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테와 루이제 시공주니어 문고 2단계 10
에리히 캐스트너 지음, 발터 트리어 그림, 김서정 옮김 / 시공주니어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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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딴에는 동화를 읽는다고 읽었는데 케스트너는 얼마전쯤에 처음 읽었다. <하늘을 나는 교실>이 처음이었다. 처음 시작하기가 좀 힘들었는데(웬지 잘 안나갔다.) 30분쯤 읽으니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인물들 하나하나가 생생한 개성을 지니고 있었고, 주인공들도 도덕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품위있는 인간들이었다. 세부적인 묘사도 마음에 들었다. 케스트너가 앞에서 쓴 말도 재미있었다. 케스트너라는 작가에게 빠지게 된 첫 계기였다. 린드그렌이나 안데르센 같은 동화작가와는 또 다른 개성을 지닌 작가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로테와 루이제> 이야기를 하는데 난 데 없이 <하늘을 나는 교실>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 책도 그 재미가 <하늘을 나는 교실>에 못지 않다. 설정부터가 재미있다. 여름수련회에서 만나게 된 로테와 루이제라는 쌍둥이는 알고 보니 서로 자매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헤어지면서 한 아이씩을 데리고 가게 된 것이다. 다행이게도 두 부모들은 아직 재혼을 안 하고 있었고, 아이들을 끔찍하게 사랑했다. 로테와 루이제는 결국 서로에게 얽힌 비밀을 알게 되고, 서로의 역할을 바꾸어서 하기로 한다.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작은 사건들이 모여서 나중에 자연스런 결말을 가져온다. 결론은 행복이다. 어쩌면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들이 무지 많다. <왕자와 거지>와 비슷한 냄새를 풍긴다. 우리는 쌍둥이 이야기를 좋아한다. 더구나 서로 역할을 바꾸게 된 쌍둥이.

지휘자이면서 작곡가인 아버지, 신문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인 아머니는 문화적인 배경을 탄탄하게 가진 사람들이다. 엄마와 아빠가 서로 대조적이듯이, 로테와 루이제라는 아이의 선명하게 대조적인 성격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부분이다. 성마른 아버지와 온화한 어머니를 빼닮은 아이들은 오히려 서로 잘 어울린다. 이른바 삶의 구질구질한 냄새는 전혀 나지 않는다. 읽는 내내 그 밝은 성격 때문에 재미있었다. 삶의 어두운 측면에 대해서는 또 다른 동화가 다루어주겠지. 이 정도로 만족이다. 중학년용(3-4학년)으로 구분한 분류가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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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뭐든지 할 수 있어 창비아동문고 174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강일우 옮김, 일론 비클란트 그림 / 창비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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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우리들 초중학교 시절에 삐삐와 코난이 없었다면 얼마나 재미없었을까 하고 말이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문화라고는 텔레비전이 거의 전부였던 시절의 일이다. 그 때 우리가 즐긴 것은 <전우>나 <마징가 제트><육백만불의 사나이><원더우먼><소머즈>같은 싸우고 죽이고 하는 종류의 드라마들뿐이었다. 그렇게 황폐하던 것들의 와중에 처음 등장한 외계인 같은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말괄량이 삐삐다. 아마 1980년 전후가 아니었을까 싶다. 정말 삐삐는 이해하기 힘든 존재였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여자아이였다. 그 요상한 외모며, 천하장사도 이겨낼 힘, 부모도 없이 큰 저택에 혼자 사는데다 금화를 한 궤짝이나 가지고 있는 부자라는 점 같은 것은 우리 머리로는 이해가 불감당인 그런 인물이었다. 그래도 얼마나 재미있었던가. 
 
마징가 제트와 삐삐는 그렇게 우리 정신생활의 세계에서 공존했다. 항상 선악이 분명한 세계 속에서 주인공과 악당이 싸우는 것만 보다가, 삐삐처럼 희한한 주인공에 악당같지 않은 악당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우리 정신세계를 조립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싶다. 미래소년 코난도 그런 점에서 마찬가지다. 우리는 그들을 창조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과 미야자키 하야오를 한참 지난 뒤에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들이 위대한 예술가임을 평론가들이 말해주기 전에 미리 알아보았다. 

