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 - 개국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
박시백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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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사만큼 재미있는 것도 드물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다. 500년 왕조의 역사를 지나는 동안 다양한 지배자들과 정치가들, 문인들, 반란자들, 전란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한편의 대하역사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다. 조선은 건국도 흥미롭고 멸망도 기막히다. 어느 왕조인들 그렇지 않겠는가마는 조선은 특히 더 그렇다. 그것은 그 나라가 기록의 왕국이었기 때문에 풍부하게 남아있는 다양한 사료들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모든 사료들 중에서 으뜸인 사료가 바로 <실록>이다. 이 조선왕조실록은 세계 역사에 유례가 드문 희귀한 자료라고 한다. 이 실록 하나만으로도 우리 민족은 세계 어느 곳에 가도 문화민족으로 대접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

박시백은 조선왕조실록을 20여권에 이르는 만화책으로 그려낼 심산이라고 한다. 이미 나와있는 것이 7권 분량이다. 1권은 개국, 2권은 태조와 정종, 3권 태종, 4권은 문종과 세종, 5권은 세조, 6권은 예종과 성종, 7권은 연산군 편으로 되어있다. 어느 책을 들여다보아도 재미없는 것이 없다. 한권 잡으면 손에서 놓기가 어렵다. 다 읽어야 내려놓을 수 있고, 한권 다  읽으면 다음 권이 또 궁금하다. 이제 조선의 10대 임금인 연산군에 이르러 잠시 멈추어있는데, 앞으로 나올 중종, 인종, 명종, 선조 대의 이야기들이 궁금타. 연산군까지가 사림의 맹아기였다면 중종 이후는 사림의 성장과 투쟁, 시련, 정권장악의 시기다. 이 시기를 그는 어떤 시각으로 다룰 것인지 궁금해질 수 밖에 없다. 특히 박시백의 장기인 한국토종 캐릭터 창출이 또 어떤 경지에 가닿을지 기대된다. 연산군을 그릴 때, 얼굴에 '대일밴드'를 붙인 재치는 기막혔다. 또 태종과 세조의 캐릭터는 어떠한지. 조조를 연상하게 하는 그들의 음모가적인 모습이 박시백에 의해서 잘 그려져 있다. 박시백의 <실록>을 읽는 재미의 첫번째는 단연 그 캐릭터들의 다양함에 있다고 하는 생각한다.

이미 어린이용 역사만화책으로 윤승운 선생의 <맹꽁이서당>이 나와있어서 조선사에 대한 대강의 전개과정을 알고 싶을 때 보면 얻는 것이 많다. 나도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야사에 많이 기대고 있다는 느낌이 많이 온다. 박시백은 고려대 84학번이라고 한다. (혹시 85학번?) 그의 그림은 딱 386세대의 역사의식이 만화 속에 침투해있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를 이야기가 아닌 현실의 거울로 보려는 경향이 보인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라는 E.H.카아의 명제는 386세대의 역사인식의 밑바탕이 되고 있다. 박시백의 만화를 통한 역사해석은 그런 시각이 강하게 엿보인다. 박시백의 <실록>은 우선 정사인 <실록>을 고증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록을 보는 다양한 비판적 해석들을 참고한 위에 자신만의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이 만화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함께 읽어볼 책으로는 이덕일의 <사화로 보는 조선역사>와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박영규의 <한권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을 들고 싶다. 통사적으로 조선사를 꿰뚫어보는 데 쓸모있는 책들이다. 더 자세한 것을 원한다면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와 사계절에서 나온 <한국생활사박물관>조선편을 보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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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평전
송우혜 지음 / 푸른역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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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는 겨우 27년 2개월 정도의 삶을 이승에서 살아내고 죽었다. 비참한 죽음이었다. 식민지의 지식청년으로서 가졌던 꿈과 포부가 일제의 복강형무소에서 허무하게 사라졌다. 그러나 윤동주는 죽지 않았다. 청년 윤동주는 시인으로 한민족의 정신세계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우리는 일제에게 받았던 억압을 통해서 훼손된 영혼을 윤동주의 시와 정결한 삶을 통해서 정화시키는 경험을 하게 된다.

