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단상 동문선 현대신서 149
로베르 브레송 지음, 오일환 외 옮김 / 동문선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로베르 브레송이란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수잔 손탁의 <해석에 반대한다>를 읽으면서였다. 브레송의 영화를 다루고 있는 손탁의 글에 나는 금세 빠져들고 말았는데, 그것이 손탁의 필력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브레송의 영화세계가 내뿜는 매력에서 야기된 것인지 그 당시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뒤, 한국에 발매된 브레송의 DVD를 우연히 보게 되면서 나는 손탁의 글을 읽으며 받았던 감동의 연원에 대해 바로 결론내릴 수 있었다. 브레송의 영화에는 말로 설명될 수 없는 압도적인 영화 고유의 매력이 담겨져 있고, 손탁의 글은 브레송의 영화를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 가장 적확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이 책은 브레송이 아포리즘 형식으로 직접 기록한 영화론인 만큼, 손탁의 글보다 더 명료하게 자신만의 영화미학을 드러내고 있다. 브레송은 자신의 영화를 연극적이고 재현적인 양식에 기대고 있는 '시네마'와는 변별되는 '시네마토그래프'로 명명하는데, 시네마토그래프는 모방을 거부하는 반재현적 성격을 지니고 우연에 주목하며 실험과 재구성, 그리고 관계를 중요시하는 "글쓰기의 새로운 방식", 또는 "느끼기의 새로운 방식"이다. 시네마토그래프의 성격을 뚜렷이 보여주는 데 다음과 같은 두 문장이면 충분하다.

"창조한다는 것은 사람과 사실들을 변형하거나 발명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존재하는 사람들과 사실들 사이에, 그리고 '존재하는 모습 그대로' 새로운 관계들을 엮는 것이다." (29쪽)

"관례(상투성)에 젖어 관객을 임의로 처하게 하지 말고, 존재와 사물들에 정면으로 대면케 하라. '예측 불가능한' 인상들과 감각들에 너 자신을 내맡기듯이 말이다. 어떤 것도 예단치 마라." (108쪽)

영화란 우리가 보아 왔던 것, 그리고 보고 싶어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지 못했으나 존재하는 것, 또는 늘 보아 왔던 것 안에서 카메라의 눈으로 새로운 관계를 포착하고 형성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영화란 결국 감독의 눈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일진대, 그 감독은 우리가 이미 보아 알고 있는 선입관, 인상, 관습 등과 같은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바로 그 점 때문에 감독은 우연에 몸을 내맡기고 뜻하지 않은 지점에 카메라를 들이댐으로써 예기치 못한 이미지를 포착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실험'이다.

"낚시꾼이 자기 낚싯대 끝에 뭐가 걸릴지 모르듯이 너 역시 네가 잡게 될 것에 대해 무지하라. (어느곳에서도 '난데없이 불쑥 튀어오르는 물고기'" (135쪽)

무심코 넘겨버릴 만한 문장이 단 하나도 없는 이 얇은 책을 읽다 보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왜 영화를 보는가, 내가 영화 속에서 보아온 것은 무엇이었나, 나는 영화를 봄으로써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그럼에도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가...  꼭 영화에만 국한되지 않고 글쓰기 또는 예술 일반에 대해 진지한 성찰의 계기를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이 얇은 책의 가치는 막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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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9-01-21 0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문선의 책은 워낙 번역 상태가 엉망이라 실패한 책이 많았는데 이 책은 아닌가보네요. 읽어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