린드그렌의 작품은 무엇을 읽어도 재미있다. 우리 말로 번역된 것도 많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60권도 더 된다. 내가 읽은 것은 겨우 다섯 권 정도다.  그 가운데 이 책 <난 뭐든지 할 수 있어>가 제일 마음에 든다. 모두 열 두편의 단편동화가 모여 있는 작은 책인데, 읽고 나면 이 책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꼬마 아이들이 머리 속에 선명하게 남아서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것은 세 편의 동화이다.  표제작인 '난 뭐든지 할 수 있어'와 '봐 마디타 눈이 와','펠레의 가출'이 그것이다. 모두 스웨덴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품격, 강아지 같이 귀여운 아이들을 보여준다.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게 귀엽다. 아이들이 모두 싱싱하게 살아 있다. 아이들은 부모와 이웃의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신나게 뛰논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식민지와 분단, 전쟁, 산업화의 그늘에 찌들어사는 아이들을 그릴 수 밖에 없는 우리 동화가 마음에 안 들어서 내가 린드그렌의 동화에 열광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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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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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겐 이 책도 빚쟁이 같은 책이다. 벌써 두 번이나 읽으려고 시도했다가 실패했던 책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30쪽 정도 읽다가 말았다. 다른 기막힌 책이 눈에 들어와서 그만 이 책을 버리고 말았다. 기억도 선명하다. 그러다가 한 해 쯤 지난 뒤에 다시 읽으려고 했다. 이 때는 반 정도까지 읽었다. 재미있었다. 감동도 있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또 책을 중도에 버리고 말았다. 왜 버렸는지는 나도 모른다. 아마 다른 멋진 책이 다가와서 유혹했겠지. 그렇게 마음의 빚으로 남아있던 이 책을 이번에 겨우 읽었다.  책꽂이에 꽂혀있는 이 책을 보면 마음이 편안하다.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나는 것처럼 한번씩 뽑아서 쓰윽 한번 넘겨본다. 아무 구절이나 읽어보고 내가 이 내용을 잘 기억하고 있음에 만족한다.

원제목은 '작은 나무의 교육 The education of little tree'이다. 작은 나무는 여섯살짜리 꼬마 체로키 인디언이다. 작은 나무는 아버지 어머니가 죽고 난 뒤에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따라서 산 속으로 들어간다. 산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할아버지는 190미터 정도 되는 거구를 지닌 인디언이다. 할아버지는 아일랜드인의 피가 섞인 혼혈 체로키다. 할머니는 순수한 체로키족 출신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손자인 작은 나무를 정말로 사랑한다. 지구상 모든 종족들의 조부모가 손자를 사랑하는 그런 방식으로 사랑한다. 그러면서도 아이를 키우는 체로키적인 방식이 있다. 문명의 기준으로 보면 턱없이 부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작은나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품 안에서 아무런 부족도 느끼지 못한다. 행복을 느끼고 산다.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미국의 1929년 대공황을 전후한 때인 것 같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양은 좀 황폐해 보인다. 정부에서는 위스키 제조를 법으로 금하고 있다. 그렇지만 산간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옥수수 농사를 짓기 때문에 옥수수를 팔아서는 겨우 입에 풀칠할 만한 정도 밖의 수입을 얻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농부들은 옥수수를 가공해서 몰래 위스키를 제조해서 판다. 이 때는 금주법의 시대였기 때문에 술을 만드는 것는 좀 돈이 되는 때다. 도시에서는 아마 술을 만들고 유통시키는 일을 마피아들이 관장해서 엄청난 부를 축적했던 것 같다. 작은 나무의 할아버지는 몰래 위스키를 제조해서 아래 마을의 잡화점에 판다. 그 돈으로 필요한 생필품을 사게 된다. 작은 나무는 어린 나이지만 할아버지의 위스키 제조를 나름대로 돕는다. 할아버지는 작은 나무가 하는 일의 몫을 인정해주고 긍정한다. 정부에서는 이 불법위스키 제조를 뿌리뽑기 위해서 수시로 단속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배꼽을 잡는 일들이 일어난다.

할아버지는 글자를 모른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세상사를 해석하는 방식이 독창적이다. 어찌보면 핵심을 찌르는 말이기도 하다. 할아버지는 뉴욕이란 곳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살 땅이 모자라기 때문에 뉴욕 사람들 중 반 정도는 미쳐 있고, 그래서 총으로 자살하거나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일이 생긴다고 말한다. 하지만 할머니는 글자를 알고, 아이의 교육을 위해서 정기적으로 도서관에서 책을 빌린다. 그렇게 빌린 책으로 작은 나무에게 문자교육을 시킨다. 할머니가 읽어주는 책을 들으면서 할아버지가 보이는 반응이 웃기고 재미있다. 돌난로 앞에 앉아서 책을 읽어주는 할머니, 흔들의자에 앉아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할아버지는 상상만 해도 정겹고 재미있다. 인디언은 몽골족이라니 아마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로 상상해도 좋을 듯하다. 물론 이렇게 정겨운 할아버지, 할머니는 우리나라에서도 찾기는 참 드물겠지만 말이다.  

