번역본에 대한 동명의 서평을 작성하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예전에 읽은 어떤 글에서는 김수영이 직접 [들어라 양키들아]의 일부를 번역하여 잡지에 발표하였다고 하는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
그리고 저는 보통 '좋은 책이지만 옥의 티가 일부 눈에 띄는 책'에 별 네 개를 주곤 합니다. ^^; 이 책의 경우 네 개 줄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위에서 지적한 결점들이 그저 사소한 것만은 아닌 듯해서 걍 세 개 때렸습니다.;;;

돌바람 2005-07-15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기사는 대체로 신뢰하지 않는 편이지만 다음 기사는 근래 읽은 가장 선정적인 거였어요.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가 왜 사변적으로 변했는지 압니까? 언어에 대한 인내심은커녕,너무 사적인 이야기에 치우쳐 단 5행을 읽기 힘들어요. 그게 다 김수영의 영향이지요.”
'김수영이 우리 시를 타락시켰다.' 제목은 뭐 이런 거였는데, 확 꼭지가 돌아버렸지요. 그러다 오세영이 정말 말하고자 했던 게 이런 거였을까, 다시금 의심해봐도 흥분은 가시지 않더라구요. 제게 김수영은 그런 시인이지만, 사량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 시문학사에 연구할 사람이 김수영밖에 없냐는 문제제기는 무조건 동의합니다. 사량님의 문제제기가 제가 생각하던 부분과 맞아떨어져서 동지를 얻은 듯 기분이 좋네요. 저처럼 방만하지도 않고 조목조목 조용조용 이야기하시는데도 왜 이리 시원한지요. 만나서 반가워요 정말...

사량 2005-07-15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바람 / 그 기사 찾아서 읽어봤는데, 흥분하시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그냥 한 마디 뱉고 무대 뒤로 사라지는 '지나가는 광인' 같은데요. ^^ 무식하면 용감하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명색이 서울대 교수가..;;;

히피드림~ 2005-07-26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위 '학자'라는 사람들의 배타성과 오만함이 여기에서도 드러나네요. 국문학쪽도 그런가보죠? 저도 학교다닐때 그런 교수 있었습니다. 자기 학설 외엔 가르치치 않아요. 배울땐 아직 학부생이고, 자신이 배우는 학문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능력이 없으니까 그게 정설인줄 알고 배우죠. 근데 조금 지나보면 그져 그 교수 개인의 주장일 뿐이라는 게 드러납니다. 물론 자기 학설을 자기 제자에게 가르칠수도 있지만 동일한 주제에 대해 남들은 뭐라고 하나 잠깐이라도 언급해주면 학생스스로 판단하고 공부에 대한 열의도 생길텐데 학부생에게 그러다니,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참 치사하죠...^^

사량 2005-07-27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unk / 공부 안 하는 교수들이 목소리는 또 무지 크죠. ^^ 저는 그래도 학교 다닐 때 좋은 선생님들을 많이 뵈어 다행이라고 늘 생각하는데, 사실 그분들이 여기저기 글을 자주 쓰고 대외에 이름을 날리던 분들은 아니었거든요. 그저 묵묵히 연구실에서 공부하시고 그걸 고스란히 수업시간에 학생들께 돌려주실 뿐이었지요. 그리고, 당신들께서 익숙하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라는 말씀을 서슴없이 하시곤 했어요. 그래서일까요, 저는 일단 유명세를 타는 교수들은 그리 신뢰하지 않아요. 괜히 애꿎은 성실한 학자들만 욕 먹는 데 일조하는 것 같아서... 저 오세영 교수의 글은 국민일보에 실렸는데, 한 마디 한 마디가 그 사람의 참담한 지적 수준을 보여주고 있어서 보기 민망합니다.
 
