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데라토 칸타빌레 (구) 문지 스펙트럼 19
마르그리트 뒤라스 지음, 정희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도입부에 등장하는 젊은 연인들 사이의 살인사건을 제외한다면 딱히 특별할 사건이랄 것도 없고, 극적으로 긴밀하게 구성되어 있지도 않으며,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심심하기만 하고, 대화들이란 것도 횡설수설과 중언부언으로 가득해 보일지 모를 이 소설에서 당신은 무엇을 읽어낼 것인가. 일종의 유한마담인 안 데바레드와 공장노동자 쇼뱅의 입을 빌려 뒤라스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소리를 들을 것을, 시들어가는 목련꽃이 온몸으로 뿜어내는 어느 봄날의 기운을 해독할 것을 나지막한 속삭임으로 우리에게 권한다. 아이가 피아노를 치기 싫어하는 것도, 살인사건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안과 쇼뱅이 정녕 무엇을 원하는지도 애써 이해하려고 들지 말라. 다만 까페 안으로 스며드는 아련한 석양의 붉은 빛을, 노을이 별빛으로 변해가는 우수를, 바다에 이르지 못한 채 철책을 벗해야 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곡조를 알 수 없으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방향을 잃은 세레나데처럼 입가를 맴도는 소나티네를, 대서양일지 지중해일지, 아니면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태평양일지, 가깝지만 먼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눈물어린 소금기를, 그리고 천천히 찾아오는 거역 불가능한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맡아라. 불가능하다면 그들처럼 포도주가 가져다주는 달콤한 환각과 저릿함에 몸을 내맡겨도 좋을 것이다. 포도주가 당신의 오감을 섬세한 더듬이로 만들어줄 테니.

그때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안과 쇼뱅이 왜 그토록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시간에 집착하였는지를. 사랑의 순간은 섬광처럼 강렬하게 찾아오지만, 그것은 결국 섬광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기에 안타깝게도 우리 곁에 오래 머물지 않는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랑할 시간은 많지 않다. 따라서 대화는 다급해진다. 그러나 그것이 "사랑해요"라는 말을 함부로 뱉을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사랑이란 안의 것도, 쇼뱅의 것도 아닌 바다와 대기, 바람 속에서 그저 솟아오르는 것이기에, 그들은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대신, 태양과 공기의 충실한 기호 해독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 대화가 겉돌고 모호해보일지언정 그들을, 뒤라스를 탓하지 말라. 그들은 어딘가에서 소리 없이 솟구치는 사랑의 기미를 이겨내지 못해, 스스로 통제하지 못해, 그리고 표현하지 못해 더욱 아프고 절절하게 사랑해야 한단 말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대화의 내용 자체가 아니라 "계속하십시오"를 반복하며 밀물처럼 닥쳐오는 무수한 사랑의 기호들을 끊임없이 해독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므로 뒤라스를 나무라지 말고 당신이 직접 바다와도 같은 그 넓은 대화의 행간에 뛰어들어 몸을 적셔라. 그리고... 사랑하라, 모데라토(보통 빠르기로) 칸타빌레(노래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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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바람 2005-09-23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량님, 사량님!
멋지다. 멋지다!
저, 펑크님이 책을 보내주셔서 김사량의 소설을 첨으로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사량님이 무척이나 기다려졌어요. '태양과 공기의 충실한 기호 해독자가 되어야 한다...사랑하라, 보통 빠르기로 노래하듯이' 랄랄라^^

사량 2005-09-23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바람님, 리뷰 올리자마자 찾아와주셨네요. 반갑고 고마워서 미치겠는데 무력한 제 언어가 이를 감당하지 못합니다.ㅠㅠ 그동안 조금 아프고 고된 사정이 있어 심신이 많이 지쳐 있었답니다. 알라딘에도 자주 못 들어왔구요. 그런데 그 와중에 용케도 돌바람님의 김사량 리뷰는 읽을 수 있었어요. 아마 말없이 어디선가 돌바람님이 저보고 읽으라고 불렀었나봐요. 서럽도록 아름다운 글이었어요. 나도 무언가 쓰고 싶은데... 하는 욕망을 간절히 불러일으키는 글이었구요. 댓글을 달고 싶었으나 아무래도 리뷰로 먼저 사람들께 인사를 해야한다는 생각에 간신히 참았어요. 게다가 펑크님이 책을 보내주셨다니 마음 한구석이 싸했답니다. 펑크님은 제 닉네임이 김사량에서 따온 것임을 가장 먼저 알아준 분이신 동시에 제 방명록에 처음 족적을 남겨준 분이시기도 해서 제가 늘 고마워하고 있거든요. 그렇게 인연을 만들어가는 알라딘 친구들이 부럽기도 하고, 또 이런 이야기를 자연스레 꺼낼 수 있어서 참 기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리뷰, 아무거나 좋으니 하나라도 빨리 써보고 싶었는데, 쓰자마자 이렇게 댓글 남겨주시니 어찌나 행복한지 모르겠어요. ^^ 고마워요.

