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소설 혁명의 요람인가 예술의 무덤인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73
유기환 지음 / 책세상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른바 ‘노동소설’이라는 개념과 실재는 우리에게 익숙한 듯 하면서도 낯설다. ‘노동’이라는 단어 속에서 우리는 멀리는 1920-30년대의 신경향파 문학 및 카프(KAPF)의 창작물들을, 가깝게는 1980년대의 정화진·방현석·안재성 등의 작품들을 떠올리면서, 이들로부터 노동자들과 그들의 의식을 작품의 전면에 배치하고자 했던 일련의 문학적 흐름들을 어렵지 않게 연상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같은 특성들을 하나의 양식이나 장르로서 개념화하는 과정에서 정작 노동소설이라는 용어는 리얼리즘, 혹은 사회주의 리얼리즘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주 사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하기 위함이든, 노동소설의 한계를 지적하려는 시도이든, 지금/여기에서 노동소설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노동소설이라는 용어에 드리워진 양가적 성격, 즉 노동소설의 익숙하면서도 낯선 무언가를 고려하는 것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종류의 글에 가장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은 개념의 외연과 내포를 확정하고 이를 일관성 있게 사용하는 것이라 할 때, 노동소설 개념의 양가성과 애매성은 논증의 방향성 자체를 처음부터 좌초시킬 수 있는 암초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노동소설의 개념 설정은 최소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차원에서 정리되고 해명되어야 한다. 첫째, 노동소설의 사전적 정의는 무엇인가. 둘째, 노동소설은 다른 소설들과 어떻게 변별되는가. 셋째, 어떻게 노동소설의 현재적 의의를 발견할 수 있는가.

유기환의 [노동소설, 혁명의 요람인가 예술의 무덤인가] 역시 노동소설의 양가성을 언급하는 것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그러나 저자가 주목하는 노동소설의 양면적 성격이란 노동소설 개념 자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소설’이라 불려 왔던 일반적인 작품들에 각각 부여되어 온 “혁명의 요람”과 “예술의 무덤”이라는 상반된 평가로부터 비롯된다. 이 같은 전제 아래 저자의 기획은 “마르크스의 유산을 어떻게 상속할 것인가의 문제”(12쪽)와 “하나의 예술 장르로서의 노동소설의 미학적 특징”(17쪽)을 조화롭게 통일시키는 것이다. 이때 저자는 노동소설이라는 개념 자체를 문제시하고 재검토하지 않으며, 노동소설의 외연과 내포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노동소설을 정의하고 있는 부분이 이백 페이지가 넘는 글 속에서 고작 한 페이지에 그칠 리가 없다. 말하자면 이 책의 가장 치명적인 결점은 바로 이와 같은 무책임한 개념 정의에 있다. 엉성하게 설정된 개념으로 말미암아 논의 전체가 전반적으로 취약하고 부실하게 흐르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노동소설을 “(동일한 집단 의식과 동일한 역사적 전망을 가진) 사회계급으로서의 노동자들이 보여주는 동태적 이야기”(18쪽)으로서 정의한다. 이러한 정의는 “노동자에 의해 씌어진 소설”이나 “노동 문제를 다루는 소설”이라는 기준을 적용할 경우 그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는 사정에서 연유한다. 그러나 저자의 정의 역시 불분명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사회계급이 반드시 프롤레타리아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며, 동일한 집단 의식과 역사적 전망을 가졌다고 여겨지는 계급 내부에서도 다양한 구성원들의 이해 관계 및 권력 관계가 존재한다. 노동자들의 정체성은 성과 인종의 문제와도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보다 역동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노동해방소설’ 대신 노동소설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어야 하는 까닭은 1980년대 한국의 컨텍스트에 크게 힘입고 있는 노동해방소설이라는 표현이 아직까지는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하지만 개념의 적절성은 보편적인 권위로부터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 저자 자신의 치밀한 논증과 근거 제시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진정 노동소설이라는 말의 보편성을 내세우고자 했다면 저자는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관련 문헌이라도 인용해야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노동소설을 다루는 ‘보편적인’ 소설 이론가들의 각주는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노동소설에 대한 개념 정의가 충분하지 못하다 보니 텍스트를 선정하는 데서도 자의적일 수밖에 없다. 졸라의 [제르미날], 고리키의 [어머니], 런던의 [강철군화], 한설야의 [황혼]을 분석 대상으로 선택한 저자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서로 다른 자본주의적 경험을 가진 나라의 소설일 것. 둘째, 각기 그 나라 노동운동 상승기의 소설일 것. 셋째, 각기 그 나라, 그 시대의 대표작일 것. 말하자면 공간성, 시간성, 예술성이 선택 기준”(20쪽)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자본주의적 경험”과 “노동운동 상승기”를 설명하는 부분은 본문을 통틀어 “프랑스의 선진자본주의, 러시아의 후진자본주의, 미국의 직접적 봉건 체험 없는 자본주의, 한국의 강요된 이식자본주의”(같은 곳)라고 약술하는 대목이 전부이다. ‘선진’. ‘후진’, ‘이식’ 등의 민감한 단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저자의 비정치성과 몰역사성이 놀랍기도 하거니와, 문학과 경제 체제의 복잡다단한 관련 양상을 각주 하나 없이 한마디로 요약해버리는 학문적 불성실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더구나 “그 나라, 그 시대의 대표작”(대체 ‘대표작이란 또 무엇인가?)이 곧바로 예술성을 담보하게 되는 것이라면, 노동소설의 미학적 특질을 밝히고자 하는 저자의 논의는 시작과 동시에 이미 완결되는 것이 아닌가? 저자는 문학성을 인정받은 작품들에 안전하게 무임승차하려 했던 것에 불과한 것인가?