협력과 저항 - 일제말 사회와 문학
김재용 지음 / 소명출판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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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이란 말만 들으면 비분강개하지 않을 수 없는데, 누군가 면전에서 "일제 때 친일 안 한 사람이 어딨냐? 조선어로 글도 못 쓰는 상황에서 걔네는 뭐 하고 싶어 했겠냐?"라고 반문하며 염장지르는 통에 가슴을 쳐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이 책을 읽기 바란다. 이 책이 최종적인 해답은 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문학에 관한 한 이 책은 그 어떤 논문이나 저작보다도 친일 행위에 대한 효과적이고 쓸모 있는, 한 마디로 '빼도박도 못하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오랫동안 한국근대문학의 저항성에 대해 연구해 온 저자는 이 책 [협력과 저항]에서 친일문학이 폭압적인 일제의 강요를 이기지 못한 데서 나온 어쩔 수 없는 산물이라는, 그렇기 때문에 일제 말기에 친일 행위를 하지 않은 작가가 없다는 기존의 편견에 맞서 친일문학을 비판할 수 있는 다양한 논거들을 밝히고자 노력한다. 그 근거의 핵심은 친일문학이 단단한 내적 논리를 바탕으로 철저하게 자발적인 양상으로 나타났다는 점에 있다. 1937년 일본에 중국 본토를 침략하고 이듬해 '동양의 마드리드'라고 불리던 무한을 함락하였을 때 이광수를 비롯한 조선의 여러 작가들은 일본의 군사력에 압도되었고, 급기야는 조선의 독립에 관한 어떠한 희망도 버리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결국 조선이 나아갈 길은 피와 살을 모두 일본의 것으로 바꾸어 모든 차별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내선일체'를 추구하는 방향 외에는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1940년에 나치가 파리를 함락하게 되자 또 많은 작가들은 서구가 추구해 온 근대 이념, 즉 자유주의와 개인주의가 파탄에 도달했다고 보고, 아시아는 일본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유럽중심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문명과 질서를 '대동아공영권'의 기치 아래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미국 및 영국과의 전쟁에 참여를 독려하는 것은 그들에게 자연스럽게 운명적인 소임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 같은 사고와 행동들이 철저하게 자발적이었고, 또 단발적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친일 협력을 하였던 이들보다 하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았던 것이 엄연한 문학사적 현실"(4면)로 남았을 리 없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저항문인으로 교과서에서 가르치는 이육사와 윤동주 외에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작가들을 기억해야 한다. 동양의 가치란 것에 대해 전면적으로 검토하면서도 일제의 대동아공영권이 동양을 물신화하는 것을 비판하며 결국 조선어 글쓰기가 금지되자 절필을 택하고 해방 전까지 침묵으로 일관하였던 김기림, 일본어로 작품 활동을 하였지만 작품 속에서 우회적으로 식민주의를 비판했던 한설야, 그리고 일본어 작품 활동만으로도 성에 안 차 작가들로 하여금 입대를 종용하도록 강요하는 식민 당국을 피해 결국 조선의용군의 대일항전이 펼쳐지는 중국 연안으로 망명하였던 김사량 등이 저자가 논하는 대표적인 저항작가들이다.

