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行 야간열차 문학과지성 시인선 341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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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사랑하던 황인숙은 끝내 고양이가 되고 말았다. "사람이기를 멈추고/쉬는 시간이다"라고 일갈하더니, "기와 지붕, 슬레이트 지붕, 콘크리트 지붕, 천막으로 덮인 지붕,/굽이굽이 지붕들의 구릉과 평원을 굽어"보는 사이, "사람이기를 멈춘 내/영혼에 이빨이 돋는다"며 고양이가 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아는 이 모두를 저버"리며 "기울어진 지붕, 흔들거리는 처마,/말하자면 기우뚱함에, 그리고 지붕과 지붕 사이의 허공"에 "환장"하는, "空中空間의 활용자인 고양이"임을 긍정하기에 이른다. 고양이로 거듭난 그녀는 가볍고 활달하고 유쾌하다. 인간일 적 가졌던 약간의 음울함과 적적함도 다 떨쳐 버린 것 같아 부럽기까지 하다.

대신 인간으로서, 시인으로서 황인숙은 파삭 늙었다. 고양이를 자임하는 시편들 외의 작품들은 평범하다 못해 지루해졌고, 나이가 든 만큼이나 시의 피부도 그녀 특유의 탄성과 긴장이 사라져 버석거린다. 마흔 살을 넘겨 펴 냈던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나 [자명한 산책]만 해도 전반적인 정조야 어쨌든 시의 탄력만은 첫 시집 못지않게 팽팽히 유지하고 있었기에, 황인숙이야말로 한국 시인들의 고질병인 조로증을 극복한 예외적인 시인이라고 내심 생각했건만, 조금 안타깝다. 그녀가 주변의 소소한 일상과 풍경에 보내는 연민과 애정 어린 시선들에 울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울림은 고양이의 삶에서 풍기는 가벼움과 대비되며 청승맞게 다가온다. 늙어가는 한 시인의 내면풍경이 그렇다면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하겠으나, 고양이의 눈으로 쓴 시와 달리 인간의 눈으로 쓴 시는 시가 되지 못하고 날것의 정서로만 남은 것 같아 민망하다.

어차피 시인도, 독자도 늙어가기 마련인데, 왜 예전처럼 젊게 시를 쓰지 못하냐고 나무라는 건 부당할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자기가 좋아서 고양이가 된 시인에게 왜 인간의 시선으로 쓴 시의 정서 환기력이 예전만 못하냐고 뭐라 하는 것도 번지수를 잘못 찾은 볼멘소리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어쩌면 시인은 이런 반응을 원하고 야생고양이마냥 지붕만 바라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만큼 우리 삶은 비루하고 재미없다는 것, 그러니까 고양이처럼 심드렁하면서도 고고하게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 그러나 우리네 삶은 지질하고 옹졸하기 짝이 없어서 고양이처럼 초연하고 가벼운 유유자적한 삶을 그냥 두지 않는다. 한가하게만 보이는 고양이가 사실은 "잔인하고 무정한 이 거리에서/구사일생으로 살아가"며, "도둑고양이, 길고양이, 골목고양이"라는 낙인 속에 인간들에게 "시끄럽다, 더럽다, 무섭다"는 이유로 해코지를 당하는 건 그 때문이다. 황인숙은 이렇게 말한다. "생각해보세요, 어느 편이 진짜 그런지." 그리고 덧붙인다. "고양이들이 사라진 동네는/사람의 영혼이 텅 빈 동네입니다./이만저만 조용한 게 아니겠지요./그러면, 좋을까요?" 좋을 것 같지 않다. 그렇게 대답할 수 있게 만든 건 고양이가 된 황인숙과 이 시집의 힘이다. 그럼에도 고양이가 된 황인숙이 인간으로 영영 돌아오지 않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잔인한 부탁이겠지만, 예전처럼 인간에 대해서도, 사랑에 대해서도 젊고 활기차게 노래해 줬으면 좋겠다. 리스본에서 쓴 시들처럼 늘어지지 말고. (그러고 보니 몇 편 되지도 않는 리스본 여행시편과 관련해 시집의 제목이 정해진 이유를 생각해 보지 못했다. 정말 이기적이고 애정 없는 독자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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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8-03-15 0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말을 해야 할 것 같긴한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어요. ㅠ_ㅠ
그래서 저도 추천으로 대신합니다. 으흐

잘지내시죠? :)

비로그인 2009-01-21 0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시집을 읽지 않았는데요. 그래서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아마도 소설 '리스본 행 야간 열차'에서 일상에서 벗어난 주인공을, 말씀하신 시집의 내용으로 비교하자면 사람에게서 벗어난 고양이와 같은 자신의 모습과 연결시키고자 했던 저자의 의도가 있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