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언 달러 베이비 [dts]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힐러리 스웽크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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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함께 최근에 본 영화다. 우리집에는 DVD 플레이어가 없고, 오래된 VTR밖에 없기 때문에 비디오 테이프로 빌려보았다.  아카데미상을 받았다는 소문을 듣고 본 영화다. 평론가들의 눈은 어지간하면 빗나가는 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재미있게, 감동적으로 보았다. 결론부가 나는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지만, 별 네개 반 정도는 줄 만하다. 결론을 좀 더 다르게 마무리했다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오래 했다. <쇼생크 탈출>의 결론부가 우리에게 주는 그런 여운이 없어서 아쉬웠다. 왜 꼭 그렇게 여주인공을 죽일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된다.

 

우선 이야기가 실감난다. 오래된 체육관, 은퇴한 권투선수, 혼자사는 트레이너, 30살이 넘어서 권투를 배우겠다고 찾아온 웨이트리스, 그리고 고만고만한 주변인들의 이야기가 인간적인 냄새를 물씬 풍긴다. 소재가 칙칙해서 시시한 영화이거나, 현실감없는 성공스토리일 수도 있는 이야기로 만들 수 있는데도 작가는 이야기를 재미있고 그럴듯하게 끌어간다. 이야기에 몰입할 수 밖에 없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서술력이 있다. 이야기를 영화로 만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연출력과 연기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여러번 했다. 그리고 모건 프리먼의 연기도 영화를 잘 받쳐주는 중요한 기둥의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모건 프리먼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 연기를 했다면 그런 실감이 났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힐러리 스웽크의 연기는 참 근래에 보기 드문 혼이 들어간 연기였다. 밤에 혼자서 한번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참 눈물나올 것 같더라. 연기 잘 하더라. 헐리우드 여배우같지 않은 느낌.

 

결론이 그렇게 날지 상상도 못했기에 좀 충격이었다. 이야기의 흐름이 팍 꺾이는 느낌.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디브이디 소개에서- 실화에서도 여주인공이 그렇게 되어서 그런 것인지? 모를 일이다. 후반부 20여분은 죽음에 대한 철학적인 문제-안락사 같은-를 다룬 영화 같아서 적응이 안되었다. 따로 그 주제로만 다룬 영화였다면 한층 받아들이기가 쉬웠을 텐데 말이다. 여하튼 1년 6개월 만에 타이틀 전을 갖게 될 정도로 혼신을 다했던 복서-영화에서는 fighter라고 나온다. 이스트우드가 하는 말 중에 yes. this is my fighter라고 하는 대사가 있더라. 힐러리 스웽크가 데뷔전에서 두드려맞던 중에 개입하면서 -인 여주인공의 삶은 비극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영웅적이라는 표현이 맞을까? 자기가 원하던 삶은 여한없이 살다가 죽었으니 행복한 죽음이었다고 해야할까. 미칠 듯이 좋아할 만한 일을 찾았고, 거기서 최고가 되었기에 그는 행복했던 것. 인간의 삶이란 과연 무엇이라고 해야할지. 삶에 대한 고민을 던져주는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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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 역사인물 다시 읽기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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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예전에 허준의 <동의보감>과 광해군이라는 코드를 연결시키기가 참 곤란했다. 허준의 <동의보감>은 선조나 인조가 아니라 광해군 시대에 나온 책이다. 왜 우리 민족이 자랑할 만한-팔만대장경이나 목민심서에 버금갈 만하다고 하는-명저가 광해군이라는 '폭군'의 시대에 나왔을까 하는 의문을 풀 수가 없었다. 광해군의 시대는 당연히 모든 것이 어렵고 피폐한 시대라야 마땅한 것인데, 왜 그랬을까? 소박한 의문이었다. 그만큼 내 머리 속에 광해군의 시대는 역사적 공백기, 공포정치의 시기로 비쳐졌다. 학교교육과 텔레비전 사극의 영향이리라. 대부분의 성인들은 연산군과 광해군을 폭군이라는 이름으로 묶어서 생각하고 있다. 요즘에 들어서 광해군에 대한 학계의 새로운 평가가 나오면서 인식의 전환이 있었지만, 아직도 대다수는 광해군을 폭군으로만 기억하고 있다.

한명기가 쓴 이 책은 광해군 이혼(李琿)에 대한 평전이다. 어린시절과 성장기, 영광과 시련, 몰락의 삶을 골고루 그려내고 있다. 광해군은 몰락한 임금이기에 祖나 宗같은 칭호를 얻지 못하고, 왕자 시기의 君칭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의 치세를 다룬 실록은 <광해군일기>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다.