그러나 이상의 작가들을 온당히 평가하고 이들의 작품을 명백한 친일문학들의 수렁에서 건져내기 위해서는 우리도 친일을 바라보는 기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일본어로 글을 썼다는 이유만으로 친일문학이라는 멍에를 씌우지 말아야 한다. 식민지배를 찬양하고 전쟁을 미화하는 내용이라면 조선어로 글을 쓰는 것도 부분적으로 허용되었으며, 반대로 일본어로 썼을지언정 작가의 의지에 따라 교묘하게 일제의 폭압성과 비합리성을 비판하는 것도 가능했음을 당시 발표되었던 작품들이 엄연히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조선문인보국회따위의 어용 문인단체에 가입되었다는 사실만 놓고 친일 여부를 판단해도 안 된다. 정지용처럼 일회적으로 친일적 논조의 작품을 남겼을 경우, 이는 그야말로 '피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을뿐더러, 김사량처럼 학도병 위문단의 이름으로 중국에 건너간 뒤 이를 이용하여 망명에 성공하는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창씨개명을 이유로 삼는 것도 불충분한 혐의 가운데 하나이다. 널리 알려진 사실은 아니지만 대표적인 저항시인으로 알려진 윤동주조차 히라누마(平沼)라는 성으로 창씨개명을 했는데, 그의 대표시 <참회록>이 이와 관련된 고뇌를 시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면, 과연 윤동주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결국 친일 여부를 가리는 데 중요한 것은 어느 단편적인 사실 하나만을 확대하여 전면적인 판단의 잣대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해당 작가의 작품과 삶 전체를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들 통해 저자가 궁극적으로 시도하는 바는 위의 세 가지 잣대(일본어 글쓰기, 종군단체 가입, 창씨개명)로 친일의 혐의를 드리우는 단순하고 일의적인 민족주의적 관점과, 식민주의에 저항하려는 노력은 필연적으로 또 다른 내셔널리즘을 동반하므로 식민주의 이후에 다시금 억압을 낳게 된다고 보는 이른바 탈식민주의적 관점을 한꺼번에 극복하는 것이다. 민족주의적 잣대를 비판하면서도 민족주의에 대한 전면적 비판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일제파시즘에 저항하였던 작가들이 단지 잃었던 국민국가를 되찾는 것만을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나 국제주의 같은 민족주의 이외의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지니며 행동하였기 때문이다. 저자에 따르면 "민족주의에 선 ...... 작가들은 저항을 하였지만 문학적 저항 전체를 고려할 때 극히 소수였다. 오히려 끝까지 저항을 하였던 문학인들은 사회주의적 국제주의자이거나 혹은 세계주의자였던 것이다."(186쪽) 이 같은 의미에서 이 책은 민족주의 비판에만 열을 올리는 나머지, 식민주의의 재검토에 상대적으로 소홀한 국내의 몇몇 이론적 흐름들, 아울러 식민주의가 완전히 종식되었다고 판단하고 식민주의 이후의 제반 문제들을 다루는 탈식민주의 이론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고도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모성의 강조가 철저하게 일본의 전시체제에의 협력으로 수렴되고 있음을 꼼꼼하게 지적하고 있는 최정희론은 페미니즘과 식민주의의 관련성을 살피는 데도 매우 유용하다.

이 땅의 근대화에 실질적으로 공헌한 일본의 식민 통치를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크게 잘못되었냐고 항변하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에게 이 책이 그러한 생각이야말로 "근대 자체를 물신화시키면서 그것이 갖고 있는 폭력성에 대해 눈을 감고자 하는 ...... 식민주의와 공모하"(43쪽)는 행위와 맞닿아 있음을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바꾸어 말하면 공부 제대로 안 한 무지의 소산이라는 것이다. 특히 미학적 인식의 변모가 그대로 친일의 내적 논리로 이어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서정주론은 [주례사 비평을 넘어서]라는 책에 실린 김진석 교수의 글과 더불어 서정주의 친일 행각을 비판한 글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곧 서정주의 옹호가 음험한 이데올로기 또는 '무식'에 기인함을 까발리는)  글이다. 물론 이 책은 문학이라는 섬세한 지적 산물을 다루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는 성급한 일반화와 가설의 도식적 적용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일본어로 작품 활동을 하면서 에둘러 일제를 비판하고자 했던 한설야를 언급할 때 저자가 명명한 '우회적 글쓰기'라는 개념에서 볼 수 있듯이, 일제에의 협력과 저항의 경계를 명확하게 설정하는 것은 실제로 어려운 일이다. 책 전반에 걸쳐 저자의 평가와 비판이 신념에 찬 단호한 어조로 줄곧 표현되고 있고 또 비슷한 내용이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아마 여러 편의 논문을 한데 모은 듯하다)은 이 책의 문제의식이 그만큼 다급하고 절실하며 그만큼 뒤이은 생산적인 토론과 비판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이해하기로 하자. 대신 별 하나를 깎는다. 그러나 저자의 목소리가 거칠다고 하여 책까지 후다닥 졸속으로 만드는 것만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너무나도 명백한 오타와 뜬금없는 비문이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편집자의 불성실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편집자의 불철저가 가뜩이나 도발적이고 아슬아슬한, 그러나 소중한 저자의 문제의식을 희석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저자에게는 죄송스럽지만 출판사가 괘씸해서라도 별을 하나 더 깎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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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5-07-04 0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저두 보관함에 넣어놨는데 언제 읽게될지... 사놓고도 안읽는 책이 넘 많거든요.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사량님의 리뷰 잘 읽었습니다. 언제 읽어도 좋은 글들입니다.

