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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월드 ㅣ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대니얼 클로즈 글.그림, 박중서 옮김 / 세미콜론 / 2007년 7월
평점 :
[고스트월드]가 날 뿅 가게 만드는 것은 시작 페이지에서 세 컷째에 이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니드는 수류탄 떨어뜨리듯 단박에 말한다. "소닉유스가 누군지만 알면 다 '첨단'이냐?"
아, 난 소닉유스 별로 안 좋아해서 다행이다.... 라기 보단 뭐랄까. 적절한 동지의식? 그러고보니 소닉유스는 [심슨가족]에도 나와서 낄낄거리는 거 보여줬었지. 스프링필드, 고스트 월드.
푸른색의 2도 인쇄를 통해 지향하게 된 차가운 입체감을 통해 모노톤보다도 더 건조하고 해부적이며 그래서 날카로워진 장면들과 쏟아지는 듯한 공격적인 수다로 채워진 방만한 텍스트가, 컷의 반을 채우는 문답식의 말풍선 배치를 통해 [고스트 월드]의 황량함을 차곡차곡 구조해주는 동시에 내용적으론 세계를 바라보는 날선 시선의 정서를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이니드가 살고 있는 세상은 하등의 즐거움이란 걸 찾아볼 수 없는 90년대 미국 교외의 어느 뻔한 중산층 마을이다. 시시껄렁한 개그쇼들과 휴일날 틀어주는 지리한 특집 프로그램들로 채워진 텔레비전 브라운관, 세월이 흐름에 따라 고착되어버린 너절한 감정들과 지긋지긋하게 적막스러웠던 첫 섹스의 경험으로 점철된 이 세계에서 이니드와 레베카는 스스로의 망상과 아집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내고 붙이고 유희한다. 그녀들에게 세상의 모든 것은 비난의 대상이다. 패션잡지든 셀러브리티 프로그램이든 정치적 참여의지든 골수 우익들이든 기성적인 모든 것은 그녀들의 혀를 통해 박살나고 문질러진다. 그러나 스너프 비디오가 공공연하게 유통되고 위장한 나치주의자들과 얄팍한 트집으로 관심이나 끌어보기 위해 복제된 자극들을 좇는 인간들, 연쇄살인범에게 팬레터나 보내는 싸구려 정서의 인간들로 가득 찬 세상, 그래서 자극의 창고형 매장이 된 세상에서 그녀들의 유희란 떨어져서 보면 기껏해야 동네 식당에서 본 아무 연관 없는 사람에게 무턱대고 사타니스트의 지위를 선사해주는 정도의 일일 뿐이다.
세계는 뒤집혀지지도 않고 박살나지도 않을 것이며 단지 지긋지긋하게 지속될 뿐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쓰여져 왔던 고발과도 같은 낙서 'GHOST WORLD'처럼.
그래서 그녀들은 거의 본능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들이 모종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는 걸 깨닫고 있다. 첫 에피소드의 끝에서 한바탕 수다를 끝내고 '병신 같은 년들'이 줄줄이 나오는 잡지를 까대는 일상 속으로 들어가는 이니드의 모습. 그녀는 단발적인 욕설과 저항, 그리고 체제에의 적당한 순응을 통해 생활을 지탱한다. 관련된 얘기가 나올 때마다 당혹스러워하고 화를 내던 레베카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갈 정도로, 이니드는 세상에 대한 경멸과 함께 대입 준비를 위한 공부를 은밀하게, 그리고 제법 성실하게 치뤄낸다. 물론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지긋지긋한 세계에 대한 도피욕구의 일환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이 대학입학이라고 하는 방법론이라니, 이 안온한 해방구는 그녀가 평소에 쏟아내는 날카로운 얘기들하곤 많이 다르다. 모순이다.
모순. 그녀들은 웃으면서도 울고 싶어하고 비웃으면서도 진실을 찾는다. 무턱대고 부여한 의미가 엉망진창으로 깨질 것이라고 스스로 먼저 방어기제를 치지만 은근히 그 소망의 성립을 기대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모든 모순들은 [고스트 월드]의 이야기를 헝클어놓지 않으며 총체적으로 그녀들을 구성한다. 또한 그 꾸준한 모순의 일관성들은 [고스트 월드]가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게 짜여진 작품이란 걸 증명한다.
모순들은 그녀들이 관계에 대한 서투름에 어쩔 줄 몰라 한다는 걸 알려준다. 이니드는 자신만의 곡해와 아집으로 채워진 세상을 꿈꾸지만 현실이 그녀의 뜻을 쉬이 따를 리 없다. 그래서, 결국 상처를 받는 것은 그녀 자신이다. '숫총각' 조시의 집에 피임기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고스트월드] 안에서의 어느 장면에서보다도 서럽게 우는 이니드의 모습을 보라. 고통에 대한 책임에 익숙하지 않은 고독은 순식간에 자아를 습격한다. 그리고 자기혐오. 애초에 방향이 없었던 증오가 드디어 제 주인을 찾아오게 된다. 모순 없이, 순수한 고통으로.
세상이라는 대전제는 바뀌지 않지만 시간은 흐르고 세계의 부분으로써의 인간은 바뀐다. 대학입학과 그로 인해 예정될 이별 때문에 이니드와 자신 사이에 생기는 거리감을 못 견뎌하던 레베카 '도펠갱어'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마침내 혼자 서게 된 장면을 이니드가 확인하는 시점에서 [고스트 월드]의 삭막한 동화는 끝난다. 그리고 이니드는 막연한 소망처럼 미래를 향해 떠난다. 어떤 확신도 얻지 못한 채, 여전한 불안을 안고서.
그것 또한 삶의 뻔한 풍경들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너무도 잔인한 후일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