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김훈 지음 / 학고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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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쯤 전에 창비에서 나온 <소설 소현세자>를 읽은 적이 있다. 상하권으로 나뉜 책이었는데, 읽고 나서 흥분했던 기억이 난다.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치욕, 청나라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강빈의 현실주의적 사고, 비극적인 죽음을 다룬 내용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나온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과 이은성의 <소설 동의보감>류의 역사소설이었는데, 소설이 아니라 역사적 기록의 행간을 메꾸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졌다.  거기서는 소현세자가 비극적인 영웅이라면 무지에 의한 악인 역할을 인조가 맡는다. 인조는 병자호란이라는 치욕 때문에 국제현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어리석은 통치자의 전형으로 나온다. 이렇게 선명한 갈등구조를 가지고 대립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 역사소설은 사람을 흥분시킨다. 다 읽고 나면 괜한 흥분 같은 것도 가지게 된다.

김훈의 <남한산성>은 그런 흥분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어디에도 영웅은 없다. 인조나 김상헌, 최명길, 청태종 누구도 초인적이고 영웅적인 면모가 없다. 답답한 상황 속에서 발버둥치는 인물들의 선택은 최선이 아닌 차악 정도이다. 누가 최악도 아닌 차악을 좋아하겠는가. 버틸 수도 없는 곳에서 적을 맞이해서 버티려고 한 무모한 조선의 통치세력은 쓰나미 같이 거대한 물결 앞에 속수무책으로 떨고 있을 뿐이다. 김상헌의 주전론과 최명길의 주화론, 영의정 김류의 모호한 태도 사이에서 주상인 인조는 특별한 입장을 보여주지 않는다. 결국에는 거대한 힘에 굴복하는 쪽을 택한다. 다른 선택의 길은 없기에. 치욕을 치욕으로 받아들이는 이는 사대부들 뿐이다. 결국 조선은 사대부들의 나라인 셈이다.

소설에서 유일하게 희망적으로 보이는 것은 대장장이 서날쇠다. 그는 글과 말로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몸과 기술로 먹고 사는 사람이다. 그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신민이 아니다. 단지 먹고사는데 충실한 사람일 뿐이다. 나라는 그에게 커다란 의미가 없다. <남한산성>에 들어온 사대부들과 관료들이 나라의 운명에 대해서 큰 소리로 떠들어댈 때도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만 할 뿐이다. 어서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려서 자기의 생업인 농사와 대장간 일을 할 수 있기만을 바라고 있다. 그는 성심껏 병장기를 수리한다. 그가 수리한 병장기는 생생하다. 또한 조정이 부탁한 격문 돌리기도 아무런 무리없이 해낸다.  그러나 마치 이 싸움은 나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처럼 그는 처신한다. 병장기 수리도 그가 수행하는 생업의 일부일 뿐이다.

김훈은 '하는 말'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아무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받는 자들의 편이다." 어떤 선언처럼 들리는데, 이 말이 과연 소설 속에서는 어떻게 작용하는지 모르겠다.  나라 간의 전쟁이라는 냉엄한 현실 앞에서 백성들은 어떻게 되는가. 김훈은 김상헌과 최명길, 김류, 이시백 같은 고위관료들(당상관)의 처신과 말을 많이 보여준다. 이른바 국제외교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다. 책에서는 최명길보다는 김상헌을 비중있게 다룬다. 서날쇠와 개인적인 친분을 맺는 것도 김상헌이다. 그 김상헌의 노선은 철저한 주전론이다. 차라리 싸우다 죽어서라도 명분을 세우자는 것이다. 청나라 같은 오랑캐-문화적 후진국이라고 할까-에게 머리를 숙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김상헌은 무엇을 믿고 그렇게 강경하게 싸우자고 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청나라의 대병력이 들어와 있는데도 조선의 정규군은 제대로된 싸움 하나 하지 못한다. 결국 기대를 거는 것은 서울 아래의 삼남지방의 지방군과 의병인데, 그게 과연 기대를 걸만한 것인지. 임진왜란 때는 명나라가 지원군이라도 보내주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때는 명나라는 아무런 도움도 줄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김상헌과 같은 주전론자들은 명나라를 버리고 청나라에 붙은 것은 안된다고 목소리 높인다.  무언가? 결국 광해군과 대북파 정권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집권한 서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숭명배청, 재조지은이라는 -를 위해서 싸움도 아닌 싸움을 계속하자는 것이었는지. 참 병자호란은 이해할 수 없는 전쟁이다. 이미 10년 전에 정묘호란을 겪으면서 청의 강성함과 명의 허약함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인데도 조선의 지배세력은 바뀐 것이 없었다. 묘하고 묘하다. 제대로 된 정치가는 최명길 밖에 없다. 최명길은 존명론자들이 판치는 조선에서 두고두고 짐이 될 것이 뻔한데도 청에 보내는 국서를 직접 작성한다. 청태종에게 보내는 답서를 쓰라고 명령했던 당하관들 세 명은 모두 이런 저런 이유로 글을 쓰지 않는다.  여기에 최명길이라는 정치가의 가치가 있어 보인다.