 

작가 송우혜는 이 책을 통해서 윤동주의 삶을 한편의 영화처럼 생생하게 보여준다. 역사가의 관점과 소설가의 시각이 잘 어울려 있다. 거기다가 송우혜는 윤동주와 삶과 죽음을 함께한 송몽규의 조카라는 개인적인 배경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절절함이 글의 행간 속에 들어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윤동주 시의 비밀을 여는 열쇠들을 얻게 된다. 윤동주의 '동시'가 왜 특정 시기에 집중해서 씌어진 것이며, 그의 시 '자화상'이 어떤 배경하에서 나온 것인지도 알게 된다. 이 책은 윤동주의 시를 분석한 평론집으로도 손색이 없다.

 

윤동주는 짧은 생애지만 다른 시인과는 다른 경험들을 많이 했다. 그는 한반도가 아닌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지사들의 고장인 명동촌에서 기독교 교육을 받고 자란 그는 강한 민족주의 정서와 아울러 기독교적 순결함에 대한 의식을 골고루 가지고 있다. 국내에서는 연희전문학교를 나왔다. 거기서 맺은 인연들이 그에게 참 소중하게 작용한다. 대동아전쟁시기에는 일본에 유학갔다가 '조선독립운동'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하게 된다. 30년도 안되는 짧은 삶, 아내는 커녕 공인된 애인도 없었던 그는 소년이나 청년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인식되어 있다. 그만큼 윤동주는 순수한 그림으로 남아있다. 윤동주는 이 책의 표지로도 나온 연희전문 졸업사진의 그 고요하고 순수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다.

 

윤동주와 소중한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가슴아프게 남는다. 그의 친구 송몽규, 연희전문 동기인 강처중, 후배인 정병욱, 연희전문 스승이면서 윤동주 시의 최초 해설자가 된 대시인 정지용. 이 가운데 정병욱만 남한에서 살아남아서 윤동주 시의 후견인이 되었다. 다재다능했던 친구 송몽규는 윤동주와 같이 복강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윤동주가 죽은 얼마 뒤에 옥사한다. 강처중은 해방 이후 경항신문 기자로서 윤동주의 시가 세상에 알려지는데 큰 기여를 한다. 그러나 남조선노동당 간부였던 그는 한국전쟁중에 체포되었다가 북으로 넘어가게 된다. 시인 정지용 또한 전쟁중에 납북된다. 평화로운 시기였다면 다들 문단에서 교유하면 한국어의 활동공간을 넓혔을 그들이다. 마치 비극적인 소설이나 영화같은 것이 그들의 삶이다. 생각하면 아까운 이들이다.

 

만주사변이 일어나는 1930년 이후 군국주의 일본이 전쟁의 광기에 미쳐 돌아갈 때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이들은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이었다. 그 영향은 우선 교육에서 노골적인 황민화 교육, 조선 전통의 말살로 나타났다. 그 시절에는 한국어로 자기 생각을 표현한다는 것이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이 때 윤동주는 조선어와 시, 문학이라는 영역을 자기 삶의 중추로 고집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간다. 개인적으로는 안간힘에 가까운 노력이 들어갔다.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의 시기에 한국어로 시를 쓰려고 노력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나. 윤동주라는 개인은 자신의 정체와 미래에 대한 고뇌를 한국어로 된 시로 나타냈다. 이것이 나중에 해방된 우리 민족에게 얼마만한 영혼의 정화를 경험하게 했는지. 생각해보면 윤동주는 타락한 민족을 위한 희생양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비록 독립투쟁의 대열에 총을 들고 뛰어들지는 않았어도 문화의 영역에서 주체를 지키려고 한 시인의 고투는 어떤 시대에 올바로 산다는 것이 어떠해야 하는지 묻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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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 역사 인물 찾기 18
이원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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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은 예로부터 선비와 의병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에 이름을 떨친 이로는 유가의 김종직, 불가의 사명대사가 있다. 그 맥은 끊이지 않아서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한 시기와 전체주의 정권 시절에도 많은 투사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약산 김원봉은 특출한 인물이 아닐까 싶다. 불세출의 독립투사였지만 해방 이후에 월북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고 국가검열상, 노동상을 지낸 고위인사였기에 남쪽에서는 이름조차 입에 담기 어려운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정지용을 빼놓고서는 시문학사를 논할 수 없듯이, 독립투쟁사에서 약산을 빼버린다면 그것은 반쪽도 못되는 역사일 것이다. 우리의 과거가 그래왔다.  