비운의 정치가 광해군은 1575년에 태어나서 1641년에 죽었다. 67년의 삶을 살았던 셈이다. 그가 태어난지 18년만에 임진왜란이 있었고, 죽기 5년전인 1636년에 병자호란이 있었다. 조선조 최대의 전란을 평생의 삶 속에 두루 겪어낸 셈이다. 한번은 주인으로, 한번은 구경꾼으로. 그는 임진란 당시에 왕세자로서 임시정부-이른바 분조(分朝)-를 이끌고 전쟁터를 누볐던 이력이 있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에 그는 폐위된 왕으로서 유배지에 있었다. 결국 그는 삶의 종장을 마지막 유배지인 제주에서 맞았다. 쓸쓸한 죽음이었다고 한다.

그가 유배지에서 읆었다는 시는 이러하다.

바람불어 빗발 날릴 제 성 앞을 지나니
장독 기운 백척 누각에 자욱하게 이는구나.
창해의 성난파도 저녁에 들이치고
푸른 산의 슬픈 빛은 가을 기운 띄고 있네
가고픈 마음에 봄 풀을 실컷 보았고
나그네 꿈은 제주에서 자주 깨었네
서울의 친지는 생사 소식조차 끊어지고
안개낀 강위의 외로운 배에 누웠네

쓸쓸한 시다. 그의 아들(왕세자)은 유배지에서 도망치다가 죽고, 며느리(세자빈)는 목을 매 죽는다. 부인도 일찍 죽는다. 말년에는 유배지의 여종조차 구박을 했다고 한다. 말년이 참으로 비참했다.

광해군은 그의 아비인 선조와 다음 임금인 인조를 비교해가면서 보아야 더 선명하게 보인다. 그의 내치와 외교노선은 선조와 인조의 그것과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임진왜란이라는 대전란을 겪으면서, 동시에 대제국 명의 몰락과 청의 등장을 지켜보던 격변기에 그가 구사한 자주적 외교노선은 오늘날에도 참고할 바가 많다. 결국 자주적 외교노선 때문에 그의 치세는 막을 내렸지만, 난세에 그가 취한 노선은 조선시대를 통틀어서 거의 유일한 자주노선이라는 점이 기억할 만하다.

어떤 이는 노무현을 광해군에 비기기도 한다. 미,중,일의 대립과 알력 속에서 우리 민족의 활로를 찾아가려는 점은 많이 닮았다. 그렇게 보면 대북파-정인홍 같은 의병장 출신의 청치가들이 주축이 된-는 오늘날의 민주화세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럴 수도 있겠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몸으로 싸운 이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니 말이다. 민주주의와 평화, 인권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투쟁한 그 세력이 실패하지 않는 것이 꼭 필요하리라. 역사에서 배우라. 특히 전환기에서. 정도전, 광해군, 김옥균, 여운형. 그들을 실패하게 만든 외세와 보수파들의 힘과 정체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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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01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싶게 하는 리뷰입니다. 고맙습니다. ^^
 
칠칠단의 비밀 - 방정환의 탐정소설 사계절 아동문고 34
방정환 지음, 김병하 그림 / 사계절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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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정환이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더니 과연 헛말이 아니었다. 방정환의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고무신에 오줌을 받아가면서 들었다는 일화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책을 읽고나서 그말이 사실이겠구나 싶었다.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읽을 때 느낀 감정과 비슷했다. 마치 사람을 앞에 앉혀 놓고 들려주듯이 그렇게 조근조근하게 글을 쓴다.

이 책 속에는 <동생을 찾으러>와 <칠칠단의 비밀>이라는 두 개의 이야기가 함께 들어있다. 모두가 탐정소설이라는 갈래다. <동생을 찾으러>는 중편소설이고 1925년에 <<어린이>>에 발표가 되었다. <칠칠단의 비밀>은 장편이고, 1926년부터 27년까지 <<어린이>>에 연재되었다고 한다. 당대의 어린이들이 얼마나 재미있게 이 소설들을 읽고, 또 기다리고 했을지 짐작이 간다.

<동생을 찾으러>에서는 주인공인 창호가 납치된 여동생 순희를 중국인들의 손에서 구해내기까지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리고 있다. <칠칠단의 비밀>에서는 일본인 곡마단에서 자란 상호가 여동생 순자를 중국까지 가서 되찾아 내고, 어린시절에 헤어진 아버지도 다시 만나게 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이 모험의 과정이 정말 쉴 틈 없이 긴박하게 진행이 된다. 손에 땀을 쥐고 책을 넘길만큼 긴장의 연속이다.