정치와 외교란 언제나 최선을 선택할 수는 없는 법이다. 힘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최선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당연히 힘있는 자 뿐인 것이다. 청태종이 삼배구고두를 받는 자리에서 오줌을 누는 장면을 보라. 통역관 정명수가 조선의 조정을 능멸하는 것을 보라. 오로지 힘있는 자만이 최선을 선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최명길의 고뇌와 선택은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정치가가 행동할 수 있는 본보기를 보여준다. 소설가는 닫힌 공간 속에서 힘없는 자들이 벌이는 말의 잔치를 부끄러워한다. 그리고 서날쇠나 나루 같은 백성의 건강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너무 허약하다. 여기에 차선의 정치는 없다. 차라리 전쟁통에서 지배세력들이 보여주는 무능함을 신랄하게 보여주는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싶다. 대장장이 서날쇠가 기껏 꿈꾸는 희망이 올해 농사는 어떻게 할 것이며, 쌍둥이 자식들 중에서 누구를 나루와 짝지어줄까 고민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민중은 희망의 정치를 꿈꿀 줄 아는 능력을 거세당한 존재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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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훈이 "남한산성"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from 風林火山 : 승부사의 이야기 2007-11-05 02:37 
    남한산성 - 김훈 지음/학고재 2007년 10월 31일 읽은 책이다. 올해 내가 읽을 책목록으로 11월에 읽으려고 했던 책이었다. 재미가 있어서 빨리 읽게 되어 11월이 아닌 10월에 다 보게 되었다. 총평 김훈이라는 작가의 기존 저서에서 흐르는 공통적인 면을 생각한다면 다분히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매우 냉정한 어조로 상황을 그려나가고 있다. 소설이기에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이 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읽었음에도 주전파..
 
 
 
여러분! 이 뉴스를 어떻게 전해 드려야 할까요? - 황우석 사태 취재 파일
한학수 지음 / 사회평론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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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손에 들면 내려 놓을 수 없는 책이 있다. 그런 책은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나를 버려두지 않는다. 마치 정신이 중독된 것처럼 끝을 보아야만 한다. 주로 추리소설이나 연애소설, 무협지, 만화 같은 장르들에 그런 책들이 많다. 사회과학 책이 그런 경우는 참 드물다. 그런데 문화방송 한학수 피디가 쓴 이 책은 그런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읽는 내내 한편의 스릴러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나는 저녁밥을 먹고 난 뒤에 책을 읽으려고 손에 들었는데, 처음에는 100쪽 정도만 읽고 자려고 했다. 그런데 읽다가 보니 어느 순간 200쪽을 넘기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이제 자야지 내일도 있는데' 하고 책을 밀쳐놓고 잠을 청했다. 이불을 덮고 누웠는데 잠이 안왔다. 도대체 다음 장면이 궁금해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 말이지. 결국 일어나서 책을 더 읽었다. 300쪽이 넘었다. 눈꺼풀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잠깐만 쉬다가 더 봐야지 하고 잠시 눈을 붙였는데 그 길로 아침까지 자 버렸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책들고 읽기 시작해서 오전 중에 450쪽 정도까지 보았다. 낮에는 일이 있어서 책을 볼 수가 없었다. 머리 속에 온통 황우석, 줄기세포, 테라토마 같은 낱말들이 뱅뱅 돌았다. 저녁에 집에 돌아와서 저녁밥 먹기 전에 책을 다 읽었다.