작은나무가 정부공무원에 의해서 고아원으로 잡혀가는 장면은 소설로 치면 갈등과 절정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평이한 에피소드의 연결 정도에 그치고 있던 이야기는 이 부분에서 갈등으로 치닫는다. 갈등의 해결도 감동적이다. 역시 인디언적인 방식이다. 우직한 지혜가 여기서 발휘된다. 체로키들이 지닌 인간적인 품격에 비하면 백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인격을 지닌 사람들이다. 고아원의 목사는 인디언의 핏줄인 작은 나무를 교육한답시고 막대기로 몸에서 피가 나도록 때린다. 인디언은 악의 씨앗이라는 것이 목사의 신념이다.  그에겐 이승은 선과 악으로 구분되고 저승은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진 곳이다. 할아버지가 이야기하는 이른바 '정치인'을 비롯해서 목사, 공무원,소작인들은 모두가 인격에 어떤 장애를 지닌 사람들처럼 보인다. 이에 비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 인디언 동료들, 집에서 키우는 개들은 모두가 고결한 인격을 지닌 신비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전혀 다른 종류의 인류를 느낄 수 있다. 언젠가 <녹색평론>의 김종철 교수는 어떤 글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이야말로 가장 고결한 품성을 지닌 사람들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자연에 순응하면서 사람들과 어울려서 사랑을 나누면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 책 속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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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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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에서 '손님'이란 책 이름을 쳤더니 무려 122개나 되는 책이름이 나타난다. 도깨비 손님, 우리 집에 온 손님, 겨울 손님 등등. 이렇게 책이름에 손님이란 이름이 많이 붙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에게 '손님'이라는 말은 반가운 의미로 많이 쓰이는 것 같다. 어렸을 적에도 우리 집이나 동네에 손님이 온다고 하면 설레었던 기억이 난다. 반갑게 맞이하기 위해서 청소하고 정리하면서 부산을 떨었지 싶다. 손님은 잠시 머물다 가기 때문에 짧은 동안의 시간에 좋은 기억을 주기 위해서 긴장하고 그랬던 것이지.

황석영의 소설 제목인 손님이 상징하는 바는 '주인이 되어버린 손님'이다. 돌림병처럼 사람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무서운 손님이다. 여기서는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손님이다. 겨우 100여년전에 한반도로 들어왔지만 이제는 남녘과 북녘에서 주인이 되어버린 손님이다. 기독교나 공산주의 모두 민족과 민중의 수난기에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들어왔지만, 결국에는 사람을 억누르고 파멸시키는 사상이 되어버린 역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은이는 황해도 신천 학살 사건의 진실을 알아내 가는 과정에서 그것이 우리 민족 내부의 싸움에서 생긴 사건임을 알아내었다고 한다. 노근리 사건처럼 미제국주의에 의한 학살이 아니라 기독교와 공산주의 간의 살륙임을 알아낸 것이다.

황석영은 황해도 신천학살의 이야기를 지노귀굿, 혹은 오구굿이라는 굿의 12마당 형식을 빌어서 들려주고 있다. 기독교도인 요한과 요섭 형제는 한국전쟁 뒤 남쪽으로 내려온 뒤 미국으로 이민을 간 세대다. 요섭은 목사다. 미국에서 북한으로 가는 고국방문을 통해서 그들의 고향을 찾아간다. 그 고향방문에 요한은 혼령으로 함께 따라간다. 황석영은 헛것이라는 표현을 쓴다. 신천학살 때 숨진 그 마을 사람들의 혼령은 지상을 떠돌다가 요섭을 따라서 북으로 간다. 그곳에서 해방전후와 전쟁전후로 벌어졌던 마을의 일들의 실상이 밝혀진다. 이것은 소설적인 장치이기도 하지만 역사적인 사실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것을 밝히는 이야기는 작가가 모두 이야기하는 방식도, 주인공이 진술하는 방식도 아닌,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방식이다. 소설이 아니라 연극 같은 느낌도 준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아서 불편했는데 자꾸 읽다다 보니까 편안해졌다. 나는 한번 읽고 나서 다시 한번 앞에서부터 책장을 한장 한장 넘기면서 이해안 되던 부분을 읽어보았다. 그랬더니 이야기의 전모가 이해되었다. 결국 책을 두번 읽은 셈이다. 나는 같은 책은 두번 잘 안 읽는데 하다가보니 그렇게 되었다.

