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보러 가는 길
순종 세인트버나드 한 마리
주인을 기다리며 슈퍼마켓 입구에 앉아 있다
꿈쩍도 않고 오랫동안
누구와도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알프스는 오래전에 잊었다는 듯이
마늘 베이글 하나 들고
수북한 털 속 견고한 몸 부피를 가늠하며
나도 그 앞에 한참을 서 있다
한 줄기 미풍이 전해주는 마늘 향
씰룩이는 젖은 코가 그의 윤색한 건강을 말해준다
씰룩, 아내가 종이 위에 적어준 장거리들처럼
인생의 세목들이 평화롭고 단순했으면 좋겠다
씰룩, 장 보기 직전의 다짐
ㅡ 가장 질 좋은 고기를 고르리라 ㅡ
은 비록 찰나지만 느껍기까지 하다
마침내 서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는 세인트버나드
그의 입가에 고이는 무심한 침이 투명하다
너 멋지다, 쿠울하다
볕 좋은 이른 봄인데
그에게 구조당하고 싶어 폭설 내리는
내 마음의 알프스
장 보기는 오래전에 잊었다는 듯이
-30쪽
삼십대
나 다 자랐다, 삼십대, 청춘은 껌처럼 씹고 버렸다. 가끔
눈물이 흘렀으나 그것을 기적이라 믿지 않았다. 다만 깜
짝 놀라 친구들에게 전화질이나 해댈뿐, 뭐 하고 사니, 산
책은 나의 종교, 하품은 나의 기도문, 귀의할 곳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 공원에 나가 사진도 찍고 김밥도 먹
었다, 평화로웠으나, 삼십대, 평화가 그리 믿을 만한 것이
겠나, 비행운에 할퀴운 하늘이 순식간에 아무는 것을 잔
디밭에 누워 바라보았다, 내 속 어딘가에 고여있는 하얀
피, 꿈속에, 니가 나타났다, 다음 날 꿈에도, 같은 자리에
니가 서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너랑 닮은 새였다(제발
날아가지 마), 삼십대, 다 자랐는데 왜 사나, 사랑은 여
전히 오는가, 여전히 아픈가, 여전히 신열에 몸 들뜨나, 산
책에서 돌아오면 이 텅 빈 방, 누군가 잠시 들러 침만 뱉
고 떠나도, 한 계절 따뜻하리, 음악을 고르고, 차를 끓이고,
책장을 넘기고, 화분에 물을 주고, 이것을 아늑한 휴일이
라 부른다면, 뭐, 그렇다 치자, 창밖, 가을비 내린다, 삼십
대, 나 흐르는 빗물 오래오래 바라보며, 사는 둥, 마는 둥,
살아간다-1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