황우석이라는 이름, 피디수첩이라는 이름으로 온 나라가 들썩이던 시절이 있었다. 겨우 2년도 안 된 옛날이다. 그 때를 옛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직도 황우석과 피디수첩은 현재진행형이다. 많은 이들의 증언이 빠짐없이 나오는 진실의 책은 아마 20,30년 쯤 지난 뒤에야 나올 것이다. 입을 꼭 다물고 있는 이들도 너무 많다. 더구나 황우석 사태의 공모자였던 노무현 대통령, 청와대, 정치권 인사들, 한국언론들이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물러난 사람은 기껏해야 황우석 정도이다. 이른바 황우석 사단의 과학자들도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얼마 전에 서울대의 이병천 교수가 또 무슨 복제를 했다고 발표를 했다가 브릭의 젊은 과학자들에게 또 한방을 먹었다. 통계에 결정적인 실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2007년 오늘도 여전히 황우석 사태의 구조는 잔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그러한 조작과 허영의 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희망이 있음을 알게 된다. 한편으로 우리 사회가 얼마나 기이한 방식으로 조직되고 있는가를 아는데도 유용한 책이다.

나는 황우석을 보는 순간 불교의 큰스님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 형형한 눈빛은 선사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선사 중에도 깨달음을 거짓으로 공포하는 사람들이 있듯이 황우석도 과학에 사기를 쳤다. 깨달음의 언어는 증명할 수 없지만, 과학의 언어는 증명할 수 있다. 거기에는 실험자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권위라는 이름에 속아 넘어갔다. <네이처>의 권위에, 황우석의 권위에, 노무현 대통령의 권위에 우리는 그냥 넘어갔다. 오직 극소수의 양심적인 연구자들과 언론인들만이 깨어있었다. 설마 하는 사이에 진실은 사라졌다. 어쩌면 진실이 거짓에 굴복할 수도 있는 순간도 있었다. 그 순간 등장했던 '어나니무스'라는 무림고수의 등장. 차라리 이건 추리소설이 아니라 무협지라고 하는 것이 더 합당한 비유리라. 정말 기가 막힌 반전. 현실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지. 마치 노무현이 정몽준의 배신을 이겨내고 대통령에 당선되던 그날처럼, 2002년에 한국팀이 월드컵 4강을 차지하는 그 순간처럼, 87년에 민주화세력이 군부독재에게 판정승을 거둔 그날처럼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 일어날 때가 있다. 황우석 사태의 마지막에는 이와 같은 대반전의 드라마가 있어서 더 기가 막히다. 그러나 사실 그보다 더 기막힌 것은 황우석 사태의 내부제보자인 부부가 자기 직업에서 밀려나 야인으로 생활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진실의 편에 선 대가가 이와 같은 따돌림이라면 우리 사회는 글쎄 희망이 없는 사회일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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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빈센트
박홍규 지음 / 소나무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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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보다 먼저 이 책과 내 인연부터 말해야겠다. 책을 산 날짜를 보니 2000년 6월 8일이었다. 어쩐 일인지 읽히지 못하고 계속 책꽂이에서 나를 기다렸다. 무려 6년간이나. 그러다가 지난해 가을에 집안 정리를 하는 중에 이 책은 청산대상이 되어서 처가로 분양이 되어갔다. 어떤 친구인지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보내려고 하니 마음이 좀 쓰렸다. 이번 설날에 처가에 갔다가 심심하던 차에 그 곳에 있는 이 책을 꺼내 읽게 되었다. 설날 휴가 덕분에 나는 이 책을 다 읽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 독후감을 올리려고 <알라딘>에 들어가보니 개정판이 2006년 1월에 나왔네. 쪽수도 80쪽 가까이 늘었다. 개정판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일단 옛날판으로 읽은 독후감을 쓰기로 한다.

책의 두께는 260쪽 정도이고, 내용도 술술 넘어가는 편이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고흐의 그림을 원색으로 보지 못하고 흑백으로 보아야한다는 것이다. 진정 괴로운 것은 예술에 모든 것을 바치고 서른 여덟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고흐의 삶을 따라가는 것이다. 글쓴이 박홍규 교수가 아무리 고흐의 아나키즘이나 사회주의를 말하며 의미부여를 해도 나는 생활인의 눈으로 고흐의 삶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구필 화랑의 화상이라는 안정된 직장도 버리고 온갖 고난의 길을 자청해서 떠나는 고흐의 삶은 보기에 안쓰러웠다. 그렇다고 생전에 성공하지도 못하고 결국에는 삶을 자살로 마감할 수 밖에 없었던 실패한 인생이 그의 삶이다.  겨우 서른 여덟의 나이에 죽었으며, 가진 것도 없었고, 아내나 자식도 없었다. 죽을 당시의 그는 실패한 인생이었다.

