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 역사인물 다시 읽기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0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예전에 허준의 <동의보감>과 광해군이라는 코드를 연결시키기가 참 곤란했다. 허준의 <동의보감>은 선조나 인조가 아니라 광해군 시대에 나온 책이다. 왜 우리 민족이 자랑할 만한-팔만대장경이나 목민심서에 버금갈 만하다고 하는-명저가 광해군이라는 '폭군'의 시대에 나왔을까 하는 의문을 풀 수가 없었다. 광해군의 시대는 당연히 모든 것이 어렵고 피폐한 시대라야 마땅한 것인데, 왜 그랬을까? 소박한 의문이었다. 그만큼 내 머리 속에 광해군의 시대는 역사적 공백기, 공포정치의 시기로 비쳐졌다. 학교교육과 텔레비전 사극의 영향이리라. 대부분의 성인들은 연산군과 광해군을 폭군이라는 이름으로 묶어서 생각하고 있다. 요즘에 들어서 광해군에 대한 학계의 새로운 평가가 나오면서 인식의 전환이 있었지만, 아직도 대다수는 광해군을 폭군으로만 기억하고 있다.

한명기가 쓴 이 책은 광해군 이혼(李琿)에 대한 평전이다. 어린시절과 성장기, 영광과 시련, 몰락의 삶을 골고루 그려내고 있다. 광해군은 몰락한 임금이기에 祖나 宗같은 칭호를 얻지 못하고, 왕자 시기의 君칭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의 치세를 다룬 실록은 <광해군일기>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다.

비운의 정치가 광해군은 1575년에 태어나서 1641년에 죽었다. 67년의 삶을 살았던 셈이다. 그가 태어난지 18년만에 임진왜란이 있었고, 죽기 5년전인 1636년에 병자호란이 있었다. 조선조 최대의 전란을 평생의 삶 속에 두루 겪어낸 셈이다. 한번은 주인으로, 한번은 구경꾼으로. 그는 임진란 당시에 왕세자로서 임시정부-이른바 분조(分朝)-를 이끌고 전쟁터를 누볐던 이력이 있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에 그는 폐위된 왕으로서 유배지에 있었다. 결국 그는 삶의 종장을 마지막 유배지인 제주에서 맞았다. 쓸쓸한 죽음이었다고 한다.

그가 유배지에서 읆었다는 시는 이러하다.

바람불어 빗발 날릴 제 성 앞을 지나니
장독 기운 백척 누각에 자욱하게 이는구나.
창해의 성난파도 저녁에 들이치고
푸른 산의 슬픈 빛은 가을 기운 띄고 있네
가고픈 마음에 봄 풀을 실컷 보았고
나그네 꿈은 제주에서 자주 깨었네
서울의 친지는 생사 소식조차 끊어지고
안개낀 강위의 외로운 배에 누웠네

쓸쓸한 시다. 그의 아들(왕세자)은 유배지에서 도망치다가 죽고, 며느리(세자빈)는 목을 매 죽는다. 부인도 일찍 죽는다. 말년에는 유배지의 여종조차 구박을 했다고 한다. 말년이 참으로 비참했다.

광해군은 그의 아비인 선조와 다음 임금인 인조를 비교해가면서 보아야 더 선명하게 보인다. 그의 내치와 외교노선은 선조와 인조의 그것과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임진왜란이라는 대전란을 겪으면서, 동시에 대제국 명의 몰락과 청의 등장을 지켜보던 격변기에 그가 구사한 자주적 외교노선은 오늘날에도 참고할 바가 많다. 결국 자주적 외교노선 때문에 그의 치세는 막을 내렸지만, 난세에 그가 취한 노선은 조선시대를 통틀어서 거의 유일한 자주노선이라는 점이 기억할 만하다.

어떤 이는 노무현을 광해군에 비기기도 한다. 미,중,일의 대립과 알력 속에서 우리 민족의 활로를 찾아가려는 점은 많이 닮았다. 그렇게 보면 대북파-정인홍 같은 의병장 출신의 청치가들이 주축이 된-는 오늘날의 민주화세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럴 수도 있겠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몸으로 싸운 이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으니 말이다. 민주주의와 평화, 인권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투쟁한 그 세력이 실패하지 않는 것이 꼭 필요하리라. 역사에서 배우라. 특히 전환기에서. 정도전, 광해군, 김옥균, 여운형. 그들을 실패하게 만든 외세와 보수파들의 힘과 정체를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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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01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고 싶게 하는 리뷰입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