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 - 오타쿠를 통해 본 일본 사회
아즈마 히로키 지음, 이은미 옮김, 선정우 감수 / 문학동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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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오타쿠가 가지는 게토적 성질은 새로운 세대의 단초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카타리파 수도자들처럼 멸종해버릴 운명인 것인가. 적어도 일본의 경우, 현재의 웹문화의 상당 부분이 그들로 인해 구축되어있는 만큼 전자의 경우로도 볼 수 있지만 그 정치적 의지결여는 그들의 고착을 지속시킨다. 마치 지하 속을 면면히 흘러왔던 일렉트로니카의 역사처럼 일본에서의 오타쿠는 점진적인 자기패러디와 확장을 통해 세계를 유지한다. 여기엔 새로운 문화, 쓸만한 상품으로서의 오타쿠의 가치를 발견한 기성세계에서의 구애가 기다리고 있으며 이것은 그대로 산업적인 측면에서의 파이 확장과 직결된다. '오타쿠라는 것'에 대해 자부심과 자기혐오가 뒤섞였던 것은 어느 쪽이 더 함량초과든 간에 그들만의 특질이란 것을 유지시켜주는 바였다. 그러나 지금 오타쿠들은 3세대까지의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고집과 팔리는 트렌드로서의 오타쿠와 서로 경쟁하고 있다.

일전에 관련 페이퍼에선 서사의 붕괴에 대한 반작용으로 [카우보이 비밥]과 그외의 애니메이션에서의 성과를 섣불리 생각했지만 여기서 아즈마 히로키는 장르 자체가 다른 영역, 즉 미소녀게임에서의 서사적 특질에 주목하고 그것을 서사의 붕괴에 대한 반작용의 일례로 제시한다. 서사의 힘은 애니메이션이라는 고전적 영역을 벗어나 보다 데이타베이스 집중적인 퍼스널 컴퓨터의 세계로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비중 있게 제시된 칸노 히로유키는 벌써 오래 전 양반이고 그의 작품들이 오타쿠의 데이타베이스적 사고를 훌륭하게 체현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그의 시대가 아니다.

3세대 이후 오타쿠층에 있어서 작가적 아우라의 단절은 서사 붕괴 현상에 대한 직설적인 표상이다. 애니메이션에 있어서 마지막으로 명징한 작가군이라고 한다면 안노 히데아키쯤을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후 오타쿠붐의 핵이었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에 이르러 제작자들인 교토애니메이션은 하나의 집단으로 인식되지 특정한 작가의 의지가 표명된 것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래서 특정한 작가성에의 주목이 미소녀게임계, 나스 키노코로 옮겨가서 가장 강력했던 팬덤을 구축했던 사실은 의미심장하고 아즈마 히로키의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바이기도 하다. 그러나 [페이트] 이후 미소녀게임계 또한 관성적인 자기복제를 거듭하며 긴 휴지기를 맞이하고 있다.

애니메이션쪽으로 현재를 다시 생각해보자. 2007년 9월부터 [신세기 에반게리온]은 2년에 걸친 또 한 번의 리믹스를 시도한다. 현재 오타쿠 트렌드를 이끌어가는 교토애니메이션의 [럭키스타]는 끊임없는 자기패러디로 서사 없는 오타쿠극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이 다음에 선보일 작품은 오타쿠 서사의 궁극을 지향했던 키의 미소녀게임 [클라나드]의 애니화다. [천원돌파 그렌라간]이 보여주는 이야기의 거침없는 속도감은 오타쿠서사의 응축화가 드러날 수 있는 어떤 지점을 보여준다. 이 현상들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점, 서사의 붕괴 이후 서사라는 측면, 그리고 애니메이션이라는 고전적 영역이라는 부분에서 충분히 흥미롭다.

여기서 연결해낼 수 있는 재밌는 사실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서사의 붕괴를 계속 얘기하면서도 중요한 것은 서사 그자체라는 점이다. 서사의 붕괴가 이른 시점에서 장르의 사형이 선고되고 서사라는 왕관은 다른 장르의 다른 소화양식을 찾아 통통 튀어가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다. 그것은 단순히 장르의 대체라기보단 새로운 활력의 탐색에 따른 결과와도 같다. 여기서 유희적 인간, 이야기를 원하는 인간이 재확인된다. 서사라는 힘이 아니라 인간의 본능에 더 밀접하게 접근지어지는 이 흐름의 다음은 아직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은 걸로 보인다.

