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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랫폼
미셸 우엘벡 지음, 김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야기는 아버지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40대의 공무원. 별 열정 없이 문화계획시안에 도장을 찍어주는 걸로 월급을 버는 독신남. 일이 끝나면 핍쇼를 보러 가서 자위를 하는 것이 유일한 낙인 화자 나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굴러 들어온 유산 덕분에 여유로운 주머니를 가지고 태국으로 섹스관광을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레리를 만난다.
죽기 직전까지 끝없이 삶을 추구했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 비하면 나는 무기력하고 일종의 '이미 죽어버린 자'에 가까운 존재다. 투쟁영역에서도 멀찌감치 벗어나 있으며 성적인 욕구는 충만하나 그걸 금새 인스턴트적으로 때워버릴 수 있는 의식과 행동의지를 가진, 현대사회의 회로 끝자락이 만들어낸 능률 안 좋은 단말체적인 존재. 그러나 그가 아버지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섹스다. 여성의 생식기. 어머니의 생식기, 이슬람 여성의 생식기. 그는 그 사실을 단 두 줄로 해치워버릴 만큼 무덤덤하게, 때로는 적개심을 가지고 받아들인다. 아버지는 더이상 얘기되지 않고 금방 치워진다. 자신의 문제만으로도 벅차기에. 그리고 이미 죽어버린 자이기에.
미셸 우엘벡이 바라보는 세상은 여전하다. 그의 시선은 서구 유럽 사회, 특히 프랑스 사회라는 미시적인 영역에 대한 경멸적인 판단으로 드러난다. 그는 서구사회가 전파해 온 소위 '지성적인' 선택들이 실패였다고 꾸준히 얘기해왔다. 그리고 증거로 그 잘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지평이란 것이 얼마나 쉬이 무너져버릴 수 있는 것인지를 잡아내는 데 귀신 같은 솜씨를 발휘해왔다. 그가 여기서 들이미는 카드는 여행이란 개념이다. 우리에게도 아주 낯익은 경험인 섹스관광을 소재로 삼으면서 그는 그 문제에 도덕성을 묻는 이들에게 되묻는다. 어째서 그들은 섹스관광을 떠나는가. 인간의 본능인 섹스는 왜 그토록 어려워져버렸는가. 인식이 본능을 제도하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가 정당한 것인가. 작가는 세상에 만연한 불평등을 잔인하게 잡아낸다. 그리고 이성이 아닌 본능의 합리성을 제안한다. 그것은 사업가적인 감각이다.
바로 그렇다. [플랫폼]의 반쪽을 차지하는 건 사업에 대한 이야기다. 이미 도덕적 판단의 차원을 훌쩍 넘겨버린 채 우리는 중반부에서부터 섹스관광을 합법적인 차원으로 올려서 돈을 벌려는 인물들의 재간을 볼 수 있다. 마치 [소립자]에서 보여줬던 SF적 과격함처럼, 사고를 넘어서서 행동의 경지에서 움직이는 이들은 주먹구구식이었던 욕망과 쾌락의 제도화를 꾀한다. 그것은 가짜 위로지만 서구적 가치의 추구가 불러온 마지막 도착지이며 종말 직전에서 머뭇거리는 망설임이다. 잔인하지만 처연하진 않은 이 인식의 도살과정. 그리고 여기서 영토와 자본의 이야기가 제시된다.
섹스관광에 대한 직시와 그 활성화 방안에 대한 작가의 제시는 역설적으로 섹스관광에 낭만을 가져야 하는 현대인들의 고독에 대한 직시기도 하다. 미셸 우엘벡에 따르면 현대의 프랑스에서 서구사회 지배 인종들 간의 섹스는 너무나도 고도의 행위가 되버려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처럼 얘기된다. 그래서 섹스는 인종 간의 경제격차, 혹은 지배격차에 의해서만 행위된다. [플랫폼]에서 법적 프랑스인들끼리의 섹스로 이뤄지는 경우는 오직 나와 발레리뿐이라는 걸 염두에 두자. 나머지는 SM이거나 난교, 아시아인이나 아랍인들과의 지위-경제적 격차로 매개되는 섹스들뿐이다.
그래서 발레리의 존재는 그 자체로 [플랫폼]의 축이자 나머지 반쪽이 된다. 발레리는 투쟁영역의 한가운데에 있다. 현대사회가 만들어낸 피로를 모조리 짊어져야 할 운명인 그녀는 자신이 차지한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서만이라도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는, [투쟁영역의 확장] 텍스트 자체의 인간화다. 끝없는 소모전 속에서 그녀는 나와 사랑을 나눈다. 섹스를 하고 난교를 하고 어떤 것도 제한 없이 행동으로 몰아부치지만 그녀와 나는 서로를 잊지 않고 향한다. 그러나 그녀는 SM에 대해선 혐오반응을 보인다. 합치될 수가 없는 관계가 증명되었을 때 향해야 할 고통과 폭력, 그리고 그것을 형식적으로 발전시킨 행위를 접하고 그녀는 자신들이 사는 세상에 대한 혐오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온갖 수단을 통해 본능을 외면하면서 파멸되지 않기 위해 잔인해지는 세계에 대한 분노다.
강제적인 신뢰관계를 폭력을 통해 구축해야 하는 SM과 달리 완전히 정반대의 위치를 가진 둘이지만 그 둘의 관계는 신뢰와 애정으로 가득 하다. 그렇다면 이것은 로맨스 소설인가? 맞다. 너무나도 이상적인 커플로 그려지는 나와 발레리의 사랑의 과정에서 동인을 가지는 건 발레리 쪽이다. 그녀는 계산적인 성녀다. 나는 소설 속에서 여러 번 되묻는다. 자신이 그녀로 하여금 자신을 사랑하게끔 만든 무언가가 있었는가. 대답은 항상 없다, 로 나온다. 끝까지 제시되지 않는 발레리가 그를 향하는 이유에 대해 소설은 딱 그정도로 의문을 끝내버린다. 그들의 위치 자체가 그들의 상황을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게 만들기에, 이 환상극 부분은 소위 소설적 정당성을 갖는다.
그래서 내가 맞이하는 끝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세상에 대한 아주 조용하고도 사근사근한 소멸이다. 마치 처음이 그랬던 것처럼. 방치되서 죽은 아버지와 상반된 나는 다시 한 번 죽음이라는 공통점으로 만나게 된다. 저항의식이라면, 유전자가 후대로 배달되지 않았다는 아주 미약한 위안. 징글징글한 연쇄의 끝.
미셸 우엘벡은 유혹하지 않는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재발견해낸다(마치 소설 안에서 화자 '나'의 입을 빌려 말하는 예술론처럼).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 복잡하거나 어딘가에 숨어있는 비의적인 무언가가 아니다. 그것은 외면하고자 하는 우리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잘 만든 소설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미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