약산의 삶은 한편의 독립운동사 드라마이다. 1898년에 밀양에서 태어난 뒤에 십대에 망국인이 되었고, 1919년에 약관의 나이에 의열단을 창단해서 일제에 대항하여 타협하지 않고 투쟁했다. 30여년 가까운 세월 동안 중국 땅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약산은 일본이 패망한 뒤에야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만큼 그의 삶과 투쟁은 치열했다.

1919년 11월 11일은 약산이 21살의 나이에 의열단을 창단하여 의백(단장)이 된 날이다. 이후 10여년 가까이 진행된 의열단의 각종 암살, 폭탄투척 같은 의열투쟁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다른 민족들에게는 조선민족의 기개가 살아있음을 보여주었다. 밀양경찰서 폭파, 부산경찰서 폭파,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 투척, 일본인 대장 암살 기도 등 수많은 사건목록이 보여주듯이 의열단의 투쟁은 그 차제가 무장독립투쟁사의 전설과 같은 것이었다. 약산은 1920년대의 빈 라덴이었다. 

약산은 의열투쟁에 머물지 않고 무장 독립군부대 창설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 그 꿈은 '조선 의용대'의 창설로 이어졌고, 나중에 조선의용군이라는 무장부대로 맥을 이어갔다. 그들은 중국인과 연대하여 공동전선을 구축하고 견결한 항일투쟁을 벌였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 독립투쟁사의 마지막은 찬란할 수 있었다.

 약산은 해방 전 중국땅에서나 해방 후 조선땅에서나 좌우합작에 충실했다. 이미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위한 '국공합작'의 진행을 보아왔던 약산이기에 독립투쟁의 좌우합작을 위해서 일관되게 노력했다. 그 결과 민족혁명당이라는 통합정당의 건설이 가능했고, 말년의 대한임시정부를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함께 이끌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백범과 약산의 이 좌우통합의 경험은 해방정국에서 좌우합작,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 같은 좌우통합노력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일관되게 좌파를 배척하는 입장에 섰던 이승만의 노선과 차별화되는 부분이다. 

약산이 해방 이후에 좌파운동의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가담하는 등 친좌파적인 경향으로 흐른 것을 원래 약산은 좌파였기 때문에 그랬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심지어 약산이 북한정권 수립에 참여하고 국가검열상, 노동상의 고위직을 거쳤기 때문에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취급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그것은 곡해라고 본다. 약산은 해방이전이나 이후나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좌우통합만이 최선의 길이라고 보고 일관되게 통합의 길을 걸어왔다. 결국 해방정국에서 약산(48년월북)이나 몽양 여운형(47년암살), 백범 김구(49년암살), 우사 김규식(50년 납북)같은 통합론자들의 실패는 곧 해방이후 우리 민족사의 비극을 잉태한 씨앗이 되었다. 약산의 실패는 이승만이나 김일성 같은 일방주의자들의 성공을 더 돋보이게 만들어준다.

약산의 최후는 숙청과 음독자살로 나온다. 지은이 이원규가 정확히 알고 쓴 것인지, 추측인지 모를 일이다. 관련 자료를 더 읽어보아야겠다. 61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날 때 약산의 처지가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다. 남로당파, 연안파, 소련파 등 비김일성계들이 모두 숙청된 상황에서 그가 북쪽에서 건재하기는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약산의 삶을 실패라고 규정할 수는 없겠다. 약산은 의열단과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를 창건하고 비타협적으로 일제와 싸운 독립운동가로서, 일관되게 좌우합작노선을 걸었던 통합론자로서 치열한 평생을 살았다. 약산은 분단과 반목을 청산하고 평화와 통일의 길로 가는 우리 시대에 더욱 곱씹어 보아야 할 지도자의 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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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cember (20th Anniversary Edition)
조지 윈스턴 (George Winston) 연주 / 소니뮤직(SonyMusic)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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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음악에는 문외한이다. 노래부르는 것이야 즐긴다.  다룰 줄 아는 악기도 거의 없다. 지난해에 기타를 처음 배워보았다. 더듬거리면서 6개코드로 모든 노래를 반주하고 목놓아 부른다. 피아노는 겨우 오른 손으로 '학교종이 땡땡땡'을 치는 수준이다. 그렇지만 음악을 듣는 것은 좋아한다. 그러나 내 음악감상실력으로 식별이 가능한 음반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이때까지 주로 들어온 것은 대중음악이다. 몇 년 전에야 겨우 바하나 모짜르트의 대표곡을 들어보고 황홀함을 느꼈다.