상호나 창호, 소년회원들, 조선인 어른들은 모두들 얼마나 씩씩하고 의리있는 사람으로 나오는지. 중국인들은 모두 음흉하고, 일본인 순사는 조선인의 불행에는 관심이 별로 없는 관료들로 나온다. 약간의 상투성도 느껴지고, 우연적인 이야기의 흐름이 마음에 거슬리는 곳이 많지만, 한편의 이야기로서 말의 솜씨는 현대의 여느 소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방정환이 33세에 죽었다는 것이 우리 민족의 불행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가 뿌린 이야기의 씨앗, 어린이 사랑의 혼은 살아남아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양분이 되었으니 감사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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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코드
브루스 커밍스 지음, 남성욱 옮김 / 따뜻한손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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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북-미간의 갈등은 이른바 8월 위기설을 불러오고 있다. 6자회담이라는 틀이 회복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이 이 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넘길 경우 북한과 미국은 전쟁직전 단계로 간다는 것이다. 이미 북한은 이 문제의 안보리 회부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고 큰소리친 바가 있다. 한반도에 사는 백성의 한사람으로서 우리는 말못할 두려움과 혼란을 느낀다. 우리가 전쟁이라는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이곳이 우리의 삶의 터전인 까닭이다.

 커밍스 교수는 이 책이 '미국의 대북정책에 대한 공개적인 토론'에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밝히고 있다. 2004년에 미국에서 간행된 책이지만, 이 속에서 다루고 있는 상황은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서 긴급토론용으로 쓸모가 있겠다. 책 전체는 6장으로 짜여있다. 김일성의 만주게릴라 투쟁, 한국전쟁과 미국의 북한 공습, 김정일이라는 포스트모던한 독재자, 북한핵문제의 역사적 기원과 쟁점들, 북한의 사회발전과 인민들의 생활, 김일성 사후 북한이 가고 있는 길이 각장의 소재들이다. 커밍스는 과연 한국문제에 대한 세계적인 석학답게 넓고 깊은 안목으로 이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북한 문제를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시각을 기본적으로 견지하고 있는 점이 우리에게 신뢰를 주고 있다. 물론 냉전적 반공주의의 관점에서 본다면 불만일 수 있겠다. 그러나 북한과 과 공산주의에 대한 선입견과 미국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냉철하게 관찰한다면 커밍스의 진단에 동의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문제는 미국을 선, 북한을 악이라고 보는 우리의 극단적 이원론이다.

 코폴라의 영화 <지옥의 묵시록>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미군의 공격용 헬기가 바그너 음악을 배경으로 밀림에 네이팜탄을 퍼붇는 장면일 것이다. 순식간에 숲이 불바다로 변하는 광경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 와중에 목숨을 구하기 위해 달리는 베트남 인민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 네이팜탄은 베트남이 아니라 북한에 더 많이 퍼부어진 폭탄이란다. 미군의 공습으로 80% 이상의 파괴된 북한의 도시들에 대한 커밍스의 이야기는 또다른 충격이다. 우리는 한국전쟁에 대해서는 한쪽눈만 뜨고 보도록 강요당해왔다. 커밍스에 따르면, 북한이 그토록 꽉 짜인 병영국가로 갈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들에 있다는 것이다. 대규모 폭격의 기억과 전후에 끝없이 이어진 미국의 핵공격 위협이 북한을 하나의 거대한 병영이며 개미굴 같은 것으로 만든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미국의 책임론을 강하게 거론하는 셈이다.

 북-미 관계의 해답은 이미 1994년에 나왔다는 것이 커밍스의 진단이다. '94년의 기본합의서가 미국과 북한의 새로운 관계를 위한 유익하고 건전한 토대'라는 것이 커밍스의 견해다. 클린턴이 핵과 미사일을 북-미 관계 정상화와 맞바꾸려는 시도를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며, 그 시도를 물거품으로 만든 것이 공화당과 부시대통령이었다는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핵 위기설은 이미 10년 전의 필름을 '빨리 되감기'하고 있는 실정이라는 것이 커밍스의 진단이다. 북한 외교팀이 현안에 대한 놀라운 집중력으로 사태를 이끌어가고 있는 반면에 미국은 혼란스런 대응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물론 그  혼란의 이면에 미국이 북한체제를 무너뜨리려하고 하는 야심이 자리잡고 있고, 그것은 한반도 전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위험하기도 하다.

 커밍스는 5장 <사람사는 세상>에서 그가 직접 본 북한사회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80년대초부터 북한을 방문했던 그가 보기에 북한은 주택과 의료, 교육이 균등하게 보장된 안정된 사회였다. 70년대 후반에 남한에 추월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북한경제는 남한을 늘 능가해왔다는 것이 커밍스의 지적이다. 이런 관찰을 토대로 해서 보면, 우리는 60-70년대 내내 남한이 보인 북한체제에 대한 두려움의 원인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커밍스는 냉정한 관찰자다. 그는 현실의 양면을 그대로 이야기한다. 지극한 폐쇄사회인 북한이 가진 결점들을 지적하면서도 그것이 이루어낸 성취와 가능성을 인정하기에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북한문제에 관해서 균형잡힌 시각에 목말라왔다. 커밍스의 책은 그 목마름을 달래준다.