여기까지는 일본쪽의 얘기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우리나라의 오타쿠문화가 가지는 담론에서부터 트렌드까지에 이르는 전반적인 수입편향은 오래 전 [마징가제트]의 시대로 거슬러올라간다. [마징가제트]의 국적이 밝혀지고 [태권브이]의 표절성이 드러난 사건은 우리에게 강력한 트라우마였다. 그 이후로 우리는 끊임없이 극복에의 강박을 가지게 됐다. 영화는 헐리우드를, 애니메이션은 일본을. 이 강박은 미국 애니메이션에의 진한 영향 아래에서 대체역사를 꾸며내서 현재의 가면 쓴 세계, 포스트모던한 독자적 영역(아이러니다)을 구축해낸 것에 기반을 두고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더 나아가 가짜고유성을 확보해낸 오타쿠 문화를 가진 일본과는 다른 점이다.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에서도 언급되고 있고 김준양의 저작 [이미지의 제국]에서도 지적되는 바이지만 우리가 일본의 원천기술, 데즈카 오사무의 발명품쯤으로 알고 있는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은 실은 2차 대전 이전에 이미 미국에서 풀애니메이션에 대한 예술적 반발로써 존재했던 기술이며 그것이 전후에 일본에서 기술적으로 차용이 된 바이고, 2차 대전 이전의 일본 애니메이션계는 마치 지금의 우리나라가 가지는 무형의 강박처럼 디즈니에 대한 질투와 동경이라는 강박으로 가득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은 그 영역을 가짜 역사로 대체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너무 늦거나 일렀다. 그래서 우리의 강박은 계속해서 개발성취적인 영역으로 회귀한다. 이와 관련된 극히 최근의 사건들, 황우석파동과 [디워] 논쟁은 여전히 우리가 그 영역에 고착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이른바 독자성이라는 환상이다. 대체할 역사를 꾸며내지 못한 상태에서 급작스럽게 바닥을 알아버린 이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꿈과 같은 것.

사실 이 부분까지 오면 우리나라에서의 서브컬쳐 소비층의 전반적인 차원에서 해당되는 문제다. [트랜스포머]의 성공과 [디워]의 옹호층이 로봇물과 괴수물 팬덤의 숫자를 증명한다곤 생각되지 않는다. 아즈마 히로키가 설명한 오타쿠의 2세대와 3세대 어느 가운데에 샌드위치처럼 끼워져 있는 것이 우리나라의 서브컬쳐 양상처럼도 보이지만 문제는 그렇게 딱딱 나뉠 것 같지 않다. 인터넷 유토피아라는 범세계적 망상에 발맞춰서 국민의 정부에서 전략적으로 주도했던 인터넷망의 비정상적인 확장은 가짜역사의 확립 또는 역사의 재발굴이 없는, 컨텐츠 부재 상태에서 이뤄지면서 대한민국 인터넷망 안에 정보의 무차별적인 수입과 평준화를 통한 기이한 공백을 가져온다. 이것은 2세대적 인간상과 3세대적 인간상의 혼잡스러운 동시출현이다. 그 결과는 그야말로 유희적 유희라는 차원에서의 온라인 게임, 컨텐츠의 범람으로 보여지고 있다. 소비풀로서의 우리나라는 가히 이상적이지만,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고색창연한 묘사라고도 할 수 있는 '창조적 견지에서의 빈한함'이다. 내게 이것은 뒤죽박죽인 혼돈 상태로 보인다. 소위 일본에서의 한류라는 짧은 유행이 복고성 때문이었다는 지적은 그래서 산업적으로 잔인해보이는 결론이다.

아즈마 히로키의 이 책은 저자 자신도 거듭 밝혔듯이 뒤늦게서야 도착한 책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지적되는 바들은 예리하고 효용성 있으며 여전히 중요하다. 이것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미래의 한조각을 미리 비춰보는 설명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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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inpix 2007-08-21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 잘 읽었습니다.

hallonin 2007-08-23 0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하지만 아직 멀었습니다....