나아가 우리는 저자가 은밀히 견지하고 있는 발전론적, 진화론적, 신랄하게 말하자면 서구중심적인 소설관에 의혹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상대적으로 장구한 소설사의 산물인 [제르미날], [어머니]가 상대적으로 일천한 소설사의 산물인 [강철군화], [황혼]보다 예술적으로 나아 보였다”(같은 곳)는 언급은 소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동시에, 이 글의 전반적인 논조를 예감케 한다. 노동소설 개념의 두 축을 이루는 ‘노동’과 ‘소설’에서 저자가 ‘소설’의 형식 자체에는 거의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소설의 정의를 충실하게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을 탐색하는 루카치 식의 서구중심적 소설관을 근간으로 삼고 있는데, 이는 별다른 의의 없이 서구 이론의 ‘보편성’을 모든 ‘결핍된’ 문학 작품들이 획득해야 할 선험적인 가치이자 모델로서 받아들이게끔 하는 동인이 된다(저자는 이따금 ‘모범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즉 ‘서구중심적’인 것 자체가 문제인 것이 아니라, ‘서구중심적’인 ‘보편성’이 상이한 시공간에서 소설이 생산하는 다채로운 차이와 변주를 억압하고 소설의 가치를 판단하는 유일무이한 기준으로 화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 같은 관점이 야기한 대표적인 결과가 본문을 시종 관통하고 있는 이항대립적 이분법 논리의 남용이다. 저자가 공들여 제시하고 있는 육체적 초상, 생활 양식, 사회언어학, 시공간, 성장구조 등의 분석틀은 기본적으로 선명한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다. 저자의 표현대로 ‘가독성’을 높이는 효과적인 수단인 이분법은, 주제와 메시지 전달의 선명성을 텍스트 속의 다양한 가치와 목소리가 형성해내는 복잡한 의미 작용들의 공존과 맞바꾸어 버린다. 이러한 이분법이 자아와 세계의 선명한 대립 하에 타자를 대상화하고 정복하는 서구의 주체철학과 근대 소설 이론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이분법에의 집착은 결국 내용/형식, 혁명/예술, 또한 아이러니컬하게도 노동/소설과 같은 해묵은 대립을 반복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진부한 도식은 진부한 통념만을 낳는다. ‘노동’과 ‘소설’을 변증법적으로 통합시키고자 했던 저자의 야심찬 시도가 “진부하지만 옳은 명제 중의 하나는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것이다”(184쪽), “그래도 역시 팸플릿은 팸플릿이고, 문학은 문학이다. 예술의 과도한 도식화는 흔히 예술의 죽음을 부른다”(189쪽) 식의 어이없는 상투형으로 수렴되고 마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저자는 현실과 예술은 엄연히 별개의 것이며 어느 한쪽이 특화되어야 한다는 자승자박의 결론으로부터 결코 빠져나올 수 없다. 