박홍규 교수는 고흐의 삶을 성장, 구도, 모색, 방황, 해방, 회귀의 여섯 단계로 나누어 살펴본다. 빈센트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에 네덜란드 시골의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다. 밑으로 태오라는 동생이 있었다. 네덜란드는 유럽에서는 북방미술의 전통을 따르는 화가들이 활동한 곳이다. 렘브란트, 루벤스, 브뢰겔, 홀바인의 걸작들을 고흐는 소중하게 여겼다. 특히 렘브란트는 자화상의 화가라는 점에서 고흐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화가이기도 하다. 평범하게 자랐던 고흐의 삶이 격동을 맞게 된 계기는 스무살 무렵이다. 구필화랑의 런던지점에서 근무하던 고흐는 그 곳에서 첫사랑의 시련을 맞이한다. 그 뒤 화상이라는 직업에 매력을 잃어버린 고흐는 교사, 전도사 등의 직업을 가지고 밑바닥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삶을 가지기 위해서 애쓴다. 이 과정이 8년 가까이 되는데 박홍규 교수는 이 때를 ‘구도’라고 표현하고 있다. 고흐는 스무살 시기를 민중 속에서 보낸 셈이다.

 

고흐는 1880년부터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데생수업을 시작한다. 죽기 전까지 10년 정도의 세월을 화가의 삶을 살았다. 이 때는 화단에 인상파가 등장해서 새로운 기풍을 실험하던 시점이다. 나중에 고흐는 ‘후기 인상파’의 대표주자 중의 한 사람인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평생 고흐는 인상파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고흐가 인상파에서 배운 것은 기법이었을 뿐이었다고 한다. 오히려 고흐는 평생에 걸쳐서 밀레나 도미에, 쿠르베 같은 농민을 주로 그리거나 좌파적 경향을 가진 작가들의 작품을 친근하게 여기고 따라 배우려는 노력을 해왔다고 한다. 박홍규 교수는 고흐의 회화정신을 사회주의나 아나키즘이라고 본다. 물론 이것은 마르크스류의 과학적 사회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고흐는 당대의 인상파 화가들과 다르게 그림의 대상을 대부분 자연풍경과 평범한 민중들에서 취했다. 10년 세월 동안 고흐는 그야말로 엄청나게 그려댔다.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그는 그림을 그린다. 그야말로 그리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처럼 고흐는 온 삶을 그림에 바친다. 죽기 얼마 전에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 나의 그림, 그것을 위해 나는 나의 목숨을 걸었고 이성까지도 반쯤 파묻었다.”

 

고흐는 평생 동안 겨우 한점의 그림을 팔았을 뿐이었던 무명화가였다. 그런 고흐의 그림이 지금은 세계최고의 값으로 팔리고 있다. 이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우선 그의 동생 테오를 들 수 있다. 화상이었던 테오는 형인 빈센트를 후원하고 형의 그림을 대부분  보관하고 있었다. 테오는 고흐가 죽고 난 뒤 6개월 뒤에 죽었다. 테오에게는 요한나라는 아내가 있었다. 겨우 1년 반 밖에 같이 살지 못했다. 요한나는 테오와 빈센트 간에 오고간 6백여통의 편지와 메모를 정리했고, 빈센트의 그림도 정리해서 수집했다. 또한 요한나의 아들인 빈센트 빌렘은 고흐의 작품을 한점도 팔지 않고 국가에 기증했다. 네덜란드에서는 ‘빈센트 반 고흐 국립 미술관’을 지어서 그 작품을 소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테오와 요한나의 노력 덕택에 고흐는 무명화가로 사라지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예술사에 영원히 남기게 되었다. 고흐의 삶과 예술에 대한 열정도 놀라운 것이지만 테오와 요한나라는 의인의 존재도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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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수수께끼 - 마빈 해리스 문화 인류학 3부작
마빈 해리스 지음, 박종렬 옮김 / 한길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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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빈 해리스의 문화인류학 3부작은 진작부터 소문을 듣고 읽고 싶었던 책이다. 사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문화인류학이라는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삼천포에서 목욕탕을 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 집에 가면 삼성판 세계문학전집과 세계사상전집이 있었다. 거기에서 내가 빌려보았던 책이 <사기열전>과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말리노프스키의 문화인류학?>이라는 책이 있었다. <사기열전>은 다 읽었는데 나머지는 책의 해설부만 읽고 내용은 대충 핥는 수준으로 그치고 말았다. 어쨌든 그 덕분에 문화인류학이라는 학문이 있다는 정도는 알게 되었다. 고3때는 대학을 가려고 할 때 문화인류학이나 고고학, 동양사학을 전공하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었다.