돌바람 2005-09-23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제가 더 행복한 걸요. 글자를 읽을 거냐, 행간을 읽을 거냐, 저는 늘 이런 것에 배가 고파서요. 사량님의 글들은 행간에서 건져올린 치열함이 첫만남 이후 늘 제게 보여서, 펑크님처럼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반갑고 따뜻하답니다. 오래 뵐 수 있으면 좋겠어요 ^^

비로그인 2005-09-23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리 없이 솟구치는 사랑의 기미를 이겨내지 못해, 스스로 통제하지 못해, 그리고 표현하지 못해 더욱 아프고 절절하게 사랑해야 한단 말이다. -> 이 부분 너무 와닿아요
사량님 글이 이렇게 잘 읽어지는거 오랫만인 듯하네요. 근데.. 바뿌셨어요?
너무 오랫만에 보는 것 같아요. ^-^ 안부 묻고싶었는데........ 참. 우리 말놓고 지내요
요즘 저 계속 캠폐인중이예요. 형이라고 부르면 안될까요? 오랫만에 보니 더욱더.
반갑습니다. 사량형!! ^-^ (허락도 안해줬는데. 하고 보는 심보. ㅋㅋ)

사량 2005-09-24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바람 / "몸둘 바를 모르겠다"라는 말은 아마도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말인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저도 돌바람 님 오래오래 뵙고 싶습니다.

가시장미 / "캠폐인" 중이라 함은 캠 가지고 폐인 놀이하는 거 말하는 겁니까? ^^ 가시장미님, 믿지 않으시겠지만 그동안 많이 보고 싶었더랬습니다. ㅠㅠ 댓글도 달고 싶고 좋은 시도 보내드리고 싶었는데, 이래저래 사정이 여의치 않았어요. 지금도 썩 나아진 것만은 아니지만, 언제 자세히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지요. 나중에 번개 또 하게 되면 저도 불러줘요. ^^ 그리고... 말을 놓고 싶으시다면 앗싸리 세게 나오셔야죠. 사량형이 뭡니까, 치사하게. 사량아, 하고 편하게 부르세요. 그러면 저도 가시장미야, 하고 기꺼이 말을 놓겠습니다. 장미야, 꼭 그래야 해. 알았지? ^^

비로그인 2005-09-25 0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흐흐흐. 사량아. 너가 정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지? 근데말야.
언젠가는 무지막지하게 후회하게 될꼬야!!! 우헤헤헤헤헤 =_=
안그래도 지금 술취해서 어지러운데. 이런 글을 보니. 정신이 더 마구 없음.
근데 너무너무 좋네. ^-^* 10배는 더 가까워진 것 같아서........
근데. 인심쓰는김에 더 쓰지. 내가 누나하면 안될까?! 으하하하하하 -_ㅡ*)~
알써알써. 장난이야. 누나하면 맛난거 사줘야 하니깐. 그냥 친구하자. 근데말야.
한번 말 놓으면 영원히 말 놓는거야. 치사하게 나중에 나이가 몇살 많니..하면 안돼!
으흐흐흐흐흐. 이리저리 사정이 많았다니. 참 궁금하기도하네. 기회가 된다면.
무슨 사정이 그렇게 많은지. 또, 그것들로 인해. 마음속에 남은 앙금은 없는지..
썩 나아진 것이 아니라니... 지금도 많이 힘들고 괴로운지. 괜찮은 건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데. 참 거시기하네. 기회라는 것을 만들면 그만이지만.
참. 만드는 것이 쉬운것도 아닌지라.. ^-^; 곧 보세. 여유 생기면. 연락하소.

로드무비 2005-09-28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너무 좋아요.^^

사량 2005-09-29 0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감히 로드무비님의 리뷰들에 비기겠습니까...ㅠㅠ

히피드림~ 2005-10-07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건 또 언제 쓰셨답니까? 다들 모여있는데 혼자 지각한 기분이네요.^^;; 오늘 또 이렇게 사량님 서재에서 배우고 가네요.추천 꾹~

사량 2005-10-08 0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앙, punk님... 반가워요. ㅠㅠ

2005-10-20 0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1-10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balmas 2006-02-08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허,
읽고싶어라~~
딱 읽고 싶게 쓴 멋진 리뷰네요.
땡스투요~~

사량 2006-02-08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발마스님께서 거미줄로 가득한 이곳에 친히 왕림해주실 줄이야! 감격감격ㅜㅜ 그런데 아마 저런 투의 문장은 다시는 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제겐 나름대로 사연이 있는 책이라서요.. 아무튼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