 여담하나. 아내는 내가 보는 책이 <다빈치 코드>인 줄 알았단다. 책표지가 붉은 것도, 제목의 위치까지 비슷하다는 것이다. 글쎄, 나는 <다빈치 코드>를 못 보아서 모르겠다. 이것은 번역본에 대한 불만이다. 번역제목이 원작 제목-North Korea: Another country-에 비해서 책내용을 나타내기에 적절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표지의 붉은 색과 김정일 부자 사진도 마음에 안 든다. 아무래도 남한 사람들은 김부자의 사진은 좋아하지 않는 편이거든. 책표지가 책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소한 부분들에서 커밍스 책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책의 판매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생각이 기우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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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이덕일 / 김영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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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라는 극존칭과 개이름인 '시열이' 사이의 극단적인 대비가 송시열이라는 인물이 가진 위치, 명암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송시열이라는 창을 통해서 들여다보는 조선후기의 역사라고 보면 되겠다. 여기에는 인조반정, 병자호란, 소현세자의 죽음, 효종의 북벌계획, 2차에 걸친 예송논쟁, 숙종시기의 잦은 정권교체-이른바 '환국'-와 상대당에 대한 부정과 살육의 역사가 들어있다. 조선후기 당쟁사의 대부분이 여기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송시열은 '노론'이라는 당대의 집권당을 이끌었던 이론가이자, 정치가로서 그 역사에 관여하고 있다.

결국 모든 비극의 씨앗은 서인들의 인조반정에 있었다. 명청교체기의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주체적으로 경영했던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은 '구데타'이면서 '역사의 퇴보'를 의미했다. 허울좋은 '재조지은'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얽매인 결과로 조선은 병자호란이라는 국가적인 재난을 당하게 된다. 씻을 수 없는 국가적인 모욕을 당하게 된다. 송시열이 활동한 시기동안 일어나는 국가적인 사건들-소현세자의 귀국과 죽음, 효종의 북벌론, 예송논쟁-도 결국에는 인조반정이라는 사건이 없었다면 생기지 않았을 사건인 셈이다.

동아시아가 격변기였듯이, 조선의 국내사정도 격변기였다. 임진왜란은 국가지배층인 사대부의 권위를 땅에 떨어지게 만들었다. 대동법의 실시는 농업,상업의 발달을 촉진하고, 그 결과 사회적인 신분제는 더욱 동요하게된다. 여기에 지배세력인 사대부집단은 보수냐, 개혁이냐의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송시열로 대표되는 노론은 지배체제의 재정비를 통해서 사회를 보수화, 일원화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송시열은 '주자근본주의'의 깃발을 들고 그 방향을 선도했다. 이에 비해 김육, 윤휴, 윤증, 허목 같은 송시열의 경쟁자들은 다른 방식의 사회를 구성하려고 애썼다. 나는 송시열이 왜 이율곡이나 이퇴계가 아닌 '주자'에 그토록 집착했는지 의문아닌 의문이 들었다. 지은이의 말처럼, 주자는 송시열의 시작이자 끝이었다. 죽기 전에 남긴 유언에도 "학문은 마땅히 주자를 주로 할 것이며"를 넣었을 정도로 송시열은 주자 마니아였다.

숙종의 왕권강화와 당쟁의 격화는 함께 간 측면이 있다. 남인과 노론이 몇 년 단위로 번갈아 집권하면서 상대방을 도륙하는 사이에 정치는 길을 잃게 되고, 도의는 땅에 떨어진다. 공작정치와 보복, 살육이 난무하게 된다. 물론 숙종은 그것을 이용해서 왕권을 강화한다. 왕권강화를 했다지만 그 실체가 무었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숙종 이후 경종, 영조시기에 더욱 격화된 당쟁응 상대당의 국왕은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는 분위기조차 만들었다. 그 상황에서국왕이 설자리가 얼마나 좁았던가를 살핀다면 숙종이 한 일이 과연 잘한 일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영조의 탕평책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 학자들의 의논을 눈여겨볼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산림'이라는 집단이 흥미로웠다. 글만 하는 선비들이 나라를 경영한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이른바 사대부 집단을 일본의 사무라이 집단과 비교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결국 그들이 학문과 정치를 논할 수 있었던 것은 땅과 노비의 주인이라는 경제적, 사회적 배경 위에서만 가능한 일이 아니었던가. 더구나 한문이라는 그 어려운 문자는 그들의 지적인 권위를 더욱 높였을 것이다. 과연 오늘날은 일하는 사람들 스스로 정치와 학문을 논하는 세계를 만들었는지 되새겨 볼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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