      우리 연배에 문화인류학이라는 학문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준 사람은 아마 주강현이 아닐까 싶다. 주강현의 <우리문화의 수수께끼>는 정말로 우리 문화의 수수께끼를 밝혀준 우리 시대의 고전이다.(이건 만고 내 생각임)  최근에 주강현이 보이고 있는 바다에 대한 저술 작업들-관해기,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도 독창적인 작업이라는 생각을 한다.  주강현의 작업의 모형은 책의 제목에서 보듯이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에서 빚진 바도 많지 않겠나 하고 추측도 해본다. 주강현은 마빈 해리스가 한 작업을 우리 땅에서 하겠다는 그런 각오를 가지고 있었을 것 같다.

      책 제목이 우선 재미있다. <암소, 돼지, 전쟁 그리고 마녀>다. 그리고 <문화의 수수께끼>다. 정말 수수께끼는 수수께끼일 것이다. 어떤 민족은 소를 먹지도 않고 숭배하는데 반해서, 어떤 민족은 소를 게걸스럽게 먹는다. 돼지에 대한 태도도 거의 극단으로 대비된다. 이렇게 다른 이유들이 무엇일까? 이것을 마빈 해리스는 '과학적 객관성'의 이름으로 탐구한다. 해리스 말 마따나 우리 시대는 과학의 시대이지만 문화에 관해서는 과학이 아직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문화야말로 우리네 삶을 포장하는 옷과 같다. 마빈 해리스는 자기 입장을 '문화유물론'이라는 이름으로 확정한 바 있다. 문화를 보는 유물론적인 태도라는 말이겠지. 엄밀하게 말해서 유물론-materialism. 물질주의?-이란  유심론, 혹은 정신주의에 대비되는 학문자세를 말한다. 모든 문제를 상부구조가 아니라 하부구조나 물질적 토대의 고찰에서부터 탐색하려는 태도를 말한다.

       문화의 근본을 고찰한 책은 별로 읽은 바가 없어서 그런지 쉽게 이해가 되는 책은 아니었다. 읽는 중간중간 막히는 부분도 있었다. 번역의 문제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주강현이 현학적인 부분이 있듯이, 마빈 해리스도 영어로 현학을 부린 부분이 있지 않겠나 싶었다. 그래도 2장인 '거룩한 어머니의 암소'부분은 지난번 제레미 리프킨의 <육식의 종말>에서 인용부분을 읽었던 곳이라서 그런지 좀 쉽게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원시전쟁, 포트래취,유령화물 같은 부분은 쉬운 듯 하면서도 좀 어렵게 느껴졌다. 한번 더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제일 재미있고 논란이 될 수 있는 부분은 구세주와 전투적 메시아주의, 마녀광란에 대한 장들이 아닐까 싶다. 나도 그 곳이 참 재미있었다. 내가 어렴풋하게 느꼈던 부분을 명확하게 표현한 것을 보니 마음에 시원한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예수사상과 바울의 사상을 대비한 부분, 마녀광란의 실제적인 원인에 대한 부분, 루터의 종교개혁이 철저하게 진행되지 못한 점에 대한 부분등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성서을 읽으면서 느끼는 그 모순, 불일치를 선명하게 지적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가 불합리로 가득한 책이라는 것은 아니다. 모든 위대한 책은 완결된 텍스트가 아니다. <논어>나 <맹자>,<노자>,<불경> 등에도 서로 어울리지 않는 주장들이 공존한다. 한 순간에 만들어진 책이 어디 있는가? 더구나 위대한 책들은 보통 수십, 수백년의 세월을 거쳐서 수많은 사람들의 손길을 거쳐서 형성된 완성품이다. 그것을 글자 하나 하나 곧이곧대로 믿는 자들이 바보일 뿐이다. 스스로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자들은 그 곳에서 자기 삶을 해석해주는 비밀을 발견할 것이다.

