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6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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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환멸로 이끄는 것들







태양

오른쪽

레몬 향기

상념 없는 산책

죽은 개 옆에 산 개

노루귀 꽃이 빠진 식물도감

종교 서적의 마지막 문장

느린 화면 속의 죽음

예술가의 박식함

불계(不計)패

변덕쟁이들

회고전들

인용과 각주

어제의 통화 내용

부르주아 대가족

불어의 R 발음

모교의 정문

옛 애인들(가나다 순)

컨설턴트의 고객 개념

칸트의 물(物) 자체

물 자체라는 말 자체

라벤더 향기

아래쪽

토성
-24쪽

장 보러 가는 길



순종 세인트버나드 한 마리

주인을 기다리며 슈퍼마켓 입구에 앉아 있다

꿈쩍도 않고 오랫동안

누구와도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알프스는 오래전에 잊었다는 듯이



마늘 베이글 하나 들고

수북한 털 속 견고한 몸 부피를 가늠하며

나도 그 앞에 한참을 서 있다

한 줄기 미풍이 전해주는 마늘 향

씰룩이는 젖은 코가 그의 윤색한 건강을 말해준다



씰룩, 아내가 종이 위에 적어준 장거리들처럼

인생의 세목들이 평화롭고 단순했으면 좋겠다

씰룩, 장 보기 직전의 다짐

ㅡ 가장 질 좋은 고기를 고르리라 ㅡ

은 비록 찰나지만 느껍기까지 하다



마침내 서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는 세인트버나드

그의 입가에 고이는 무심한 침이 투명하다

너 멋지다, 쿠울하다

볕 좋은 이른 봄인데

그에게 구조당하고 싶어 폭설 내리는

내 마음의 알프스

장 보기는 오래전에 잊었다는 듯이


-30쪽

삼십대

나 다 자랐다, 삼십대, 청춘은 껌처럼 씹고 버렸다. 가끔
눈물이 흘렀으나 그것을 기적이라 믿지 않았다. 다만 깜
짝 놀라 친구들에게 전화질이나 해댈뿐, 뭐 하고 사니, 산
책은 나의 종교, 하품은 나의 기도문, 귀의할 곳이 있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지, 공원에 나가 사진도 찍고 김밥도 먹
었다, 평화로웠으나, 삼십대, 평화가 그리 믿을 만한 것이
겠나, 비행운에 할퀴운 하늘이 순식간에 아무는 것을 잔
디밭에 누워 바라보았다, 내 속 어딘가에 고여있는 하얀
피, 꿈속에, 니가 나타났다, 다음 날 꿈에도, 같은 자리에
니가 서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너랑 닮은 새였다(제발
날아가지 마), 삼십대, 다 자랐는데 왜 사나, 사랑은 여
전히 오는가, 여전히 아픈가, 여전히 신열에 몸 들뜨나, 산
책에서 돌아오면 이 텅 빈 방, 누군가 잠시 들러 침만 뱉
고 떠나도, 한 계절 따뜻하리, 음악을 고르고, 차를 끓이고,
책장을 넘기고, 화분에 물을 주고, 이것을 아늑한 휴일이
라 부른다면, 뭐, 그렇다 치자, 창밖, 가을비 내린다, 삼십
대, 나 흐르는 빗물 오래오래 바라보며, 사는 둥, 마는 둥,
살아간다-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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