설령 “노동소설이 ‘미학적 질’을 더 많이 구현하면 할수록 그 ‘사회정치적 테제’는 더 큰 설득력을 얻는다는 것이다”(192쪽)라고 결론지으며 저자가 이분법의 폐해를 인식하고 이를 미학적 입장으로 극복하려 할지라도, 복합적인 삶의 단면들을 섬세하게 포착할 수 없는, 보편성을 가장한 획일적이고 전통적인 이분법의 잣대로서 미학적 가치가 평가되는 이상, 무엇보다 강력한 전복성으로 뒷받침되어야 할 ‘사회정치적 테제’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소설, 혁명의 요람인가 예술의 무덤인가]는 개념의 부적절한 정의와 그에 따른 연구 방법론에 대한 고민의 결여가 정치성·역사성의 부재와 맞물리며 발생하는 참담한 결과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노동소설이라는 개념은 본문 안에서 테제 소설, 혁명주의 소설, 리얼리즘 소설, 사회주의 소설,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과 크게 구별되지 않은 채 사용되며, 각각의 분석틀로서 사용된 이분법의 대립항만 바꾸어주면 노동소설에서 ‘노동’이란 말을 ‘페미니즘’ 내지 ‘탈식민주의’라는 표현으로 대체하고 관련 작품들에 적용해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이는 보편성의 확보라는 저자의 성과를 예증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자의식 부족과 몰역사적, 탈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다. 노동소설만이 갖는 특성과 장점은 미학의 발견이라는 미명 하에 행해지는 과도하면서도 단순한 구조 분석 속에서 거세되고 추상화되고, 따라서 결론 부분에서는 노동소설의 현재적 의의가 아닌 ‘불변의’ 문학과 예술에 관한 새로울 것 없는, 그래서 위험한 일반론만이 되풀이된다. 이들 모두 글의 도입부에서 해결되었어야 하는 노동소설 개념의 양가성의 문제, 즉 익숙하면서도 낯선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외연과 내포의 불일치 문제가 개념 규정의 미비로 말미암아 이론적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오히려 확대재생산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아울러 이같은 본질적인 문제를 제쳐둔 채 각 장의 서두마다 전후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필요한 부분만 고르는 식으로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을 인용하고, 정작 실질적인 논의 과정에서 거의 반영되지 않은 바르트의 영향을 강조하며(단순화시키자면, 바르트에게 미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은 분리되지 않는다. 저자의 글은 이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게다가 바르트의 글의 직접 인용은 단 한 차례도 없다), 모스와 바타이유의 ‘포틀래취’ 논의를 성급하게 도입하는(절망으로 가득한 노동자들의 절박한 집단 행위가 어째서 잉여의 무제한적 소비란 말인가?)등의 시도들은, 혹독하게 말하자면, 모두 사족에 지나지 않는 지적 기만이다. 고작 “(혁명)문학은 예술이며, 예술인 (혁명)문학만이 시대를 뛰어넘는 감동을 보장한다”(194쪽)라는 결론을 얻기 위해 굳이 이들과 같은 쟁쟁한 이론가들이 동원되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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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량 2005-07-30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 리뷰를 쓸 여력은 안 되는데 서재 업데이트는 하고 싶어서 오래 전에 써뒀던 글을 그냥 올렸습니다. -_- (퍼퍼퍽!)