비로그인 2005-07-04 0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때 이광수의 무정을 읽고 참 좋아했었는데. 친일파라는 이야기를 듣고 많이 씁쓸하게 생각했었습니다. 서정주의 신부라는 시도 아주 좋아했었는데.. -_-;
'빼도박도 못하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고 하니.. 한번 읽어보고 싶긴하네요.



로드무비 2005-07-04 0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사량님의 김사량 사랑이 이 글에서도 느껴지는군요. 잠시.^^
 
청소년을 위한 이야기 윤리학 청소년을 위한 인문 시리즈 1
페르난도 사바테르 지음, 안성찬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윤리학을 공부하긴 해야겠는데 무턱대고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이나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 사람은 이 책부터 읽으면 좋겠다. 이 책은 윤리학의 정의와 기본 개념, 역사 등을 다루지는 않는다. 심지어 윤리학이라는 용어 자체도 책 안에서 그리 자주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양심, 자유와 책임, 나와 타자, 개인과 공동체, 진정한 행복의 의미 등에 관해 편안하고 섬세하게, 무엇보다 진지함을 잃지 않으면서도 유머와 익살을 동반하며 자신의 생각을 차분히 들려줄 뿐이다. (이 책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짜여져 있다) 이상의 키워드들은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는 윤리학의 핵심 화두들이라는 것만 기억해 두면 되겠다.

이 책은 "청소년을 위한"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기는 하지만, "왜 사냐?"라는 덧없어 보이는 질문에 딱히 대답할 말이 없는 머리 굳고 웃음을 잃은 어른들에게 더 유용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에 따르면 윤리란 결국 "어떻게 하면 가장 멋진 삶을 살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윤리학은 자신이 원하는 삶, 멋진 삶, 기쁨과 행복한 삶... 등등 더 나은 삶을 살려는 이성적 시도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타자와 공동체의 문제 역시 멋진 삶을 원하는 자신의 윤리로부터 나온다. 이를 모른 체하고 마냥 불의와 폭력을 타도해야 하고 타락을 막아야 한다는 식의 '좋은 소리'만(우리가 일반적으로 '윤리적'인 태도라고 말하는)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다면 경계해야 한다. 그들이 녹음기처럼 되풀이하는 세속에 대한 질타나 협박, 으름장들이 어쩌면 다른 사람들이 삶을 즐거이 받아들이는 것을 배아파하는 데서 비롯된 고약한 언사들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짐짓 고상하고 점잖은 체 하지만 실은 위선적인 어른들, 곧 '꼰대들'이야말로 이 책의 독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것이 가장 윤리적인 태도임을 강조하기 위해 저자는 성경부터 아리스토텔레스, 아우렐리우스, 셰익스피어, 스피노자, 루소, 보르헤스, 오손 웰스의 <시민 케인>에 이르는 동서고금의 텍스트들을 수시로 넘나드는데, 이들을 죽 따라 읽는 것만으로도 흥미롭고 알차다. '읽어두면 좋은 글들'이라는 코너를 각 장의 끝에다 마련하고 관련 텍스트들을 일부 발췌하여 수록하고 있으니, 윤리학 교본으로서도 톡톡히 값어치를 한다.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저자는 칸트와 스피노자, 아렌트의 논의를 주로 수용하고 있는 듯하다)  딱히 걸리는 부분 없이 부드럽고 매끈하게 읽힌다는 점도 이 책이 갖는 커다란 장점 가운데 하나이다. 종이질도 좋고 가볍기까지 하니 어여 읽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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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5-06-09 0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나온 책이네요. 님이 리뷰쓰신 책들은 다 사고 싶어요.
이 책도 사야겠네요. Thanks to 누를게요. 하루만 일찍 봤다면... 어제 책주문했거든요. 일단 보관함 들어갑니다.