 

조오지 윈스턴을 만난 것은 내 인생에서 한 전환점이 되었다.  음악감상의 삶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처음 만난 음반은 다. 그것도 대형할인점의 음반코너에서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망설이다가 샀던 것으로 기억한다. 들어보니 참 무어라 말할 수 없이 기막히더라. 그 다음에 산 것이 바로 이 시디다.  '몬타나'와는 다른 느낌이다.  너무도 유려하고 그렇다. 정말 물이 흐르는 고요한 계곡에 있는 느낌이 든다. 무릉도원으로 향해 가는 개울에 봉숭아꽃잎이 동동 떠오는 광경이랄까. 나는 아침에 일어날 때 이 음반을 틀어주도록 맞추어 놓았다. 덕분에 아침이 감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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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김순남 나남산문선 9
김세원 지음 / 나남출판 / 199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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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책이다. 김순남이라는 이름에 끌려서 보게 되었는데, 알고보니 김세원씨가 김순남의 딸이었더라. 김세원이 누군가 싶어서 책날개의 안내글을 보니 문화방송에서 오랫동안 음악프로그램을 운영했다고 했다. 그래도 감이 안 잡혔는데, 얼마 전에 알게 되었다. 바로 박찬욱의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는 000했다"하는 식의 해설을 하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란다. 김미숙이 문화방송 라디오의 진행을 하기 전에 오랫동안 그 부분을 담당했단다. 그 김세원이 바로 김순남의 딸이라고 한다니 참 놀랄 일이었다. 세상에는 놀랄 일이 참 많구나 싶었다. 사실 그보다 더 놀랄 일은 김순남이라는 불세출의 작곡가가 그토록 철저히 잊혀졌다는 사실이 놀랄 일인거지. 1988년에 월북 예술가들이 해금되기 전까지 심지어는 정지용 같은 대시인도 이름조차 입에 올리는 것이 금지된 사회였으니 말이다. 지금부터 20년도 안 되는 시절이다. 그런 시절이 우리 앞에 있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믿기지 않을 정도다.

글 전체가 김세원의 일기 같은 느낌이다. 아버지의 작품이 해금되고, 그 작품을 연주하는 연주회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놀라고 하는 과정이 실시간 영상처럼 나온다. 문화방송의 특집으로 김순남의 삶을 돌아보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겪었던 일, 만났던 사람에 대해서 가감없이 서술되어 있다. 아버지의 삶의 자취를 따라서 일본으로, 모스크바로, 중국으로, 미국으로 떠돌아다니는 딸의 모습은 눈물겹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인 대목은 백남준을 만난 부분이다. 백남준이 이건우나 김순남을 현재형으로 기억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젊은 시절에 음악에 심취해서 작곡과 피아노를 배우려고 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 김순남이 좌파운동에 연관되어 수배를 받고 있을 당시여서 그에게 배우지는 못했지만 그의 음악이 당대 최고 수준임은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마치 김순남은 그 시대의 윤이상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윤이상이 살아남아서 위대한 작품을 남겼음에 비해서 김순남은 정치적 격랑에 휩쓸려 사라졌던 것이고. 백남준은 말한다. "작곡가가 나오기는 힘들죠. 귀신이 방귀 뀌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지. 나도 사실은 하다가 힘이 들어서 안 했다우. 작곡가는 5000만명 중에 하나쯤 태어난다고 힌데미트가 말했지. 천재는 영어로 말하면 단순히 '주어진' 것이지." 뭐 대충 그런 말이다. 여하튼 우리 민족은 그렇게 전쟁통에 위대한 작곡가를 꽃피울 기회를 잃었다는 것이다. 나는 음악을 잘 모르겠지만 위대한 작곡가들의 작품은 다른 모양이지. 책을 읽으면서 안타깝기도 하고, 김세원의 삶이 애잔하기도 하고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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