비로그인 2005-07-30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쩜 이리도 어렵습니까? ㅠ.ㅠ 배경지식이 없으면 절대 이해를 할 수 없는 리뷰네요
리뷰를 쓸 여력이 안되실정도로.. 흠.... (이하생략) ㅋㅋ

사량 2005-07-30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장미님의 풍부한 심리학 지식이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그것도 어렵긴 마찬가지예요. T_T 그런데 아직 여행 안 가셨네요? ^^ 잘 다녀오시고 에너지 만빵 충전하셔서 저희들에게도 듬뿍 나누어주세요~

2005-07-31 0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량 2005-07-31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 님 / 흑흑, 고맙습니다. T_T 정말루...

히피드림~ 2005-08-02 0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쓰신 분이 사량님의 신랄한 비평을 읽으면 이불 뒤집어 쓰고 울겠는데요. ^^
학문을 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깨닫게 만들어 주십니다.
잘 읽었어요.

사량 2005-08-02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unk / 책세상 우리시대 문고는 글의 완성도를 떠나 참신하고 도발적인 문제 제기가 볼 만한 시리즈인데, 이 책은 그런게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씹어야죠. ^^ 그런데 지난 4월 이후 우리시대 문고가 나오지 않고 있네요. 무슨 일일까요?

히피드림~ 2005-08-02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세상문고 시리즈를 많이 읽으시나봐요. 전 이 시리즈의 제 1호였던 탁석산의 '한국의 정체성'하구 '주체성' 밖엔 읽은게 없네요. 책 값은 싸서 좋았어요.^^ 이 시리즈 중 괜찮은 거 있으면 추천해 주세요. 부탁드려요.^^

사량 2005-08-03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앗, 사실 저도 별로 읽은 건 없어요. -_-;;; '정체성'과 '주체성'도 못 읽었습니다.-_- 워낙 다양한 주제들을 포괄하는 시리즈니 그저 입맛에 맞게 골라 읽으시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책세상 우리시대 문고의 경우 시의성을 띤 문제 제기들이 많은 편이어서 출간 당시에 읽지 않으면 조금 김이 빠지는 책들이 꽤 되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공임순의 [우리 역사소설은 이론과 논쟁이 필요하다] 같은 책은 매우 흥미롭지만, 보다 폭넓고 구체적인 논의를 원한다면 같은 저자의 최근작 [식민지의 적자들]을 보시는 게 낫지요. 또 고미숙의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 역시 무겁기 짝이 없는 제목에 비하면 무척 재미있는 내용을 담고 있으나, 지금은 비슷한 테마를 더 깊게 다룬 책들이 많이 소개되어 있어, 2001년이라는 출간시기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 책이 식상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저자들 가운데 소장 학자들이 많아서 그런가 봅니다. 제가 인상 깊게 읽은 책은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간명하게 요악하고 있는 김선욱의 [정치와 진리], 낭만주의의 본질과 정치적 성격을 효과적으로 정리한 김진수의 [우리는 왜 지금 낭만주의를 이야기하는가]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권만 꼽으라고 한다면 기발한 문제의식으로 주류 경제학을 매섭게 비판하고 있는 홍기빈의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를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홍기빈이라는 사람은 <한겨레>에도 정기적으로 칼럼을 쓰고 있는 소장 경제학자인데, 알라딘에서 이 이름으로 검색해 보면 예사롭지 않은 책들이 눈에 띕니다.

히피드림~ 2005-08-05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알라딘에서 나름으로 다 검색해 봤어요.
사량님의 취향(?)도 알수 있었고 추천해 주신 책들에 대해서도 흥미가 솟아나네요.^^ 특히 홍기빈 책은 꼭 읽어보고 싶네요.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