해방과 전쟁 전후의 이야기를 보면서 늘 느끼는 것이지만 그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불구덩이를 지나왔을까 하는 안쓰러움이다. 내가 만약에 그 시대에 젊은이로 삶았다고 하더라도 어떤 선택을 강요당할 수 밖에 없지 않았겠나. 기독교든 공산주의든, 극단적 반공주의든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중간파란 존재하기 힘든 시대였으니까. 회색은 검은색도 흰색도 아닌 색깔로 취급되어서 어디에서든 환영받지 못했으니까.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다보면 사람은 어느 순간 마약에 중독된 사람처럼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다. 그것의 노예가 된다. 손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비극이 벌어진다. 이 소설에서 다루는 장소와 시대에서는 그것이 극단으로 치달아서 수만명의 인민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을 벌였다. 공산주의가 옳지도 않고 반공하는 기독교도 옳지 않다. 재판도 없고 판결도 없는 학살이 서로간에 벌어진다. 내 논밭을 뺏어간 공산당의 세력이기 때문에 죽이고, 내 편을 학살한 반대편이기 때문에 죽인다. 나중에는 서로 같은 편끼리도 죽이는 일이 벌어진다. 어린애고 여자고 어른이고 가리지 않는다.  평소에 마음에 두고 있던 여자도 반대편이면 총을 무기로 능욕하고 지겨우면 죽여버린다. 과연 이런 세상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지.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이런 일들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유고내전에서, 아프리카의 내전들에서 이런 일들이 예사로 일어난다. 그야말로 문명속의 야만이다. 총든 자들이 저지를 수 있는 야만은 얼마나 무서운지. 막강한 힘이 주는 유혹. 돈가진 자들도 마찬가지다. 권력을 가진 자들이 힘없는 이들에게 저지르는 횡포도 본질은 같다. 어른이 어리고 약한 아이들에게 휘두르는 권력도 마찬가지.  여하튼 성찰되지 않은 힘은 남을 해치고 결국에는 자기의 인간성을 파괴하는 법이다. 세설이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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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티치티 뱅뱅 - 하늘을 나는 자동차
이언 플레밍 지음, 존 버닝햄 그림, 김경미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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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나는 곧 내가 그 책을 옛날에 본 적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언제 그것을 보았는지 기억이 안 났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초등학교 3학년 시절이었다. 학교도서관에서 그 책을 빌려보았던 기억이 났다. 동화책이 아니라 만화책이었고, 제목도 <치티치티 빵빵>이었다. 만화가가 누군지 기억을 더듬어보니 아마도 이원복 교수(먼나라 이웃나라를 그린)가 아니었을까 하고 짐작이 되었다. 그 때 책의 세계에 처음 접속하던 나는 그 만화에 정말 깊이 빠졌더랬다. 우스고 신기하고 모험이 가득한 세계가 그 속에 있었다. 요즘 옛날 만화를 복각하는 것이 유행인데 이 만화의 원본도 다시 펴낸다면 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다.

글쓴이가 이언 플레밍이고, 삽화는 존 버닝햄이 그렸다. 이 두 사람의 명성만으로도 책에 대한 흥미가 당길 만하다. 이언 플레밍은 역시 첩보소설의 대가답게 재미있는 한편의 동화를 만들어냈다. 버닝햄의 삽화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역시 버닝햄다운 그림이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분량이 좀 짧다는 것이다. 중편동화로분류해야 할 만큼 내용이 길지 않다. 모두 세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적어도 5,6장 정도 되게 더 많은 모험들을 배치했다면 더 좋았을 걸. 그게 아쉽다.

발명가이며 모험가인 커락터커스 중령의 가족은 특이한 사람들이다. 쌍둥이인 제미마와 제레미, 아내인 밈지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커락터커스 중령을 사랑하고 이해해준다. 그리고 중령도 특이한 사람이다. 한마디로 삶을 즐기고 사는 사람이다. 돈이나 명성에 애달복달하지 않고 즐겁게 산다. 인생에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가족간의 사랑과 행복이고 모험이다. 이 정도가 중령의 모토 아닐까 싶다. 이들의 인생에 새로운 기쁨을 주는 것이 바로 신기한 녹색자동차 치티치티 뱅뱅이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도 몰라도 이 자동차는 기묘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늘을 날아가기도 하고, 바다에서는 배가 되기도 하며, 위험 앞에서는 생각을 할 줄아는 능력이 있다. 또 은혜를 잊지 않는 덕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여름 휴가차 떠난 중령 가족들은 꽉 막힌 고속도로를 비행기처럼 날아간다. 영국해변의 번잡한 장소를 피해서 사람들이 오지 않는 유명한 모래언덕에서 멋진 휴가를 보낸다. 그리고 거기서 이들은 영불해협을 보트처럼 되어버린 자동차를 타고서 프랑스의 어느 해변으로 간다. 우리 나라도 치면 제주도에서 즐거운 휴가를 ㅗ내고 일본 대마도 정도되는 곳으로 건너가는 셈이 되겠다. 거기서 이들은 이상한 동굴을 발견하고, 거기에 얽힌 엄청난 비밀을 알아낸다. 곧이어 유명한 강도들을 한번에 일망타진하게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재미있게 그려져있다. 초등학교 3학년 이상이면 충분히 재미있게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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