       문화야말로 이데올로기가 판치는 분야다. 일종의 신화와 전설이 판치는 분야다. 이해하지 못하기에 신비화시키는 부분이 많다. 이것이 다 대중의 의식을 눈멀게 하고, 부당한 지배를 영속화하는 데 기여한다. 마빈 해리스는  문화에 과학의 빛을 비춤으로써 대중을 신비화된 문화의식에서 놓여나게 하는 데 자기 학문의 목적을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함으로써 대중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겠지. 마빈 해리스의 나머지 책들도 곧 찾아 읽어보고 싶다. 우선 이 책을 한번 더 읽어보는 게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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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 연대기 :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1disc)
앤드류 아담슨 감독, 조지 헨리 외 출연 / 브에나비스타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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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지난 해 성탄절 때 산타할아버지가 우리 큰 딸에게 선물한 것이다. DVD 타이틀이었다. 마침 나도 보고 싶었던 영화라서 산타할아버지의 감식안에 나도 경탄을 했더랬다. 성탄절 때 아이들이 보는 것을 옆에서 드문드문 보았는데, 그렇게 재미있어보이진 않았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와 비슷한 판타지 영화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확인해주는 정도였다. 어제 아이들이 보는 것을 옆에서 같이 보게 되었는데, 꼼꼼하게 보니 그런대로 볼 만했다. '월트디즈니' 프로덕션에서 만든 제품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보니 역시 디즈니 표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모험과 사랑, 우정, 희망이 섞여있으면서 온 가족이 다함께 볼 수 있는 그런 이야기였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나찌의 런던대공습이 행해지던 1940년대이다. 공습을 피하기 위해서 네명의 형제자매들은 시골의 어느 늙은 교수의 집으로 옮겨진다. 거기서 아이들은 환상의 나라인 나니아로 가는 길을 발견한다. 우습게도 그곳은 옷장 속이다. 옷장 속에 거대한 세계가 들어있었던 셈이다. 옷장 속 나니아 나라는 얼음마녀와 아슬란의 전쟁이 벌어지는 곳이었다. 아이들은 전쟁을 피해서 시골로 갔는데, 오히려 그곳에서 그들은 또다른 전쟁의 한복판에  내던져진다. 거기서 아이들은 아슬란의 편에 선 전투부대의 지휘관으로, 전사로 참여한다. 아이러니다. 결국 정의는 승리하고 아이들은 다시 환상에서 현실로 돌아온다. 

 정의의 마법사인 아슬란은 숫사자다. 나쁜 마법사인 얼음마녀는 대단한 미모를 지닌 존재다. 안데르센의 '얼음여왕'에 나오는 그런 마녀의 이미지와 닮았다.  아슬란의 편에 선 동물들은 아프리카와 유럽계 동물들이 많다. 비버를 비롯하여 코뿔소, 치타, 하마 같은 동물들이 그렇다. 얼음마녀의 편에 선 동물들은 늑대를 필두로 하여 박쥐, 북극곰, 호랑이, 흑소 같은 것들이 있다. 그외 켄타우루스 같은 반신들은 아슬란 편이다. 난장이들은 얼음마녀편이다. 이런 것들에서 나는 괜히 백인들의 편견 같은 것을 느꼈다. 사자는 대영제국의 상징이다. 얼음과 북극곰은 러시아의 상징이다. 어쩐지 영국 대 러시아, 혹은 유럽 대 아시아의 대리전 같은 느낌도 들었다. 원작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본 작품의 분위기는 모르겠지만 영화는 어쩐지 그런 분위기를 풍겼다.

 작품의 기본 구조가 현실-환상-현실이라는 판타지 동화의 일반적인 틀에 충실하다. <해리포터>가 '마법학교'라는 틀 내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나는 '해리포터'가 별로 재미없더라. 학교라는 틀은 적당한 재미밖에는 주지 못하는 법이다. 그것은 진짜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차라리 <반지의 제왕>은 인간의 세상도 다른 존재들의 세계 중의 하나로 상정하고 전개해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시야가 확장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나는 <반지의 제왕>이 재미있다. 어디로 뻗어갈지 알 수 없는 광활한 이야기의 공간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나니아 연대기>는 '나니아'라는 나라가 단지 옷장 속에 존재하는 현실일 뿐이라고 가정하고 이야기를 끌고 간다. 물론 옷장 속에 그런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나는 왠일인지 속이 탁 트이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한개의 세계가 아니라 수십수천 개의 세계가 펼쳐지는 그런 환상의 기운을 이야기 속에서 느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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