히피드림~ 2005-06-09 0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에 글을 남기면 사량님의 메일로 바로 들어간다는게 다행이네요.
알라딘마을의 마이페이퍼에 들어가보시면 아시겠지만 영화이야기 바톤잇기가 붐입니다. 제가 사량님 추천했어요. 바쁘신거 알고 서재활동 잘 하시지 않는거 잘 알지만, 꼭 써주세요.^^;

비로그인 2005-07-04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윤리학에 관심 많은데.. 읽어봐야 할 것 같네요. 철학과 관련된 책은 너무 어려운 책이 많아서 읽어도 잘 이해가 안되요. -_-; 그래서 저는 청소년이 아닌 어린이를 위한 책을 읽곤하지요 ㅋㅋ
 
사랑은 야채 같은 것 민음의 시 115
성미정 지음 / 민음사 / 2003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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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절판되었는지 쉽게 구하기 어려운 책이 되어버린 성미정의 첫 시집 [대머리와의 사랑]이 가져다준 흥분을 나는 잊지 못한다. 동화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 모성적인 이미지과 파괴적 이미지들이 현란한 말놀이와 리듬 속에서 발랄하고 깜찍하게, 그리고 서러우면서도 사랑스럽게 한데 빚어지고 어울리는 성미정 시의 풍경들을 보게 되면서부터, 나는 아이러닉하게도 시에 대한 흥미를 잃었는지도 모르겠다. 좀 과장하자면, 성미정을 읽다 보니 정작 다른 시들에서 좀처럼 재미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만큼 성미정의 시는 참신했고 기발했다. 

그러나 두 번째 시집 [사랑은 야채 같은 것]은 전작에 비해 시적 긴장도가 현저하게 떨어져 있어 조금 안타깝다. 첫 시집 [대머리와의 사랑]에 <다소 악마적인>이라는 시가 있었다면 이 시집에는 <다소 엽기적인>이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어 분위기상 두 시집 사이에 연속성이 없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토끼가 사냥꾼을 잡아 먹으면서 눈이 빨갛게 된다는 <다소 엽기적인>의 세계는 자신의 살을 떼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먹이는 <다소 악마적인>의 세계보다 더 엽기적일지언정, 더욱 가슴 저미고 애틋하지는 않다. 형식적인 측면에 주목하자면, 첫 시집에서는 거의 모든 수록작이 행갈이가 없는 산문시였던 데 반해, [사랑은 야채 같은 것]에는 행갈이와 연갈이가 이루어져 우리에게 보다 친숙한 형태로 다가오는 시들이 많다는 점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성미정의 산문시가 동어반복과 언어유희를 마침표와 행갈이 없이 쉴 새 없이 배치함으로써 당대의 어떤 시보다도 발랄하고 생동적인 운율을 이루어왔음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형태상의 변화는 그녀만이 가질 수 있던 귀한 재능 하나를 가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큰 아쉬움은 시집 전반에 걸쳐 , 특히 후반부부터 성미정 자신의 이야기가 지배적인 시적 모티프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자신의 일상과 시에 대한 단상들로 전개되는 이 부분들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첫 시집의 세계와 견주어 볼 때 지극히 무던하고 평범하다. 몇몇 부분들을 서로 비교하면서 읽어보면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놀랄 것이다. 물론 자기연민, 나아가 자기모멸을 보이는 자의식 과잉의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고 적당한 익살과 넘치지 않는 자조를 보여주고 있어 나름대로 일정한 재미를 갖추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정서는 굳이 성미정이 아닌 여타의 시인들에게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흔한 것이다. 겨우 두 번째 시집에서 조로하는 것인가? 정리하자면, 성미정의 두 번째 시집 [사랑은 야채 같은 것]은 전반적으로 흥미롭고 재기가 담긴 시집이라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겠지만, 그녀의 첫 시집을 떠올린다면 사실 '범작'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시작(詩作)의 내공 면에서는 '뒷걸음친' 양상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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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5-05-13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합니다! 꾸욱!

로드무비 2005-06-09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머리와의 사랑> 이야기하시는 분이 많군요.
구해서 읽어봐야겠어요.^^

비로그인 2005-07-04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시 좋아하는데.. ^^ 사랑을 하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하죠? 한때는 저도 시를 꽤 섰던것 같은데.. ㅋㅋ <대머리와의 사랑> 과 <사랑은 야채 같은 것> 같이 읽어보고 비교해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